한밤중의 표적 1 '엉? 벌써 끝났나? 아직 3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뭐, 할 수 없지. 나이가 나 이니 만큼...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영감의 황홀한 얼굴을 흘낏 바라본 후, 올라 타 있던 녀석에게서 허리를 들었다. 그러자 축 늘어진 영감이 내 몸에서 빠져 나왔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내 허리를 영감이 끌어안는다.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 도 안 되는 물건을 아직 미련이 남은 듯 내 엉덩이에 비벼대면서 말이다. '이봐요, 영감. 그래선 기분 나쁘기만 하다구, 알아?!' "아아, 나츠키, 마이 하니. 조금만 더 널 맛보게 해 다오..." 라며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는 영감을 팔꿈치로 밀어낸 수, 나는 재빨리 옷 을 입었다. '...정말이지, 도중에도 마이 하니를 연발할 줄 알았더라면 이딴 녀석 절대 사절이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소파에 던져뒀던 청바지를 입자, 등뒤에서 감탄의 한숨이 들려왔다. "...뭐야." 뒤를 돌아보자, 영감이 황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52,3. 이름은 카와...뭐라고 했더라. 잊어버렸다.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상대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에겐 기억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얼굴만은 한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 마와...뭔지 하는 영감의 얼굴도 '각이 지고 턱이 갈라지고 코는 매부리 코다' 라고 완전히 머릿속에 입력해 뒀다. 나는 같은 남자와는 두 번 다시 자지 않는 주의니까, 이 카와...뭔지 하는 영 감과도 이걸로 영원히 안녕이다. "아아, 나츠키. 누드도 최고지만 청바지 한 벌 차림도 정말 매력적이군. 늘 씬하고 야성적인 다리에 너무 잘 어울려." '맘대로 지껄여라, 이 변태영감.' 나는 T셔츠를 입고 재빨리 호텔에서 나갈 채비를 끝냈다. "아아, 하니. 아직 시간은 잔뜩 있어. 그렇게 서두를 것 없잖아. 하다못해 한 시간 만이라도 더 나와 함께 있어 줘." "한 번으로 끝내기로 약속했잖아. 당신, 자신의 나이와 체력을 좀 생각하지 그래? 두 번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완전히 늘어져 버린 그곳을 영감은 당황하며 손으로 가렸다. 내가 영감의 코앞에 손을 내밀자, 영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며 묻는다. "왜 그러지? 대금이라면 벌써..." "아까 받은 돈은 선금. 서비스표도 지불하셔야지." "서, 서, 서, 서, 서비스료?" "한 번 했으니까 만 엔 플러스 스킨료 만 엔 해서 2만엔. 그런 건 상식이라 구." 영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지, 그런 상식은 나도 무르니까 말이다. "아, 그, 그럼 선금 5만에 3만 엔을 더 줄 테니까 오늘밤 여기서 묵..." "헛소리 집어 쳐!" 순간 영감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며 나는 침대에 한쪽 다리 를 올리고 녀석의 네모난 얼굴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숙박은 추가요금 10만. 뭐, 내 메뉴에 숙박은 없지만..." 멍하니 굳어있는 영감을 향해 미소를 지은 후,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옷 장을 열었다. 그리고 녀석의 비싸 보이는 양복 주머니를 뒤져서 멋대로 지폐를 꺼내자, '뭐야?! 현금이 잔뜩 있잖아. 몇 장 더 슬쩍해도 되겠군.' 이 영감 지구력은 없는 주제에 순발력은 원숭이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가 아닌가. 내 단골 호텔인 이 신주쿠 S호텔의 스위트룸 요금은 영감의 골드 카드로 지 불할 수 있을 테니까, 만 엔 짜리 열 장 정도는 챙겨가도 별 문제 없을 것이 다. 'ㄱ럼 오늘밤의 매상은 15만 엔이군. 럭키♡' "그럼 안녕. 아. 저. 씨." 손으로 키스를 던지고 나가려고 하는 내 등을, 느닷없이 영감이 끌어안아 나는 순간 휘청하고 말았다. 그렇다, 가끔 이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남자를 상대로 이런 장사를 한지도 벌써 1년째가 되건만, 나는 아직도 등을 돌릴 때가 힘들다. "좋아. 아침까지 함께 있어주기만 한다면 10만 추가해도 좋아. 그러니까 나 츠키군, 딱 한 번 만 더..." 알몸으로 매달리는 영감을 뒤돌아보며, 나는 미안하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음-, 미안하지만 오늘밤은 앞으로 예약이 있어서." 뒤끝이 없도록 내가 이렇게 쌀쌀맞게 굴어주고 있건만♡. "그럼 내일! 내일은 어떨까." "안돼요. 내일도 예약." "그럼 어, 어, 어,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게. 난 사장이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어."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이런 녀석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츠키군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들었지만, 이, 이렇게까지 굉장할 줄은... 저, 가능하다면 나츠키군과 계약을 맺고 싶어. 한 달에 50만 엔 어떨까. 안될 까? 그럼 백..." "시끄러워!" 내 고함소리에, 영감은 한심하게도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녀석의 배를 발로 밟으며 일부러 천박하게 내뱉었다. "내 소문을 들었다면 내 주의도 알고 있을텐데. 난 네 녀석들한테 팔리는 게 아냐. 팔려 주시는 거라구! 게다가 백 만이니 2백만이니 하는 잔돈푼으로 날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한 번 안겨 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 이런 더러운 말을 내뱉을 때는 나 역시 조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나를 포기해주지 않는다. 조금이 라도 동정하면 그 날밤 남자들은 나를 돌려 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것이다. "날 우습게 보지마. 안녕." 녀석의 축 늘어진 배에 침을 뱉고서 부서져라 문을 닫은 것은 내 나름대로 의 상냥함이다. 2 나는 아마노 나츠키, 통칭 나츠키라 불린다. 전 일본을 뒤져봐도, 얼굴도 스타일도 그쪽 테크닉도 이렇게 굉장한 사라은 둘 도 없을 거라고 신주쿠 업계에 평판이 자자한 나는 훌륭한 남자다. 여자역 저눈이라곤 해도 트랜스 젠더도 아니고, 키도 평균 정도는 된다. 피부는 하얗냐구? 기분 나쁜 소릴 묻는 군. 사람들은 날더러 항상 남국 출 신 아니냐고 묻더군. 그럼 호리호리 가냘프냐구? 골격은 가늘지만 일단 근육은 붙어 있지. 예를 들자면 흑표범이랄까, 게다가 머리카락을 염색하지도 않았고 장발도 아냐. 물론 성형수술도 하지 않은 내추럴이지. 성격도 지극히 심플. 뒤끝은 전혀 없음.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 남 자를 울린 적은 있어도 내가 운 적은 없어. 뭐, 그렇게까지 해서 붙잡아두고 싶었던 녀석이 이 세상에 없었다는 게 현 실이지만. 날 만나고 싶으면 신주쿠 2번 가의 루트라는 가게로 오면돼. 맨즈 온리 회 원제 쇼트 바인데, 나는 매일 밤 그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까. 루트에 가 면 소문이 자자한 나츠키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고, 매일 밤 수많은 노친네 가 돈을 싸들고 나를 만나러 찾아오지. 잘 차려입고 씀씀이도 좋은 멋진 남자 들이 말야. 하지만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난 내가 택한 남자에게밖에 안기지 않거든. 따분한 여름의 피날레를 따분한 영화감상으로 장식하고 난 시간은 겨우 밤 6시, 신주쿠 2번 가의 아침이 찾아온다. 내일부터 9월이건만 오늘도 역시 더럽게 덥다. 나는 V네크라인 셔츠의 옷깃을 퍼덕거리며 루트의 철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서늘한 공기와 좁은 철벽으로 둘러싸인 어 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스무 명 가량 들어오면 꽉 차 버리는 좁은 바지만, 신원보증서가 붙은 남자 만 모이는 가게로 이쪽 계통에서는 유명하다. 왼쪽에는 드링크 카운터, 오른쪽은 스탠딩 전용 홀. 벽 쪽에는 한 손에 술을 들고 얘기할 수 있도록 배려된 작고 둥근 테이블이 세 개정도. 대체로 손님들은 이 루트에서 한두잔 술을 마시는 동안 그 날 밤 의 상대를 결정한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서 상대방을 유혹하거나 호텔로 직행. 그러니까 루트는 좁긴 해도 회전율은 매우 좋다. 아직 개점 한 시간 전 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스터는 카운터 안쪽에서 글 래스를 닦고 있었다. 근육질에 스킨헤드를 한 전 프로레슬러인 마스터는, 체격에 비해 마음이 몹 시 약하다. 그런 성격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순히 남자와 끌어안고 뒹굴고 싶다는 이 유로 시작한 프로레슬링에서 3년 전 발을 빼고 이 가게를 열었다. 치고 박는 일보다 서비스업이 적성이 맞았던 모양이다. "안녕, 마스터." "어머, 오늘도 빨리 왔네, 나츠키군." 말투도 얌전하고 초 여성스럽다. "'군' 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카운터 제일 안쪽에 앉았다. 이곳은 거의 내 지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았어. 항상 마시는 쥬스. 아, 물수건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땡큐." 마스터는 항상 내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녹색의 야채] 라는 건강 쥬스를 서비스해 준다. 사실 난 술을 전혀 못 마신다. 한 모금만 마셔도 혀가 돌아가지 않게 되는 한심한 체질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곳에서 바텐더로 일할 생각이었지만, 이 체질을 알고 포기해버렸다. 뭐, 그 대신 나만의 장사도구가 이 몸에 갖춰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마스터는 매춘 따윈 그만두라고 때때로 내게 충고하곤 한다. 내가 루트에 드나드는 덕분에 가게가 번성하고 있건만, 마스터는 가게의 매상보다 내 장래를 걱정해주는 것이다. 쥬스를 마시며, 나는 카운터 구석에 놓아뒀던 신문을 펼쳤다. 영업시간 직전까지 이곳에서 사회상태를 머릿속에 집어넣거나 책을 펼쳐보 는 것이 나의 일과다. "마스터, 오늘 석간은?" 그러자 마스터는 웃음을 거두고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카운터 안쪽에서 신문을 꺼냈다. "미안, 놔두는 걸 깜빡 했지 뭐니." 신문을 받아들고 펼쳐보자, 3면 기사의 커다란 헤드라인이 내 눈에 들어왔 다. [신주쿠에서 타살시체 발견] 이라는. 얼마 전에도 이거랑 똑같은 사건이 있 었는데. 일본도 정말 험해졌군. "마스터, 이 기사 읽었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묻자, 마스터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나츠키군, 그 사람 기억 안 나?" 그 말에 나는 지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억이 나고 자시고 사진이 흐릿해서 잘 못 알아보겠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나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마스터, 이 사람은 카와... 카와..." "카와구치 세이이치씨. 나츠키군이 어제 여기서 함께였던 사람. 동양상사의 사장이야."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기사를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동양상사 사장. 카와구치 세이이치씨(55세), 어젯밤 신주쿠 C공원에서 머 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 무차 별 범행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경찰청과 신주쿠서는 요 1주일간 발생한 두 건의 살인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현재 조사중. 도한 경찰은 어젯밤 카와구치씨와 함께 있던 A의 행방을...] --뭐라고?! "말도 안돼!" 전신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으로 마스터에게 호소했다. 마스터의 가는 눈에는 동정이 어려 있었다. "아니야, 마스터. 난 아무 짓도..." 확실히 나는 방을 나올 때 녀석의 배를 짓밟았었다. 침도 뱉었다. 그것이 폭 행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 머리가 깨질 리는 없다.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살인따윈 하지 않았다! "...오늘밤은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마스터의 한숨이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이걸로 세 사람 째. 니카이도 회장, 이와사키 상무, 그리고 카와구치 사장. 다들 나츠키군과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 뿐이야. 몰랐어?" 몰랐다. 난 원래 3면 기사 따윈 흥미가 없다. 언제나 헤드라인만 주욱 훑어 볼뿐이다. 어디서 누가 죽었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아무 짓도..., 정말이야..." 카운터를 돌아 홀로 나온 마스터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는 내 눈동자를 보며 격려하듯이, 하지만 괴로운 듯이 미소지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어제 나츠키군이 카와구치 사장과 함께였던 건 이곳에 있던 손님들 모두 알고있어. 지금까지는 우연으로 넘겼지만 이걸로 세 사람 째니... 그러니까 돌아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3 다들 우릴 보고 있었다. 내가 어젯밤의 상대로 카와구치씨를 선택했을 때, 순간 주위에 실망의 한숨이 흘러나오던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 다.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득의양양하게 나를 에스코트하는 카와구치씨를 노 려보고 있던 누군가-. 누구였더라? 증오로 가득 찬 그 시선은... "혹시나..." 먼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마스터였다. 마스터는 면도날로 민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던 손님 누군가가 범인일지도 몰라." "그만 뒁, 마스터!" 나는 마스터의 손을 뿌리쳤다. 짐작가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기분 나쁜 비쩍 마른 재수생. 그 녀석은 확실히 어젯밤에도 있었다. 늘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개점시간 부터 폐점시간까지 버티고 있는 주제에, 딱히 남자를 유혹하지도 않고 누군 가에게 말을 거는 일도 없이 묵묵히 카운터 왼쪽 입구 근처에 앉아 안경 너머 가느다란 눈을 빛내고 있던 그 녀석. 그 녀석의 이름이라면 알고 있다. 타카자와라고 한다. 어떻게 그런 기분 나쁜 남자가 루트의 회원이 된 거냐고 마스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마스터는, 개점할 때 자금을 원조해 준 사람의 아들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었다. 타카자와는 언제나 일부러 나를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내가 카와구치와 나갈 때, 스쳐지나가는 순간 타카 자와 녀석은 이런 말을 했었다. ----------가엾게도...라고. 그 때 나는 반사적으로 타카자와를 뒤돌아봤었다. 하지만 타카자와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맥주 잔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하지만 등뒤로 우리를 응시하 고 있었다. 증오를 담아서... 그 말이 혹시 살해당한 카와구치씨에 대한 예고였다면...? 나는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알았어. 오늘밤은 돌아갈게. 또..." 그렇게 말하며 문으로 뛰어간 순간-, 철문이 기세 좋게 열렸다. 그 바람에 나는 바닥으로 보기좋게 나쥥굴고 말았다. "나츠키군!" 마스터가 허둥지둥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려다가, 그 그 림자에 꿀꺽 숨을 삼키고 말았다. 꼬깃꼬깃한 싸구려 검은 양복. 와이셔츠에 다림질을 하지 않은 것은 일목요 연. 느슨하게 맨 촌스러운 넥타이가 마른 남자의 가슴에 단정치 못하게 흔들 리고 있었다. 빗질도 하지 않은 머리카락. 뺨과 턱에 아무렇게나 난 수염. 짧은 담배를 입에 물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뭐야, 이 녀석?! 나는 순간 남자에게 적의를 느꼈다. 그런데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전신에 풍기는 이상하리 만치 의 위압감에 완전히 압도당해있었기 때문이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이런 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만큼 남자의 눈은 흉폭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 자는 사람을 죽인적이 있단 것을 말이다. "네가 나츠키냐?" 잘 울리는 낮은 목소리였다. 4 내가 잠자코 있자, 남자는 담배를 바닥에 뱉은 후 낡은 가죽구두로 그것을 비벼 껐다. 남자가 한 걸음 내게 다가섰다. 순간 마스터가 커다란 등으로 나를 감쌌다. "뭐예요, 당신! 여긴 당신 같은 수상한 사람이 들어올 만한 가게가...꺄악!" 남자가 가볍게 뿌리친 것만으로도, 남자보다 몇 배나 덩치가 큰 마스터가 뒤로 날아갔다. 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정면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일까. 나는 이 남자가 왠지 두려웠다. "나츠키 맞지?" 그 질문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긴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가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인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나는 남자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츠키는 본명인가? 성은?" 머리 반개 쯤 높은 위치에서 질문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마노." "흐응." 남자가 양복 주머니에서 검은 덩어리를 꺼냈다. "히익..." 권총일까, 나이프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겨겨겨겨, 경찰!" 검은 수첩에 영롱하게 빛나는 경찰 배지. 눈부시게 빛나는 금박으로 박혀있는 세 글자는 정의의 수호자 경.찰.청. 아아아...,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조사 1과의 칸자키라고 한다. 카와구치씨 사건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경 찰서까지 동행해줬으면 한다." "안돼애애애!" 그 기묘한 비명의 주인은 마스터다. 나는 너무 어리둥절한 나머지 임의동행을 거부하는 것조차 잊고 있을 때, 남자가 내 목덜미를 잡고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멀리서 마스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누나... 칸자키의 구식 검은 스카이라인 조수석에 쳐박힌 후에야, 나는 겨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칸자키는 형사다. 그렇다면 일단 살해당할 염려는 없다. 하지만 경찰에 연행되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단 보증은 없다. 나 역시 털면 한참 먼 지가 나오는 몸이니 말이다. "난 죽이지 않았어!" "누가 너더러 범인이라고 했냐. 참고인으로서 협력을 부탁하고 있을 뿐이 다." "참고인? 협력? 하지만 난 아무 것도..." 나를 무시하고 칸자키는 차를 출발시켰다. 깜빡이는 2번가의 네온사인이 시야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칸자키가 양복 가슴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말보로 케이스를 꺼낸 후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그의 뺨 에 광대뼈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긂주린 야생의 늑대 같은 느낌이다. "...당신 말야, 신경 좀 쓰지 그라ㅐ?" 칸자키가 내게로 흘낏 시선을 옮겼다. 동작 하나 하나에 몹시 위압감이 있는 남자다. 기분 나쁜 녀석. 이런 녀석은 딱 질색이다. "뭘 신경 쓰라는 거냐?" "난 성장기중이란 말야. 흡연은 성장을 저해한다는거 몰라?" 단순한 빈정거림이었건만, 칸자키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묵묵히 담 배를 꺼버렸다. "어라...? 저기... 그러니까... 칸자키씨." "..." 물론 대답을 바란 건 아니지만 하다못해 반응 정도는 해라. "당신 말야, 협력해 달라고 해 봤자 난 아무 것도 몰라. 딱히 묵비권을 행사 하는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말야." "매춘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생각이냐?" 그런 잘문으로 날 겁주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 이거야. 난 아무렇게나 수염이 난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당신 말야, 형사주제에 형사특별법도 몰라?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형사처 벌을 하는 건 현 단계에선 불가능 하다구." 칸자키가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흥, 나 역시 갠히 신주쿠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 정도의 지 식은 상식이지. "그럼 매춘을 묵인한 벌로 루트의 마스터를 체포할까?" 우와, 이렇게 나오기냐. 최악이다, 이 녀석.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한 수 위였다. "그것도 무리일텐데. 마스터는 내게 매춘도 술도 강요한 적 없어. 거짓말 같 으면 조사해 봐. 마스터는 내게 장사를 그만두라고 여러 번 충고했으니까. 그 사람은 내 보호자 같은 사람이야. 게다가 난 [매춘]을 한 적이 없어. [권유] 정도는 처벌을 받는다 해도 만엔 이하의 벌금으로 끝이지?" 여기까지 얘기한 후, 나는 문득 눈썹을 찡그렸다. 이 녀석, 웃고 있잖아? "...뭐야." "법률에 꽤 해박하군. 장래 형사라도 될 생각이냐?" 그거 칭찬이냐? 물론 아니겠지. 뭐 상관없다고 중얼거리며, 칸자키는 화제를 바꿨다. "너와 관계한 남자들이 시체로 발견된 사건은 알고 있겠지." "신문에 실린 내용 정도는. 하지만 난 그 녀석들에 대해서 잘 몰라." "그래?" "정말이야. 날 조사해봤자 시간낭비라니까. ...이봐, 당신. 내말 듣고 있어?" 완벽하게 무시당했다. 제기랄. 나는 왠지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칸자키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옆얼굴을 묵묵히 노려보았다. 5 "그-러-니-까! 난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나는 철제 책상을 두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좁고 더러운 취조실. 스탠드 불빛 아래 서 베테랑 형사의 심문을 받고 있는 용의자. 베테랑 형사역은, 무라이라는 키가 작고 머리가 짧은 콜롬보같은 노친네 경 찰(아마도 진짜 베테랑일 것이다). 나를 이런 곳으로 끌고 온 칸자키는, 무라이의 뒤에서 벽에기대 팔짱을 끼 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이제 그만 좀 해요! 직권남용으로 고소할거야!" "넌 특별이다. 뭐니뭐니해도 살인용의자니까." "사사사사, 살인용의자아아?" 나는 파이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험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다. 땀이 쏟아지고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 작한다. 이건 사정청취 아니었나! 살인용의라는걸 알았더라면 따라오지 않았 을 텐데! 칸자키 이 자식! "호오, 초조해하고 있군, 아마노 나츠키." "아니라니까!!" 나는 반쯤 울면서 호소했다. 그러자 검은 사신처럼 묵묵히 벽에 기대어 있던 칸자키가 천천히 몸을 일으 켰다. 그의 눈이 열리며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우우우, 무서워. 이 눈이 아무래도 싫단 말야, 제기랄!' "아마노, 다시 한 번 순서대로 설명할 수 있나?" 몇 번 말해야 직성이 풀리겠냐. 용기를 쥐어짜서 칸자키를 응시하자, 칸자 키는 그 몇 배의 위력으로 내 용기를 간단하게 꺾어버렸다. 네, 말하겠습니다. 말하면 되잖습니까. "이게 마지막이야!" 나는 내 뒤에서 진언을 기록하고 있는 젊은 형사에게 큰 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니까, 어제는 루트에서 카와구치씨를 만나서, 신주쿠 S호텔에 가서 잠 깐 아르바이트를..." "아르바이트? 아까는 매춘이라고 하지 않았나?" 무라이의 정정에, 나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진짜 열 받는 노친네다. 칸자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봐, 댁이 말하라고 했잖아.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네 그렇사옵니다. 매춘을 하였사옵니다. 봉사를 마친 후 12시 반, 저는 먼 저 실례했사옵니다. 물론 제가 돌아갈 때 카와구치씨는 펄펄하게 살아있었사 옵니다. 이상!"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서기의 펜이 멎었다. 무라이가 흐응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도 보란 듯이 커다란 한숨을 쉬어 줬 다. "이봐, 아마노. 아까도 말했지만 세 번의 사건 모두 프론트에서 자네를 목격 했어. 신장 170센티 전후의 남자. 마른 형에 늘씬한 체격.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고양이과." "고양이과아~?" "모햐게 호텔 같은 곳에 익숙한 분위기였다더군. 아마추어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2번 가를 수소문해 봤지. 그랬더니 금방 [나츠키]라는 이름이 나오더 군. "당연하지. 난 잘 나가는 몸이니까." 무라이 경부가 머리를 끌어안으며 신음했다. 내가 무슨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라도 했나? 음, 역시 안한 거 맞는데. "...어제 자네가 피살자보다 먼저 돌아갔다는 말은 믿어주지. 하지만 단서도 공통점도 전부 자네- 아마노 나츠키뿐이야." "나랑은 상관없어." "엄청 있지. 세 사람 다 자네와 관계를 가진 후 신주쿠 부근에서 살해당했으 니까." "...어떻게 나랑 관계를 가진 후 라는 걸 알지? 나와 헤어진 후 다른 누군가 와 또 한 판 벌였을지도 모르잖아." "유감이지만 그럴 리가 없어. 각 피살자의 몸에서 같은 인물의 혈액반응이 나왔다. 피살자가 이용한 호텔 방에서 발견된 인물의 체모와 정액도 완전히 일치했지. 피살자들과 취후로 관계를 가진 인물이란 물론 아마노 나츠키 자 네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나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언어의 폭력 아닌가? "피살자는 자네와 관계를 가진 후 곧 호텔을 체크 아웃했어. 그리고 신투쿠 부근에서 전원 시체로 발견됐지. ...게다가 말야, 어제 마침 자네가 묵었던 방 앞으 ㄹ지나가던 룸 서비스가 두 사람이 다트는 모습을 목격했다더군." "뭐?" "자네와 카와구치씨는 문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다더군." "아..." 그랬다. 마침 방에서 나오려던 순간 카와구치가 울면서 매달렸으니까. 혹시 나 문이 조금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카와구치씨를 걷어차는 모습을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른다. 무라이가 책상 위의 라이트를 내게로 향했다. 나는 눈이 부신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체념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죄가 없으니까 말이다. 범인은... 그렇다, 타카자와가 수상하 다. 조사해 보면 틀림없이... "그리고 아까 자네의 지갑을 조사해 봤다." "...뭐?" 느닷없는 화제의 전환에, 나는 멍하니 무라이를 쳐다보았다. "하룻밤의 보수치고는 액수가 너무 많던데? 응?" 무라이가 내 앞에 지갑을 던졌다. 그 위로 쏟아지는 만 엔 짜리 지폐 열 다섯 장. "돈 때문에 카와구치씨를 죽였나?" "-무라이씨." 칸자키가 무라이를 말리고 나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 관없다. 내 눈앞은 이미 새까매져 있었다. 사고 회로가 정지하고 차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리 경찰이 라 해도, 용의도 확정되지 않은 인간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모욕해도 되는 거 냐?! 너무 분하고 한심한 나머지 나는 어느 샌가 큰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 다. "웃기지 마! 보수가 너무 많다구?! 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먹고사는 너희 짭새들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나를 위해서라면 하룻밤 백만엔을 내도 아 깝니 않다는 녀석들이 널리고 깔렸어! 거짓말 같으면 네 녀석이 직접 시험해 봐! 내 몸이 얼마나 근사한지 직접 시험해 보라구! 네 녀석의 썩어 문드러진 물건 따윈 0.1초만에 승천시켜줄 테니까! 제기랄!!!" 칸자키가 길길이 날뛰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무라이의 축 늘어진 얼굴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미ㅏㅇㄴ하다."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두통도 나고 토할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누구의 목소린지 순간적으로 판단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등위에서 끌어안고 있는 칸자키 목소리라 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아마노. 이제 돌아가도 좋아." 칸자키의 말에, 나는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님을 불러줄까 하는 말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신이 바래다 저야 하는 거 아냐? 칸자키씨. 당신이 날 여기로 끌고 왔잖 아." 칸자키는 잠시 나를 바라본 후 아무 말 없이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는 신주쿠서의 현관으로 스카이라인을 몰고 와서 멍하니 서 있는 내게 턱으 로 타라는 신호를 했다.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안에 올 라탔다. "집은 어디냐?" "신주쿠 2번가, 루트." "거긴 가게잖아. 너희 집은?" "집은 없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부모님? 몰라." 칸자키는 묵묵히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칸자키가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입에 물 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순간, 그가 아차 하는 얼굴로 담배를 상자에 다시 집어넣 었다. 이 녀석, 니코틴 중독인가. "피워도 돼." 내가 모처럼 허가해 줬건만, 칸자키 녀석은 계속 사양하고 있었다. 나는 칸 자키의 손에서 담배 한 대를 뺏어서 입에 물었다. 그릭는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그을 빤 후 칸자키의 입가에 내밀었다. 내춘부 녀석이 입에 댄 담배 따윈 더럽다고 거절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 칸자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맛 있다는 듯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잠시 후 차는 루트 앞에 도착했다. "왜 그래, 안내리냐?" 그 말에 나는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 말야, 날 믿어?" 고개를 돌리자 칸자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날카로웠던 시선이 꽤나 부드러워져 있었다. 칸자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칸자키 이 녀 석 의외로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잖아. "넌 거짓말이 서투니까." "...뭐?" 가슴이 두근 하고 울렸다. 거짓말쟁이라는 욕을 들은 적은 있어도, 거짓말 이 서툴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칸자키는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만나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 아무도 안 죽였어." "그래." "그 돈도 보수로 받은 거야." "그래." "죽은 세 사람과 잔 건 한 번 뿐이야." "그러냐." "게다가 난 헤어질 땐 언제나 잔인하게 걷어차곤 해. 그러니까 치정살인 같 은 것도 아니야. 전부 오해라구." "그러냐." 이렇게까지 무관심하면 거꾸로 열이 받는군. "당신 형사 맞아? 사건을 해결할 생각이 있긴 있는 거야?" 그러자 칸자키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된 거냐?" ...그 질문은 비겁하다. 무시하고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내 등뒤에 또다시 칸자키의 질문이 날아왔다. "부모님도 집도 없는 거냐?" 나는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역시 칸자키도 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무신경한 짭새다. 나는 빈정거림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확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머니가 나 같은 음란한 녀석은 낳은 기억이 없다더라고!" 나는 차에서 뛰어내린 후 차 문을 부서져라 닫고 루트로 뛰어갔다. 내가 위 로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 그 녀석들을 위로해줌으로서 내 마음도 위안을 얻는다. 6 나는 소리 높여 무죄방면을 선언하며 손님 속으로 들어갔다. 울면서 기뻐하는 마스터, 축배를 드는 손님들, 재빨리 오늘 밤의 상대가 되기 위해 나를 둘러싸는 남자들. 부모님 따위 없어도 나를 안아주는 팔이라면 잔뜩 있다. "나츠키, 넌 나쁜 애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아..."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오늘 밤의 먹이가 내게 애원한다. 보기에는 댄디한 로맨스 그레이지만, 옷을 벗으니 역시 노쇠함을 숨길 수 없어서 왠지 불쌍 한 느낌이 든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오오오! 오오!" 쾌락이 절정에 달한 손님이 기묘한 소리를 내게 시작했다. "안돼요, 사장님. 아직 참으세요."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손님은 끝없이 계속되는 쾌락을 예감하고 괴로운 듯한 표정으 ㄹ지 으면서도 기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츠키...나츠키...오오, 나츠키..." 손님이 내 팔을 잡고 나를 끌어당기려고 했다. 키스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키스만은 절대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다. 키스는 본능인 성욕과 는 다른 것이니까. 섹스는 몸에 필요한 에너지지만, 키스는 마음의 비타민제다.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노친네들에게 이 입술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안돼요, 사장님..." 손님의 손을 잡고 손가락 사이를 살짝 핥아주자, 그것만으로도 손님은 더욱 부풀어올랐다. 오늘밤의 손님은 꽤 순순하다. 이 정도면 헤어질 때도 수월하겠지. "여길 만져줘요." 나는 타액으로 젖은 손니의 손가락을 내 가슴으로 가져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톱을 세우는 손님을,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무랐다. "좀 더 부드럽게... 그래요, 그렇게." 이 손님은 틀림없이 남자와는 처음일 것이다. 머리로는 안는 법을 알고 있어도 역시 어딘가 어색하다. 풍만한 가슴이 없어서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가엾게도, 하필이면 첫 남자가 이 나라니... 나와 한 번 잔 남자는 다른 남자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는 모양이다. 이 사장은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남자를 안을 용기를 얻은 모양이지만, 이래서야 남은 인생은 끝장 난 것이나 다름없 다. 나보다 근사한 몸을 가진 녀석 따윈 아마 평생 만날 수 없을 걸. 뭐, 좋은 꿈을 꿨다고 생 각하고 내일부터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겠지. 나는 요령 없는 손님을 도와 내 가슴을 애무하게 했다. 남자도 이곳을 만져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요염한 신음까지 부록으 로 덧붙여줬다. "아...으응."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여기가 좋은가 보지, 나츠키?" 손님의 눈에 자신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리드할 수 있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나는 일 부러 몸을 뒤틀며 손니의 손가락에서 도망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손님은 도망치는 나를 잡고 더욱 집요하게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좋아...기분 좋..." 아, 진짜로 기분이 좋다. 나는 가슴을 커다랗게 젖히며 손님에게 더욱 애무해 줄 것을 요구 했다. "좀 더...아아." 나는 두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격력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아, 아아아...아앗!" 그래, 그대로 계속해요. 그대로. 그대로. "오오, 나츠키. 최고야, 최고야!" "아, 사장...님...아앗." "나츠키, 오오! 나츠키!" 나는 손님에게 이래도 넘어오지 않을 수 있냐고 도발하듯 나의 추태를 서비스했다. 열심히 미칠 듯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시각적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내가 이제 자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상대방이 착각해 버릴 만큼 말이다. "아아, 사장님, 아아..." "나츠키, 오오, 오오오-------!" 손님이 눈을 감으며 내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격렬한 호흡과 함께 온다! "5, 4..." 나는 고개를 천장으로 향하며 눈을 감았다. 7 다음날 아침 나는 이불을 돌돌 말고 바닥에 앉아 아침 TV뉴스를 보고 있었다. 신주쿠 모 주차장 구석에서 남자의 타살시체가 발견되었다. 피살자는 이토 시게유키 50세. 로맨스 그레이에 댄디라는 평판의, 모회사 사장이었다. 와이드 쇼에서는, 동성애 연속 살인사건이라며 이 사건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경찰이 용 의자의 이름을 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TV 화면에는 모자이크 처리된 남자 A가 비추고 있 었다. 이토씨의 사망추정시각은 심야 1시 경. 그것은 내가 신주쿠 S호텔을 나온 시각으로부터 꼭 30분 후였다. 나는 곧 방문을 잠그고 창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 후 경찰청에 연락을 취했다. 칸자키는 자리에 없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모양이었다. 칸자키 형사를 긴급무선으로 호출 해달라고, 나는 교환수에게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오늘 아침 시체로 발견된 남자와 어젯밤 함 께 있었던 A라고 말하자, 교환수는 멍청이 무라이 경부에게 전화를 연결시켜 줬다. '또 너냐, 아마노 나츠키!' "또라니 무슨 뜻이야! 그쪽이야 말로 빨리 범인을 잡아!" '좋아, 거기서 꼼짝 말아라. 당장 널 체포해 줄 테니까!' "난 범인이 아냐! 아무 것도 안 했다고 했잖아!" '아, 그러냐. 그럼 간통죄로 처넣어 주마.' "나야말로 무고죄로 고소할 테닷!" 나는 내 목을 조이기 위해서 경찰에 전화한 게 아니얏!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은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벌써 체포하러 온 걸까, 아니면 매스컴이 냄새를 맡은 걸까. 도어 뷰로 머뭇거리며 문밨을 엿보자, 검은 양복에 촌스러운 넥타이를 맨 늑대 한 마리가 어 슬렁 거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쾅 열며 "왜 이렇게 늦었어!" 라고 고함쳤다. 우리집으로 찾아갔었다는 칸자키의 대답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불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 연예계에서 스카웃하러 왔다고 둘러댔어." 그, 그런 안 어울리는 변명을... 칸자키는 나를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사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 는 칸자키의 말을 신용했다. "당신 직장에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교환수는 당신을 바꿔주지 않지, 무라이 그 멍청이는 날 체포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지... 난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다구! 제기랄!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는 거야!" 펄펄 뛰는 나를 무시하고, 칸자키는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와서 거실 블라인드를 살짝 내리 고 바깥을 살펴봤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후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노."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자, 등줄기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탓에 방안은 어둡건만, 칸자키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칸자키의 눈은 안구 전체가 푸른빛을 띄고 있으며 홍채의 색소가 유달리 엷다. 마치 시베리 안 허스키 같은 눈동자다. 칸자키가 턱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칸자키가 바닥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의외로 긴 속눈썹. 눈가도 샤프하다. "피살자는 어제의 손님이지?" 의심하는 듯한 어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는 호텔에 체크인할 때 모닝 콜을 부탁했다더군." "알고 있어. 다음날 아침 8시에 깨어 달라는 거였지? 사장이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난 로비 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칸자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토는 네가 돌아간 후 그걸 캔슬하고 체크아웃을 했어." "...무슨 뜻이야?" "예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될 급한 볼일이 생겼던 거겠지.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불려나갔 다던가." 칸자키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나는 숨을 삼키며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호텔 안에 이토의 핸드폰에 전파가 닿지 않는것은 이미 조사해뒀어. 프론트도 이토의 방에 외선을 연결한 적은 없다더군. 그렇다면 호텔 내선전화를 사용한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럼 범인은 호텔 안에 숨어 있다가 내가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이토씨에게 전화를 걸었단 말야?"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지. 지금 숙박객을 조사해보고 있는데, 만일의 경우 얼굴 확인을 부탁 해." "좋아, 협력할게." 칸자키가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려던 손을 다시 ㅜ릎 위에 얹었다. 담배르 ㄹ피우고 싶으면 피우면 될 텐데. 재떨이...같은 건 없다. 빈 캔 같은 거 없나. 내 배려 따윈 소용없다고 말하는 듯이, 칸자키가 심문을 개시했다. "어느 호텔에 갈지는 항상 누군가에게 얘기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 한 번 루트에서 호텔 이름을 깜빡 말해버렸을 때 다른 손님이 방까 지 쫓아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택시를 타고 난 후 손님 사정에 따라 호텔을 정하는 것이다. "범인으로 짐작되는 인물은?" "...있어." 나는 타카자와의 존재를 칸자키에게 얘기했다. 타카자와가 나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 내가 루트에서 스쳐지나갈 때 타카 자와가 속삭였던 '가엽게도' 란 의미시장한 말. 그리 기쁘진 않지만, 타카자와는 틀림없이 내게 반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날 유혹할 용기가 없어서 나와 잔 남자들에 대한 질투와 원망으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칸자키에게 내 견해를 털어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칸자키는 두 세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나는 칸자키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토씨도 역시 타살 당했어?" "그래. 뇌좌상에 두개골 골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안면의 손상이 극심했지." "그, 그렇게 심했어...?"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그 로맨스 그레이의 부드러운 웃는 얼굴이 격통에 일그러지는 광경을... 내 몸 안에서 절정을 맞은 순간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던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 며 쓰러져 가는 영상을... "폭행부위가 두부에 집중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살해하기 위해서라는 걸 추측할 수 있지. 피살자는 오른쪽 관자놀이가 함몰돼서 뼈가 뇌에 박혀 있었어. 다툰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항할 틈이 없었거나 또는 경계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찌됐든 동일범의 소행이 틀림없..." 칸자키가 순간 내 입을 한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안고 화장 실로 끌고 갔다. 하지만 변기 앞에 도착하기전에, 나는 칸자키의 손에 위액을 쏟아내고 말았다. "...미안하다. 아침부터 듣기 거북한 얘기를 해서." 칸자키는 평소 필요최저한의 말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아니, 그 이하다), 어 째서 이런 얘기를 할 때만 이렇게 달변가가 되는 것일까. 정말 웃기는 남자 다. 칸자키가 내 등을 쓸어주고 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도 계속해서 구역질 이 밀려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변기에 얼굴을 박고 미칠 듯이 토 했다. 어제 이토의 애무를 받았던 피부가 썩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어질 때, 이토 역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굴었었다. 그래도 이토는 최근에 상대했던 남자들 중에서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 었다. 다른 녀석들과도 틀림없이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자, 이토는 순순히 물러서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도망친 나를 이토가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느껴졌다. 위 속에 들어있던 것을 모조리 토해낸 후, 나는 칸자키의 부축을 받아 소파 에 누웠다. "담배 좀 줘." 희미하게 눈을 뜨고 말하자, 칸자키는 아무 말 없이 말보로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손을 움직이는 것도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아서 그것을 무시하 고 눈을 감았다 할 수 없이...였을 것이다. 칸자키는 지난번의 나처럼 자신의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후 그것을 내 입에 물려주었다. 두 번 째의 간접 키스... 나는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이 방은 금연 스페이스가 아니라고 안심한 것일까, 칸자키도 재빨리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재떨이 있냐?" 내가 고개를 젓자, 칸자키는 부엌으로 이동했다. 빈 캔을 찾고 있는 모양이 다. 빈 캔이 없다는 것을 알자, 그는 멋대로 냉장고를 열어 야채 쥬스 캔을 꺼 내더니, 컵에 쥬스를 따르길래 마시려나 보다 했더니, 칸자키는 컵을 냉장고 에 도로 넣은 후 빈 캔만을 들고 왔다. 이 녀석, 진짜로 구제불능의 헤비 스모커인 모양이다. "...그래서? 호텔 방에서 또 내 것들이 발견된 거야?" "...그래." "당신도 봤어? 그거." "그래." 나는 담배를 문 채 코웃음을 쳤다. "이토 사장을 죽였을 때 쓴 흉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당신은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확인하러 왔다. 범인을..."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칸자키의 뺨을 때렸다. 칸자키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서 빈 캔에 넣었다. "착각하지 마." 낮은 목소리. 그 말에 나는 칸자키의 눈동자 속에 있는 진실을 파악했다. "오늘밤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8 그날 밤, 나는 열 시가 넘어 루트에 얼굴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대체적으로 청바지 차림이지만, 오늘밤 나는 거기의 형태마저 알 수 있을 만큼 착 달라붙은 가죽바지로 쫘악 빼입고 있다. 거기다 부츠에 가죽조끼, 개 목걸이에 오른쪽 귀에 피어스. 팔에는 체인 팔 지. 누가봐도 본격적인 하드 게이다. "나츠키군!" 마스터가 당황하며 카운터에서 튀어나와 커다란 몸으로 나를 가렸다. 몇몇 손님들이 나를 뚫어져라 훑어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욕망 에 찬 눈빛이 아닌, 나를 범인이라고 단정짓고 있는 비난과 혐오의 눈빛이었 다. "이쪽으로 와." 마스터가 주방으로 손짓하는 것을 거절하고, 나는 평소대로 카운터에 앉았 다. 칸자키가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마스터, 냉방이 신통찮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베스트의 지퍼를 천천히 내 렸다. 눈이 마주친 옆자리의 손님이 당황하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카운터 너머에 서 마스터가 걱정스러운 듯이 아는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스터에게 괜찮 다는 뜻을 담아 윙크를 했다. 홀을 향해 몸을 돌리며 카운터에 기대어 선 순간,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 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에,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베스트 아래는 물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맨살. 훗, 다들 만져보고 싶다는 표 정이로군. 나는 홀 중앙에 폼잡고 서 있는 남자를 타겟으로 정했다. 녀석의 눈을 응시하며, 나는 음란한 표정으로 압술을 핥다, 내가 천천히 다 리를 벌리자, 녀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를 외면하고 있던 옆자리의 남자까지 어깨너머 나를 힐끔 힐끔 바라보고 있다. 남자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니지만, 칸자키가 가능한 한 주목을 끌고 있으라고 했으니 이 정도의 도발은 상관없을 것이다. 뭐, 감상뿐이라면 맘대로들 하시지. 탄탄한 복부도, 보기 좋은 가슴도, 뚜렷 하게 드러난 쇄골도, 그리고 이 얼굴도. 전부 내 자랑거리인 장사도구다. "어라, 오랜만이군, 나츠키군." 이거 보라지, 벌써 한 사람 걸려들었다. 전에 한번 상대를 해 준 적이 있는 모 대학의 교수님이다. 이 교수, 오랜만에 내 맨살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이 스타일은 지나치게 도발적인걸." 설교를 하면서도, 나를 만지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지 교수의 손가락은 머 뭇머뭇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성욕을 택하는 타입인 모양이다. 음란한 눈빛으로 나를 흝어 보다니. 아까 까지는 나를 범죄자로 단정짓고 있던 주제에. 우습지도 않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의 돌기를 가볍게 튕겨주자, 녀석의 시선이 내 얼굴과 손 가락 끝을 분주하게 오갔다. "저, 어때, 나츠키군. 오늘밤 식사라도 함께..." "여어, 자네가 [나츠키]? 상상이상일군. 보자마자 그 유명한 나츠키라는 걸 알았어." 교수를 밀치고 끼어들어 온 것은 아까 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던 개폼맨이 었다. 교수가 먼저 행동에 나서자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어느 가게에 가도 자네의 이름이 들려오더군. 테크닉이 굉장하다면서? 자 네가 상대를 해 준다면 최고일거야." 최저의 남자들.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지 않다. 이 녀석들에게 있어서 결국 나는 그저 변기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녀석들 에게 안겨서, 이런 녀석들을 즐겁게 해 주며 잘난척 만족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야말로 최악의 바보가 아닌가. "미안하지만 댁은 내 취향이 아냐." 내가 자조적으로 코웃음을 쳤을 때, 루트의 무거운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모습에, 나는 숨을 삼켰다. 루트에 있던 15명 정도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냉랭함과 존재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고급 더블 슈트에 회색 넥타이가 잘 어울 리는, 선이 가늘지만 단단한 어깨. 유능한 청년 실업가라는 느낌을 주는 남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남자는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안쪽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후 이쪽에 등을 돌리고 섰다. 침착해 보이긴 하지만 [나츠키]를 찾아 이곳에 왔다는 것이 눈 에 뻔히 보였다. 아무래도 마스터까지 그에게 넋을 잃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작게 기침을 하자, 마스터는 당황하며 남자에게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어딘가의 중년이 재빨리 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오, 거절당했나 보군. 저런 뚱보는 싫어하는 모양이다. 계속해서 아는 얼굴 인 모 전무가 그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내게 끈질기게 매달린 주제에 변심 한 번 빠르다. 하지만 그만큼 남자에게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이거 저 사람이 주문한 것?" "응? 아, 그렇지만..." "내가 가져갈게." 마스터의 손에서 버본을 빼앗은 후, 나는 홀을 가로질러 그의 뒤에 섰다. 모 전무는 아직 오늘밤의 예정을 그와 교섭중이었던 모양인 듯, 내가 가까이 다 가간 순간 재미있을 만큼 낭패하기 시작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당신 정도로는 이 남자를 절대 함 락시킬 수 없을걸? 나는 둘 사이에 끼어 들어 남자의 앞에 술잔을 내밀어 술잔을 받아드는 남 자의 손등에 일부러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상상대로 딱딱한 피부였다. 남자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 이 가게의 회원이 아니지? 누군가의 소개?" "...그래." 쌀쌀맞은 대답.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전무는 나를 상대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머뭇거리며 물러 갔다. 나는 나보다 5센티 정도 키가 큰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내가 먼저 이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교태를 부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그래서일까, 등뒤에 꽂히는 무수한 시선들에는 비난이 듬뿍 담겨 있었다. 용의자 주제에... 라는 중상도 혹시나 섞여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 시선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남자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관찰 했다. 올백으로 가볍게 넘긴 약간 긴 까만 머리카락. 보기 좋은 이마. 콧날도 높고 이지적이다. 입술은... 조금 얇군. 하지만 단정하게 다물어져 있는 것이 인상 적이다. 이런 입술은 왠지 억지로 벌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눈..." 작게 중얼거리자, 남자가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당신... 눈이 굉장히 멋지군." 남자는 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후 눈을 가늘게 떴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드물게 당황하고 있다. 이 남자의 미소가 나를 몹시 자극하고 있기 때 문이다. 나, 좀 위험한 거 아닌가...? 피부를 조용히 어루만지는 듯한 낮은 목소리. 나는 남자로부터 몸을 뗐다. 일단 의식해버리자 목소리만으로도 욕망이 느 껴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당신의 이름은?" "...시로." "시로? 어떤 한자?" "역사 사(史)자에 쾌활할 랑(朗)자." "쾌활할 랑(朗)? 우와, 엄청 안 어울리는군." 농담을 하면서도 내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입안으로 몇 번이나 남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시로, 시로. 시로가 담배를 꺼냈다. 나는 재빨리 거기서 담배 한 대를 꺼낸 후 불을 붙여 줄 것을 요구했다. 시로는 아무 말 없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나는 한 번 빨아들인 담배를 시로의 입술에 내밀었다. 시로는 순순히 그 담배르 ㄹ받아 물려고 살짝 입술 을 벌렸다. "---!" 깜짝 놀라는 시로의 시선과 미소짓는 내 시선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부 딪혔다.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 후 시로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시로의 입술을 빼앗아버렸다. "읍..." 이봐, 혀에는 혀로 제대로 반응해 줘야지, 시로. 시로의 입술에서 내가 머금고 있던 연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ㅇ낳도록 시로의 메마른 입술을 내 입술로 빈틈없이 막 았다. 긴장감이 오히려 나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마음껏 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시로의 머리를 끌어안고 억지로 혀를 얽히는 탄력 있는 혀. 차갑고 강하고, 내 취향의 감촉이다. 혀에 배어있는 담배 맛도 남자답게 느껴져서 온 몸이 오싹오싹해 질 정도 다. 나는 어느 샌가 시로에게 허리를 밀착시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로는 내 팔을 잡고 나를 억지로 떼어 내 버린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불타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키스를 하는 것 자체도 오랜만이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웠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시로도 뺨이 약간 붉었다. 난 수치심을 억누르며 시로의 맛이 배어있는 입술을 핥았다. "잘 먹었습니다. 오드볼이 굉장히 맛있더군. 메인 디쉬는..." 호텔에서 먹여달라고 멋지게 말할 참이었건만... "시로...?" 흥분해 있는 나와 대조적으로, 시로는 완전히 분개해 있었다. 그는 나를 날카롭게 노려본 후 몸을 돌려 나를 두고 가게를 나가버리는 것 이 아닌가. "잠깐 기다려! 이봐요!" 우와, 내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교태어린 목소리에 소름이 쫘악 끼 쳤다. 내가 남자한테 '기다려요' 라니... 시로 본인은 이 엄청난 명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랜 세월 이 가게에 드나들면서도 내게 무시만 당하던 아 저씨 무리들은 나 이상으로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두가 지켜보 는 가운데서 시로의 팔에 매달렸다. 시로는 나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아저씨들의 비난의 시선이 등위에 꽂혀왔지만 상관없다. "나츠키군!" 마스터가 걱정스러운 듯이 작게 외쳤다. 나는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아까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음침한 재수생 타카자와-. 스쳐지나갈 때, 나는 타카자와가 시로를 찌르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긴박 감을 느꼈다. 등줄기에 전율이 느껴졌다. 불안한 표정의 마스터에게 윙크를 한 후, 나는 시로의 팔에 매달려 루트를 나왔다. 택시에 올라탄 순간, 시로가 느닷없이 내게 고함을 쳤다. "너 바보냐!" 바보라니 너무하네. 아아아, 화가 났나 보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치만 칸자키씨가 이렇게 근사하게 등장할 줄은 몰랐거든." "네가 그랬잖아! 신경써서 차려입고 오라고! 내가 아니면 협력하지 않겠다 길래 내가 이, 이런...!" 아아아아, 엄청 화났나 보네. 말도 안 나오나 봐. 이럴 땐 아부를 해서 얼렁 뚱땅 넘겨버리는 게 상책이지. "그건 그렇고 칸자키씨, 사실은 엄청 미남이잖아. 깜짝 놀랐어. 반했지 뭐 야." 낄낄 웃는 나를, 칸자키 시로는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하지만 칸자키씨 지시대로 오늘밤도 남자와 호텔에 간다는 연극은 완벽했 잖아. 그러니 키스 정도로 그렇게 화내지 마셔." 시로는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며 팔짱을 꼈다. 이거야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뭐, 할 수 없지. "...뭐가 우습냐." "별로." 키스 한 번에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건 한심하지만, 내가 시로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손님들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았던 입술을 그렇게 쉽사리 줘 버렸으니 말이 다. 분하지만 나는 그때 연극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는 정말로 시로를 유혹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래선 정말 위험하다. 상대는 형사인데..., 나를 감방에 집어넣을 수도 있 는 사람인데...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시로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 었다. 보면 볼수록 칸자키 시로는 멋진 남자다. 생김새가 단정한 것 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가 느껴진다. 시로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그 무엇에도 움직이지 않는(키스에는 확실히 동 요했지만) 강인하게 단련된 정신과 선입관에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인격이 배어 나오고 있다. 나는 정의 따윈 믿지 않지만, 그것을 꿰뚫어보는 시로의 눈동자는 신뢰할 수 있다. "시로는 나이가 몇?"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마." "뭐 어때. 나도 나츠키라고 부르면 되잖아, 시로. 그건 그렇고 정의의 사도 울트라맨 시로는 지금 몇 살?" "...스물 일곱이다." "----켁." 말도 안돼. 그렇게 젊단 말야?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수염에 빗질도 하지 않은 머리카락, 그리고 꼬깃꼬깃한 양복 차림의 그는 아무리 젊게 봐도 서른 넷, 다섯 정도는 되어 보인다. 무뚝뚝하고 위압 적인 태도도 도저히 20대의 분위기가 아니다. "시로 당신 항상 이렇게 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틀림없이 인기만발일 거 야." "형사가 범인한테 인기 만발이어 봤자." "하하, 그것도 그렇군." 왠지 난 지금 생전 처음 데이트를 하는 사람처럼 들떠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위험이 시작될 텐데도 말이다. 9 로코코풍의 소파에 천장. 그 중앙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섬세한 샹들리에. 창가의 침대는 물론 킹 사이즈로, 커버에는 호화로운 자수가 수놓여 있다. 대리석 카운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열대 과일과 고급 샴페인, 그리 고 화려한 카사블랑카 릴리. 처음으로 와 본 P호텔의 스위트 룸 내부는 평소에 이용하던 호텔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식으로 방안을 두리번 거려 본 적이 없다. 오늘밤 은 유난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것 같다. 창가에서 신주쿠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척 하며, 나는 유리창에 비친 시로를 보고 있었다. 키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근육질도 아니고, 어느 쪽인가하면 슬림한 편 이다. 하지만 양복을 벗은 그의 가슴은 제법 두터운 편이다. 그리고 가는 허 리와 와이셔츠를 통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어깨의 근육. 실전으로 단련 된 상반신. 시로는 형사다. 나 같은 녀석이 진심으로 반해봤자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12시 반에 넌 여길 나가라." 시로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너무 빨라. 정력이 없나보다고 범인이 오해하겠는 걸." "호텔에서 나가면 곧장 서쪽 출구의 파출소로 가라. 얘기는 해 뒀다." 엄청 사무적이군. 아까 나눴던 키스의 맛 따윈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거냐. "난 파출소 같은 덴 볼 일이 없는데." "됐으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는 유리창 너머 시로를 위세어 아래로 흝어 보았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입술에 짧아진 담배를 물고 있는, 늑대의 이빨과 매의 눈을 지닌 칸자키 시로라는 남자. 너무 멋있어서 열 받는다. "알았어. 복창할 테니까 들어 봐." 시로가 유리창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시로에게 안긴다. 기절할 때까지 2시간 동안 사랑을 나눈 다. 그리고 나는 파출소로 달려가서 경시청의 칸자키 시로에게 강간당했다고 신고한다. 하지만 시로가 내 뒤를 쫓아와 준다면 신고를 취소해도 좋아." 시로는 역시 내 헛소리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기고 있었다. 시 로가 내뱉은 담배 연기가 유리창의 어둠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른 경관에게 널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마." "난 시로가 아니면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네가 돌아가 주지 않으면 난 널 지키기는 커녕 언제까지나 여기서 대기하 고 있어야 된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로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다. 범인은 늘 내가 돌아간 직후에 나와 관계를 가진 상대를 노리곤 했 다. 범인은 시로를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범인은 이미 이 근처에 숨어있겠지만, 행동을 짐작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내 가 미끼가 돼서 범인과 접촉한다. 그걸로 사건은 해결. 똑같은 말을 몇 번이 나 하게 만들지 말아다오." 드럽게 빈정거리는 군.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써 줄 시간은 없다 이거냐? 시로가 지포라이터 바닥을 눌렀다. "뭐야, 그 스위치는..." "도청기. 발신기도 겸하고 있지." 시로가 그것을 양복 안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이걸로 시로가 범인에게 불 려나가더라도, 장소도 대화도 전부 경찰이 파악할 수 있다. 그럼 시로에게 무 슨 일이 생기기 전에 곧 경찰이 원호해준단 말이지. 시로는 위험에 처하지 않 아도 된다. ...하지만 나보다 지포라이터가 도움이 된다는 현실이 상당히 분해 나는 주 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 방에 경찰이 숨어있는 거야?" "아니, 섣불리 경계를 하다가 범인이 눈치를 채기라도 하면 곤란해. 호텔 측 에도 조사에 대한 얘긴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럼 범인에게 연극이라는 걸 들키지 않도록 할 일을 하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나는 오른손 가운데 순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걸, 시로." "그보다 너, 항상 손님과 스위트 룸을 이용하나? 사치스러운 녀석이군." 시로는 그런 식으로 화제를 돌렸다. 남자를 안는 건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있는 시로에게 다가가서 시로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시로 가 불쾌한 듯이 눈썹을 찡그렸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시로의 목에 팔을 감 으며 유혹하듯이 속삭였다. "시로..." 대부분의 남자는 여기서 홀랑 넘어오기 마련이지만... "뭐냐?!" 그 바보 취급하는 듯한 눈빛, 그만 둬 줄 수 없어? "모처럼 호텔에 왔으니까 하자..." 시로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역시 무리였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로의 무릎에서 내려와 그의 발 밑 에 주저앉았다. "아아, 만약 지금 이 광경을 범인이 창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절대 함정수 사라는 걸 눈치챘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로의 무릎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의 다리사이를 슬쩍 바라봤지만 반응은 제로. 시로는 그쪽 기질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내 마음은 결코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슬펐다. 처음으로 게이의 불행을 실감했다. 시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웃었다. 그런 질문은 비겁하다니까... 내가 힐끔 올려다보자, 시로는 안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서 스위치 를 누른 후 말했다. "아아, 별 것 아닙니다." 그가 말을 마친 후 도청기를 껐다. 나는 웃고 말았다. 그렇군.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형사도 마음을 쓰나 보지. 시로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형사를 상대로 진실을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어라라, 말해버렸다. 왠지 입이 멋대로 웃고 있는 걸. 하긴 웃지 않으면 해 나갈 수 없다. 이런-- 이런 일 따윈. "일하지 않으면 밥도 먹을 수 없어. 난 어머니한테 미움받고 있으니까." "...이버지는?" "새 아버지야. 그는 어머니의 반대. 날 엄청 사랑하고 있지. 무서울 만큼..." "그럼 왜 이런 일을 하는 거냐?" 시로가 담배를 끄며 물었다. 짙은 냄새가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나는 울 컥해서 내뱉듯이 말했다. "버림받았으니까. 어머니는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고, 새 아버지는 날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귀여워했고--. 결국 부모님은 날 버리고 도망쳤어." "도망쳤다고?" "새 아버지가 날 덥쳤으니까!" 틀림없이 시로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로는 잠자코 담배연기를 내뱉었을 뿐이었 다. 나는 시로의 발 밑에 누웠다. 앉아있는 것이 피곤했다. 지금까지 부모님을 미워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불쌍하다고 한탄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면, 두 번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마이너스 부분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그 러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 왔다. 혼자가 된 슬픔은 영원한 자유를 손에 넣은 기쁨으로 바꿔버렸다. 억지로 당한 굴욕은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을 농락하며 해소했다. 새 아버지를 미워할 수만 있다면 미워했을 것이다. 한밤중, 잠들어 있는 나를 느닷없이 덮쳐서 울부짖는 내 입을 막고 욕망을 내 안에 밀어 넣었던 새 아버지. 그런데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어머니는 내가 새 아버지를 유혹한 거라고 나를 비난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어머니는 결코 날 믿어주지 않았다. 그렇다, 믿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 아버지를 상랑하고 있었으니까. 새 아버지의 애정이 자신에게 쏠려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 서--, 내가 지금도 과거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머니는 새 아버지를 데리고 현실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3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 았다. 버림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찾지 않았다. 부모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치면 그만이다. 미워한다는 것을 버림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나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새 아버지도 어머니도 날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모양이야. 새 아버지는 날 안고 싶어지고 어머니는 내 목을 조르고 싶어지고. 그러니까 이제 나와는 함께 살 수 없다던걸." 나는 기다렸다. 시로의 동정과 위로의 말을. 처음 만난 날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일깨워줬던 시로가, 나를 위로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빨아 마신 후 내 입에 넣어주고 화장실로 가버렸을 뿐이다. 난 너무 바보스러워서 웃고 말았다.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자, 뭔가가 가슴에 쿵 떨어져 내렸다. 쓸쓸했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고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뭔가로 가슴을 채우고 싶었다. 폐 한 가득 연기를 들이마쉬고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는 공중을 선회한 후 이 윽고 넓게 퍼지며 사라져갔다. 왠지 전부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거라던가, 이 길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거라던 가, 이제와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거니와, 현재의 상태를 후회하 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인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사과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한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지금 이 고독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 이 현실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미래의 나를 더 이상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시로가 돌아왔다. 그가 내 입술에서 짧아진 담배를 빼앗아 두 세 모금을 빤 다음 재떨이에 눌 러 껐다. "이쪽으로 와라." 그가 턱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환호성 을 질렀다. 먼저 베스트를 벗어 던졌다. 이런 쓸쓸함 따윈 시로가 곧 날려버려 주겠지! "시로, 함께 샤워라도..." "무슨 소리냐. 바닥은 차가우니까 하다 못해 여기서 얌전히 있으라는 얘기 야." "...아, 그렇구나. 뭐야." 나는 반쯤 내린 가죽팬티를 다시 끌어올렸다. 시시한 녀석. 내 기대를 멋지게 박살내 준 시로는, 킹 사이즈 침대 위에 벌 렁 드러누웠다. "손은 잘 씻었어?" 내가 묻자 시로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올라가 시로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시로의 오른팔을 억지로 잡아당겨 팔베개를 하려고 했다. 왠지 어리광을 부리고 있군, 나. "오른쪽은 막지마. 여차할 때 총을 쏠 수 없으니까." "아, 응." 총. 총이라니 대체 어디에 숨기고 있는 걸까. 시로가 왼쪽 팔을 뻗었다. 혹시나 팔 베개를 해 주려는 걸까. 나는 시로의 배 위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시로의 왼쪽 팔을 베고 누웠 다. 시로는 도망치지 않았다. 상상했던대로 단단한 팔이었다. 따뜻해서 왠지 눈물이 난다.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죽여버리겠다, 널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죽어라, 거짓말쟁이------ 그런 말로 나를 상처 입 히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시로의 어깨에 코끝을 비볐다. "시간이 될 때까지 자고 있어도 될까, 시로." "...그래." 나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10 "...봐, 이봐, 일어나, 나츠키!" 누군가의 외침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넓은 침대에 샹데리아. 여긴 무슨 호텔이었더라. 왜 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거지. 오늘밤 손님은 누구였더라. 이 향기는 말보로. 누군가가 덮어준 시트. 아아... "안녕, 시로." 시로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로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뭘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까, 나... "잘도 자더군. 몇 번이나 불렀는데 일어나지 않던 걸."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본 풍경이 시로라니, 왠지 기뻐서 긴장되는 걸. "기가 막히지? 내가 너무 뻔뻔스러워서." "아니, 배짱 한 번 좋다고 감탄중이다." 나는 웃었다. 푹 자고 일어난 후의 상쾌한 머리로 확신했다. 나는 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남자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건만, 마 음은 굉장히 충만해 있었다. 게다가... 시로는 아까 나를 나츠키라고 불렀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지만, 시로의 마음속에 내 이름이 입력된 것 같아서 기뻤다. 시로의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나는 재빨리 베스트를 걸쳤다. 침대에서 내려와 손목시계를 보자, 시각은 12시 20분. 이제 곧 내 역할이 끝난다. "세수라도 하고 와. 슬슬 시간이다." 시로가 내게 턱으로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나가 그렇게 말하고 있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충만감이 급속히 사라져갔다. "시로, 저기..." 시로가 내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눈은 물건을 보는 듯한 감정이 없는 눈 빛으로 변해 있었다. "내 역할은 이걸로 끝이지?"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로는 이 사건이 해결되면 또다시 다른 사건을 맡겠지?" 시로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도망치고 있다.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으로부터..., 시로와 헤어져야 하는 순 간으로부터..., 그런데도 시로는 나를 욕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가 버렸다. 시로는 이제 내가 귀찮은 것이다. 아까 까지는 나를 필요로 했던 주제에, 자기가 먼저 협력해 달라고 했던 주 제에, 그런데도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나를 쫓아내고 귀찮은 사건을 해결하 려 하고 있다. 역시 시로도 다른 어른들과 똑같다. 멋대로 날 낳은 주제에 낳는 게 아니었다고 펄펄 뛰던 어머니와 마찬가지 다. 자신이 강간해놓고도 내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고 꾸짖던 새아버지와 마찬 가지다. 내가 손님과 외박을 하지 않는 것은, 아침이 되면 남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기 시작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밤의 어둠에 섞여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안는 아저씨들이, 아침 햇살 아래서는 곧 거만한 어른의 얼굴로 되돌아가, 남창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 당하고 싶지 않아서, 손바닥을 뒤집듯 내 존재를 감추려고 한다. 나는 그들의 장난감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문 앞까지 가서 등뒤의 시로를 돌 아보았다. 시로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 건방진 태도는 뭐야!" 목소리가 떨려서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뭐냔 말야, 시로!" 시로가 눈썹을 찡그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아, 도청기. 스위치를 켜 놨나 보군. 그거 잘됐다. "--굉장히 좋았어, 시로." 시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도를 지나가는 룸서비스에게 또 치정싸움을 들려주려고 내가 일부러 연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시로는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스스로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다. 이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남자에게 매달리다니... "나 시로의 테크닉이 너무 좋아서 좀 무리했나 봐. 허리 아파 죽겠어." 시로가 할 말을 잃고 있다. 그의 눈이 그만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 빨리 돌아가라 - 시선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음엔 언제 만날까? 내일? OK. 내일 만나. 약속이야." 내가 이만큼 도발하고 있건만 대답도 없다. 화조차 내지 않는다. 나는 주먹 을 움켜쥐었다. "약속이라고 했잖아, 시로!" 나는 사로에게 덤벼들었다. 어깨를, 가슴을, 몇 번이나 주먹으로 때렸다. 시로의 근육은 너무 단단했다. 나 정도의 힘과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약한 가슴과 심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로는 이 강한 몸과 마음으로 나 한 사람 조차 잡아주지 못한단 말인가! "내일 만나자고 했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 바보야!" "내일의 약속 따윈 할 수 없어." "뭐...!" 시로가 지포라이터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렇군. 누가 들을까봐 신경 쓰이나 보군. 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부탁하고 있건만, 이렇게 반해있건만, 시로는 내 마음 따위보다 일이 더 중요한 것이 다. "그래? 날 상대하는 게 싫은가보군. 그렇게 쉽사리 날 버리는 거야! 당신 도?!" "그만 좀 해!" 드디어 시로가 화를 냈다. 당연하다. 시로에게 있어서 나는, 범인을 끌어내기 위한 먹이에 불과할 뿐. 사건이 해결되면 이제 두 번 다시 시로는 나를 떠올리는 일이 없을 것이고, 나 역시 또다시 루트에 드나들며 시로를 잊고 다른 남자들과... 싫다. 나는 시로에게 매달렸다. 밀쳐내려고 하는 시로에게 혼신의 힘으로 저항했다. 저항하면서 나는, 수치 심이고 뭐고 없이 시로에게 애원했다. "비겁해 시로... 날 방해꾼 취급할 거였으면 어째서 다정하게 대해 준거야. 왜 그런 얘길 물은 거야... 시로가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난 내가 외 롭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텐데... 시로...!" 말로 얼버무리지 않는 시로를 좋아하는 주제에, 나는 어째서 시로에게 대답 을 원하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건 알고 있다. 시로가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문에 밀어붙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 정시키며 기도를 담아 눈을 감았다. 마지막 도박이었다. 나로서는 안 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눈을 떴을 때, 시로는 슬픈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의 입술 따윈, 아무리 기다려도 역시 무리였다. 시간은 12시 30분. 이제 타임 리미트, 연회는 이걸로 끝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주었다. "바이바이, 형사 아저씨." 시로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방에서 나갔다. 이걸로 끝. 시로와 나는 아무런 관계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경찰이 뭘 어쩌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는 도망치듯 호텔을 나와 시로의 지시대로 신주쿠역 서쪽 출구로 향했다. 그렇다, 이대로 파출소에 직행해서 경찰의 보호를 받다가 맨션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내일이면 사건은 깨끗하게 해결된다. "...내일?" 나는 문득 발결음을 멈췄다. 시로가 아까 뭐라고 했더라? [약속할 수 없다] ......라고, 내일 어떻게 될 지는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술주정뱅이가 뭔가 큰 소리로 외치며 스쳐지나갔다. 누군가가 내 팔을 잡으 며 함께 놀러 가자고 집적대고 있다. 뒤를 돌아보고 침을 뱉는다. 하지만 나는 멍하니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만약 범인이 경찰보다 한 수 위라면, 만약 함정수사가 실패한다면, 사건은 스타트지점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시로는 어떻게 될까? 혹시나 살해당할 수 도 있단 말인가? "약속할 수 없다는 건 그런 의미였나...?!" 내가 그저 시로와 함께 있고 싶어서 억지를 부린 탓에, 시로는 죽을지도 모 른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말보로의 냄새가 풍겨왔다. "시로...!" 나는 왔던 길로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11 모퉁이를 돈 순간 호텔에서 나오는 시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름을 부르려 다가,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 부근에 범인이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시로가 멈춰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살해당한 내 손님들과 같은 경로를, 시 로는 착실하게 밟아나가고 있다. 내 손님들도, 나를 자신의 차에 태워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목격 당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언제나 저렇게 택시를 이용하곤 했다. 하지 만... 그렇다면 방에 누군가의 호출 연락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빌딩 그늘에서 감시하는 내 눈앞을, 시로를 태운 택시가 가로질러갔다. 시 로가 운전수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운전수가 흘낏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 간... 내 뇌리에 순간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데자뷰처럼 불확실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저 운전수..." 감색 모자를 눌러쓰고 하얀 마스크와 안경을 끼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가 내 기억을 뒤흔들었다. "----------!!"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로를 태운 택시를, 틀림없이 경찰이 쫓고 있... 지 않 잖아! "말도 안돼!" 미행하고 있는 기색이 없잖아! 도청하고 있었잖아. 후속차는 어디로 간 거 야! 경찰은 뭘 하고 있는 거냐구! 범인이, 타카자와가 택시 안에 있는데! 틀림없이 택시 조수석 부근에 흉기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타살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쾅쾅 울려 퍼졌다. "제발 눈치채 줘, 시로!" 시로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호텔 로비에서 내선을 이용해서 시로를 불러낸 것은 역시 타카자와였다. 타 카자와는 택시 운전수로 변장해 있었던 것이다! 운전수가 로비에서 객실로 직접 전화를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하얀 장갑을 당당하게 끼고 있으니까, 살해현장이나 피살자의 몸에 는 지문하나 남지 않는다. 틀림없이 타카자와는 근무처에 급한 볼일이 생겼다는 거짓말로 남자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그리고 택시로 남자들을 근처의 어두운 공원으로 끌고 가 서 흉기로 때려 죽였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미칠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뒤쫓지 않으면 주가 뒤쫓는단 말이냐! 나는 한 대의 차 앞에 뛰어들었 다. 억지로 세워서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여어, 뭐 하는 거냐, 아마노 나츠키." 갈라진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무라이 경부가 조수석 창문에서 얼굴을 내 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무라이! 지금 시로가...!" "알고 있어. 하지만 도청기 상태가 안 좋아서 말이지. 너 말야, 칸자키한테 누명을 뒤집어 씌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 상관없지만, 기계까지 고장내 진 말아다오." 켁. 누명이라는 걸 눈치챘나 보군. 아니지, 그 전에 그렇게 간단히 고장나는 도청기를 사용하지 말란 말이야. 마음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나는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 "됐으니까 빨리 아까 그 차를 쫓아요!" 나는 운전석의 형사에게 고함을 지른 후 경부를 협박했다. "시로가 다치기라도 해 봐라! 부당 강제 연행 및 모욕죄, 일반시민에게 함정 수사 협력을 강요하는 등 직권남용을 서슴지 않는 경찰법 위반 악덕경부로 고소할 테니까!" 시로를 태운 택시를 추적하는 동안, 나는 내 견해를 무라이경부에게 설명했 다. "그럼 뭐야, 너 그 타카자와라는 녀석과 그런 사이냐?" 경부가 느긋하게 물었다. 나는 초조하게 프론트 글래스 너머를 바라보았다. 심야 택시가 너무 많아서 시로를 태운 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게 대체 어떤 관계인데?" "그러니까 네가 남자를 유혹할 때마다 상대를 살해하고 싶어질 만큼 질투하 는, 깊은 관계냔 말이다." "그쪽이 멋대로 질투하는 것 뿐이야. 난 타카자와 같은 녀석은 상대도 안 한 다구. 굳이 말하자면 혐오의 대상이지." "호오, 그럼 너.도.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가 쫓아다니는 바람에 짜증나고 피 곤하겠군." "...시끄러워!" 무라이 자식, 내가 시로에게 한 일방적인 열애선언을 듣고 재미있어하고 있 군. 내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자 무라이는 코웃음을 쳤다. 빌어먹을!! "무라이씨." 과묵하게 운전하고 있던 후지시로라는 젊은 형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운전수가 용의자라는 것, 선배의 핸드폰으로 살짝 연락을 할까요?" 나는 뒤에서 몸을 내밀었다. 명안이다, 후지시로! 시로를 [선배]라고 친한척하며 부르는건 맘에 안 들지 만... "무리야. 미끼역을 맡은 사람은 여차할 때까지 핸드폰 전원을 꺼 두는 게 일 반적이지. 칸자키도 그렇게 하고 있어." "어째서?" 내가 묻자, 무라이가 대답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끼인 이상 어디로 끌려갈지 무슨 일이 생 길지 모르잖아. [연락을 취해야 할 때 마침 충전이 다 됐다] 같은 황당한 사 태를 막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러는 편이 제일 안전하거든." 내가 '그렇군' 하며 납득하는 건 당연하지만, 어째서 현역 경찰인 후지시로 까지 감탄하고 있는 걸까. 이런 녀석도 경찰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은 엘리트 경관도 될 수 있겠다. "게다가 아마노, 너 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이 눈치챌 정도라면 칸자키 는 이미 알고 있을 걸. 가게에서 얼굴을 봤잖아? 칸자키는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아무리 변장을 해도 절대 알아보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경부의 말에,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경부가 시로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좋아하는 사람 이 칭찬 받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다. "칸자키 선배님께 맡겨두면 됩니다." 후지시로의 말은 초 열받지만. 그때, 차의 무선기에서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경부는 알겠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오오, 응. 그래. ...알겠네." 경부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 "미행차로부터다. 해결됐다더군." "뭐!" 나와 후지시로가 동시에 외쳤다. "범인은 네 말대로 타카자와다. 축하하네." 난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수석 시트를 움켜쥐며 물었다. "어, 어떻게 잡았대!?" "간단하지. 다른 미행차량이 타카자와한테 들켰다더군." "...뭐?" "초조해진 타카자와가 핸들조작을 실수해서 택시로 빌딩에 처박혔다더군." "뭐라고!" 나와 후지시로는 큰 소리로 외친 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 * 현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경찰차 두 대가 도착해 있었다. 경관도 4,5명. 자동차 라이트를 등지고 불사신 남자 시로도 있었다. 무사하 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시로!" 나는 차에서 내려 시로에게 달려갔다. 그런 한심한 이별을 한 이상 이제 와서 얼굴을 마주칠 면목이 없지만, 지금 은 그런 옛날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시로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아까는 정말 심장이 멈출 뻔 했었다. 시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나는 두 세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뭐뭐뭐뭐, 뭐야, 그 피 ...피는!" 시로의 얼굴 반쪽은 새빨간 선혈에 물들어 있었다. 오른쪽 뺨에 눈썹 위까지 그어진 칼자국. "아아, 좀 스쳤어." "스쳤다니, 뭐에!" "나이프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3cm 만 삐끗했어도 오른쪽 눈알을 찔렸을 것이다! 손수건 따윈 없었기 때 문에, 나는 손바닥으로 시로의 눈꺼풀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됐어. 꼴 불견 이잖냐." 그렇게 말할 것 없잖아. 남이 모처럼 걱정해주고 있는데... "왜 칼 같은 게 튀어나온 거야." "글쎄, 타카자와한테 물어봐 줘." 아아, 눈물이 난다. 시로가 크게 다칠 뻔 했다. 전부 나 때문이다. "왜 피하지 않은 거야." "너무 가까워서 무리였어." "총을 갖고 있다면서!" "일반시민한테 발포할 수 있겠냐." "타카자와의 어디가 시민이야! 살해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때는 내 무덤에 향이라도 피워다오." "시... 시로오오오!!" "선배, 괜찮으세요!" 후지시로가 재빨리 뛰어왔다. 후지시로는 주머니에서 잘 다림질 도니 손수건을 꺼내 시로의 상처에 대어 주었다. 그릭는 자신의 넥타이를 붕대 대신 사용해서 손수건을 정성스럽게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시로, 왜 내가 피를 닦아줬을 때처럼 거절하지 않는 거야...? 아, 후지시로 녀석, 시로가 물고 있던 담배에 잽싸게 불까지 붙여주다니. 왠 지 엄청 열 받는다. 하지만 제일 열받는 건 역시 시로가 다쳤다는 것이다. 타카자와를 걷어차 주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살인범 타카자와를 찾았다. 그러자 시로가 재빨리 내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쪽으로는 가지 말아라." 시로가 내 어깨를 안았다. 아무리 부탁해도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던 주제에, 시로가 나를 끌어안았다. 뭔가로부터 내 시선을 돌리게 하려 하고 있다. 시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 어서, 나는 시로의 어깨 너머 그것을 찾았다. 눈부신 라이트 중앙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검시관일 것이다. 그리고 감식반이 카메라 플래쉬를 그곳에 누워있는 무. 언. 가. 를 향해 연 신 터뜨리고 있다. 무엇을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붉게 물든 너덜너덜한 천 조각. "아..." 일그러진 손가락과 선혈에 물든 상반신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타카자와의 목은 이미 잘려나가 있었다. 12 "하지만 마스터,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카운터 안에서 묵묵히 물수건을 접고 있는 마스터에게, 나는 흥분된 목소리 로 말했다. 결국 그 후 시로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잽싸게 조사본부로 돌아가 버렸 고 이럴 때 혼자 있는 것도 불안했고, 범인체포를 빨리 마스터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나는 후지시로에게 루트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가게는 이미 닫혀 있었지만, 내가 인터폰을 누르자 마스터는 2층 자택에서 뛰어내려와 주었 다. 이미 새벽 3시임에도 불구하고 장부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 시 루트의 카운터에서 내게 야채 쥬스를 서비스해 주었다. "이제 됐잖니. 사건에 대해선 잊어버리도록 하렴." 마스터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입장에서 타카자와는 신세를 진 사람의 아들이자, 매일 밤 찾아와 준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무사히 범인이 체포되었다곤 해도, 상당히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밤의 마스터는 나와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 역시 이곳에 와선 안 되는 거였을까. "마스터." "응?" "시로는 루트에서 한번 스쳐지나간 것뿐인 타카자와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대. 얼굴 이라기 보단 기척을 말야. 후각이 거의 개 수준이라니까. ...그런데 경찰차가 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타카자와가 갑자기 폭주를 하 는 바람에 시로는 그걸 말리려고 했대. 타카자와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시로 는 얼굴에 칼을 맞고 차는 그대로 빌딩 벽에 격돌했다나 봐. 타카자와는 프론 트 글래스에 후두부부터 처박고 자폭했다더군.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아?" 나는 쥬스를 다 마신 후 카운터에 컵을 올려놓았다. 인적 없는 루트의 철벽에 차가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등줄기가 오싹 했다. "카와구치씨도 이토사장도 다들 타살 당했다고 신문에 써 있었는데, 왜 시 로만 칼로 찔러서 죽이려고 한 걸까?"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니?" 마스터가 겨우 내 말에 흥미를 보였다. 나는 희희낙락 이야기를 계속했다. "택시에서는 흉기가 될 만한 둔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더라구. 게다가 나보다 빈약한 타카자와가 아무리 흉기를 휘둘러봤자 사람의 두개골을 박살낼만한 힘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 말야, 일단 아저씨들의 완력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데, 이토 사장은 제법 완력이 있었어. 그 사람이 타카자와같은 녀석한테 힘으로 져서 맞아 죽다니,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건 그렇네." 마스터가 동의한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힘으로 져서 맞아죽었다... 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한기와는 다른 의미의... 오한이 느껴졌다. "예를 들면..."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마스터였다. "예를 들면 나츠키군, 타카자와군은 단순한 운반책이고 주범이 따로 있다면 앞뒤가 맞지 않을까." "그게 무슨 뜻...?" 내게 등을 돌리고 있어서 마스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이 추위 때문일까. "항상 함께 루트를 나가는 나츠키군과 손님을 타카자와군이 미행한다. 그리 고 나츠키군이 일을 마치고 호텔에서 나올 때 타카자와군은 주범에게 연락을 한다. 슬슬 오늘밤의 희생양을 끌어내겠다고..." 마스터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커피콩을 갈고 있다. 난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마스터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 내 머리통 따윈 쉽사리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 투박한 손가락... "그리고 타카자와군은 로비의 내선전화를 이용해서 희생양의 방에 연락을 하는 거야. 나츠키의 전언이라고. '아까는 차갑게 대해서 미안합니다. 택시를 불러뒀으니까 지금 곧 우리집으로 와 주시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야. 희생양 은 희희낙락 호텔을 체크 아웃하겠지. 타카자와군은 그 희생양을 사형대까지 차로 안내하는 거야. 그리고 주범은 사형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희생양을 때려 죽이는 거지." 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오한은 이미 식은땀으로 변해있었다. 마스터가 커피를 갈던 손을 멈추고 소리 없이 홀로 나와서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스터의 손이 내 허벅지에 와 닿았다. 설마, 설마, 설마! "나츠키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로씨가 그때 그 형사였어? 난 전혀 몰랐어." 시로!! 나를 지켜준다고 했던 주제에 뭐 하는 거야? 빨리 와줘, 시로...! "나츠키군이 누군가와 그런 식으로 키스를 하다니, 난 정말 놀랐어. 왠지...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리광을 피우는 모습이 전혀 나츠키군답지 않 았어." 그런 건 마스터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살인과 무슨 관계가!! "나츠키군이랑 난 이렇게 사이가 좋은데,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어. 어째서 일까. 난 이렇게나 나츠키군을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나 츠키군을 빼앗겨야 하는 걸까. 난 항상 카운터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잠자코 지켜볼수밖에...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내가 줄곧 지켜주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 "어... 째서...?" 나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스터의 슬픈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와 그 형사와 어느쪽이 좋아?" "나...!" 참을 수 없었다. 괴로웠다. 이 긴장에 짓눌릴 것 만 같아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시로가 좋아!" 그렇게 외친 순간, 나는 체념했다. 그러니까 하다못해, 시로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시로가 좋아! 너무너무 좋아! 만난지 얼마 안됐지만, 난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어! 이유 따윈 몰라. 하지만 시로가 아니면 안돼! 난 알 수 있어. 시로가 아니면 안된다구!" "뭘 안다는 거지?" "몰라! 하지만 알 수 있어!" "내가 있잖아, 나츠키군. 지금까지처럼 나츠키군을 지켜..." "그만 둬, 마스터!" "그 남자, 언젠가 틀림없이 나츠키군을 안을거야. 그리고 상처 입힐 거야. 난 나츠키군이 상처입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나라면 나츠키군을 언제까지나 소중하게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응?" "그만 둬!" 나는 마스터의 손을 뿌리쳤다. 마스터의 작은 눈은 미소인지 증오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형태로 이그러졌 고, 이윽고 그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나츠키군..." 마스터의 두꺼운 손가락이 내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잡고 서서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몸은 어느센가 의자에서 떠올라 있었다. 마스터의 두 손이 내 목을 조르며 나를 허공으로 들 어올리고 있었다. "...괴, 괴로워." "...어제 죽은 이토씨는 정말로 기쁜 듯이 어두운 주차장에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 당장이라도 휘파람을 불 것 같은, 소년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 분했어. 미웠어. 나츠키군을 생각하며 미소짓는 남자들의 얼굴 따우니 보고 싶지 않아. 그런 얼굴을 해서는 안돼. 용서할 수 없어. 그렇잖아? 나츠키군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나 이토씨의 얼굴을 박살내 줬어. 샌드백처럼, 그 녀석의 얼굴을 마구 짓이겨줬어! ...나 나츠키군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거 야. 봐, 덕분에 나츠키군은 아직도 이렇게 깨끗하잖아...?"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심장의 고동이, 마스터의 광기어린 속삭임이, 차 츰 멀어져 갔다. "그런데 어째서 나츠키군은 날 돌아봐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다른 남자를 선택하는 거야? 날 얼마나 더 괴롭힐 셈이지? 왜 날 상처 입히려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 내 손으로 널 죽일 수 밖에 없잖아! 더 이상 나츠키군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그렇지, 나츠키군!" 난 그런 건 모른다. 그저 이제 죽는구나 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난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도 외면 받고 처음으로 반한 남자는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 살아있어 봤자 맥해무익한 인간이다. 그러니 까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인간의 손에 죽는 것은 의외로 행복한 결말이다. 부모님도 그렇게 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버릴 바에는 죽여줬으면 좋았 을 것이다. 그랬다면 난 새 아버지와 어머니를 조금은 다시 봤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이별이군, 시로.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겠지. 난 시로가 좋았다. 실의 말보로 향기가 좋았다. 언제까지나 시로의 목소리 를 듣고 싶었다. 좀 더 빨리 시로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인생이란 정말 뜻 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만약 시로와 서로 사랑할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의 처지와 내 짧았던 인생 에 깊이 감사했을 것이다. 삶이란 행복한 거라고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에게도 혹시나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꿈이지만... "시... 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시로의 이름을 입술에 남기려고 한 것뿐이 었다. 그러나, "그 손 놔라!"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철문이 쾅 열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 시로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총일까. "나츠키를 내려놔라, 야마구치!" 야마구치... 누굴 말하는 걸까. 아아, 마스터의 본명이다. 현역 레슬러였을때 바이슨 얌마구치라는 링네임이었다고 했지. 웃기는군. 이 상냥하고 마음 약한 마스터가 힘으로 먹고사는 레슬러였다니. 그리고 그 강한 주먹이라는 흉기로 4명이나 되는 남자를 때려죽였다니...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은 마스터는, 총을 들고 있는 시로를 향해 괴성 을 지르며 돌진했다. 시로가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마스터의 주먹이 벽에 꽂혔다. 빠지 지 않게 된 주먹을, 시로가 아래에서 걷어찼다. 마스터의 절규. 마스터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시로가 재빨리 그 틈으 로 파고 들어 마스터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순간 마스터의 거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마스터가 시로의 멱살을 잡았다. 마스터와 시로는 한 덩어리가 되어 문 밖 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대기하고 있던 경관들의 목소리일까. 다들 와 줬구 나. 시로도... "나츠키!" 나를 안아 일으킨 것은 시로였다. "숨을 쉬어 봐! 나츠키!" 숨? ...난 벌써 죽었을 걸. 누군가 내 뺨을 때리고 있다. 하지만 이젠 눈이 떠지지 않는걸. 숨 따윈 쉴 수 없다구. 누군가 내 코를 잡고 입을 맞췄다. 폐 안으로 산소가 흘러 들어왔다. 꿈이 아닐까. 시로가 내게 이런... 아아... 필사적으로 인공호흡을 해 주고 있는 ------------- 시로. "숨을 쉬어, 나츠키! 죽지 마!" 죽지 마. 시로가 내게 죽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다면 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한번, 다시 한 번. 시로가 몇 번이나 산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입에서 입으로 내게 생명을 전해주었다. 시로가 내게. 생명을. "--콜록!" 폐에 격동이 느껴졌다. 나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격렬하게 기침을 했 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숨을 쉬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시로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나는 단순하게도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살아서 다행이라고. 일단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라는 시로의 권유를 거절하고, 나는 경찰차를 향 해 걸어갔다. 뒷좌석에는 수갑을 차고 형사들에게 양팔을 잡혀 있는 마스터 가 커다란 몸을 구부리고 앉아있었다. "마스터..." 내가 아무리 외쳐도 마스터는 고개를 들어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다리 사이로 손목을 감췄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내 뒤에 서 있는 시로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츠키군을 잘 부탁합니다... 라고. 시로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 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스터를 태운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심야의 거리로 사라져갔다. 문득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시로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담배 끝이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작은 불에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로... 어째서 와 준거야?" 시로가 뒤쪽 차에 올라타는 후지시로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후지시로는 미안한 듯이 내게 머리를 숙인 후 무라이경부를 태우고 가 버렸다. "후지시로 저 바보가 널 집이 아니라 루트에 데려다줬다고 하길래. 덕분에 이런 한 밤중에 범인을 체포하게 됐지." 그렇구나. 후지시로는 바보구나. 왠지 좋은 기분... "마스터가 범인이란 걸 알고 있었어?" "용의자중 한 사람이었지. 피살자의 상처로 보아 흉기는 육체라는 걸 짐작 할 수 있었으니까. 타카자와 공범설도 확정됐고 해서, 겨우 야마구치의 체포 영장이 내일... 아니, 벌써 오늘인가, 나올 예정이었지. 너와 후지시로 덕분에 체포가 반나절 앞당겨졌다." 시로가 턱짓으로 차에 타라고 말했다. 검은 구식 스카이라인. 나는 안심하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타카자와는 야마구치가 레슬러로 활약하고 있을 때부터 열광적인 팬이었 다더군. 자금원조를 방패삼아 야마구치에게 관계를 강요했다나 봐. 하지만 야마구치는 타카자와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네게 몹시 집착했다더군. 그래서 타카자와는 네게 원한을 가졌던 거야." 시로가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시로의 가슴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야마구치에게 이번 살인을 부추긴 것은 타카자와야. 나츠키를 더럽힌 녀석 을 죽이라고. 너를 살인범으로 몰아서 야마구치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할 생 각이었겠지. 야마구치는 네가 세상에서 고립하면 자신만을 의지하게 될 거라 고 믿고 살인에 동의했겠지. 너무 허술한 계획이라 간단히 꼬리가 밟히고 말 았지만." 나는 시로의 말을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허술한 계획이라 사건이 해결된 게 아니다.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시 로가 나를 믿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사건으로부터, 과거로부터 말이다. "시로." "응?" "나 형사가 될 거야." 끼이익 하고 차가 옆으로 미끄러진 것은 어째서일까? 이봐, 시로. 뭘 그렇 게 놀라는 거야?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냐." 시로가 굳어있다. 아, 옆 얼굴이 석화되어 있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나 내년에 경시청 채용시험을 봐서 조사 1과의 형사가 될 거야. 도쿄는 우 리집 마당이나 마찬가지니까, 후지시로같은 녀석보다는 내가 훨씬 도움이 될 걸." 시로가 나를 힐끔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봐 봤자 이젠 무섭지 않다구. "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지켜주기 쉽게 항상 옆에 있어 줄게. 게 다가 이미 OK했잖아?" "OK?" "마스터가 날 잘 부탁한다고 했을 때 알겠다고 했잖아? 형사라면 자신의 말 에 책임을 져야지." "너 말야..." 결정했다. 앞으로 계속 시로의 곁에 있기로, 그의 오른팔 같은 존재가 되기 로, 그리고 나도 시로를 지켜 줄테다. "시로, 난 부모님이 어딨는지도 모르고, 이번에 이런 사건도 있었고... 역시 누군가의 보호 감찰을 받지 않으면 안되겠지? 역시 신원보증인이 필요하겠 지?" "...무슨 말이 하고 싶냐?" 시로가 핸들을 힘껏 움켜잡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도는 경찰의 의무잖아? 하지만 시로는 설마 날 가정과에 통보하진 않겠 지? 그런 짓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하자, 시로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후훗,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구요. "내게 흡연을 권장하는 것은 비행을 조장하는 행위 맞지? 들통나고 싶지 않 으면 당신의 감시하에 두는 편이 낫지않을까?" 시로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잠시 후에는 우리 집에 도착이다. 자, 시로, 어떻게 할래? "짐은 이 담에 옮기지 뭐. 당장 감찰 보호체제에 들어가는 편이 좋을 테니까. 난 적이 많거든. 혹시 알아? 오늘밤 또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될 지." 동경? 시로에 대한 내 마음은 그런 귀여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표적이라고 할까. 내 자존심을 걸고 칸자키 시로라는 남자를 함락시키고야 말테다. 각오해 두 시지. "...이 빌어먹을 꼬마 녀석!" 시로의 검은 구식 스카이라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맨션 앞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백미러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올라있는 맨션의 불빛이 차츰 작게 멀어져 갔다. 부모님과 살았던, 그리고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던 집. 고독과 불안 때문에 탈출할 수조차 없었던, 나를 속박하고 있던 집. 모든 것은 그리운 과거의 일이다. "...시로. 내가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해방됐다고 생각하면 돼." 시로의 코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와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형사가 된다고 하면 마스터는 깜짝 놀라겠지." "출소할 때는 마중 나가 줘라." "...응." 출소하는 날 따위는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다. 무기징역, 그리고 집행유예도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 없으니까, 나는 가끔씩 마스터를 면회하러 갈 예정이다. 파워 윈도우를 내리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졌다. 계절은 이제 곧 가 을. 몸을 둥그렇게 움츠리고 보이지 않는 추위에 떨며 지내는 것보다는 앞을 향해 달리며 땀을 흘리는 편이 훨씬 매력적인 삶일 것이다. 이제 곧 날이 밝는다. 머지않아 떠오를 태양을 향해, 난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지배의 매장 1 일본법률 168호, 제1장 1조에는 법시행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비행 청소년에 대해서는 성격의 교정 및 환경의 조정에 관한 보호처분을 행함과 동시에... 라고 . 뒤는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든 한마 디로 청소년이란 좋건 싫건 나라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애기다. 법률상 만 20세가 되자 않은 자를 총칭 청소년이라고 부르며, 9월 13일 현 재 만으로 19세인 나 나츠키는 당연히 이 법률에 따라 건전하고 평안한 삶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치만 시로." 나는 법률전서를 한 손에 들고 이불을 가볍게 걷어찼다. 지금 시각은 8:00AM. 하루는 이미 시작되어 있건만, 내 보호자는 밤새 일을 하다 이제 막 자리에 누웠다. 보호자라곤 해도 시로와 나는 새빨간 남이다. 내가 경시청 조사1과의 형사 칸자키 시로와 만난 것은 2주일 전 신주쿠에서 일어난 연속 살인 사건이 계기로, 처음에는 내가 살인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 었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지만, 시로의 첫인상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태도도 위 압적이고 눈초리도 험악하고. 빗질도 안한 머리에 아무렇게나 난 수염, 꼬깃 꼬깃한 검은 양복에 촌스러운 넥타이, 게다가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워 무는, 단순한 니코틴 중독자--그것이 시로의 첫 인상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단 하루만에 시로의 이미지를 철회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과 용맹한 늑대의 발톱을 지닌 시로는, 그 강인한 심장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상냥함을 숨기고 있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흉악범과 싸워 준 칸자키 시로. 게다가... 호흡정지에 빠진 내게 마우스 투 마우스로 인공호흡까지 해 줬었 다. 그 후 나는 완전히 시로한테 반해서, 이곳 요츠야 신사 뒤에 위치한 붕괴작 전인 시로의 아파트로 쳐들어왔다. 물론 시로에게는 민폐스러운 얘기일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남자들은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지곤 했다. 포 로가 되곤 했다. 안겨주지만 하면 100만 엔을 내겠다는 둥, 죽어도 좋다는 둥, 간단하게 돈과 자존심을 내던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일절 없다. 카스는 했지만, 그것은 내가 시로의 빈틈을 노린 것일 뿐 시로가 적극적으 로 한 것이 아니다. 한 번쯤 그와 몸.과. 몸.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슬프게 도 시로는 100% 노말이라 설령 눈 속에서 조난 당한다 해도 남자를 상대로 뭘 어쩌진 않을 것이다. 나는 법률전서를 펼치며 시로의 몸 위에 올라탔다. 법률전서는 내년 경찰청 채용시험을 목표로 하고 있는, 내 애독서로 변해있 다. 내 장래의 꿈은 조사1과의 형사가 되는 것. 그래서 시로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다. 아아, 나란 녀석은 어쩜 이렇게 기특한 것일까. "시로. 내 성격의 교정과 환경의 조정을 현역 형사인 칸자키 시로가 맡아주 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하지만 스무살 미만이 어린애라니 말도 안돼. 고등학교도 이미 졸업했는데!! 어른과 아이의 구별에 연령따윈 상관없다구. 그치, 시로?" 시로가 이불을 내리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츠키." "왜 그래? 졸려?" "...이봐, 나츠키." "왜?" "빨리 학원에 가." "그럼 다녀오세요 앤드 굿나잇 키스."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가까이 대자, 시로는 낮게 신음하며 이불을 뒤집어썼 다. ...쳇. 나는 시로의 허리 부근을 발로 꾹꾹 밟은 후 재빨리 현관으로 가서 운동화를 신었다. "나 오늘은 좀 늦게 돌아 올 거야. 이상한 데서 자고 오려는 건 아니니까 걱 정 마!" 시로 녀석, 대답도 안 하는군. 하지만 대답이야 늘상 안 하기때문에 나는 신 경 쓰지 않고 덧붙였다. "가스 렌지위에 있는 냄비속에 삶은 계란이 있으니까 배고프면 먹어! 그럼 잘 자!" 하도 낡아서 떨어져나가기 일보직전인 알루미늄 도어를 소용없다는 걸 알 면서도 일단 열쇠로 잠갔다.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겠다. 내 이름은 아마노 나츠키, 내년에 경찰시험을 보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 다. 외모는 약간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야생 고양이같은 날렵한 얼굴과 흑 표 범의 탄력을 겸비한 팔다리에는 절대적인 자신을 지니고 있다. 이 완벽한 외 모덕분에 모두들 나를 어려워해서 다들 두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내 본성을 알고 있는 녀석은 한 사람도 없다. 나의 어두운 과거따윈, 틀림없이 상상조차 못하고들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고교 3년 간 매일 밤 새 아버지에게 당했던 과거라던가, 질투에 미친 어머니가 날 목 졸라 죽이려 했던 과거라던가, 결국 부모님은 나를 맨션 에 남겨둔 채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던가. 하지만 나의 비밀은 그것뿐이 아니다. 생활자금이 끊긴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 단락적인 사고라고 바보취급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평범한 아르바이트란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방 두 개 짜리 전세 맨션을 내놓고 아파트로 옮기고 싶어도, 보증인이 없으 면 이사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첫 손님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두운 공원 한구석에서, 다섯 명의 남자들에게 당했기 때문에... 아니, 합 의하에 한 짓이라고 정정하자. 나는 녀석들로부터 만 엔 씩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 후로, 하룻밤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장사에 맛이 들려, 나는 신주쿠 2번가 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새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안겼던 덕분에, 그리 큰 아픔도 저항도 없이 나는 남자들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새 아버지에게 당했을 때부터 내 인생은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내 비밀 병기의 희소가치에, 남자들은 차츰 서로 나를 안으 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루트]라는 쇼트 바를 거점으로 장사를 하며 돈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 다. 그리고 [같은 남자와는 두 번 다시 자지 않는다]를 모토로 부자 전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사건만 없었던들... 루트의 마스터가 내게 집착한 나머지 네 명이나 되는 손님을 살해하는 사건 만 없었던들, 나는 지금도 영감들을 상대로 몸을 팔고 있었을 것이다. 비참함 인생이라고 동정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나는 그 사건 덕분에 시로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운이 좋은 거라고, 지금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있다. 2 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적의 강인함을 자랑하며, 불량 그룹들도 피 해간다는 이이지마 타츠야다. "아마노! 어이, 아마노 나츠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 앞에 자전거를 급정차한 이이지마는, 짧은 머리에 땀 을 빛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었다. 이 녀석은 매일 아침 이렇게 내 앞에 등장한다. "안녕, 아마노." "--------안녕." 이이지마는 강아지처럼 붙임성 있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누구 에게나 이렇게 귀엽게 구는 것이 아니다. 이 강아지 같은 눈은 내 전용 아이 템인 모양이다. "다행이다. 오늘 아침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뭐야, 그게?!" 나는 이이지마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재빨리 건물을 향해 걸었다. 이이지마 는 나와 같은 과목을 들은 후로 반년간, 거의 매일 아침 이런 분위기다. 남자 에게는 무뚝뚝하기로 유명하건만, 나한테만은 기분 나쁠 만큼 상냥한 표정을 짓곤 한다. 본인은 자신이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 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이지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딱히 싫은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하는 게 어려울 뿐이다. 이이지마뿐만 아니라 같은 또래 녀석들 모 두가 말이다. 게임이나 여자 아이돌에 전혀 흥미가 없는 나는, 당연히 녀석들과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참한 과거나 환경 때문에 어디까지 녀석들과 가까 워져도 괜찮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게 두려워서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딱 히 매춘을 했던 것은 들켜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주위에서 성가시게 굴 테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생각이다. 남창의 세계에서 발을 씻은 지금 내가 제대로 얘기를 나누는 상대는 시로 한사람뿐이다. (물론 시로는 상대해 주지 않지만) 시로는 27세치고 꽤나 과묵하고 침착하다. 척 보기에는 34,5세 정도로 보 이지만, 시로가 일단 수염을 깎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더블 슈트라도 입 는 날에는, 전 일본의 수(受)들이 침을 흘리며 흥분할 만큼 [수컷]이 된다. 차가운 분위기에 눈빛도 날카롭고 말수도 적고, 남자의 페르몬을 마구 풍기 며--아,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군. 위험해, 위험해. 어, 어쨌든 시로는 보기 드문 진짜 남자라고, 나는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다. 얘기가 딴 길로 새어 버렸군.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평판을 알려주겠다. [두뇌명석. 운동신경발군. 쿨하고 말수 적은 초 미남, 키무라 타쿠야도 맨발 벗고 도망갈 약간 불량스러운 나이스 가이] 라는게 나에 대한 평판이다. 시로가 들으면 틀림없이 코웃음을 칠 테지만 말이다. 이이지마는 주차장에 자전거를 던져놓고 신발장 앞으로 나를 쫓아왔다. 이 렇게 나란히 서면 키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는 마른 형에 키는 약 170센티 가량, 하지만 이이지마는 와일드한 체격에 190센티가 넘는다. "아마노, 너희 집 전화 고장났냐?" 너무나도 느닷없는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이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너희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은 번호입니다' 라 는 메시지만 나오더라구." "무슨 일인데?" "뭐?" 이이지마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내 말의 의미를 해설해 줬다. "그러니까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었냐고." 실내와로 갈아 신고 복도를 걷기 시작한 나를, 이이지마는 충견처럼 쫄래쫄 래 따라왔다. 나와 이이지마의 주종관계를 여자애들은 재미있어 하며 바라보고 있다. 이젠 익숙해지긴 했지만, 가끔은 이이지마가 몹시 귀찮게 느껴지곤 한다. "저기 말야, 친구가 밴드를 하고 있거든. 밤 7시부터 죠지에서 라이브를 하 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미안. 바빠." 나는 강의실로 들어가 창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안녕, 나츠키군~' 이라는 여자들의 환호성을 여느 때처럼 무시하자 이이지 마가 나 대신 손을 흔들어 준다. 이 녀석, 여자들한테는 엄청 싹싹하군. "반년간 줄곧 바쁘구나, 아마노는." 이이지마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같이 놀러가자고 해도 한 번도 OK를 해 주지 않네. 설마 바쁘다는 건 날 거절하기 위한 구실?"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그걸 깨달았냐? "어쨌든 난 못 가." "어째서?" "그러니까..." 아아, 귀찮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이이지마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이 지마는 내가 반응을 한 것 자체가 기쁜지 안 어울리게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 지처럼 눈동자를 빛낸다. "오늘은 이사를 해야 하거든." 그러자 이이지마는 깜짝 놀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사?! 어디로 이사가는데? 설마 학원을 옮기는 건 아니겠지? 어째서 갑자 기 이사를 가는 건데? 어디로 가는 거야?" "뭐! 아마노군이 이사를?!" "말도 안돼! 너무해. 앞으로 아마노군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다니~!" 나와 이이지마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떠들어대 기 시작했다. ...어휴,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학원 같은 건 안 옮겨. 근처로 옮기는 것 뿐이야."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나는 책을 거칠게 펼쳤다. 불쾌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순간 모두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럴 땐 특별취급 받는 게 좋군. 제멋대로에 건방지게 굴어도 아무도 뭐라 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은 잔당이 약 1명. "아직 무슨 볼일이 남았나?" 내 불쾌한 목소리에도 굽히지 않고, 이이지마는 잠자코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것도 이번에는 비 오는 날 버림받은 강아지같은 얼굴이다. "미안하지만 라이브 같은 건 흥미 없는데다가 정말로 바빠." "...어디로 이사가는 건데?" 이이지마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버림받은 강아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실은 나 지금 아는 사람 집에 얹혀 살고 있어. 그래서 집에 남아있는 짐을 빨리 그 쪽으로 옮기고 싶거든."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다. 이봐,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 가라구. "그럼 내가 도와줄게!" 그 희희낙락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이지마가 재빨리 몸 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르는 편이 빠르잖아. 힘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어. 좋아, 결정했다!" 그리고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이지마는 의기양양하가ㅔ 자신의 자 리로 돌아갔다. "뭐야, 저 녀석..."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로군. ...뭐, 할 수 없지. 내가 이사를 서두르는 것은 짐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로의 집은 정말로 좁아서 어차피 짐 같은 건 거의 놓아 둘 수 없다. 하지 만 이불만은 별개다. 어째서냐구? 시로 녀석이 매일 밤 심야근무를 하고 있 기 때문이다. 심야근무의 기본체제는 통상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교대제인 모양이지만, 형사부 조사1과에 소속되어 있는... 한마디로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이른 바 강력범을 상대하고 있는 시로는 근무시간에 관계없이 나돌아다니고 있다. 그 결과 시로는 수면시간도 적다. 그리고..., 현재 시로와 나는 시로의 침대를 교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시로의 모습은 이미 없다. 한마디로 시로는 나와 피부를 맞대고 잠드는 것이 아마도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무시했다. 본래 인간이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얼마 못 가서 시로가 백기를 들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로는 나날이 초췌해져 가기만 했고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게 된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지친 얼굴을 보는 것은 괴로우니까 말이다. "헤에, 아마노 너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냐? 부모님은? 해외 출장 중이셔?" 신기한 듯이 맨션을 둘러보고 있는 이이지마를 무시하고, 나는 침대 위의 이불을 말아서 끈으로 묶은 후 이이지마를 향해 발로 차서 굴렸다. 이제 오늘밤부터 시로와 침대를 함께 쓰지 않아도 된다. 이젠 시로도 돌아도고 싶을 때 돌아와서 마음 껏 잘 수 있다. 단, 그 좁은 방에 무슨 수로 이불을 두 채나 깔아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더러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형사 월급이란 그렇게 짜단 말인가? "아마노, 이제 뭘 옮길까?" "이제 됐어. 나머지는 처분할거니까." "처분? 하지만 아직 이렇게..." "가자." 머뭇거리는 이이지마를 흘낏 바라본 후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두를 신고 문의 손잡이를 돌린 순간.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이지마." "응?" "너 아까 현관문 잠궜어?" 이이지마가 어깨에 이불을 매고 걸어왔다. "응. 네가 잠그라고 했잖아. 잠그고 확인까지 했는데. 왜?"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나는 평소 문단속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다. 이유는 근 1년동안 집안에서 빈번하게 물건이 없어지곤 했기 때문. 그것도 분실물은 항상 세탁하려고 벗어놓은 팬티다. 너무 기분이 나쁜 나머지 그 후부터 나는 속옷을 벗자마자 세탁하게 되었 다.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베란다에 널어놓은 속옷이 가끔씩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피해신고는 하지 않았다. 경찰에 알렸다가 자칫해서 일이 귀찮게 되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집주인에 게 열쇠를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집에 있을때도 조심하는 버릇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걸음 밖으로 나가서 맨션의 통로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불안이 가슴속에 느껴졌다. "...아마노?" 아무도 없다, 기분 탓이다. 하지만 분명히 열쇠를 잠궜는데도 문은 열려 있다. "왜 그래, 아마노?" "아무것도 아냐. 빨리 가자." 누군가가 잠겨있던 문을 연 것이다. 이이지마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요츠야 3번가에 하차했다. 영감들에게 받아 모은 돈이 300만 정도 남아있으니까 이사차를 불러도 되 지만, 궁핍하게 살고 있는 시로를 생각하면 왠지 돈을 쓰기가 어려웠다. 빨리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아르바이트 비에서 시로에게 조금씩 생활비를 돌려주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치를 부릴 수 없다. 아파트에 도착한 순간, 이이지마가 입을 떡 벌렸다. "굉장하다..." 칭찬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일목요연했다. "이쪽 벽에는 금이 쫙쫙 가 있고, 창문은 없고... 진짜 엄청나다." 좌우 양쪽으로 신사의 부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서 있는 작고 기울어진 3 층 건물. 1층 계단 앞에는 우편함이 다섯 개. 하지만 사용중인 것은 1호실의 시로와 최상층의 수상해 보이는... 아마도 신흥 종교 단체인 듯한 2세대 뿐이다. 1층은 시로의 집뿐이고, 2층과 3층에 2세대씩 집이 있다. 시로의 집이 부엌까지 딸려서 세 평밖에 안 된다는 건만 봐도, 이 건물이 얼 마나 좁고 위험한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히 신경이 무디거나 강심장, 아니면 엄청난 가난뱅이나 담력테스트 를 좋아하는 폐허 매니아(뭐냐, 그게) 가 아니면 아무도 이런 곳에 살지는 않 을 것이다. "여기 정말로 사람이 살 수 있냐?" 이이지마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 무너져 가는 1층의 알루미늄 문을 열쇠로 연 다음 재빨 리 안으로 들어가자. "...아!" 이불 위로 시로의 머리가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시로의 검은 스카이라인은 언제나 신사 뒤에 주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눈 치채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시로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 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불을 향해 다이빙했다. 순간, '꽤액' 하는 찌그러진 개구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로!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는 몸을 동그랗게 움츠린 채 자고 있는 시로의 등을 끌어안고 어깨 너머 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여섯시야, 시로. 이제 그만 일어나." "...으음."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인지, 시로는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왠지 나는 안타까워져서 시로의 가슴에 팔을 둘렀다. 시로는 팬티 한 장 차 림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참으며, 온 몸으로 시로의 체온과 고동을 만끽했다. 나보다 조금 키가 크고 나보다 훨씬 단단한 근육. 어깨에도 팔에도 작은 상 처가 무수하게 나 있었다. 등뒤에서 뺨을 비비자 아무렇게나 난 수염이 따끔 거리며 피부를 찔렀다. 면도를 하라고 몇번이나 충고했건만, 그는 한 번도 내 말을 들어준 적이 없 다. "시로, 일하러 가지 않아도 돼?" "으응...아아." 몸을 뒤척이며 시로의 팔이 나를 안았다. "아...시로?" 시로 이 녀석, 잠이 덜 깼군. 이 기회를 놓칠쏘냐. 나는 시로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려고 한 순간, 일부러 고개를 돌려 시로 의 입술을 빼앗자 시로가 반쯤 눈을 떴다. "안녕, 시로." 입술을 맞춘 채 말하자, 시로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몸을 벌떡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자기가 키스해 놓고 그런 얼굴 하지 마." 시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나?--는 아닐테고... 시로가 턱으로 가리킨 방향을 본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이이지마가 이불을 어깨에 매고 문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이이지마의 존재를 홀랑 까벅고 있었군. 쿨한 이미지로 통하고 있는 내게 실은 엄청 어리광을 부리는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아, 저기... 학원 친구인 이이지마." 아아, 어색해 죽겠네. 시로의 잠든 얼굴을 보고 무심코 이성을 잃고 말았지 뭐냐.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이이지마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땡큐. 도와줘서 고마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이지마는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와 시로에게 달려들었다. "우왓!" 이것은 이이지마 때문에 밀쳐나간 나의 비명. "이 자식, 아마노한테 무슨 짓이야!" 이것은 느닷없이 분노가 폭발한 이이지마의 고함소리. 시로는 뚱한 얼굴로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 더 큰 이이지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후 한 손으로 그의 팔을 꺾고 있었다. "이거 놔! 이 자식이!" "...진정해라.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낮은 목소리가 너무 멋져! "이이지마!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이이지마에게 고함을 쳤다. 나의 시로를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이지마는 멍한 표정이었다. 시로에게 어이없게 당한 것이 어지간 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뭐, 실력과 경험의 차이랄까. "하, 하지만 아마노... 이 녀석이 아마노를 덮치길래..." "덮치긴 누가 덮쳐! 내가 자고 있는 시로를 덮친 거잖아!" 아, 열 받는 바람에 쓸데없는 소릴 해 버리고 말았다. 시로가 팔을 놓아주자, 이이지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미안한 듯이 운동화 를 벗었다. 시로의 사랑하는 침대 위에는 커다란 구둣발자국이 남아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몸을 움츠린 채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는 이이지마의 모습에, 나는 이이지마가 내게 강아지처럼 굴었던 이유를 깨닫고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심 어깨를 떨궜다. 남자끼리의 스킨 쉽을 우정으로서가 아닌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일 만큼 말 이다. "이봐, 이이지마. 시로는... 그러니까 칸자키씨는 형사이고, 일단 내 보호자 대신이야." "형사? 왜 형사가 보호자를...?" 이이지마가 나와 시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우릴 무시하고 있던 시로가 와이셔츠를 걸친 후 담배를 들고 호장 실로 사라졌다. "이이지마, 얘기 한 김에 한가지 더 털어놓자면, 난 저 칸자키 형사한테 반 했어." "----------...뭐?" "나 동성연애자거든." 이이지마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혐오가 아닌, 실연 당했구나 하는 표정이다. 역시 이이지마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왠지 미안한 걸. "나 말야 시로한테 홀딱 반했어." "반...했다구...?" 나는 베갯맡의 재떨이에서 시로가 피었던 담배꽁초를 하나 들고 불을 붙였 다. 연기를 내뿜는 나를, 이이지마는 입을 떡 벌린채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됐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여 기로 쳐들어왔지.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지만..." "하다니...뭐, 뭘?" "뭐냐니. 당연히 사랑의 행위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순간, 시로의 핸드폰이 울렸다. "시로! 전화!" 큰 소리로 불러도, 시로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 나는 방구석에 걸려 있 는 시로의 양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칸자키입니다." [--뭐야, 아마노잖아. 아직도 거기 있었냐.] 뭐야, 무라이 경부잖아. 무라이 경부는 시로의 상사로, 내가 시로에게 홀딱 반해있다는 걸 알고 있 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시로는 아까부터 화장실에서 격투중이야." [격투는 나중에 하고 당장 시부야의 R빌딩으로 오라고 전해. 범인이 그곳 에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OK. 나도 가면 안 될까?" [멍청아, 너는 잠이나 자! 그렇지 않아도 넌 골칫덩이니까!] 무라이가 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어느 샌가 볼일을 마치고 나온 시로가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물고 내 손에 핸 드폰을 낚아챘다. "멋대로 받지 마." "뭐 어때. 그보다 시로, 큰 거 봤으면 손 씼어." 시로는 담배를 끈 후 나를 무시하고 재빨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왠지 여느 때보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아까 덮치는 바람에 화가 난 걸까. 신발을 신는 시로에게, 나는 싹싹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이빨은 닦았어? 세수도 안 했지? 아, 시로, 그 지저분한 수염 깎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깎는 게 훨씬 멋있단 말야. 응? 시로." 제길, 또 무시하고 있군. "시로, 밥은?" "맘대로 아무 거나 사 먹어." 시로가 내게 천엔짜리 지폐 한 장을 거칠게 건넸다. "그게 아니라, 실가 제대로 챙겨 먹었는지 걱정이 돼서..."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이봐, 무라이씨가 장소는 시부야의 R빌딩이라고... 저기, 역시 살인 범?" "너와는 관계없어." "시로..." 알루미늄 도어가 쾅 하고 닫혔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시로의 구식 스카이라인의 엔진소리. "...아마노...?" 이이지마가 나를 부른 것 같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 돌아갈게, 아마노." 이이지마는 현관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신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이 지마 따위는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시로가 사라진 후의 공기로부터 시로의 체취로 변해 있는 말보로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서 움직이고 싶지 앟았기 때문이다. "저기,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말야. 그 칸자키라는 사람 왠지 아마노 를 저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건 나도 안다. "굉장히 차갑잖아. 그 사람..." 시로는 누구한테나 저렇다. 딱히 나한테만 저렇게 대하는 게 아니다. 이이지마는 모르는 것 뿐이다. "아마노가 말을 걸어도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 은 눈으로..." "닥쳐!"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네가 시로에 대해서 뭘 안다 구!" 나는 이이지마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문을 쾅 닫은 후 열쇠를 잠갔다. 이이지마는 한동안 문밖에서 서 있다가 이윽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까까지 시로가 자고 있던 이불에 들어가 아직 조금 남아있는 시로 의 온기를 더듬었다. 미움 받는 것도 차갑게 대하는 것도, 부모님 덕분에 익숙해져 있다. 딱히 이제 와서 괴롭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되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3 다음날 시로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귀가거부까지 당해버리고 만 것 같다. 나는 시로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 끈질김에는 넌더 리가 난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이렇지 않았다. 남자에게 매달린 적고 없거니 와 울고불고 한 적도 없었다. 남자 따윈 이용하고 나서 버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내가 누군가에 게 집착하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참하군. [여보세요.] "켁!" 깜짝 놀랐다. 시로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범인 추적 중에 벨이 울리지 않도 록, 시로는 일하는 중에는 대체로 핸드폰 전원을 꺼놓고 있다. 용건이 있을때 는 경찰로 전화를 걸면 교환수가 시로의 무선으로 연결해 준다. 하지만 사적인 용건 때문에 무선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시로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넣어두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웬일이야. 시로가 전화를 받다니. 어~이, 살아있어?" [...무슨 일이냐?] 무뚝뚝하고 기분 나쁜 듯한 목소리. 나는 지지 않고 밝게 대답했다. "아침 일찍 까지 일하느라 수고! 나 말야, 오늘 시험이라 오전에 끝나거든. 끝나면 그 쪽으로 가도 돼? 점심이라고 같이..." 하지만 애써 명랑한 척 하는 것도 거기서 끝이었다. "먹는 게... 어떨 까 해서..." 웃는 얼굴은 여기까지가 한계. "--방해해서 미안. 안녕." 나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후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8시 5분, 빨리 나가지 않으면 지각이다. 오늘도 완벽하게 우등생 역을 연기하고 그리고...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귓속에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목소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 오던 여자의 격렬한 신음소리가... "시로도 역시 평범한 남자였구나." 불쾌한 생각은 하지마.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마. 신경 쓰지마.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면서 전화를 받다니. 그 바보."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시로에게는 나를 돌봐줄 의부는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시로는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하겠지. "이사하는 거 도와줄까?"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이지마가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젠 나를 짐도 없어." 내가 대답하자, 이이지마는 더더욱 복잡한 표정으로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어제는 미안." "뭐가." "어쨌든 미안!" 나는 사과의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과할거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 으면 되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인간이란 살아있으면 누군가에게 어떤 실으로든 폐를 끼치게 되는 법이다. 나도 시로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너무나도 많지만... 하지만 사과 하는 것은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인정해 버리면 모르는 척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무서워서 사과할 수 없다. "저, 저기 말야, 어제 너희 집에 갔더니 CD가 잔뜩 있던데. 그거 보여주지 않을래?" "...맘에 드는게 있으면 줄 테니까 가서 맘대로 집어 가." "아마노 너도 같이 가자. 응?" 나를 들여다보는 이이지마의 얼굴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왠지 그의 마음은 지금 내 심정과 비슷한 상태인 모양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까. 아니면 내가 구원받고 싶으니까 누군가를 구해주려 하고 있는 것 뿐일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만들어서 슬픔 따윈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 이런 걸 현실도피 의존증... 이라고 한다던가. 맨션에 도착하자, 이이지마는 재빨리 오디오 앞에 앉아서 정말로 CD를 물 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이지마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실 소파에 앉아, 그의 넓은 등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집이 무서워서 친구를 부를 수 없었고, 부모님이 실종된 후에는 한밤중까지 놀러 다녔기 때문에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놓아두는 곳이었다. "이이지마." 말을 걸자, 이이지마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덩치에 좀 노는 것처럼 보이 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인 모양이다. "이이지마, 어제 여자한테서 고백을 받았다며?" 이이지마의 뺨이 확 붉어졌다. 순진한 녀석, 나는 그 모습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좋아하는 녀석이 있다고 거절했다면서? 여자애들이 수근거리더라." "수근거려...?" "이이지마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누구냐고." 이이지마의 긴장이 공기를 통해 전해져왔다. 나는 셔츠 버튼을 풀며 완만한 동작으로 소파에 누웠다. 이이지마의 당혹스 러운 시선이 내 손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이지마..." "왜 왜...?" "이이지마 너 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지?" 이유따윈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어제 나는 이이지마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먼저 일러준 것이다. 날 좋아해도 소용없다고. 하지만 내가 불행할때는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 들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나란 녀석은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이이지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 "나, 나는!" 이이지마가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뭘 흥분하는 거야? 그래서야 누가 봐도 들켜버릴걸?" 나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셔츠를 벗었다. 이이지마가 진심인지 아닌지 시험 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라면 한번쯤은 같이 놀아줘도 좋으니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불을 껐다.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 오디오의 파워 램프만이 붉고 격렬하게 깜빡거리고 있다. 딱 알맞은 어둠에 감싸여 무드는 만점. 나는 이이지마의 등뒤에 섰다. 이이지마가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틱코리 아의 [인사이드 아웃] 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이지마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녀석이 손을 뻗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녀석의 정면에서 가슴과 배를 어 루만지며 음악에 안기듯이 몸을 뒤튼다. 이이지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이이지마가 뭔가를 얘기했다. 들리지 않아--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지 지퍼를 열고 검은 비키니 브리프 위로 몸의 중심을 손으로 감싼 후 리듬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이지마는 당황하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뭐야, 니 녀석. 설마 동정인가? 나는 계속해서 두 손으로 몸을 애무했다. 그리고는 이이지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자." 이이지마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나, 날 좋아하지 않는 녀석과 그, 그런짓을 할 수는 없어!" 뭐야. 평범한 녀석들은 그런 일에 집착한단 말인가?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심리로군. "뭐 어때? 하고 싶지?" 그러니까 하자. 즐기는 거니가 서로 솔직해 지자구. "난 하고 싶어, 이이지마와." 이이지마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안아달라고 울고 있단 말이야--" 이이지마는 큰 소리로 외치며 나를 안았다. 틀림없이 쾌감을 느낄만한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줄곧 큰 소 리로 외치고 있었다. "난 계속 아마노 네가 좋았어! 하지만 이럴 생각은 없었어! 난 그냥 아마노 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그래서--!" "시끄러워! 닥쳐!" "미, 미안!" 이렇게 절규를 하며 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이래서야 날 기분 좋게 해 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아아, 팔꿈치와 무릎이 아프다... "웃, 우웃! 우아아아아!" ------------겨우, 끝났냐. 빌어먹을... 이이지마는 부들부들 떨며 땀으로 뒤범벅된 몸으로 내 등에 쓰러졌다. 첫 경험이라 긴장했던 것일까? 이이지마가 내 등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이이지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왔 다. "아마노는...? 기분 좋았어?" 달성감 때문일까, 겨우 나를 걱정해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좋았어. 안심해라."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미 새의 심정이다. 뭐든지 첫 한 걸음이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나 굉장히 감동했어, 나츠키..." 한 번 했다고 이제 [나츠키]냐. 내가 코웃음을 치자, 이이지마는 어깨 너머 얼굴을 가까이 댔다. "키스는 안돼." 고개를 돌리자, 이이지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섹스 정.도.는. 상관없지만 키스까.지.는 안돼." 말하자면 키스는 내 마지막 요새다. 내게 있어서 섹스는 컨디션 유지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필요하지만, 키스 는 특별. 입술은 자존심의 문제다. "어째서. 키스하자, 나츠키." 이이지마는 내 턱을 잡고 억지로 입술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의 급소에 주먹을 날려주곤 한다. "쿠엑...!" 불쌍한 이이지마. 단 일격에 돌덩이가 되고 말았군. 가랑이를 움켜잡으며 몸을 동그랗게 움츠리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이이지마 의 팔에서 도망친 후, 난 샤워 룸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한번 할 때마다 자양강장제 1병분의 효력을 발휘해 주었다. 남 자들이 내 테크닉의 포로가 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무적이 된 듯해 서 마음도 몸도 고양되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묘하다. "뭐 어때. 시로도 아침부터 여자를 안고 있잖아. 이제와서 내가 누구랑 자건 무슨 상관이냐구!" 빌어먹을! 홧김에 이이지마를 유혹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정말로 뭔가가 무너졌다. 시로가--그 무뚝뚝한 칸자키 시로가 여자를 안고 있다니, 내가 아무리 유 혹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주제에! 게다가 전화를 받았을 때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했다. 흥분 해 있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배설행위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단 말인가. 좋아하지도 않 는 여자를 상대로... "그럼 나라도 상관없잖아!" 어제 나한테 키스했던 주제에! "빌어먹을!" 홧김에 샤워를 있는 힘껏 틀었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이이지마! 너도 빨리 샤워 해! 빨리 돌아가자!" 대답은 없었다. 이이지마 녀석, 아직 나한테 맞은 곳이 아파서 끙끙거리고 있나. 나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거실 문을 발로 열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이이지..." 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것이 확실하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발을 적시고 있는 액체가 내 몸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아 닌, 좀더 짙고 비릿한 대량의 혈액이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이...이지마...?"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이지마는 엎드려 누운 채 죽어 있었다. 이이지마의 등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 다. 1 일본법률 168호, 제1장 1조에는 법시행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비행 청소년에 대해서는 성격의 교정 및 환경의 조정에 관한 보호처분을 행함과 동시에... 라고 . 뒤는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든 한마 디로 청소년이란 좋건 싫건 나라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애기다. 법률상 만 20세가 되자 않은 자를 총칭 청소년이라고 부르며, 9월 13일 현 재 만으로 19세인 나 나츠키는 당연히 이 법률에 따라 건전하고 평안한 삶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치만 시로." 나는 법률전서를 한 손에 들고 이불을 가볍게 걷어찼다. 지금 시각은 8:00AM. 하루는 이미 시작되어 있건만, 내 보호자는 밤새 일을 하다 이제 막 자리에 누웠다. 보호자라곤 해도 시로와 나는 새빨간 남이다. 내가 경시청 조사1과의 형사 칸자키 시로와 만난 것은 2주일 전 신주쿠에서 일어난 연속 살인 사건이 계기로, 처음에는 내가 살인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 었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지만, 시로의 첫인상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태도도 위 압적이고 눈초리도 험악하고. 빗질도 안한 머리에 아무렇게나 난 수염, 꼬깃 꼬깃한 검은 양복에 촌스러운 넥타이, 게다가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워 무는, 단순한 니코틴 중독자--그것이 시로의 첫 인상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단 하루만에 시로의 이미지를 철회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과 용맹한 늑대의 발톱을 지닌 시로는, 그 강인한 심장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상냥함을 숨기고 있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흉악범과 싸워 준 칸자키 시로. 게다가... 호흡정지에 빠진 내게 마우스 투 마우스로 인공호흡까지 해 줬었 다. 그 후 나는 완전히 시로한테 반해서, 이곳 요츠야 신사 뒤에 위치한 붕괴작 전인 시로의 아파트로 쳐들어왔다. 물론 시로에게는 민폐스러운 얘기일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남자들은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지곤 했다. 포 로가 되곤 했다. 안겨주지만 하면 100만 엔을 내겠다는 둥, 죽어도 좋다는 둥, 간단하게 돈과 자존심을 내던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일절 없다. 카스는 했지만, 그것은 내가 시로의 빈틈을 노린 것일 뿐 시로가 적극적으 로 한 것이 아니다. 한 번쯤 그와 몸.과. 몸.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슬프게 도 시로는 100% 노말이라 설령 눈 속에서 조난 당한다 해도 남자를 상대로 뭘 어쩌진 않을 것이다. 나는 법률전서를 펼치며 시로의 몸 위에 올라탔다. 법률전서는 내년 경찰청 채용시험을 목표로 하고 있는, 내 애독서로 변해있 다. 내 장래의 꿈은 조사1과의 형사가 되는 것. 그래서 시로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다. 아아, 나란 녀석은 어쩜 이렇게 기특한 것일까. "시로. 내 성격의 교정과 환경의 조정을 현역 형사인 칸자키 시로가 맡아주 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하지만 스무살 미만이 어린애라니 말도 안돼. 고등학교도 이미 졸업했는데!! 어른과 아이의 구별에 연령따윈 상관없다구. 그치, 시로?" 시로가 이불을 내리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츠키." "왜 그래? 졸려?" "...이봐, 나츠키." "왜?" "빨리 학원에 가." "그럼 다녀오세요 앤드 굿나잇 키스."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가까이 대자, 시로는 낮게 신음하며 이불을 뒤집어썼 다. ...쳇. 나는 시로의 허리 부근을 발로 꾹꾹 밟은 후 재빨리 현관으로 가서 운동화를 신었다. "나 오늘은 좀 늦게 돌아 올 거야. 이상한 데서 자고 오려는 건 아니니까 걱 정 마!" 시로 녀석, 대답도 안 하는군. 하지만 대답이야 늘상 안 하기때문에 나는 신 경 쓰지 않고 덧붙였다. "가스 렌지위에 있는 냄비속에 삶은 계란이 있으니까 배고프면 먹어! 그럼 잘 자!" 하도 낡아서 떨어져나가기 일보직전인 알루미늄 도어를 소용없다는 걸 알 면서도 일단 열쇠로 잠갔다.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겠다. 내 이름은 아마노 나츠키, 내년에 경찰시험을 보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 다. 외모는 약간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야생 고양이같은 날렵한 얼굴과 흑 표 범의 탄력을 겸비한 팔다리에는 절대적인 자신을 지니고 있다. 이 완벽한 외 모덕분에 모두들 나를 어려워해서 다들 두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내 본성을 알고 있는 녀석은 한 사람도 없다. 나의 어두운 과거따윈, 틀림없이 상상조차 못하고들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고교 3년 간 매일 밤 새 아버지에게 당했던 과거라던가, 질투에 미친 어머니가 날 목 졸라 죽이려 했던 과거라던가, 결국 부모님은 나를 맨션 에 남겨둔 채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던가. 하지만 나의 비밀은 그것뿐이 아니다. 생활자금이 끊긴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 단락적인 사고라고 바보취급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평범한 아르바이트란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방 두 개 짜리 전세 맨션을 내놓고 아파트로 옮기고 싶어도, 보증인이 없으 면 이사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첫 손님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두운 공원 한구석에서, 다섯 명의 남자들에게 당했기 때문에... 아니, 합 의하에 한 짓이라고 정정하자. 나는 녀석들로부터 만 엔 씩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 후로, 하룻밤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장사에 맛이 들려, 나는 신주쿠 2번가 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새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안겼던 덕분에, 그리 큰 아픔도 저항도 없이 나는 남자들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새 아버지에게 당했을 때부터 내 인생은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내 비밀 병기의 희소가치에, 남자들은 차츰 서로 나를 안으 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루트]라는 쇼트 바를 거점으로 장사를 하며 돈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 다. 그리고 [같은 남자와는 두 번 다시 자지 않는다]를 모토로 부자 전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사건만 없었던들... 루트의 마스터가 내게 집착한 나머지 네 명이나 되는 손님을 살해하는 사건 만 없었던들, 나는 지금도 영감들을 상대로 몸을 팔고 있었을 것이다. 비참함 인생이라고 동정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나는 그 사건 덕분에 시로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운이 좋은 거라고, 지금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있다. 2 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적의 강인함을 자랑하며, 불량 그룹들도 피 해간다는 이이지마 타츠야다. "아마노! 어이, 아마노 나츠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 앞에 자전거를 급정차한 이이지마는, 짧은 머리에 땀 을 빛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었다. 이 녀석은 매일 아침 이렇게 내 앞에 등장한다. "안녕, 아마노." "--------안녕." 이이지마는 강아지처럼 붙임성 있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누구 에게나 이렇게 귀엽게 구는 것이 아니다. 이 강아지 같은 눈은 내 전용 아이 템인 모양이다. "다행이다. 오늘 아침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뭐야, 그게?!" 나는 이이지마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재빨리 건물을 향해 걸었다. 이이지마 는 나와 같은 과목을 들은 후로 반년간, 거의 매일 아침 이런 분위기다. 남자 에게는 무뚝뚝하기로 유명하건만, 나한테만은 기분 나쁠 만큼 상냥한 표정을 짓곤 한다. 본인은 자신이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 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이지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딱히 싫은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하는 게 어려울 뿐이다. 이이지마뿐만 아니라 같은 또래 녀석들 모 두가 말이다. 게임이나 여자 아이돌에 전혀 흥미가 없는 나는, 당연히 녀석들과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참한 과거나 환경 때문에 어디까지 녀석들과 가까 워져도 괜찮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게 두려워서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딱 히 매춘을 했던 것은 들켜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주위에서 성가시게 굴 테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생각이다. 남창의 세계에서 발을 씻은 지금 내가 제대로 얘기를 나누는 상대는 시로 한사람뿐이다. (물론 시로는 상대해 주지 않지만) 시로는 27세치고 꽤나 과묵하고 침착하다. 척 보기에는 34,5세 정도로 보 이지만, 시로가 일단 수염을 깎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더블 슈트라도 입 는 날에는, 전 일본의 수(受)들이 침을 흘리며 흥분할 만큼 [수컷]이 된다. 차가운 분위기에 눈빛도 날카롭고 말수도 적고, 남자의 페르몬을 마구 풍기 며--아,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군. 위험해, 위험해. 어, 어쨌든 시로는 보기 드문 진짜 남자라고, 나는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다. 얘기가 딴 길로 새어 버렸군.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평판을 알려주겠다. [두뇌명석. 운동신경발군. 쿨하고 말수 적은 초 미남, 키무라 타쿠야도 맨발 벗고 도망갈 약간 불량스러운 나이스 가이] 라는게 나에 대한 평판이다. 시로가 들으면 틀림없이 코웃음을 칠 테지만 말이다. 이이지마는 주차장에 자전거를 던져놓고 신발장 앞으로 나를 쫓아왔다. 이 렇게 나란히 서면 키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는 마른 형에 키는 약 170센티 가량, 하지만 이이지마는 와일드한 체격에 190센티가 넘는다. "아마노, 너희 집 전화 고장났냐?" 너무나도 느닷없는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이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너희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은 번호입니다' 라 는 메시지만 나오더라구." "무슨 일인데?" "뭐?" 이이지마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내 말의 의미를 해설해 줬다. "그러니까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었냐고." 실내와로 갈아 신고 복도를 걷기 시작한 나를, 이이지마는 충견처럼 쫄래쫄 래 따라왔다. 나와 이이지마의 주종관계를 여자애들은 재미있어 하며 바라보고 있다. 이젠 익숙해지긴 했지만, 가끔은 이이지마가 몹시 귀찮게 느껴지곤 한다. "저기 말야, 친구가 밴드를 하고 있거든. 밤 7시부터 죠지에서 라이브를 하 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미안. 바빠." 나는 강의실로 들어가 창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안녕, 나츠키군~' 이라는 여자들의 환호성을 여느 때처럼 무시하자 이이지 마가 나 대신 손을 흔들어 준다. 이 녀석, 여자들한테는 엄청 싹싹하군. "반년간 줄곧 바쁘구나, 아마노는." 이이지마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같이 놀러가자고 해도 한 번도 OK를 해 주지 않네. 설마 바쁘다는 건 날 거절하기 위한 구실?"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그걸 깨달았냐? "어쨌든 난 못 가." "어째서?" "그러니까..." 아아, 귀찮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이이지마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이 지마는 내가 반응을 한 것 자체가 기쁜지 안 어울리게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 지처럼 눈동자를 빛낸다. "오늘은 이사를 해야 하거든." 그러자 이이지마는 깜짝 놀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사?! 어디로 이사가는데? 설마 학원을 옮기는 건 아니겠지? 어째서 갑자 기 이사를 가는 건데? 어디로 가는 거야?" "뭐! 아마노군이 이사를?!" "말도 안돼! 너무해. 앞으로 아마노군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다니~!" 나와 이이지마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떠들어대 기 시작했다. ...어휴,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학원 같은 건 안 옮겨. 근처로 옮기는 것 뿐이야."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나는 책을 거칠게 펼쳤다. 불쾌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순간 모두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럴 땐 특별취급 받는 게 좋군. 제멋대로에 건방지게 굴어도 아무도 뭐라 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은 잔당이 약 1명. "아직 무슨 볼일이 남았나?" 내 불쾌한 목소리에도 굽히지 않고, 이이지마는 잠자코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것도 이번에는 비 오는 날 버림받은 강아지같은 얼굴이다. "미안하지만 라이브 같은 건 흥미 없는데다가 정말로 바빠." "...어디로 이사가는 건데?" 이이지마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버림받은 강아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실은 나 지금 아는 사람 집에 얹혀 살고 있어. 그래서 집에 남아있는 짐을 빨리 그 쪽으로 옮기고 싶거든."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다. 이봐,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 가라구. "그럼 내가 도와줄게!" 그 희희낙락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이지마가 재빨리 몸 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르는 편이 빠르잖아. 힘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어. 좋아, 결정했다!" 그리고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이지마는 의기양양하가ㅔ 자신의 자 리로 돌아갔다. "뭐야, 저 녀석..."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로군. ...뭐, 할 수 없지. 내가 이사를 서두르는 것은 짐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로의 집은 정말로 좁아서 어차피 짐 같은 건 거의 놓아 둘 수 없다. 하지 만 이불만은 별개다. 어째서냐구? 시로 녀석이 매일 밤 심야근무를 하고 있 기 때문이다. 심야근무의 기본체제는 통상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교대제인 모양이지만, 형사부 조사1과에 소속되어 있는... 한마디로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이른 바 강력범을 상대하고 있는 시로는 근무시간에 관계없이 나돌아다니고 있다. 그 결과 시로는 수면시간도 적다. 그리고..., 현재 시로와 나는 시로의 침대를 교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시로의 모습은 이미 없다. 한마디로 시로는 나와 피부를 맞대고 잠드는 것이 아마도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무시했다. 본래 인간이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얼마 못 가서 시로가 백기를 들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로는 나날이 초췌해져 가기만 했고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게 된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지친 얼굴을 보는 것은 괴로우니까 말이다. "헤에, 아마노 너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냐? 부모님은? 해외 출장 중이셔?" 신기한 듯이 맨션을 둘러보고 있는 이이지마를 무시하고, 나는 침대 위의 이불을 말아서 끈으로 묶은 후 이이지마를 향해 발로 차서 굴렸다. 이제 오늘밤부터 시로와 침대를 함께 쓰지 않아도 된다. 이젠 시로도 돌아도고 싶을 때 돌아와서 마음 껏 잘 수 있다. 단, 그 좁은 방에 무슨 수로 이불을 두 채나 깔아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더러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형사 월급이란 그렇게 짜단 말인가? "아마노, 이제 뭘 옮길까?" "이제 됐어. 나머지는 처분할거니까." "처분? 하지만 아직 이렇게..." "가자." 머뭇거리는 이이지마를 흘낏 바라본 후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두를 신고 문의 손잡이를 돌린 순간.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이지마." "응?" "너 아까 현관문 잠궜어?" 이이지마가 어깨에 이불을 매고 걸어왔다. "응. 네가 잠그라고 했잖아. 잠그고 확인까지 했는데. 왜?"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나는 평소 문단속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다. 이유는 근 1년동안 집안에서 빈번하게 물건이 없어지곤 했기 때문. 그것도 분실물은 항상 세탁하려고 벗어놓은 팬티다. 너무 기분이 나쁜 나머지 그 후부터 나는 속옷을 벗자마자 세탁하게 되었 다.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베란다에 널어놓은 속옷이 가끔씩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피해신고는 하지 않았다. 경찰에 알렸다가 자칫해서 일이 귀찮게 되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집주인에 게 열쇠를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집에 있을때도 조심하는 버릇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걸음 밖으로 나가서 맨션의 통로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불안이 가슴속에 느껴졌다. "...아마노?" 아무도 없다, 기분 탓이다. 하지만 분명히 열쇠를 잠궜는데도 문은 열려 있다. "왜 그래, 아마노?" "아무것도 아냐. 빨리 가자." 누군가가 잠겨있던 문을 연 것이다. 이이지마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요츠야 3번가에 하차했다. 영감들에게 받아 모은 돈이 300만 정도 남아있으니까 이사차를 불러도 되 지만, 궁핍하게 살고 있는 시로를 생각하면 왠지 돈을 쓰기가 어려웠다. 빨리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아르바이트 비에서 시로에게 조금씩 생활비를 돌려주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치를 부릴 수 없다. 아파트에 도착한 순간, 이이지마가 입을 떡 벌렸다. "굉장하다..." 칭찬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일목요연했다. "이쪽 벽에는 금이 쫙쫙 가 있고, 창문은 없고... 진짜 엄청나다." 좌우 양쪽으로 신사의 부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서 있는 작고 기울어진 3 층 건물. 1층 계단 앞에는 우편함이 다섯 개. 하지만 사용중인 것은 1호실의 시로와 최상층의 수상해 보이는... 아마도 신흥 종교 단체인 듯한 2세대 뿐이다. 1층은 시로의 집뿐이고, 2층과 3층에 2세대씩 집이 있다. 시로의 집이 부엌까지 딸려서 세 평밖에 안 된다는 건만 봐도, 이 건물이 얼 마나 좁고 위험한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히 신경이 무디거나 강심장, 아니면 엄청난 가난뱅이나 담력테스트 를 좋아하는 폐허 매니아(뭐냐, 그게) 가 아니면 아무도 이런 곳에 살지는 않 을 것이다. "여기 정말로 사람이 살 수 있냐?" 이이지마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 무너져 가는 1층의 알루미늄 문을 열쇠로 연 다음 재빨 리 안으로 들어가자. "...아!" 이불 위로 시로의 머리가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시로의 검은 스카이라인은 언제나 신사 뒤에 주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눈 치채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시로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 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불을 향해 다이빙했다. 순간, '꽤액' 하는 찌그러진 개구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로!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는 몸을 동그랗게 움츠린 채 자고 있는 시로의 등을 끌어안고 어깨 너머 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여섯시야, 시로. 이제 그만 일어나." "...으음."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인지, 시로는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왠지 나는 안타까워져서 시로의 가슴에 팔을 둘렀다. 시로는 팬티 한 장 차 림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참으며, 온 몸으로 시로의 체온과 고동을 만끽했다. 나보다 조금 키가 크고 나보다 훨씬 단단한 근육. 어깨에도 팔에도 작은 상 처가 무수하게 나 있었다. 등뒤에서 뺨을 비비자 아무렇게나 난 수염이 따끔 거리며 피부를 찔렀다. 면도를 하라고 몇번이나 충고했건만, 그는 한 번도 내 말을 들어준 적이 없 다. "시로, 일하러 가지 않아도 돼?" "으응...아아." 몸을 뒤척이며 시로의 팔이 나를 안았다. "아...시로?" 시로 이 녀석, 잠이 덜 깼군. 이 기회를 놓칠쏘냐. 나는 시로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려고 한 순간, 일부러 고개를 돌려 시로 의 입술을 빼앗자 시로가 반쯤 눈을 떴다. "안녕, 시로." 입술을 맞춘 채 말하자, 시로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몸을 벌떡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자기가 키스해 놓고 그런 얼굴 하지 마." 시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나?--는 아닐테고... 시로가 턱으로 가리킨 방향을 본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이이지마가 이불을 어깨에 매고 문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이이지마의 존재를 홀랑 까벅고 있었군. 쿨한 이미지로 통하고 있는 내게 실은 엄청 어리광을 부리는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아, 저기... 학원 친구인 이이지마." 아아, 어색해 죽겠네. 시로의 잠든 얼굴을 보고 무심코 이성을 잃고 말았지 뭐냐.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이이지마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땡큐. 도와줘서 고마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이지마는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와 시로에게 달려들었다. "우왓!" 이것은 이이지마 때문에 밀쳐나간 나의 비명. "이 자식, 아마노한테 무슨 짓이야!" 이것은 느닷없이 분노가 폭발한 이이지마의 고함소리. 시로는 뚱한 얼굴로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 더 큰 이이지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후 한 손으로 그의 팔을 꺾고 있었다. "이거 놔! 이 자식이!" "...진정해라.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낮은 목소리가 너무 멋져! "이이지마!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이이지마에게 고함을 쳤다. 나의 시로를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이지마는 멍한 표정이었다. 시로에게 어이없게 당한 것이 어지간 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뭐, 실력과 경험의 차이랄까. "하, 하지만 아마노... 이 녀석이 아마노를 덮치길래..." "덮치긴 누가 덮쳐! 내가 자고 있는 시로를 덮친 거잖아!" 아, 열 받는 바람에 쓸데없는 소릴 해 버리고 말았다. 시로가 팔을 놓아주자, 이이지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미안한 듯이 운동화 를 벗었다. 시로의 사랑하는 침대 위에는 커다란 구둣발자국이 남아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몸을 움츠린 채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는 이이지마의 모습에, 나는 이이지마가 내게 강아지처럼 굴었던 이유를 깨닫고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심 어깨를 떨궜다. 남자끼리의 스킨 쉽을 우정으로서가 아닌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일 만큼 말 이다. "이봐, 이이지마. 시로는... 그러니까 칸자키씨는 형사이고, 일단 내 보호자 대신이야." "형사? 왜 형사가 보호자를...?" 이이지마가 나와 시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우릴 무시하고 있던 시로가 와이셔츠를 걸친 후 담배를 들고 호장 실로 사라졌다. "이이지마, 얘기 한 김에 한가지 더 털어놓자면, 난 저 칸자키 형사한테 반 했어." "----------...뭐?" "나 동성연애자거든." 이이지마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혐오가 아닌, 실연 당했구나 하는 표정이다. 역시 이이지마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왠지 미안한 걸. "나 말야 시로한테 홀딱 반했어." "반...했다구...?" 나는 베갯맡의 재떨이에서 시로가 피었던 담배꽁초를 하나 들고 불을 붙였 다. 연기를 내뿜는 나를, 이이지마는 입을 떡 벌린채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됐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여 기로 쳐들어왔지.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지만..." "하다니...뭐, 뭘?" "뭐냐니. 당연히 사랑의 행위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순간, 시로의 핸드폰이 울렸다. "시로! 전화!" 큰 소리로 불러도, 시로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 나는 방구석에 걸려 있 는 시로의 양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칸자키입니다." [--뭐야, 아마노잖아. 아직도 거기 있었냐.] 뭐야, 무라이 경부잖아. 무라이 경부는 시로의 상사로, 내가 시로에게 홀딱 반해있다는 걸 알고 있 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시로는 아까부터 화장실에서 격투중이야." [격투는 나중에 하고 당장 시부야의 R빌딩으로 오라고 전해. 범인이 그곳 에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OK. 나도 가면 안 될까?" [멍청아, 너는 잠이나 자! 그렇지 않아도 넌 골칫덩이니까!] 무라이가 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어느 샌가 볼일을 마치고 나온 시로가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물고 내 손에 핸 드폰을 낚아챘다. "멋대로 받지 마." "뭐 어때. 그보다 시로, 큰 거 봤으면 손 씼어." 시로는 담배를 끈 후 나를 무시하고 재빨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왠지 여느 때보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아까 덮치는 바람에 화가 난 걸까. 신발을 신는 시로에게, 나는 싹싹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이빨은 닦았어? 세수도 안 했지? 아, 시로, 그 지저분한 수염 깎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깎는 게 훨씬 멋있단 말야. 응? 시로." 제길, 또 무시하고 있군. "시로, 밥은?" "맘대로 아무 거나 사 먹어." 시로가 내게 천엔짜리 지폐 한 장을 거칠게 건넸다. "그게 아니라, 실가 제대로 챙겨 먹었는지 걱정이 돼서..."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이봐, 무라이씨가 장소는 시부야의 R빌딩이라고... 저기, 역시 살인 범?" "너와는 관계없어." "시로..." 알루미늄 도어가 쾅 하고 닫혔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시로의 구식 스카이라인의 엔진소리. "...아마노...?" 이이지마가 나를 부른 것 같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 돌아갈게, 아마노." 이이지마는 현관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신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이 지마 따위는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시로가 사라진 후의 공기로부터 시로의 체취로 변해 있는 말보로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서 움직이고 싶지 앟았기 때문이다. "저기,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말야. 그 칸자키라는 사람 왠지 아마노 를 저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건 나도 안다. "굉장히 차갑잖아. 그 사람..." 시로는 누구한테나 저렇다. 딱히 나한테만 저렇게 대하는 게 아니다. 이이지마는 모르는 것 뿐이다. "아마노가 말을 걸어도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 은 눈으로..." "닥쳐!"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네가 시로에 대해서 뭘 안다 구!" 나는 이이지마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문을 쾅 닫은 후 열쇠를 잠갔다. 이이지마는 한동안 문밖에서 서 있다가 이윽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까까지 시로가 자고 있던 이불에 들어가 아직 조금 남아있는 시로 의 온기를 더듬었다. 미움 받는 것도 차갑게 대하는 것도, 부모님 덕분에 익숙해져 있다. 딱히 이제 와서 괴롭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되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3 다음날 시로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귀가거부까지 당해버리고 만 것 같다. 나는 시로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 끈질김에는 넌더 리가 난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이렇지 않았다. 남자에게 매달린 적고 없거니 와 울고불고 한 적도 없었다. 남자 따윈 이용하고 나서 버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내가 누군가에 게 집착하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참하군. [여보세요.] "켁!" 깜짝 놀랐다. 시로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범인 추적 중에 벨이 울리지 않도 록, 시로는 일하는 중에는 대체로 핸드폰 전원을 꺼놓고 있다. 용건이 있을때 는 경찰로 전화를 걸면 교환수가 시로의 무선으로 연결해 준다. 하지만 사적인 용건 때문에 무선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시로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넣어두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웬일이야. 시로가 전화를 받다니. 어~이, 살아있어?" [...무슨 일이냐?] 무뚝뚝하고 기분 나쁜 듯한 목소리. 나는 지지 않고 밝게 대답했다. "아침 일찍 까지 일하느라 수고! 나 말야, 오늘 시험이라 오전에 끝나거든. 끝나면 그 쪽으로 가도 돼? 점심이라고 같이..." 하지만 애써 명랑한 척 하는 것도 거기서 끝이었다. "먹는 게... 어떨 까 해서..." 웃는 얼굴은 여기까지가 한계. "--방해해서 미안. 안녕." 나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후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8시 5분, 빨리 나가지 않으면 지각이다. 오늘도 완벽하게 우등생 역을 연기하고 그리고...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귓속에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목소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 오던 여자의 격렬한 신음소리가... "시로도 역시 평범한 남자였구나." 불쾌한 생각은 하지마.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마. 신경 쓰지마.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면서 전화를 받다니. 그 바보."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시로에게는 나를 돌봐줄 의부는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시로는 속이 시원하다며 좋아하겠지. "이사하는 거 도와줄까?"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이지마가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젠 나를 짐도 없어." 내가 대답하자, 이이지마는 더더욱 복잡한 표정으로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어제는 미안." "뭐가." "어쨌든 미안!" 나는 사과의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과할거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 으면 되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인간이란 살아있으면 누군가에게 어떤 실으로든 폐를 끼치게 되는 법이다. 나도 시로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너무나도 많지만... 하지만 사과 하는 것은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인정해 버리면 모르는 척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무서워서 사과할 수 없다. "저, 저기 말야, 어제 너희 집에 갔더니 CD가 잔뜩 있던데. 그거 보여주지 않을래?" "...맘에 드는게 있으면 줄 테니까 가서 맘대로 집어 가." "아마노 너도 같이 가자. 응?" 나를 들여다보는 이이지마의 얼굴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왠지 그의 마음은 지금 내 심정과 비슷한 상태인 모양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까. 아니면 내가 구원받고 싶으니까 누군가를 구해주려 하고 있는 것 뿐일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만들어서 슬픔 따윈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 이런 걸 현실도피 의존증... 이라고 한다던가. 맨션에 도착하자, 이이지마는 재빨리 오디오 앞에 앉아서 정말로 CD를 물 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이지마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실 소파에 앉아, 그의 넓은 등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집이 무서워서 친구를 부를 수 없었고, 부모님이 실종된 후에는 한밤중까지 놀러 다녔기 때문에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놓아두는 곳이었다. "이이지마." 말을 걸자, 이이지마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덩치에 좀 노는 것처럼 보이 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인 모양이다. "이이지마, 어제 여자한테서 고백을 받았다며?" 이이지마의 뺨이 확 붉어졌다. 순진한 녀석, 나는 그 모습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좋아하는 녀석이 있다고 거절했다면서? 여자애들이 수근거리더라." "수근거려...?" "이이지마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누구냐고." 이이지마의 긴장이 공기를 통해 전해져왔다. 나는 셔츠 버튼을 풀며 완만한 동작으로 소파에 누웠다. 이이지마의 당혹스 러운 시선이 내 손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이지마..." "왜 왜...?" "이이지마 너 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지?" 이유따윈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어제 나는 이이지마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먼저 일러준 것이다. 날 좋아해도 소용없다고. 하지만 내가 불행할때는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 들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나란 녀석은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이이지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 "나, 나는!" 이이지마가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뭘 흥분하는 거야? 그래서야 누가 봐도 들켜버릴걸?" 나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셔츠를 벗었다. 이이지마가 진심인지 아닌지 시험 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라면 한번쯤은 같이 놀아줘도 좋으니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불을 껐다.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 오디오의 파워 램프만이 붉고 격렬하게 깜빡거리고 있다. 딱 알맞은 어둠에 감싸여 무드는 만점. 나는 이이지마의 등뒤에 섰다. 이이지마가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틱코리 아의 [인사이드 아웃] 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이지마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녀석이 손을 뻗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녀석의 정면에서 가슴과 배를 어 루만지며 음악에 안기듯이 몸을 뒤튼다. 이이지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이이지마가 뭔가를 얘기했다. 들리지 않아--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지 지퍼를 열고 검은 비키니 브리프 위로 몸의 중심을 손으로 감싼 후 리듬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이지마는 당황하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뭐야, 니 녀석. 설마 동정인가? 나는 계속해서 두 손으로 몸을 애무했다. 그리고는 이이지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자." 이이지마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나, 날 좋아하지 않는 녀석과 그, 그런짓을 할 수는 없어!" 뭐야. 평범한 녀석들은 그런 일에 집착한단 말인가?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심리로군. "뭐 어때? 하고 싶지?" 그러니까 하자. 즐기는 거니가 서로 솔직해 지자구. "난 하고 싶어, 이이지마와." 이이지마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안아달라고 울고 있단 말이야--" 이이지마는 큰 소리로 외치며 나를 안았다. 틀림없이 쾌감을 느낄만한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줄곧 큰 소 리로 외치고 있었다. "난 계속 아마노 네가 좋았어! 하지만 이럴 생각은 없었어! 난 그냥 아마노 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그래서--!" "시끄러워! 닥쳐!" "미, 미안!" 이렇게 절규를 하며 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이래서야 날 기분 좋게 해 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아아, 팔꿈치와 무릎이 아프다... "웃, 우웃! 우아아아아!" ------------겨우, 끝났냐. 빌어먹을... 이이지마는 부들부들 떨며 땀으로 뒤범벅된 몸으로 내 등에 쓰러졌다. 첫 경험이라 긴장했던 것일까? 이이지마가 내 등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이이지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왔 다. "아마노는...? 기분 좋았어?" 달성감 때문일까, 겨우 나를 걱정해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좋았어. 안심해라."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미 새의 심정이다. 뭐든지 첫 한 걸음이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나 굉장히 감동했어, 나츠키..." 한 번 했다고 이제 [나츠키]냐. 내가 코웃음을 치자, 이이지마는 어깨 너머 얼굴을 가까이 댔다. "키스는 안돼." 고개를 돌리자, 이이지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섹스 정.도.는. 상관없지만 키스까.지.는 안돼." 말하자면 키스는 내 마지막 요새다. 내게 있어서 섹스는 컨디션 유지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필요하지만, 키스 는 특별. 입술은 자존심의 문제다. "어째서. 키스하자, 나츠키." 이이지마는 내 턱을 잡고 억지로 입술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의 급소에 주먹을 날려주곤 한다. "쿠엑...!" 불쌍한 이이지마. 단 일격에 돌덩이가 되고 말았군. 가랑이를 움켜잡으며 몸을 동그랗게 움츠리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이이지마 의 팔에서 도망친 후, 난 샤워 룸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한번 할 때마다 자양강장제 1병분의 효력을 발휘해 주었다. 남 자들이 내 테크닉의 포로가 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무적이 된 듯해 서 마음도 몸도 고양되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묘하다. "뭐 어때. 시로도 아침부터 여자를 안고 있잖아. 이제와서 내가 누구랑 자건 무슨 상관이냐구!" 빌어먹을! 홧김에 이이지마를 유혹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정말로 뭔가가 무너졌다. 시로가--그 무뚝뚝한 칸자키 시로가 여자를 안고 있다니, 내가 아무리 유 혹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주제에! 게다가 전화를 받았을 때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했다. 흥분 해 있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배설행위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단 말인가. 좋아하지도 않 는 여자를 상대로... "그럼 나라도 상관없잖아!" 어제 나한테 키스했던 주제에! "빌어먹을!" 홧김에 샤워를 있는 힘껏 틀었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이이지마! 너도 빨리 샤워 해! 빨리 돌아가자!" 대답은 없었다. 이이지마 녀석, 아직 나한테 맞은 곳이 아파서 끙끙거리고 있나. 나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거실 문을 발로 열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이이지..." 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것이 확실하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발을 적시고 있는 액체가 내 몸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아 닌, 좀더 짙고 비릿한 대량의 혈액이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이...이지마...?"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이지마는 엎드려 누운 채 죽어 있었다. 이이지마의 등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 다. 4 감식반이 이이지마의 시체에 플래쉬를 터뜨리며 벽과 문손잡이에서 지문을 체취하고 있었고 기록담당이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내게 뭔가를 질문하고 있다. 하얀 노트 위에 펜 끝을 톡톡 튕기며 말이다. "나츠키씨, 듣고 있습니까?" 하얀 장갑을 낀 양복의 남자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후지시로인지 뭔지 하는, 시로의 후배인 부잣집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한 형 사다. "이제 곧 선배가 올 겁니다." 후지시로는 나를 격려해주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지금 내게 그 이름은 금구 였다. "시로는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미, 미안합니다. 하지만..." "보호자 실격이로군, 칸자키 녀석."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건 무라이 경부. 무라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싱긋 웃었다. 기록담당이 펜을 움직였다. 젠장, 이런 대화까지 기록하지 말라구. ...강한 척 하고는 있지만, 한심하게도 사실 난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도 없 는 상태다. 아까는 어떻게든 전화까지 기어가서 110으로 통보를 했다. 이곳 스기나미구는 신주쿠구와 나카노구를 합쳐 제 4방면이라고 불리는 공 통관내니까, 통보하면 당연히 신주쿠서에도 상황이 전달된다. 신주쿠에서는 겨우 2주일 전에 살인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신주쿠서가 이 사건을 보호자인 시로에게 알리는 게 당연한 일로, 후배 인 후지시로가 달려온 것도 납득이 가고 살인사건 지휘를 경찰청의 무라이 경부가 맡은 것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시로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도 시로도 다른 범인을 쫓고 있지 않았어?" "새벽에 처리했어. 그랬더니 이번에는 또 아마노 너냐. ...정말이지 너 조금 은 평범하게 평범하게 생활할 수 없냐." 무라이 경부는 코웃음을 치며 이이지마의 시체를 검사하러 되돌아갔다. 수 건 한 장을 허리에 감고 있을 뿐인 나를 위해서, 후지시로가 어디선가 이불을 가져와 주었다. 이방의 물건은 아직 건드리면 안 되는 모양으로, 나는 내 옷 조차 입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까까지 입고 있던 검은 비키니 브리 프는 어째서인지 현장에서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이이지마를 죽인 범인이 가져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 수고하십니다, 선배." 후지시로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로다. 나는 재빨리 이불을 끌어당겼다. 시로의 발소리가 도중에 멈췄다. 감식관이 시로에게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지문이 몇 개정도 채취된 모양 이었다. 이이지마의 것과 내 것, 그리고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 부모님 것. 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지문이 현관문에 다수. 관리인이나 손님의 지문이리라. 나는 이불 사이로 시로를 엿봤다. 시로는 나보다 먼저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하얀 장갑을 끼고 이 이지마의 상처를 확인한 후, 방안을 둘러본 다음에야 겨우 나를 바라보았다. 기록 담당이 시로에게 경례를 했다 혹시 시로는 경부 정도의 지위일지도 모 른다. 시로가 눈썹을 찡그리며 기록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거의 백지 상태인 노트를 보고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시로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상황을 설명해 봐." 몸이 떨렸다. 왜 시로가 심문을 하는 걸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걸 까. "피살자와 이곳에 온 것은 몇 시쯤이냐?" 피살자...? 난 어제 시로한테 이 녀석은 이이지마라고, 내 클래스 매이트라 고 분명히 소개시켜줬잖아. 분명히. "대답해라. 몇 시에 와서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된 거냐?" 시로의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내게는 기호처럼 들려왔다. 아무리 잠이 덜 깬 상태였다고는 해도, 내게 키스한 그 입술은 내 친구가 살 해 당해도 위로를 해주기는 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기능하고 있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나는 기계적으로 사실을 늘어놓았다. "...이이지마와 역 앞에서 밥을 먹고, 이곳에 도착한 것은 1시...40분 좀 지 난 시각. 적당히 CD를 찾아서 틱코리아를 틀고 10분 정도 후에..." 사로가 나를 손으로 저지했다. 기록 담당의 기록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다. 실의 동작 하나 하나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괜찮냐고 묻는다던가, 걱정했다던가, 단순히 얼굴만 아는 사이라 해도 아무 지장 없는 말 정도도 기대해봤자 소용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쌀쌀맞다. 후지시로조차 내게 이불을 가져다줬는데. 상냥한 말을 건네줬는데... "좋아. 계속해라." 그게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태도냐구! "질문을 하려면 사람의 눈을 쳐다보면서 해!" 그 순간, 실내에 있던 전원의 시선이 내게 집중했다. 무라이 경부가 또 시작이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시로는 색소가 옅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부며 입술을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한심하다. 이런 남자한테 반해있는 내가... 차라리 이이지마한테 키스 해 줬더라면 좋았을 걸. 이이지마는 틀림없이 굉 장히 기뻐 해 줬을텐데... "내가 이이지마를 유혹했어. 하자고..." "뭘?"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알면서 묻지 마! 요즘 오랫동안 못해서 욕구불만이었다구! 그래서 이이지 마와 잔 거란 말야! 나는...!" 시로가 기록담당의 기록을 중단시켰다. "네 감정론 따윈 필요 없어. 사실만을 정확하게 말해라. --그리고?" 시로는 너무나도 냉정해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담담하게 자세한 상황을 얘기했다. 시로는 현장 검증을 하러 가 버렸다. 기록이 끝나자, 후지시로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바람에 나 는 더더욱 비참함을 느꼈다. 오늘밤은 파출소에서 재워달라고, 나는 후지시로에게 부탁해 보았다. "나 유력한 살인 용의자잖아? 이이지마가 죽었을 때 이곳에는 나밖에 없었 고, 살해 동기도 있어. 이이지마가 하도 끈질기게 굴기에 내가 죽여버린 거 야." "하지만 나츠키씨... 저기..." 후지시로가 난처한 표정으로 무라이 경부에게 도움을 청하자 무라이 경부 가 이쪽으로 걸어와서 코웃음을 치켜 말했다. "원한다면 감옥에 처넣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아마노, 유감이지만 넌 혐의 가 없다." "...어째서?" 전에는 내가 무죄라고 주장해도 범인취급을 했던 주제에, 왜 지금은 이렇게 나오는 거야. "피해자의 등에 난 상처는 말이야, 칼에 찔린 상처다." "칼...?" "그래. 상처의 깊이와 폭으로 볼 때 틀림없이 부엌칼일거야. 뽑은 순간 엄청 난 피가 뿜어져 나왔겠지. 그 증거로 방안에는 광범위하게 피살자의 피가 튀 어 있어. 그런데 네 몸에는 한 방울도 피가 튀지 않았지." "다, 당연하잖아. 샤워로 씻어버렸으니까. 내 차림을 보면 알거 아냐!" 무라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호오, 하지만 욕실에는 혈액반응이 전혀 없던걸? 한마디로 넌 살해 순간 이 거실에 없었단 얘기지. 엄청난 BGM에 샤워 소리, 침입자의 발소리도 피 살자의 비명도 너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 보다 아마노, 범인이 노린 건 피살자가 아냐. 바로 너다." "...나?" 소름이 끼쳤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네 집이야. 도둑맞은 것도 네 팬티 한 장 뿐. 스토커나 변태의 소행 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지금까지 속옷을 도둑맞은 적 없냐?" 있다고 대답했다.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이제 와 후회했다. "...지난번 연쇄살인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네 숭배자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만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군. 게다가 네 숭배자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집착과 행동력을 지닌 남자들뿐이구나." "왜 남자라고 단정짓는 거지?" "피살자의 상처를 보면 알 수 있어. 그 근육을 부엌칼로 찌르는 건 여자의 힘으로는 무리거든." 무라이가 한숨을 쉰다. 나도 뒤따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상황으로 볼 때, 피살자는 범인이 등뒤로 접근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 이군.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어." 이이지마가 저항하지 못했던 것은 내게 급소를 맞아서 격통과 씨름하고 있 었기 때문일지도... 라고 털어놓는 편이 좋을까. "범인은 너도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대로 도망쳤지. 아마도 널 살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이건 너에 대한 경고나 메시지일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무라이 경부 일행은 일단 물러가기로 했다. 나는 조사본부인 스기나미서에서 한시간 동안 보호를 받게 됐다. "후지시로." "네?" "오늘밤은 역시 당신 집에서 재워 줘." 후지시로가 펄떡 뛰며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내 전직이 남창이라곤 해도 이럴 건 없잖아? "...농담이야. 멍청하긴." 재빨리 철회하자, 후지시로는 노골적으로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쳇, 너무하제 정말. "괜찮아요, 나츠키씨. 구치소가 아니라 직원실을 준비해 드릴테니까요." "땡큐." 그렇다. 누구라도 나 같은 트러블 메이커는 싫을 것이다. 친부모조차 날 버렸는데, 새빨간 타인이 나를 환영해 줄 리가 없다. 단 한사람 나를 받아들여 줬던 루트의 마스터는, 나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시로에게 체포되어 버렸고 이번에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이이지마가 10분 만에 살해당해버렸다. 그것도 나 때문에. "나츠키!" 깜짜가 놀라 고개를 들자, 현관에 시로가 서 있었다. "빨리 와. 바쁘니까." 시로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시로가 바쁜 것은 나 때문이다. 그럼 모든것이 나 때문... 인가. "하지만 시로, 나 속옷..." 시로가 짜증스럽게 담배를 깨물었다. 구경꾼들이 맨션의 창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참기 힘들어서, 나는 시로의 구식 스카이라인을 향해 달려갔다. "나츠키." 시로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후지시로의 차에 타라." "뭐...?" 멍하니 되묻는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로는 담배를 피우며 혼자 재 빨리 검은 스카이라인에 올라탔다. 나는 재빨리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도어 너머 시로에게 물었다. "뭐야, 시로. 왜 화를 내는 거야." 나를 무시하고, 시로가 키를 돌렸다. 나는 윈도우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확실하게 말해, 시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잖아!" 후지시로가 나를 차에서 떼어놓으려고 했다. 선배는 조사본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감싸고 있지만, 내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 다. "나한테 아무 할 말도 없어, 시로!?" 이이지마가 살해당하는 바람에 나도 사실은 괴롭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위로해주길 바랬다. 조금 정도는 상냥하게 대해주기 바랬던 것이다. 윈도우가 내려갔다. 시로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싸늘하게 나를 바라 보았다.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바보냐, 너는." "뭐라고...!" 시로와 나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의 눈동자는 뚜렷한 거절의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등줄기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주일 전에도 너와 관련된 남자들이 네 명이나 살해됐어. 그리고 오늘 또 다시 너의 감정적인 생동 때문에 또 죽었다. 경찰은 네 뒤처리를 해 주기 위 해서 존재하는 게 아냐." "선배, 그렇게 말씀하실 건..." 시로가 싸늘하게 노려보자 후지시로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갈듯이 작아졌 다. "조금은 자신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해라." 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로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버렸다. "...자, 갈까요, 나츠키씨." 후지시로의 말에, 나는 묵묵히 세리카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엔진 소리가 몹시 슬프게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경솔한가..." "그렇지 않아요." 후지시로의 위로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린애 같고 경솔하고 어리석은 부끄러운 행위다. "시로는 이제 날 용서해주지 않겠지." "괜찮아요. 범인을 잡으면 곧 기분이 풀릴걸요." 후지시로가 어떻게 그걸 아는 걸까? "후지시로는 시로와 함께 있으면 피곤하지 않아?" 후지시로는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본 후, 난처한 듯이 웃었다. 나 따위는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아한 웃음. 가정환경의 차이일까. "벌써 익숙해졌는걸요. 파출소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함께였으니까요." "뭐? 파, 파, 파, 파출소?" 우와. 시로도 순경 제복을 입고 상냥하게 웃으며 길 안내를 해 주던 시절이 있었단 말야? "의외죠?" 후지시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런 무뚝뚝한 성격으로 잘도 파축소에 근무했었군." 쓴웃음을 지으며 재떨이를 찾았지만, 담배꽁초의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체념하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칸자키 선배도, 옛날에는 좀 더 밝은 성격이었어요." 그 순간 후지시로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동요를 민감하게 눈치챈 나는,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옛날에는... 이란. 시로, 옛날에 무슨 일 있었어?" "이 길을 오른쪽으로 도는 거였죠?" 후지시로 녀석, 웬 딴소리? 그렇군, 말하기 곤란한 얘긴가 보지? 그렇다면... 나는 핸들을 잡고 힘껏 왼쪽으로 돌렸다. 우와악!" 끼이익 하고 날카로운 타이어의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이, 이, 이, 이러지 마세요, 나츠키씨!" 후지시로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다. 세리카는 좌측 도로로 반쯤 넘어간 후 겨우 멈춘다. 그 앞을 자전거를 탄 아줌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갔 다. "무, 무, 무슨 짓입니까!" "가르쳐 줘. 시로에 대해서." "...네?"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후지시로에게,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 며 호소했다. "알고 싶어. 뭐든지 좋으니까!" 나는 후지시로의 어깨를 잡고 겉칠게 흔들었다. 컨트롤 할수 없는 초조함이 슬픔이 되어 덮쳐왔다. "시로한테 인정받고 싶어! 조금이라도 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그 런데 방법을 모르겠단 말야! 어떻게 해야 시로가 기뻐할지! 무슨 짓을 해도 역효과만 나고, 뭐가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어! 제발 부탁이야! 가르쳐 줘!"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후지시로가 곧 표정을 주그러뜨렸다. "그런 건 저도 모릅니다." "후지시로!" 후지시로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한가지 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시로가 한숨을 쉬었다. "옛날에 말이죠, 선배의 소중한 사람이 죽었어요." "...소중한 사람?" 연인...? 후지시로는 내가 받은 가벼운 충격을 눈치채고 내게서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당시 아아, 나츠키씨와 같은 나이로군요." 뭔가가 내 가슴을 조여 온다. 예측해버린 비극의 결말을 눈앞에 두고, 그래도 나는 후지시로의 말을 끝까 지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죽었는데...?"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어요. 자세한 사정은 제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선배는 그 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됐어요. 야요이씨, 시로와 결혼할거라 며 항상 선배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었죠..." "결...혼...?" "선배는 아직 어린애라고 야요이씨에게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야요이씨는 그럼 20세가 되면 결혼하자고 우겨댔죠." "20세가 되면...?" "잘 웃고 잘 우는, 표정이 풍부하고 굉장히 귀여운 소녀였어요. 마치 선배 안에 있던 감정을 전부 저 세상으로 가져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 큼 야요이씨는..." "미안, 후지시로. 이제 됐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후지시로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후지 시로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왜 후지시로가 사과하는 거야. 사과할 이유가 없잖아." "...닮았어요, 나츠키씨와." "닮아...?" 후지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듯이, 그리운 듯이 나를 바라보며. "사과하면 화를 내는 점이 똑같아요. 야요이씨도 곧잘 왜 사과하는 거냐고, 사과할만한 짓은 처음부터 안 하면 되지 않냐고 했었죠. 그러니까 선배는 나 츠키씨를 괴로워서 지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선배는 나 츠키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예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반대...?" "호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후지시로가 기어를 넣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지껄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후지시로는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나는 혼란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야요이따윈 관계없어. 난 누구의 대신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사랑 받고 싶 어. 그저 그것 뿐이야." 당당하게 구애선언을 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재빨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솔직하군요." 후지시로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기나미서로 호송되는 도중, 나는 속옷을 구입하고 싶다는 이유로 잠시 차 에서 내렸다. "편의점에서 사 올테니까 주차장에서 기다려 줘. ...아, 후지시로, 돈 좀 빌 려줄래?" 후지시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게 지갑을 통채로 건네주었다. "땡큐. ...저기, 만화책 사 와도 될까. 밤에 심심할 거 아냐." "물론이죠. 범인이 체포될 때까지 당신은 보호대상이니까요." "하하. 5분... 아니, 10분만 기다려줘." "네. 다녀오세요." 후지시로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후지시로는 너무 순진해 나는 조금 가슴이 아팠다. 후지시로는 주차장에서 계속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내가 도망친 것도 모르고... 5 나는 지금 나카노의 거리를 헤매고 있다. 범인과 접촉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혼자 있으면 언젠가 틀림없이 범인 쪽에서 내게 접근해 오리라. 시로는 틀림없이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나를 도망치게 만든 후지시로가 아닌, 또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내게. 내가 또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다 고,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다. 시로를 어이없게 만드는 것도 질리게 만드는 것도... 그러니까 용서해 줘, 시로. "아아." 짧고 허무한 행복이었던 2주일간에 대한, 미련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빠르건 늦건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행복 따윈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시로가 나를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무시해도 아무렇지도 않 은 척 웃을 수 있었다. 어차피 곧 헤어질 테니까, 민폐를 끼치는 김에 조금쯤 어리광을 피워도 괜 찮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시간은 6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낡은 영화관 앞에 섰다. 지금 상영중인 프로그램은 포르노. "내 뒷처리 정도는 내가 직접 하겠어. 그러니까 이제 쉬어도 돼, 시로." 나는 극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슴푸레한 영화관 안. 때때로 들려오는 축축한 소리. 여기저기서 키스를 나누고 있다. 얼굴 따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 안 에는 더럽고 축축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혼잡한 것도 아니건만, 나는 스킨 쉽을 나누고 있는 녀석들을 밀치고 안쪽 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트에 기대어 영화를 보자, 자위대풍의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아무렇게나 수염이 난 근육질을 입으로 애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청 나네." 나도 모르게 감탄해 버릴 만큼 너무 커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남자를 무시하고 영화를 보고있는 척 했다. 지퍼에 남자의 손이 와 닿았다. "...살이 끼지 않게 조심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조금 놀란 듯이 내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목안으로 쿡쿡 웃으며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속옷은 안 입는 주의?"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가 내게 모을 굽히고 입술을 댔다. 나는 시트에 몸을 기대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상관의 남자다운 몸이 시 로의 몸과 겹쳐졌다. "어때? 아저씨 잘 하지? 기분 좋아...?" 내 다리 사이에서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시로..." 갈색 피부에 단단한 상관의 몸이 시로와 꼭 닮아 있었다. 어제 아침 얼떨결에 만져 본, 강하고 단단해서 키스마크 따윈 새겨지지 않 을 것 같은 두꺼운 피부... "시...로..." 시로의 그것은 피부와 마찬가지로 단단할까. 근육과 마찬가지로 강할까. 전화 저편에서 신음하던 여자는 시로의 강한 팔 에 안겨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단단한 팔과 감정 없는 눈동자로 날 엉망진 창으로 만들어 주길 바랬는데! "앗...!" "빠르네. 아저씨가 해 주는 게 그렇게 좋았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빈말로도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못생 긴 남자였다. 게다가 입술은 썰어 두 접시. 나는 시청각 정보를 거부하고 싶 어서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남자에게 좌석을 바꿔달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저항중이다. 그러다 아무래도 얻어맞은듯, 남자는 허겁 지겁 도망쳤다. 그리고 이 또다른 남자는 내 바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웃."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시로와 닮은 상관에게 안겨 있는 행복한 자위대원 에게 선망과 질투위 시선을 보내며, 치열을 몇번이나 핥았다. 내 지퍼를 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지나치게 혹사한 것 아니냐, 나츠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신경질 적인 느낌도 여전하다. 나는 팔걸이에 손톱을 세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며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당신이었군..." 나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어두운 눈에 광기 어린 빛을 담고 있었다. 움푹 꺼진 뺨과 백발이 섞이기 시작한 머리, 그리고 바싹 마르고 갈라진 입 술. 미남이었던 옛날의 모습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드디어 내 앞에 모 습을 나타낸 남자. "1년만이로군. --새 아버지." 광인의 눈을 한 불쌍한 남자를 향해,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내 어깨를 안고 영화관을 나간 후, 그는 나를 주차장에 세워둔 하얀 자동차 의 조수석에 밀어넣었다. 뒷좌석에는 제법 커다란 짐이 실려있었다. 혹시나 이대로 어디론가 도망칠 생각일지도 모른다. 문득 뭔가가 밟히는 바람에 나는 발 밑을 바라보았다. 순가락으로 집어 올린 까만 천 조각은 무겁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군. 당신이라면 집 열쇠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하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길 잘했어. 집안의 수치니까." 내 브리프는 이미 그에 의해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 도둑맞았던 속옷도 같은 운명을 걸었으리라. 나는 그 가련한 브리프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여전히 신경질적인 운전이다. 차선변 경을 할 때마다 끈질기게 백미러를 확인하고, 깜빡이가 점멸 할 때마다 상하 로 무릎을 흔들고--. "...진정해. 난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당신과 툭 터놓고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핸들을 고쳐 쥐며 말했다. "넌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곤 하지. 넌 항상 계산 끝에 행동하 곤 해. 자기가 먼저 유혹해 놓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지. 괜찮다고 말하면 서 안 된다고 하고, 좋아하는 주제에 싫어한다고 말하고--. 넌 항상 거짓말 뿐이야!" 그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며 자신의 망상에 젖어 있었다. "내게 안겨서 넌 기뻐했잖아. 그렇지? 아아, 히데아키, 좀 더, 좀 더 라고. 넌 언제나 그렇게 말 했었잖아!" "말 안 했어. 어머니한테 들킬까봐 내 입에 항상 재갈을 물려 놨었잖아. 그 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 "그래, 타카코에게는 비밀이었지. 너와 나만의 비밀이었어. 그런데 너는 뭐 라고 했지? 타카코에게 들켰을 때 히데아키한테 강제로 당한 거라고 말했었 지! 나츠키!" 차가 거칠게 정차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나 따위는 보고 있지 않았다. 광기어린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비가 쏟 아질 것 같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분이었다.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에게 반론하는 것도 허무하게 느껴져셔, 나는 입과 눈과 귀를 닫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시동이 꺼지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에는 아무 것 도 없었다. 그렇다, 요란한 도시의 네온사인이 없었다. 작은 깜빡거림이 때때로 천천히 옆을 스쳐지나갔다. 저 불빛은... 배? 눈을 크게 뜨자, 정면에는 새까만 바다가 파도치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이봐..." "히데아키라고 불러라." "...여기가 어딥니까, 히데아키님." 장난스럽게 말한 순간, 그가 내 뺨을 때렸다. "잠깐 만나지 못한 사이에 성격이 비뚤어졌구나! 나츠키!" "...덕분에." 또 쓸데없는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내 왼쪽 뺨을 때렸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도쿄만이다, 나츠키." 그가 스위치로 파워 윈도우를 반쯤 연 순간, 짠내와 기름내가 뒤섞인 역겨 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최후란 말인가. "동반자살이라도 할 생각...?" 추하게 퉁퉁 부운 익사체 따윈 되고 싶지 않다. 애기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는 건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상상하고 있던 것 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 "자수따윈 무린가..." 내가 죽으면 시로는 슬퍼할까. 그럴 리 없겠지. 기껏해야 시체나 확인하러 오는 게 고작일 것이다. 후지시로는 야요이와 내 가 닮았다고 했지만, 에필로그는 180도 다르다. 하다못해 시로가 내 죽음을 야요이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슬퍼해 줄 때까 지 끈질기게 살아있고 싶었는데... 그가 천천히 시트를 뒤로 내리고 내 몸을 끌어안았다. 한 번 하려는 생각일까. 이 허무함을 잊기 위해서는 확실히 좋은 방법이다. 게다가 혹시나 그가 내 몸 때문에 현세에 미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일 이다. 셔츠의 버튼을 천천히 풀어 나가는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T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은,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뜨거웠 다. "타카코에게 들리면 안되니까 조용히..." 그의 입버릇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언제나 내 입을 막았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입술만은 결코 손대지 않았다. 손댈 수 없었다. 입술은 그가 손댈 수 없었던 단 하나뿐인 나의 성역이었다. "여긴 어머니가 없어..." "있어. 언제나 귀를 세우고 나와 널 갈라놓으려 하고 있지." "무슨 헛소리를..." 아아, 시트 위의 짐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잖아. 푸른 비닐 시트로 덮 여있는 짐은 저승길에 가져갈 선물치고는 너무 큰 거 아닌가...? 문득 눈썹을 찡그린 내 입에 테이프를 붙인 후, 그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 로 말했다. "보고 있어, 타카코는. 언제나 언제나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봐 라..." 그렇게 말 하며 그가 비닐 시트를 벗겨냇다. 나는 틀림없이 절규했을 것이다. 커다랗게 열린 눈, 가라진 이마, 피에 젖은 긴 머리카락. 살해당한 공포와 배신당한 슬픔으로, 아름다웠던 어머니의 얼굴은 무참하 고 추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재수 없는 눈, 재수 없는 입술이야. 나츠키 너는 타카코를 꼭 닮았다고 생 각했었는데, 비교해보면 전혀 닮지 않았어. 나츠키 네가 몇 배나 더 아름다 워..."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본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이 미친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아아, 사랑한다, 나츠키..." 나의 의식은 거기서 뚝 끊겼다. 6 "TV에서 널 봤지..." 황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했던 시야가 뚜렷해짐에 따라, 나는 내가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팔다리 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목을 움직이자 둔탁한 아픔이 다리사이를 직격했 다. 그가 나를 들여다보며 허벅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2주일 전 천박한 와이드 쇼에서 말이다. 동성애 연속 살인사건이라고? 나 이 꽤나 먹은 한 남자가 너를 독점하고 싶어서 차례차례 네 사람의 남자를 죽 였다더군." 2중으로 묶여있는 나를 그가 천천히 어루만졌다.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긴 했지만 난 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슬픈 듯이 말을 이었다. "타카코가 슬퍼하더군. 나츠키는 악마라고. 구제불능의 음란한 남창이라고. 이미 버렸는데도 언제까지 부모를 괴롭혀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울더군." 난 그런 일방적인 비난에 몸을 흔들며 웃자, 밧줄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나는 입의 체이프를 떼어내기 위해 얼굴을 시트에 비볐다. 그리고 그의 눈 에 호소했다. 어머니는 이제 듣고 있지 않다. 그러니 해방시켜 달라고. 그는 주저하긴 했지만 어머니의 시체를 또다시 시 트 위에 올려놓은 후 내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주자 나는 재빨리 반론했다. "당신들이 무슨 부모야! 난 그때 겨우 12살이었어! 경험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유혹한단 말야! 책임 회피도 작작 좀 해!" "...그런 거친 말투는 딱 질색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나를 히데아키라고 부르렴, 나츠키." 그의 손이 나를 힘껏 움켜쥐었지만 나는 그 숨막히는 아픔에도 지지않고 반 론했다. "시끄러워, 변태! 이 살인...!!" 날카로운 충격이 몸을 꿰뚫었다.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바람에,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다리 사이를 응시했다. "앗..."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에 격통이 느껴졌다. "나는 말이지, 나츠키. 두 번 다시 그런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할 책임 이 있어. 이 이상 널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끊임없이 덮쳐오는 격통을, 나는 이를 악물며 참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에, 옛날에는 홀랑 속아 넘어 갔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나 때문이라며 내가 말을 잘 들으면 자신도 어머니한테 다정 하게 대하겠다는 말에, 나는 그에게 억지로 안겼다. 그에게 안기는 것은 나의 의무이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세뇌 당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를 더더욱 괴롭히게 될 줄도 모르고... 사과하렴, 반성하렴--그렇게 속삭이며 나를 안는 그를, 그래도 부모라는 생각에 참았던 나는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멍청한 꼬마였다. "나츠키, 넌 정말 나쁜 애야. 내가 그렇게나 널 소중하게 대해줬건만. 그렇 게나 귀여워 해 줬건만.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 다니!" "속인 것도 거짓말을 한 것도 배신한 것도 전부 당신이잖아! 내가 남자들이 랑 놀아났다는 걸 뉴스를 보고 알고 흥분했던 것뿐인 주제에. 당신은 항상 그 런 식으로 현실도피를..." "닥쳐!" 그가 밧줄을 잡아 당기자 파고드는 날카로운 아픔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 었다. 좁은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검은 차창으로 시선을 던졌 다. 사고회로가 망가진 것일까 아니면 미쳐버린 것일까. 아픔이 어떤 감각을 가리키는 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입술만은 무의미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그래서 죽인 거야?" 그의 숨소리가 유달리 크고 무겁게 내 신경을 지배해 갔다. "당신이 죽였지...? 이이지마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내 안에서 손을 뒤집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츠키." "나를... 안았...으니까?" "...그래, 나츠키..." 그가 긍정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아, 아아... 앗...!" 다시 밧줄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넌 내가 만들었다. 내가 키우고 조교했다. 내가 너의 창조주다. 그런데 너 는 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에게 안겼다!" "웃..." 그가 몸을 뺐다. 공허함과 느닷없는 체온의 하강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난 말이지, 나츠키. 타카고와 함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어. 멀리서 너를 지켜보고 때때로 너의 냄새를 맡기만 하면 살 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왜냐하면 넌 내 것이니까. 그렇지? 넌 틀림 없는 나의 창조물이야. 그렇지? 그런데 타카코는, 나츠키는 이제 내 것이 아 니라고 하는 거야. 이제는 네게 손대지 말라고. 너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뭐...?" 그의 얼굴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갈라진 목소리는 떨리고 있어 서,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널 다른 남자에게 주는 게 아니었어. 내겐 널 없애버릴 의무가 있어. 그런 데 타카코는 나를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으려고 했 다. 그래서 죽인 거야!"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안으로 도피했다. 언제나 그랬다. 내 안에서 절정을 맞을 때까지, 중얼중얼 리드미컬한 눈물 을 흘리며 사죄하는 것이다. "나츠키, 미안하다, 나츠키. 나를 용서해다오...!" 사과할 정도면 왜 안는 것일까, 울 정도라면 왜 참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생각난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고 있던 그 무렵이... 이를 악물고 오열을 참았던 그 날밤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바보라, 절정 을 맞은 후에도 몸을 뗄 수조차 없을 만큼 방심상태에 빠져 있는 불쌍한 그를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이제 됐어..." 흐느낌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이제 당신을 용서해 줄게...히데아키." 이윽고 그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멋있는 새 아버지, 미인인 어머니. 언제나 연인 같은 부모님은 언제나 내 자랑거리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사랑 받았던 나는 굉장히 행복했다. 그 날도 우리는 사이좋게 서로의 몸을 씻어주었다. 하지만 그 날, 문득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쉬 하는 곳은 정성스럽게 씻어야 한다]...라고. 그리고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말대로 그곳을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씻어주었다. 이제 깨끗해졌다고, 그는 나를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다짐을 했다. 이윽고 그는 내게도 [청결의 의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울면 참으라고 꾸중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된 욕실의 의식은, 중학교에 입학함과 동시 에 침대에서의 강제행위로 바뀌었다. 그리고 결국 폭발한 어머니가 내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했고 다음날, 어머 니와 그는 내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때 나는 드디어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혹시 나를 지키려고 한 것일까? 밤마다 날 괴롭히는 남편에게, 더 이상 계속하면 나를 죽이겠다고 거꾸로 협박한 어머니는, 나로부터 그를 떼어내 준 것일까. 이제 두 번 다시 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가족을 지키려고 했었다. 어머니도 어머니 나름대로 나와 그를 지키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도 나를... 가족이라도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관계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죽이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저 세상에서 탄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자동차 라이트를 켰다. 이미 설득을 포기한 나는 어떻게든 도망칠 기 회를 엿봤지만, 움직일 때마다 밧줄이 몸을 파고 들어서 부어오른 부위에 격 통이 느껴질 뿐이었다. 인간이란 체력을 잃으면 삶에 대한 집착도 희박해지 는 법이다. 차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히데아키, 하다못해 밧줄을 풀어 줘." 그가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난 노골적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생각은 없어. 어차피 살아남는다 해도 수치스러울 뿐이 니까." 그러자 그는 나를 풀어주지는 않았지만, 시트만은 일으켜 세워 주었다. 몸을 파고드는 아픔을 참으며, 나는 하다 못해 우리가 맞을 종말을 지켜보 려고 애썼다. 낮에 보면 틀림없이 더러운 바다겠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칠흑 같 은 그곳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무(無)로 돌아갈 수 있 을 것 같은, 소멸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지금의 나와 그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결국 아무 것도 없었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아무 것도 없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 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미련은 없다. 이걸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고, 상처 입히지 않아도 되고, 서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 "미안하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일까. 잘 알 수 없어서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사과를 받는 것도 사과를 하는 것도 질색이다. 하지만... 사과를 해야 한다면 이이지마에게 해야겠지.이이지마는 사실 굉장히 좋은 녀석이었다. 나 같은 녀석에게 매일 말을 걸어주었다. 시로 가 날 덮친 줄 알고, 이이지마 녀석 시로에게 덤벼들었는데... "시로...라." 이름을 부른 순간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시로의 말대로 나는 역시 어린애다. 시로가 여자를 안은 게 분한 나머지 히스테리를 일으켜 그런 좋은 녀석을... 이이지마를 말려들게 하고 말았다. 무지무지 반성하고 있어, 시로. 이 마음을 전할 수 없는게 유감이지만... 하지만 시로. 이이지마를 죽인 범인은 책임지고 내가 처리할게. 그리고 그 김에 나도 내 손으로 내 인생의 뒷처리를 할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날 싫어하 지 말아 줘... 드디어 그가 시동을 걸었다. 이대로 액셀을 밟으면 10초도 못 돼서 이 세상과는 안녕이다. 그가 내 뺨을 감싸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키스는 안돼."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 눈에 이미 광기는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입술은 히데아키의 것이 아니니까." 그가 의아한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너 같은 녀석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이제와서 부모인척 하지마. 어차피 나 같은 녀석은 상대도 해 주지 않아. 죽을 거라면서? 그럼 빨리..." 그 때였다. 날카로운 빛이 바다에 반사했다. 나와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빛의 소용돌이가 일제히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속을 걸어오는 그림자에 나는-----------. 그는 뭔가를 말했지만 난 듣지 못했다. 빛을 등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한 남자의 그림자에, 나는 넋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노 히데아키! 이이지마 타츠야 살해 및 아마노 타카코 살해용의로 체 포한다! 차에서 내려서 항복해라!" 시로의 목소리가 도쿄만에 울려 퍼졌다. 시로가 그에게 심판을 내린단 말인가. 우리 가족은 가정을 붕괴하게 만든 한 사람 한사람이 책임을 지고, 일가족 모두 이런 식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 시로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양복. 느슨하게 풀려 있는 넥타이. 다림질 따 윈 하지 않은 와이셔츠. 하지만 시로는 나의 동경이었다.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색소가 옅고 날카로 운 눈동자도, 온 몸을 떨리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도, 결코 많은 말을 하지 않 는 굳게 다물어진 얇은 입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 만났을 때 유일하게 나의 무죄를 믿어 준, 정의를 판별해 내려고 하는 곧바르고 진지한 마음. 어째서일까. 나는 웃고 있었다. 시로는 새빨간 남이다. 그런데도 시로는 내가 바보라는 것도 거짓말이 서툴 다는 것도 대번에 뀌뚫어 봤었다. 시로는 반드시 진실을 간파해낸다. 그런 시 로가 나를 구해주려 하고 있다. "시로--------!!" 큰 소리로 외친 순간, 그가 액셀을 밟았다. "넌 또 나를 속였구나!" "히...히데아키, 멈춰 줘!" "나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 시간을 벌어서 도와줄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 고 있었구나!" "그게 아냐! 히데아키... 우왓!"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경찰 차 한 대가 차 옆에 격돌했던 것이다. 우리가 탄 자동차는 격렬하게 미 끄러져 거꾸로 뒤집어 진 후에야 겨우 멈춰섰다. "웃...!" 어떤 놈이야! 아무리 바다에 뛰어 드는 걸 막기 위해서 라곤 해도 너무 거칠 잖아! 반쯤 찌그러진 경찰 차에서 기어 나온 것은... 헉! 후지시로였다. 후지시로는 우리가 탄 차에 가까이 다가와서 축 늘어져 있는 그에게 총을 겨눈 후 나를 향해 말했다. "괜찮습니까, 나츠키씨!" "위험하잖아, 후지시로!" 나의 비명보다 약간 빨리, 그가 깨진 유리를 집어 던졌다. 후지시로가 얼굴을 박은 틈을 타서, 그는 후지시로에게 달려들어 총을 빼앗 았다. "뭐, 뭐하는 거야, 후지시로! 이 멍청이!" "죄, 죄송합니다~!" "일일이 사과하지 마!" 그는 후지시로와 시로에게 번갈아 총구를 겨누며 차 아래서 날 끄집어 낸 후, 나를 방패삼아 경관들을 향해 외쳤다. "가까이 오면 나츠키를 쏘겠다!" "그, 그만둬, 히데아키!" 하, 하, 하다못해 뒤로 돌아서게 해 줘! 그가 내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시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등뒤에 서 있는 그를 겨눈 후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오지 마! 정말로 쏜다!" "시로!" 죽으려고 했던 녀석이 막상 이렇게 되자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묘한 얘기 다. 나는 아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건만, 이제는 목숨이 아까워서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자살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쏜 총에 맞는 것은 죽음의 의미가 다르리라. "나츠키를 죽여도 좋단 말이냐!" "어차피 죽을 생각 아니었나? 그럼 마음대로 해." "시... 시로! 이 박정한 인간!" 분개하며 외치는 나를 무시하고, 시로는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마노." 시로가 안전장치를 풀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츠키를 쏘기 전에 내가 널 쏠 거다!" "시...로..." 허리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기가 막혔지 만, 시로의 늠름한 목소리에 내 몸은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밧줄에 묶여있 어서 서지 않는 현실을, 지금은 조금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시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역시 시로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다. 시로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 다. 줄곧 시로와 함께 있고 싶다. "지금까지 난 시로에게 폐만 끼쳤지만, 언젠가는 시로의 오른팔이 될 거야! 약속해! 사랑해! 그러니까 날 구해줘!" "나츠키, 이... 배신자아아아!!" 포효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고막의 진동이 가라앉음에 따라, 시야도 겨우 뚜렷해 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분명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뒤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은 시로에게 어깨를 맞은 그 였다. "우와..." 너무나도 멋진 결말에, 나는 몸을 떨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지막까지 경찰들을 성가시게 했다. 내게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경 찰 차에 밀어 넣어졌다. 어머니의 시체는 구급차로 운반되었다. 이미 사후 만 하루가 경과했다고 한다. "장열한 모습이로군." 내 몸에서 밧줄을 풀어주며 시로가 말했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 해 봤자 소 용없지만, 그래도 나는 두 손이 자유로워 진 순간 허둥지둥 앞을 가렸다. 뺨 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후지시로가 모포를 들고 달려왔다. 후지시로는 쑥 스러워 하면서도 걱정했다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츠키씨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나를 모포로 감싸주며, 후지시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굉장히 무서웠어요. 눈에 핏발이 서서 나츠키를 찾아! 찾을 때까지 돌아오 지 마! 라고 소리치더라고요. 그렇죠, 선배?" "정말? 시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시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시로의 진심이 전해져왔다. 마음속으 로 후지시로의 참견에 감사하며, 나는 사과하는 대신 후지시로를 향해 이렇 게 말해주었다. "아까는 엄청 멋있었어, 후지시로." "아하하. 하지만 총을 빼앗기다니... 경찰 실격이예요, 전." 후지시로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가 버렸다. 걱정이 된 나는 시로에게 물었 다. "총을 빼앗기면 시말서를 써야 하나?" "뭐 괜찮을 거야. 어차피 공포였으니까." 뭐야. 다행이네. 정말 안심... 뭐? "공포?" 깜짝 놀라는 나를 바라보며, 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삭방지를 위해 항상 후지시로는 첫 번째 총알을 빼두거든." 그러니까 시로는 그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것일까. 내가 총에 맞아도 상관없었던 게 아니라...... 그렇구나. 다행이다. 들것을 거절하고 나는 자력으로 일어섰다. 시로가 등을 부축해 주었다. 현장처리를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경관들 속을, 나는 시로와 함께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시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어지간히 시로에 게 반해있나 보다. "시로, 어떻게 범인을 알았어?" "열쇠를 이용한 침입, 무수한 지문. 그리고 집안에 침입한 것을 목격 당해도 의심받지 않을 인물. 그런 것들을 전부 맞춰보니 자연스럽게 너의 가족이 용 의자로 떠오르더군. 아마노의 현재 주소를 알아내서 흉기와 치사량에 이르는 부인의 혈흔을 발견했지. 모 영화관 주차장에 떨어져 있던 너의 비참한 속옷 과 주위의 목격증언을 통해 너를 납치한 차종과 도주장소를 알아낸 거다." 수치를 각오하고 물었지만 역시 괴롭다. 분하고 한심하다. 그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최악의 가족이지, 우리." "...뭐." "자식은 소유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언제까지나 어린애 취급이나 하고." "어린애잖냐, 너는." 그 말에 울컥해서 시로를 노려본 순간... 어라,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 싶었 더니 수염이 없다. 언제 깎은 것일까.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로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들여 마시는 그의 옆모습이 라이트에 비쳐 엄청 멋있었다. 설마 시로, 내가 후지시로를 따돌리고 도망친 것을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일까. 시로의 말 때문에 내가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일을 해결하 기 위해 도망친 거라고... 그래서 시로는 내가 싫어하는 수염을 깎고 반성해 준 걸까? 하하하, 지나친 생각인가.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 나 조금 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고 있는 걸... 까? "난 어린애가 아냐. 내년에는 결혼도 할 수 있다구." "...웃기지 마라." 야요이에게도 했을 말을, 시로는 어떤 기분으로 입에 담은것일까. 언젠가 야요이의 얘기를 시로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다.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구급대원이 스트레처를 덜컹덜컹 밀 고 왔다. 시로는 나를 번쩍 안아서 그 위에 살며시 내려놓아 주었다. "시로는 아직 일이 남았지?" "병원까지는 함께 가 주마. 일단 보호자니까." "즉, 어린애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시로의 눈가의 부드러운 표정이 번졌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순간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문득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렇구나. 시로는 어린애를 돌보는 건 싫어해도 여자를 상대로는 아침부터 달아오르는 체질이니까." "...무슨 소리냐?" 열 받아. 설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 아침 내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던 걸?" "아, 임산부 말이군." --------임산부? 나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찰서로 돌아가는 도중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발견했지. 구급차를 부 르려고 했을 때 마침 너에게 전화가 온 거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고 색소 없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변명하는 것 도 쑥스러워서,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기, 시로. 그럼 시로가 임산부를 도와준 것도 뭔가 인연인 것 같으니 까, 오늘은 내 생일로 하면 안될까?" "뭐라고?" "결정했다. 오늘을 내 생일로 해야지. 겨우 나는 최악의 부모님한테서 해방 됐어. 그러니까 나의 아마노가로부터의 독립기념일. 해피 버스 데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실은 조금도 해피가 아니다. 이이지마가 죽고 어머니도 죽고 히데아키는 체 포됐다. "그러니까 난 이제 어른이야, 시로." 자신의 욕망이 최우선이라 주위에 민폐 끼치는 걸 서슴지 않는 가정에서 자 란 나의, 그 유전자의 유혹을 타파하기로 결의한 오늘은, 나의 홀로서기 제 1 보였다.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도 남는 다. 숨기려고 하면 숨기려고 할 수록 늪에 빠질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을 사실로서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아마도 자신이 한 행위 전부를 현실로 인정했을 때 처음으로 인간은 해방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아--, 담배 피우고 싶어." "참아. 경찰이 포위하고 있으니까." 큰 소리로 웃었더니 상처가 울렸다. 침대가 차내에 고정되고 시로도 허리를 숙이고 차에 올라탔다. "아, 칸자키 형사." "아차." 구급대원의 주의를 듣고 시로가 담배를 그에게 건넸다. 차안은 금연이니까 말이다. 시로가 내 옆에 앉자 대원이 차 문을 닫았다. 이윽고 구급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안에 단 둘이된 순간, 나는 시로에게 눈으로 호소했다. "아무도 없으니까 담배 줘." "...나중에." 안된다고는 말하지 않는 시로가 얄미웠다. "니코틴만이라도 맛보고 싶어..." 이런 바보같은 요청에 왜 시로가 응해줬는지는 모른다. 시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눈을 감아버렸으니까. 시로의 입술은 싸늘했다. 깊게 배어 오는 말보로의 맛. 가벼운 키스가 아닌, 어른의 키스였다. 시로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건만.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나는 아직 어린애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반성했다. "조금 자 둬.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응." 눈시울을 닦아주는 시로의 손을, 나는 살며시 움켜잡았다. 운명의 영역 운이 좋은 편이냐고 물으면, 나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운을 가늠하는 기준인 부모. 이 부모가 일단 엄청났다. 태어나기도 전에 내 친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새로 재혼한 새 아버지를 병적으로 사랑했고, 그 새 아버니는 나를 병적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그 집착은 보통이 아니어서, 나는 거의 매일 밤 그에게 당했었고, 그 것을 안 어머니는 나를 죽이려고 했다. 사실은 나를 그로부터 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용없는 일 이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지난번, 드디어 그에게 살해당했고, 그는 모든 혐의가 확정돼서 현재 복역중이다. 뭐, 하지만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긴 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야생 고양이를 닮은 얼굴, 흑표범 같다는 평판을 듣 고 있는 탄력있는 몸, 한 번 빠지면 두 번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아니, 평 생 빼고 싶지 않다는 남자들의 평판을 들은 바 있는 명기. 즉 누구나 찬미하 는 이 얼굴과 몸은 내게 있어서 유일하고도 최대의 행운인 셈이다. 하지만 외모와 성격은 아무래도 반비례하는 모양이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뭐 하지만, 나는 굉장히 제멋대로에 사고회로도 자 기 중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번 반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집 요한 성격도 물려받은 듯, 나는 지금 한 남자에게 열렬한 러브 콜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 사람은 경찰청 조사 1과의 칸자키 시로. 나 아마노 나츠키가 10년이나 연상인 이 남장게 반한 것은 운이 좋은 것일 까 나쁜 것일까. 나는 지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시로, 그런 사진만 보지 말고 빨리 밥 먹자. 나 열심히 만들었단 말야." 냄비 바닥을 국자로 쾅쾅 치며 항의했지만, 시로는 사진을 응시한 채 고개 조차 들지 않았다. 시로는 항상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꼬깃꼬깃한 검은 양복을 방구석에 벗어 던지고 팬티 한 장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넥타이를 풀고 셔츠 앞 을 열고 말보로 한 대를 피워물곤 한다. 시로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안, 나는 시로가 벗어 던진 옷을 옷장에 걸고 밥을 데워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다. 물론 시로의 생명의 원천인 차가운 맥주도 매번 잊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맥주 한 잔을 마신 후 곧 밥을 먹기 시작하건만, 오늘밤 시 로는 내 특제 볶음밥을 입에 대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는 이미 재가 되어 떨어진지 오래고, 필터만이 시로의 입술에 남아있었다. "시로, 자는 거야?" 시로의 옆에 앉아 얇은 입술에서 필터를 빼어 내 주자, 시로가 겨우 고개를 들고 찡그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딱히 시로는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 라, 일반인보다 홍채 부분의 색소가 옅기 때문에 아무래도 눈매가 나빠 보이 는 것이다. 뭐, 시베리안 허스키 같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귀엽... 지는 않은 가. "밥. 몇 번씩 말하게 하지 마." 턱으로 접시를 가리키자, 시로는 불쾌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들고 있 던 사진다발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맥주를 쭈욱 들이민 후 스푼을 쥐었다. 겨우 나도 안심하고 밥을 먹었으나------. "매...... 매워......!" 너무 맵고 짜서 나는 무심코 큰 소리로 외쳤다. 소금 덩어리... 는 아니군. 이건 일단 쌀이잖아. 자신의 요리에 자신이 질리 며, 나는 슬며시 시로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시로는 잠깐 눈썹을 찡그린 것 뿐 식사를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 다. "짜고 맵지... 않아? 시로." "평소와 마찬가지일 뿐 오늘 특별히 맛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후 시로는 묵묵히 염분 과도의 볶음밥을 먹었다. 식사가 맛없으면 대화가 준다. 게다가 시로는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이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지 않으면 오늘밤의 대화는 기대할 수 없다. TV로 기분을 바꾸려해도, 시로도 나도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는 흥미가 없고, 시로의 집은 위성 TV도 WOWWOW도 나오지 않게 때문에 필연적으로 NHK를 BGM으로 맛없는 밥을 먹어야만 한다. 단조로운 수도권 뉴스를 흘려들으며, 소금 때문에 미각이 마비된 혀를 물로 쉬게 하며 화제를 찾으려던 나는, 아까까지 시로가 정신이 팔려있던 사진을 슬쩍 훔쳐보았다. "-----------어." 나는 순간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진에 찍혀있는 인물은...... "토요시마...?" 나는 사진을 낚아채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틀림없다. 토요시마다. 전부 토요시마를 몰래 찍은 것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증오스러운 남자! "...아는 사이냐?"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정면으로 부딪혀오는 시로의 시선은 재빨리 심문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토요시마를 알고 있나? 나츠키." "아... 저-- 응..." 시로를 힐끔 쳐다보자, 날카로운 눈빛이 내게 꽂혀 있었다. 시로의 이 눈에 잡히면 무서운 반면 온 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돌릴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다. "바... 반년 가량... 전에 가게에서 몇 번 본적이 있어...." "어느 가게." "그러니까... 루트 말이야." 나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로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은 일하는 중이 아니라구. 토요시마에 대한 얘긴 내게는 아무도 건드리 지 말아줬으면 하는 필두사항이지만, 루트라는 가게의 일도 될 수 있으면 떠 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곳 요츠야의 신사 뒤에 위치한 3층짜리 낡은 아파트 1층의, 시로가 살고 있는 방 한칸짜리 세평 남짓한 공간에 처들어 와서 살기 이전의 나는, 신주쿠 2번가의 쇼트 바 루트를 거점으로 남자 손님을 상대로 몸을 팔던 남창이었으 니까. 남창이었다곤 해도 이제는 완전히 손을 씻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지내고 있고, 이제는 그 세계로 돌아갈 생각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 무렵의, 영감들을 상대로 허리를 흔들어서 돈을 벌던 자 신을 잊고 싶었다. 상대가 토요시마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시로는 내 마음 따윈 아랑곳 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계속했다. "루트에서 몇 번이나 토요시마를 봤지?" "...... 두 세번 정도..." 혹시 이것이 질투였다면. "토요시마와 접촉한 적은?" 질투였다면 조금은 기쁠텐데. "너의 손님이었나? 나츠키." "...시끄러워." 나는 테이블을 쾅 치며 벌떡 일어섰다. "몇 번 본 것뿐이라고 했잖아! 나는 토요시마 같은 녀석이랑은 잔 적 없어!" 왜 이제 와서 시로의 입을 통해 가장 불쾌한 과거를 폭로 당해야 하는 거지! 나는 운동화를 신고 반쯤 떨어져나간 현관문을 나간 후 발길질로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나는 시로와 싸우면 언제나 신사로 도망치곤 한다. 시로의 아파트는 신사의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 걸음 밖으로 나가면 발 밑에는 굵은 자갈이 박혀있다. 나는 자갈길을 밟으며 참배당으로 향해서 헌금함 앞의 계단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움켜잡 았다. 어째서 나는 항상 이런 것일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살인사건 용의자고 시로는 담당 형사였다. 내 무죄를 믿어준 것은 시로뿐으로, 나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시로, 의지할 곳 없는 나의 보호자가 되어 준 것도 역시 시로였다. 시로만이 나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시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5일전 내 새 아버지를 체포했던 날 밤, 시로는 처음으로 먼저 내게 키스를 해 줬건만. 그건 내 마음에 응해준다는 표시가 아니었었나? 왜 그 후 내게 손도 대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내 추한 과거를 폭로하려고 하 는 걸까. 어떻게 내게 다른 남자에게 안겼었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골로 물 을 수 있는 것일까...? 시로의 냉혹한 처사와 토요시마의 광기어린 미소가 내 신경을 긁었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시로의 체취가 되어버린 말보 로의 향기. "감기 걸린다." "...걸려도 상관없어." "좁은 방에 병균을 뿌리면 내가 곤란해." ...그렇겠지. 당신이 걱정하는 건 그런 거겠지. 뭐니뭐니해도 일이 제일 중 요하고 일을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나보다야 일이 훨씬 중 요하겠지. "...감기에 걸리면 이 집에서 나갈 테니까 걱정 마."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라." 시로가 너무나도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바람에,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 다. 시로가 정말로 감기에 걸린 나를 내 팽개쳐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부러 맞으러 나와 준 시로의 기분을 더 이상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로가 평소보다 말이 없는 것은 틀림없이 수사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까도 내가 토요시마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었으니까 말이다. 시로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물었다. "시로..." "왜?" "...토요시마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밀매용의다. 헤로인의." "헤로인?"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시로가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나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 나는 토요시마의 용의가 매춘이나 매춘강요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용의가 마약이라면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다. "요 2개월간 신주쿠 부근에서 검거한 마약 중독자 무리들 대부분이, 아무래 도 같은 남자로부터 약을 입수한 것 같더군." "그게 토요시마란 말야?" "그런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마약은 4과 관할이니 시로와는 상관없잖아." "뭐 그렇지. 하지만 헤로인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 상해사건을 일으키는 바 보가 급증한 덕분에 합동수사를 펼치게 됐거든. 그러자 마자 토요시마의 종 적이 뚝 끊어져서 암중모색 상태에 빠졌지 뭐냐..." 시로는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 평소와는 달리 말이 많아진다. 그래서 나는 조금 호흡하기가 편해지곤 한다. 나 같은 녀석도 시로의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실감이 드니까 말이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성가신 남자에게 반해버린 것일까. "시로의 힘이 되고 싶지만... 정말로 난 반 년 전에 잠깐 얼굴을 분 것 뿐이 야." "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깐 눈빛이 변해서 덤벼들었던 주제에. 알루미늄 도어를 열자, 좁은 방구석에서 시로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밤에도 혼자 남겨지게 될 것 같은 예감에 크게 낙담했다. 전화로 두 세마디 얘기를 주고받은 후, 시로는 양복을 어깨에 걸쳤다. "...또 일?" "그래." "오늘밤 안에 돌아올 거지?" "몰라." "아침밥 준비해 둘까?" "필요 없어." 다녀오라고 말할 기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시로는 테이블에서 담배와 지포라이터를 집어든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 가버렸다. 이런 상태니까 한달 간 한 집에서 지내도 키스 이상 진전할 수 없 는 것이다. 나는 시로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사진 다섯 장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흐릿한 흑백 사진 속에는 변함없이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토요시마의 얼굴 이 찍혀있었다. 자칭 외국인 전문 무역상이라던 토요시마는, 하는 짓이나 페 션이 요란하고 끈적끈적한 말투가 아니꼬운, 내가 엄청 싫어하는 타입이었 다. --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잊혀지지도 않는 반년 전 그날. 나는 토요시마의 거래용 상품으로 외국인 손님에게 팔렸다. 내가 같은 남자와 두 번 다시 자지 않는 주의였기 때문일까, 한 번 뿐이라면 본전을 뽑겠다고 생각했는지 토요시마는 나를 굉장히 거칠게 다뤘다. 그가 안내한 T호텔 스위트에서는 체격이 엄청 좋은 흑인이 기다리고 있었 다. 하룻밤 토요시마의 상대를 해 주면 20만 엔을 주겠다는 당초의 약속은 어디 로 갔는지, 나는 그 흑인에게 기절할 때까지 당했다. 게다가 토요시마 녀석은 비디오 카메라까지 준비해 내가 흑인에게 강간당 하는 모습을, 녀석은 침을 흘리며 비디오로 찍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성으로 절대 절정을 맞이하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 국 나는 쾌감에 미쳐 세 번이나 승천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녀석들은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된 나를 침대에 남기고 재빨리 호텔에 서 나가버렸다. 그 후 토요시마는 2번가에서 모습을 감췄고, 나는 결국 아직도 토요시마에 게 복수하지 못한 상태다. 그 굴욕의 영상이 시장에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그 후로 나는 여 기저기 가게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것 같은 테이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센가 조사를 단념했다. 토요시마의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촬영한 것 뿐일 거라고 체념하고. "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지만 시로는 나가 버 린지 오래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위험해..." 만약 토요시마가 경찰에 잡힌다면, 당연히 토요시마의 아지트는 자택수사 를 받게 될 것이다. 증거품 압수라는 이유로 경찰이 모든 것을 가져가게 되리라. 마약 거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 비디오도 당당하게 압수해서 내용을 확인 해 볼 것이다. 상관없다, 용의의 종류 따위는... 하지만 당하면서도 쾌감에 미쳐 환성을 지르는 음란한 내 모습이 경찰에 게... 시로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 나는 시로의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시로에게 그런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은... 그것만은 절대로 싫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선글라스를 낀 다음 아파트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 신주쿠 2번가로 달려갔다. 과거의 오점이 백일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깨달은 순간, 나는 격 렬하게 후회했다. 토요시마가 루트의 손님이었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시로에게 할 말이 아니 었건만! 그런 나를 알면 아무리 철의 심장을 지닌 시로라 해도 나를 보는 눈이 달라 질 것이다. 시로는 점점 더 나를 귀찮아 할 테고, 싫어할 테고, 더러운 물건처럼 나를...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시로는 틀림없이 자신의 집에서 나를 쫓아낼 것이다. 그렇게되면 두 번 다시 시로와 만날 수 없게 된다. "그것만은 안돼..."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경찰측이 토요시마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2번가를 드나들었다는 정보는 분명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 기분 따윈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이는 시로의 태도로 판단해 볼 때, 경찰 측은 토요시마의 성적인 취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건만! "난 바보야!" 후회만이 초조하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2 신주쿠 거리로 접어든 순간, 나는 만 엔짜리 지페를 던지고 택시에서 뛰어 내렸다. "손님, 거스름돈..." "필요 없어!" 전속력으로 달리려던 나는 일단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진정하라고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다. 그렇다, 아직 경찰은 여기까지 수사의 손길을 뻗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약간 리드하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시로는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 다...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뎌 여전히 가로등 불빛아래 몰려있는 아이들고 누군 가를 꼬시기 위해 라면 가게 모퉁이에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무시하고, 나 는 모 비디오 숍에 들어갔다. 작고 수상해 보이는 가게지만 제작에서 판매까지 손을 대고 있는 포르노 비 디오 전문점이다. 가게 안에 손님은 없었다. 포르노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접원이 나의 등장 에 눈을 크게 떴다. 선글라스를 벗자 점장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어머나, 나츠키잖아! 웬일이야, 여길 다 오고." 기묘한 인터네이션이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오랜만이야, 점장. 어떻게 지내나 해서 잠깐 들러봤어." "어머나, 기뻐라. 나츠키야말로 어떻게 지내고 있어? 요즘은 통 얼굴이 안 보인다고 다들 서운해 하고 있어." 점장이 카운터 안에서 쪼르르 달려나와 뚱뚱한 배를 내게 비벼댔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하건만 왜 허리 사이즈는 세 배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걸까. "나츠키가 하도 찾아와 주지 않아서, 난 거리에서 나츠키를 닮은 소년한테 만 말을 걸게 되지 뭐야." "뭐야, 지금도 순진한 녀석들을 꼬셔서 이상한 비디오를 만들고 있어?"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배나온 점장은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삐죽거린다. "정말 싫지 뭐야, 요즘 젊은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까지 벗어버리는 거 있지. 세미 누드를 찍어도 되냐고 물으면, 엉덩이라면 노출 OK라고 자기 가 먼저 말하는 거 있지." 점장은 어느센가 내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레 예쁜 소년이라도 나츠키와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점장이 나를 꼬시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던 점장의 그런 시선이 왠지 지그은 불쾌하 게 느껴졌다. "...지금도 나츠키를 소개시켜 달라는 카메라맨이 끊이질 않아. 아직도 비디 오 찍을 생각 없어?" 그때 한 남자 손님이 가게 안에 나타났다. 손님은 나와 점장을 힐끔 바라본 후 얼굴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코트 깃을 세웠다. 게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행동 패턴이다. 순님을 무시하고, 나는 점장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이냐며 가슴을 두근거리는 점장을 비디오 숍 구석으로 끌고 간 후, 나는 점장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그 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 뭐...?" 나는 점장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착 시켰다. 순간 점장의 몸이 느닷없이 반응했다. 2번가에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나의 테크닉은 현역 때와 마찬 가지인 모양이다. 역시 내 몸은 장사방법을 잊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이런 행위가 몸에 배어있다. 순간 괴로움이 내 가슴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 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점장..." "왜, 왜? 나츠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점장의 호흡이 차츰 거칠어진다. "실은 찾고 싶은 게 있는데..." "뭐, 뭔데?" "굉장히 야한 비디오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점장의 부풀어오른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점장의 허 리가 음란하게 흔들렸다. "굉장히 야한 비디오...? 그런 거라면 여기에 잔뜩..." 나는 점장의 입술을 검지 손가락으로 살며시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강간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 흑인과 절세 미남이 나오는 건 데..." "타, 타이틀이 뭔데...?" "몰라.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찾고 싶어. 제작처를 알고 싶거 든..." "제작처? 어, 어째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긋 웃었다. 점장의 거친 호흡이 내 뺨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느 썩은 물고기 같은 냄새에, 나는 참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그 비디오를 촬영한 카메라맨, 엄청 센스 있다고 평판이 자자하던걸. ...나 도 지금이 한창 좋을 때고, 기왕이면 하나 정도 기념으로 촬영해 놓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어머나, 나츠키!" 점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그 작품의 완성도를 내 눈으로 확인한 후에 결정하고 싶거든. ...그 러니까 점장, 다른 사람한텐 비밀로 해 줘. 내가 비디오를 찍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녀석들이 시끄럽게 굴 테니까. 그러니까 절대 비밀로 해 줘야 돼? 그리고 만약 그 비디오 제작처를 찾아주면 내 프라이비트 필름 점 장에게 찍게 해 줘도 좋아..." 최후의 일격으로 나는 가죽 재킷의 지퍼를 열고 점장의 손을 내 가슴 위에 얹었다. 땀에 젖어 축축한 점장의 손바닥이 머뭇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나 는 일부러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점장의 귓볼을 달콤하게 깨물어 주었다. "...나 당신의 애완동물이 되어 줄게. 묶어도 좋고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해도 상관없어. 물론 점장이 날 안아도 좋고. 내게 안기고 싶다면... 그것도 OK. 어 떤 포즈를 요구해도 기꺼이 따르겠어. 점장의 카메라에 듬북 서비스해 줄 게..." 나는 점장의 청바지 지퍼를 손가락으로 반쯤 열고는 작게 접은 메모지를 그 곳에 넣은 후 위에서 가볍게 움켜잡았다. "...이거 내 핸드폰 번호. 어제 막 구입한 건데 점장한테만 가르쳐 줄께. 그 러니까 이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야...." 설마 사정한 것은 아니련만, 점장은 반쯤 눈을 까뒤집고 부르르 경련을 일 으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점장..." 점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시라도 빨리 찍히고 싶어, 점장..." 최후의 일격으로 나는, 축축한 혀로 내 입술을 핥았다. 귀까지 새빨개진 점 장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 기다릴게..." 가게에서 나올 때 아쉬운 듯이 뒤를 돌아보자, 점장은 아직도 끈질기게 고 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게에서 나온 직후, 나는 술 자판기를 향해 달려갔다. 그 후 내가 마시지도 못하는 알콜로 입안을 소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 라. 3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옆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어슴푸레한 실내보다 새까만 그림자가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베갯맡의 라이트를 켜고 이불 속에서 말했다. "...어서 와, 시로." 시로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후 테이블 앞에 책상다리 를 하고 앉아서 다매에 불을 붙였다. 새빨간 불에 희미하게 비친 시로의 표정 은, 평소보다도 훨씬 험악했다. 내가 자신의 침대를 점령하고 있게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로에게 누울 곳을 제공하기 위해 조금 벽 쪽으로 붙어 누웠다. 시계를 보자 아직 새벽 4시 반. 이런 시간에 시로가 집에 돌아오다니 드문 일이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 지만, 내가 이곳에 눌러 살게 된 후로 시로는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돌아 온 적이 거의 없다. 희미한 어둠 속, 묵묵히 담배를 피고 있는 시로를 이렇게 침대에서 올려다 보고 있자니, 왠지 이 세상에 단 둘이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왠지 굉장히 평온하고 안타깝고 기분좋은 느낌. "...일은 어땠어? 진전이 있었어?" 내 질문에 대답할 기색도 없이, 시로가 담배연기와 한숨을 내뱉었다. 어지 간히 수사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미간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문득 나는 시로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지금 경찰이 쫓고 있는 남자가 엄 청난 변태라는 것을, 시로는 틀림없이 상상도 못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 시로. 내가 토요시마를 찾아서 내 창피한 비디오 를 뺏은 후에는 제일 먼저 시로에게 정보를 제공할테니까. "-----------... 나츠키." 문득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사랑하여 마지않는 남자를 올려다보 았다. 시로의 눈동자 속에 빨갛게 타고 있는 말보로의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 다. "아까까지 어디에 있었지?" 순간 내 심장은 멈추고 말았다. 어째서...? 입술이 떨렸다. "2번가가 그리워 졌냐?" 나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고 눈을 크게 떴다. 입을 연 순간 턱이 덜덜 떨렸 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로. 아까... 라면 같이 밥 먹었잖아. 그 후에 나 목욕하고 나서 금방 잠들었어." "전화도 무시하고?" "아..." 시트를 움켜쥔 손이 땀에 젖어 있었다. 평소에는 죽어도 전화를 걸지 않는 주제에, 왜 하필 이럴 때만 쓸데없는 짓을... "자...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전화를 받는 게 귀찮아서..." 시로, 제발 부탁이야 시로.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저 시로에게만은 죽어ㅗ 보이고 싶지 않은 비디오를 처분한 후에 나를 추궁해 줘. 지금은 아직 안돼 아직 이르단 말이야, 아직...! "거짓말하지마, 나츠키." "거짓말이 아냐,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그럼 이건 뭐지!?" 시로가 느닷없이 베갯맡에 던진 몇 장의 흑백사진을 본 순간, 내 얼굴은 굳 어버리고 말았다. "아...!" 그것은 척 보기에도 숨어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 비디오 숍 구석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죽 재킷의 소년과 작고 뚱뚱한 청바지 차림의 중년 남자가 음란하게 몸을 겹치고 있는... 점장의 반쯤 열린 지퍼에 내가 하얀 쪽지를 집어 넣고 있는 장면까지 찍혀 있었다. "이래도 거짓말이라고 발뺌할 거냐?" 나는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내 뒤에 가게에 들어온 남자-- 그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는 형사였단 말 인가! 제기랄! 예전에 내가 관련된 두 번의 살인사건으로, 나는 신주쿠에서 완전히 얼굴이 알려져 있다. 그 남자, 그래서 날 미행했던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시로에게 했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 이미 2번가 부근에 수사의 손길이 뻗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재 수 없게도 스스로 수사선상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냐, 이런 건." "이 남자에게 뭘 건넸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설마 너 운반책 같은 걸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로...!"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린 나를, 시로는 색소가 옅은 감정 없 는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담배를 끈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서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슬슬 적당한 방을 찾아봐라." 느닷없이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잔혹한, 냉혹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보증인 정도는 되어줄 테니까." 도어가 닫힌 후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드디어 시로에게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한 달이나 공짜 밥을 먹고 폐를 끼쳤는 걸." 나는 이불에 누워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애초부터 무리였다. 나 따위가 형사에게 사랑을 받으려 하다니. 내가 아무 리 시로에게 좋아한다고 연발해도, 시로의 귀에는 내 말따윈 한 마디도 들리 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시로를 필요로 해도, 시로는 내가 필요 없다. 오히려 나는... 귀찮은 존재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 * *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을 맞았다. 학원 같은 곳은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나가라는 말까지 들은 주제 에 끈질기게 집에 붙어있는 것도 비참해서 할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 왔다. 비틀거리며 학원에 도착한 내가 수업중인 교실문을 주저없이 열자, 일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냐, 지각도 당당하게 하는 구나, 아마노." 그 밝은 목소리에 교단을 흘낏 쳐다보자, 세계사 선생인 타케와키가 쓴웃음 을 짓고 있었다. 타케와키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그는 모 방송국 특별 방송 리포터로 본직인 교사를 내팽개치고 반환 1주년 을 맞은 홍콩을 진귀한 물건을 발굴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화가 난 원장이 타케와키는 모가지라고 외쳤었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무사하게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 수업에 늦다니 선생님은 슬프구나, 아마노." 타케와키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강사답지 않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운동선수로 착각할 만큼 상큼한 외모 때문인지, 타케와키는 학원 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강사다. 나이도 아직 스물 다섯이라, 얘기가 통하는 형님 같은 존재로서 남녀 모두 그를 따르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처럼 지각을 해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반드시 이유를 묻곤 한다. "무슨 일이냐, 아마노. 몸이라도 안 좋니?" "...단순한 늦잠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폭소를 터뜨려 주기도 한다. 내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수업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타케와키는 갈색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창가 제일 끝의 내 자리로 다가왔다. "점심시간에 너트를 들고 자료실로 와라. 오늘 수업 내용과... 아마노 너에 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이 마음에 걸려 고개를 들자, 타케와키는 이미 나가버린 후였 다. * "여어, 왔구나, 아마노. 발 디딜 틈이 없어서 미안하다. 자, 이쪽으로 와라." 그의 권유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타케와키가 혼자 사용하고 있는 좁은 자료실 벽은 책장으로 빈틈없이 채워 져 있고, 박스와 둥글게 만 지도, 어디서 발굴해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물 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점심은 먹었지? 그럼 빨리 특별 수업을 시작해 볼까." 귀찮다고는 생각했지만, 나는 밉보일 생각은 전혀 없다. 될 수 있는 대로 타인과 관련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모범생으로 행동 하고 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식의 호출은 내게 귀찮은 참견에 불 과하다. 상대가 아무리 인기 절정의 타케와키라 해도 내게는 관계없다. 그저 그 말을 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에, 나는 타케와키의 직성이 풀리도 록 15분 정도만 시간을 내 주겠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를 이해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마노?" 그 부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타키와키가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일까, 의자에 앉은 내 뒤에 서 있는 타케와키는 내 양쪽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공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구나." 타케와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용건부터 먼저 끝내도록 할까." 그렇게 말하며 타케와키는-------... 책상 위의 모니터를 켜고 비디오 테 이프 하나를 재생시켰다. "내가 발굴한 물건이다. 잘 감상하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내 두 눈은 이미 화면에 못 박혀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 날의 기록이었다. 한 사람이 덩치 큰 흑인에게 옷을 찢기고 무참한 모습으로 버둥대고 있는 영상이었다. 갈색 피부를 지닌 녀석이 거칠게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 졌다. 그는 절규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도망치려고 하는 그의 등을 검은 거구가 덮쳤다. 검은 팔이 그의 다리를 벌리고 몸을 안아 올렸다. 그는 버둥거리며 도망치 려고 했다. 흑인이 큰 소리로 포효했다. 그의 절규. 남자의 높은 웃음소리. "이 카메라 워크가 절묘하단 말야..." 타케와키가 내 귓가에서 중얼거렸다. 비디오카메라는 두 사람을 집요하게 촬영한 후, 그를 클로즈 업하고 난 뒤 황홀경에 빠져있는 그의 얼굴로 이동했다. "...봐, 처음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아마노 너도 차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 지...?" 타케와키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내게 나 자신의 추태를 해설해나갔다. 화면속의 나는 확실히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타케와키가 목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다. 화면 속의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대위로 무너져 내렸지만 그래도 그 는 여전히 날 안은 채 맥박치고 있었다. 되살아나는 굴욕에, 나는 눈물마저 흘리며 화면을 노려봤다. "아마노 너는 어디든지 다 아름답구나..." 내 몸 안에서 검고 큰 뱀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검은 피부와 갈색 피부가 서로 얽혀있는 그 음란한 소리와 영상은 끝없이 계속됐다. "아아, 아마노 너는 최고의 예술품이야..." 타케와키는 어느 샌가 내 옷을 풀고 뜨거운 왼손으로 내 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아무래도 등뒤에서 한창 자신의 것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 양이다. 타케와키에 의한 진동을 등뒤로 느끼며, 나는 이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피부를 어루만지는 타케와키의 손은 비디오 속의 흑인을 흉내내 고 있는 듯 격렬하고 집요하고 폭력적이었다. "아마노... 넌 어째서 이렇게 완벽한 거냐. 어째서 넌 이, 이렇게... 아마노... 아아, 아마노..." 흑인이 절정을 맞이한 순간, 좁은 자료실 한 가득 비릿한 내음이 진동했다. 타케와키도 동시에 절정을 맞은 모양이었다. 나는 희롱 당하는 가엾은 나 자신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 었다. * * * [...숨기고 있었지만... 나는 줄곧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었 어. 홍콩에 가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지. 일본에서는... 인기 있는 강사인척 하며 남자들을 은근슬쩍 만지는 게 고작이니까. 홍콩에서 말야, 아마노군과 꼭 닮은 천사상을 발견했어. 한 시대의 물건이라고 했지만 지금 홍콩에서 골 동품을 발견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고, 아무리 봐도 가짜였지. 그랬더니 천 사상을 사면 이 비디오를 서비스 해 주겠다고 하더군. 간파당한 거야. 내가 그쪽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좀 더 놀란 것은 그쪽에서 비디오 도입부 를 보여줬을 때였어. 화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난 금방 아마노군이라는 걸 알았지. 결국 나는 비디오를 갖고 싶어서 가짜 천사상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사 버렸어. 나는... 나는... 아마노에게 푹 빠져 있었어! 하지만 비디오만으로 참으려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나는 강사니까 결코 아마노군을 상처 입혀서 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아마노군의 얼굴을 본 순간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어서... 그래서 ...이런짓을... 이 비디오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 지 않겠어. 약속하마. 이제 두 번 다시 이런짓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날 용 서해 줘.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마노...] 타케와키의 사과보다, 나는 비디오가 세간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쇼 크였다. 다행히도 라벨은 손 글씨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의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제조원의 기록 등은 일절 없어서, 겨우 비디오를 발견했다 해도 정 작 중요한 사실은 불명이었다. 상큼한 강사의 가면을 쓰고 있던 변태 호모 타케와키는, 마지막에는 울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동정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타케와키를 용서해줬다. 나 는 불쌍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괴로워지곤 한다. 나의 새 아 버지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타케와키에게 웃어주었다. 다음에 좋은 비디오를 발견하면 빌려주겠다고 동료의식을 보여주기까지 했 다. 어른이 울면서 사과하면 용서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 * * 내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 날 오후의 일이었다. 벼랑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으로 학원 근처에 위치한 부동산의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설마 이렇게 빨리 점장으로부터 연락이 올 줄은 몰랐게 때문에, 나는 솔직 히 놀라고 말았다. [정말로 나츠키의 누드를 찍게 해 주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조사를 한 걸까. 복잡한 기분이다. "물론. 하지만 어디까지나 프라이비트니까 더빙이나 렌탈은 금지." [당연하지! 나만의 보물로 간직할께!] 점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비디오를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의 주소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 사람 무역회사의 사장이래. 마침 지금 귀국해 있는 모양인데, 내일 타이 로 떠난다지 뭐야. 한동안 일본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나.] "타이...?" 도주일까, 약을 가지러 가는 것일까. 어느 쪽이건 경찰은 이번에는 토요시마를 체포하지 못 할 테고 수사도 헛수 고로 끝나리라. 그렇다면 나의 집행유예도 연장되는 걸까, 하지만... 연장은 어디까지나 연장일 뿐 해결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시로의 실망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어느 쪽이건 오늘이 승 부다. [그래서 말야. 나츠키가 찾고 있던 비디오 말인데, 그거 국내에서는 입수 불 가능이래. 사장이 본업으로 거래를 할 때 단골 손님에게만 서비스 하는 특별 한 비디오라고 하더라구. 아무래도 진짜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인 모양이야. 위험하니까 사장이 항상 들고 다니나 봐.] 점장이 알려준 정보에 나는 확신을 느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입수 불가능이라는 정보에, 울고 싶을 만큼 감사함을 느 겼다. 타케와키처럼 몰래 일본으로 갖고 들어오는 녀석이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 만 말이다. [...그래서 말야, 나츠키. 비디오는 찾지 못했지만 나 열심히 루트를 찾았잖 아? 그러니까...] "OK. 목욕정제하고 다음주에 그쪽으로 갈게." [정말?! 고마워! 목욕은 내가 시켜줄 테니까 그대로 와!] 쓴웃음을 지으며 OK라고 대답한 후,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전화를 끊었다. 미안, 점장. 나 약속을 지킬 수 없어. 이제 난 두 번 다시 2번가에는 돌아가 지 않아. 그러니까 연락 불가능일걸. 미안해, 점장. 점장이 가르쳐 준 토요시마의 아지트로 찾아가기 위해 나는 재빨리 역으로 향했다. 빨리 이번 일을 처리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는걸, 뭐... 5 토요시마의 아지트는 시모키타자와에 있었다. 역에서 제법 복잡한 골목을 지나 위치한 싸구려 맨션. 최상층인 4층은 집 하나 뿐. 문에도 우편함에도 집주인의 이름은 없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체인을 푸는 소리가 들려온 후 10센티 가량 문이 열렸다. 턱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안색이 나쁜 남자가 의아한 듯한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칸자키라고 합니다. 저... 친구한테 들었는데 여기 사장님이 영화에 출연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길래... 그래서 저도 좀 흥미가 있어서... 저, 사장님 계 시나요?" 나는 어디까지나 순진하고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만약 이 남자가 그 비디오를 봤다 해도, 토요시마가 찍은 앵글은 어디까지 나 변태노선이라 거의 그곳만이 클로즈 업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은 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나츠키라고 이름을 밝히는 것은 위험하다.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여야 한다. 토요시마에게 비디오를 감출 시간만 주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남자는 일단 문을 닫고 체인을 푼 다음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제법 넓은 원 룸이었다. 중앙에 검고 커다란 칸막이가 서 있어서 방을 좌우로 2등분하고 있었다. 정 면의 창에는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왼쪽에는 비디오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세 개. 저곳에 내가 찾고 있는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 --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휘유~'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희미한 간접조명을 받으며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거 그리운 손님이로군." 난 주먹을 움켜쥐고 증오와 혐오를 담아 녀석을 노려보았다. 벌써 10월이건만, 토요시마는 오란한 빈티지 알로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의 방문에 그리 놀란 기색도 없이 온갖 폼을 잡고 술잔을 기울이며 나를 위아래로 핥듯이 보던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술을 핥았다. "옛날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짐승은 달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군, 나츠키군." 예전보다 훨씬 눈빛이 수상해진 토요시마가 입술 끝을 치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후 나는 자넬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굉장히 걱정했었 지. 내 얼굴도 보기 싫은 것 아닐까 하고. 그래서 자네가 눈을 뜨기 전에 허둥 지둥 호텔에서 빠져나갔던 거야." 토요시마가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그리고는 정면에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데킬라를 권했다. "사양할 것 없어, 나츠키군. 재회를 축하하는 뜻에서 어때?" "난 술은 안 마셔." 테이블에는 알콜도수가 높아 보이는 술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틀림없 이 토요시마는 이 방에 아이들을 끌고 와서 술을 먹이고 옷을 벗긴 후 마음대 로 촬영 하는 것이리라. "...아직 내게 화가 나 있나 보군. 이 미모의 소악마는." 그 토라진 듯한 목소리에 오한이 느껴졌지만 나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 력했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고 이곳에서 아무 탈 없이 덜아가야만 한다. 돌아간 다... 는 말에, 내 의식이 약간 흐트러졌다. 돌아갈 집 따윈 이제 아무 데도 없 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굳게 먹고 흥정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난 당신을 죽여버리려고 했어. 하지만 이젠 시효가 다 됐으니까." "그건 날 용서한다는 의미?" 나는 재빨리 눈을 감으며 진정하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분노를 드러내면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낮아질 뿐이다. 지금 내게 무엇이 최우선 사항인지 를, 나는 끈질길 만큼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 도 그에게 덤벼들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스스로도 한심한 타협이다. 그런 지독한 짓을 당해놓고 용서 할 수 있을리 가 없다. 하지만 토요시마로부터 비디오를 빼앗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비디오 테이프가 꽂혀있는 책장을 흘낏 바라보았다. 100개 이상은 될 듯한 테이프들. 척 보기에 이 집에는 토요시마와 수염 남 자 두 사람뿐이다. 이 정도면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군. 용서해주겠다는 거군. 다행이다. 자네는 사진촬영도 비디오 출 연도 거절한다는 소문이라 나도 그만 그런 비겁한 수단을 취하게 된거야. 무 슨 수를 써서라도 자네의 아름다움을 필름에 남기고 싶었거든. 그게 내 의무 라고 생각했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 알아주겠지? 나츠키군이라면..." 알게 뭐냐고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고, 나는 어디까지나 쑥스러운 듯 일부러 이야기의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굉장한 걸. 이렇게 잔뜩 여러 녀석들을 촬영했구나. 굉장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장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토요시마가 가 볍게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킨 후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네와 비교하면 다른 녀석들은 다 올챙이에 불과해. ...난 말야, 나츠키군 이 청년만이 지닌 남자다운 섹시함과 순진한 독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 에 나츠키군에게 매료된 거야." 토요시마가 나를 소파로 끌고 가서 자신의 옆에 앉혔다. 등줄기에 오한이 흘렀다. "아아, 나도 잊을 수 없어. 그 촬영은 정말 훌륭했지. 빌리의 검은 피부와 나 츠키군의 싱싱한 갈색 피부의 절묘한 콘트라스트가 얼마나 아름다웠는 지--." 나는 이를 악물고 굴욕을 참으며 맞장구를 쳤다. "나한테도 보여줘, 그 비디오. 내가 어땠는지 엄청 흥미가 있거든. 그래서... 줄곧 찾고 있었어." 토요시마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서 시가를 꺼냈다. 나를 안으로 안내해 준 수염 난 남자가 토요시마의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 다. 시가가 타 들어가는 냄새에 나는 일순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말이지. 이제 없어.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거든." 뭐가 넘겨준 거냐?! 더빙해서 홍콩에 뿌리고 다녔던 주제에. 시가를 재떨이에 놓은 후, 토요시마는 그대로 룸을 2등분하고 있는 칸막이 너머로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고 한 나를 저지하려는 듯이 수 염 남자가 커피를 권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재떨이에서 시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연기 냄새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나는 칸막이 너머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마스터 테이프가 있을 거 아냐?" 마스터 테이프를 빼앗으면 당장 바닥에 쓰러뜨린 후 직성이 풀릴 때까지 걷 어차고 짓밟아서 거길 못쓰게 만들어 주마. 그 후에는 칼에 찔리건 마약 중독자가 되어 홍콩으로 팔려가건 상관없다. 그런 굴욕적인 강간에도 희희낙락 허리를 흔들던 나를 시로에게 보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중에 더빙해 주지." "나중이라니... 난 지금 보고싶어...!" "이런, 역시 화가 나 있는 거 아냐? 나츠키군." "그...렇지 않아. 그저 비디오를... 여기 놓아두지 않았다면..." "--아니, 있어. 이곳에." 토요시마가 천천히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뭔가... 시간을 벌고 있는 듯한... 점점 끌고 있는 듯한-- 그런 기묘한 분위 기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빨... 리..." 나는 문득 눈앞이 흐릿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혀도 잘 돌아가 지 않았다. 게다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괴롭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나른하고 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이건 뭐지...? "나츠키군------." 토요시마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신경이 둔해져 서 입술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효과가 있군. --대마초도." 그런 말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시가의 정체를 깨달았다. 연기로부터 도망쳐서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토요시마가 수염 남자에게 칸막이를 치울 것을 명령했다. 칸막이 너머로 나타난 것은 촬영용 카메라 한 대와 킹 사이즈의 침대였다. "자, 연극은 끝이다. 용서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은 그만두시지. 자네가 그런 고분고분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까." ...나 지금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는 걸지도... "그럼 빨리 시작해 볼까." 토요시마가 사이드 테이블에 마시다 만 술잔을 내려놓은 후 손가락으로 유 리잔을 가볍게 튕겼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침대 뒤에서 한 사람의 백인이 나타났다. 긴 금발. 느끼한 면상.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다. 앞으로 내 몸에 일어날 악몽에, 나는 미리 구역질을 느꼈다. "소개하지, 나츠키군. 그의 이름은 프레드. 알고 있어? 파리 컬렉션에서 활 약중인 톱 모델이지. 그 비디오를 보고 나서 자네의 열렬한 팬이 됐다더군. 전부터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안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부탁했는지 몰라. 그래서 어제 미국으로 연락을 해 줬지. 그랬더니 번개같이 날아오더 군." "...뭐?" 어제... 미국에서? "자넨 지나치게 무대포군. 이런 곳에 혼자 찾아올 줄이야. 이건 맘대로 요리 해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지?" 토요시마가 프레드에게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프레드는 축 늘어져서 움직 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가볍게 안아서 촬영용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는 초점이 맞지 않는 내 눈동자를 들여다본 후 희롱하듯이 내 뺨을 핥았다. "나츠키군, 자넨 상담할 사람을 잘못 골랐어. 비디오 가게 점장과 내가 친밀 한 관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나? 그 녀석은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듣지. 이게 갖고 싶어서 말야." 토요시마가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 봉지를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하얀 가 루는 헤로인일까. 나는 이제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점장에게 팔린 것이다. 점장은 이미 약물중독이었다. 어제 점장은 그 후 곧 토요시마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넘겨주는 대신 점장은 이 하얀 가루를 듬뿍 손에 넣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 나를 몰래 촬영했던 형사는 마약 중독자인 점장의 신변을 조사하고 있 었던 것이리라. 그랬더니 거기 내가 나타나서 점장에게 하얀 꾸러미를 주는 걸 보고, 형사 는 나를 마약상인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형사는 곧 사진을 현상 해서 시로에게 보냈던 것이다. 시로가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운반책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 때문이다. 한마 디로 나는 운이 없는 것이다. 지금쯤 점장은 경찰에 잡혔을 것이다. 점장이 입을 열면 이곳에도 경찰이 들이닥치리라. ...만약 재수가 없으면 한창 당하는 도중에 들이닥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시로에게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게 되는 셈이다. ......비디오를 발견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군. * * * 좌우에서 눈부신 라이트가 나를 비쳤다. 카메라에 테이프가 세트됐다. 수염 남자가 시트 부근에 작은 기계를 놓은 후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는 토요시마와 명도를 조절하고 있다. 어느 샌가 가세한 두 명의 지저분한 일본인이 침대 좌우의 한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커다란 반사판의 각도를 조절하며 라이트 업을 테스팅하는 중이다. 녹아내릴 것 같은 의식 속에서, 나는 웃고 말았다. 엄청 본격적이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토요시마의 카메라 앵글은 변태 전문으로선 초일류다. 홈 비디오로 그런 작품을 촬영할 수 있다니 대단한 솜씨다. 이 센스에 본격적인 기재가 갖춰진다면 금세기 최고의 변태 광란 애로 무비 가 탄생하리라. 굳이 흠을 잡는다면 스토리성이 전혀 없다는 걸까나.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있는 씬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아직 손 대지 마, 프레드." 내 단추를 만지작 거리고 있던 프레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거둬들었다. 내 옆에 걸터 앉은 프레드는 이미 옷을 벗고 잇는 상태였다. 금색 가슴털, 목에는 금 목걸이, 그리고 배꼽에는 피어스. 가죽바지를 입은 하반신은 이미 부풀어 있었다. 프레드가 하얀 가슴 근육을 꿈틀꿈틀 움직이며 나를 도발했다. ...이봐, 당신은 내 취향이 아냐. 어차피 당할 거면 내게도 선택할 권리를 줬 으면. 예를 들면 이런 장신이 아니라 나보다 조금 큰 정도의 남자. 정면으로 안았을 때 그 정도가 몸이 딱 밀착돼서 기분 좋으니까. 게다가 이 런 경박해 보이는 녀석말고 지나칠 만큼 말이없는 과묵한 남자가 좋다. 근육질은 아니지만 실전으로 단련된 군더더기 없는 단단한 근육에 덮여있 는, 잘 연마된 가죽 같은 윤기 있는 캬라멜 색 피부가 좋다. 무수한 작은 상처자국이 마치 훈장처럼 멋있게 느껴지는... 머리는 물론 흑발. 좀처럼 자르지 않기 때문에 약간 길고 덮수룩하지만 그 게 또 야성적이라 제법 매력적인 느낌. 그런 남자가 상대라면 난 무슨 짓을 당해도 좋은데... 하지만 그런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시로 외에는 있을 리 없다. 시로가 나를 안아주지 않는다면, 내 몸은 평생 이상의 남자에게 안길 수 없 을 것이다.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내가 프레드를 깨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이리라. 팔 다리는 자유였다. 하지만 약물 때문에 힘이 빠져 있어서 어차피 저항은 불가능했다. "컨셉은 부화. 순진무구한 남자가 쾌락이라는 먹이를 먹고 요염한 나비로 변모한다--, 나는 그 과정을 찍고 싶어." 말은 잘 하는군, 변태 영감. 일절 그림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온 몸을 구석구석 촬영하 고 싶은 것일까. 타는 듯한 하얀 빛을 받으며,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먼저 옷을 벗겨 볼까." 토요시마의 말에, 프레드가 침대에 올라와 내 몸에 올라탔다. 토요시마가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프레드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다리 사 이를 핥듯이 찍은 후 녀석의 손가락 끝에 조준을 맞췄다. 프레드가 천천히 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가슴을 애무한 후 느닷없이 T셔츠를 좌우로 잡아 찢었다. "여전히 아름답군, 자네의 피부는." 토요시마가 웃으며 말했다. 내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다. 프레드가 내 가슴의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프레드 녀석, 지난번 비디오로 내 성감대를 학습했나 보군. "아아, 나츠키군. 너의 핑크 빛 작은 체리는 지금이 제일 먹기 좋을 대로 군..." 프레드가 베개로 손을 뻗어 깃털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깃털로 나를 간지럽혔다. 나는 참지 못하고 침대 시트에 몸을 비볐다. "멋지군.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했어. 목소리를 내도 좋아. 나츠키군." 만지면 반응하는게 당연하다. 그렇게 외치고 싶어도, 재갈이 물려 있어서 욕설을 퍼부을 수조차 없었다. 촬영 당하는 것은 굴욕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대로 촬영하게 내버려둬서 난 위험하지 않다고 방심하게 만드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절대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빈틈을 노려서 테이프를 전부 처분하 고 난 아무 걱정 없이 시로의 곁에서 떠나면 된다. 어차피 시로와 헤어져야 하는 이상 테이프를 찾건 말건 아무래도 상관없건만, 아직 나는 끈질기게 환 상을 품고 있다. 내가 없어지면 시로가 슬퍼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프레드가 내 가슴을 핥았다. "으응......!" "나츠키군, 참지 않아도 돼. 자네는 무엇보다도 섹스를 좋아 하잖아? 섹스 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잖아? 그렇지, 나츠키군?" 토요시마의 신호에 프레드가 내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내리고 단숨에 바지를 끌어내렸다. "와우!"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실크 T백 브리프를 보고, 프레드가 환성을 지르며 천 박하게 웃었다.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백화점에서 이걸 봤을 때는 엄청 웃었으니까. 이런 작은 천 쪼가리 에 그게 다 들어가겠냐는 둥, 이렇게 얇고 다 비치면 다 보이겠다는 둥 비웃 으면서도, 결국 나는 이 브리프를 사고 말았다. 시로와의 첫날 밤에 입으려고 샀건만, 기회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 로와의 결별 기념으로 입었건만 오히려 녀석들을 기쁘게 해 주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츠키군, 혹시 촬영을 위해서 일부러 이런 도발적인 속옷을 입고 온 것이 아닌가? 모처럼 멋진 속옷을 입고 왔으니 자~알 찍어줘야 겠군." 프레드가 자세를 바꿨다. 토요시마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카메라를 가까이 댔다. 그렇지 않아도 얇은 천이 프레드의 침에 젖어 피부에 달라 붙는다. "우..." 나는 도망치지도 못한 채 묵묵히 굴욕을 참았다. 아무리 버텨도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녀석들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내 마음을 약하 게 만들고 있었다. 누구에게 안겨도 반응하는 민감한 몸을 지금처럼 원망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어도 소용없어. 자네가 실은 지금 굉장히 흥분하 고 있고 좀 더 해 주길 원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왜냐하면 자네는..." 입의 재갈이 벗겨졌다. 나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내 입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높은 교성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선천적으로 음란한 인간이니까--, 나츠키군."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분했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서져 내렸다. 음란하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 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앗..." "그래, 좋아, 나츠키군..." 나는 세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앗, 아앗, 아앗..." 쾌감을 느끼고 싶지 않건만, 내 몸은 쾌락에 휩쓸려 갔다. 싫은데, 정말로 싫은데! 능숙하게 움직이는 프레드덕에, 나는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으...응, 으응, 앗...!" 도착적인 쾌감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허리를 흔드는 내가 있었다. 음란한 웃음과 음란한 눈길, 그리고 조명이 뜨겁게 느껴졌다. 괴로웠다. 이 행위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도. 차라리 알몸으로 벗겨 주길 바랬다. 빨리 끝내주길 바랬다. 빨리 절정을 맞이하고 싶었다. "으응, 응... 아아." "이제야 겨우 적극적이 됐군. 역시 자네는 이렇게 나와야지." 어차피 나는 음란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쾌감에 몸을 맡기고 싶다. 싫은 일도 괴로운 일도 이 행위 속에서 옛날처럼 전부 잊어 버리고 싶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것일까, 뭐가 이렇게 내 가슴을 죄어드는 걸까, 시로와 만난 후부터 나는 꽤나 약해지고 말았다. 내가 상처 입어봤자 시로가 상처 받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럴 때조차 끈질 기게 시로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 어차피 안아주지도 않는 몸을 아무리 더럽혀 봤자 시로에게는 아무 관계도 없건만,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시로에게 할 변명만 생각하고 있다.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시로에게 변명을 하고 싶어서 떨고 있 다. 참을 수 없어진 것이리라. 프레드가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축 늘어져 있는 틈에 재빨리 가죽 바지를 벗어 던지고는 보 드카를 들이마신 후 타잔처럼 포효하며 입에 문 보드카를 뿜어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도망치게 둘까 보냐 하고, 프레드가 나를 찍어눌렀다. "아---------------!!" "어기! 좀 더 비춰!" "아, 앗, 아, 아, 아... 아앗!!"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리는 침대에 매달렸다. 반사판의 각도가 바뀌었다. "최고야! 최고 걸작이야!" "오오오!" 미친 듯이 기뻐하는 토요시마의 목소리가, 나를 정신없이 안고있는 프레드 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남창으로서 살아가도록 정해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나는 어느샌가 체념 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며칠이나 이렇게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느 샌가 토요시마도 촬영을 방치하고 수염 남자와 안고 있었다. 토요시마 는 수염 남자에게 안긴 채 날 안아오자 프레드가 울컥 해서 날 되찾으려고 하 는 것이 우스워서, 나는 녀석을 부드럽게 애무해 줬다.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반사판을 들고 있던 녀석들도, 지금은 서로를 안아주 고 있었다. 이젠 아무 것도 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모두 정신 없이 이 음란한 쾌락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것 만이 이 세계를 연결하는 전부였다. 몸 안에서 일단 불이 붙은 성욕은 차츰 업화가 되고 불기둥이 되어 '나'라는 세계를 태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뜨거웠다. 뇌수와 혈관에 느껴지는 뜨거움 만이 살아있는 증거였다. 시로에게 줄곧 느껴온 굶주림--, 그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곳 없는 불 꽃과 비슷한 감각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지옥과 극락의 열대야. 알콜 램프의 불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쾌락 속에서, 나는 거의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잃어버린 채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7 나는 지금 프레드의 배 위에 누워 있다. 불꽃에 달궈 진 스푼 위에서 하얀 가루가 녹아들어 갔다. 누군가가 내 팔을 잡고 고무 튜브를 감았다. 떨리는 손가락,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침, 그리고 텅 빈 눈동자... 다들 약 에 취해 있었다. "나츠키군, 지금 곧... 동료로 만들어 주...지. 좀 더 쾌감을 느, 느낄 수 있 어..." 붉은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린 사람은 토요시마였다. 수용액을 주사기에 주입하며 져석이 웃었다. 바늘 끝이 불을 튀기며 빛난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임무를 떠올렸다. 테이프를 태워버려야 해...!! 다음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알콜 램프를 걷어찼다. 처음 타기 시작한 것은 침대였다. 보드카를 듬뿍 흡수한 덕에, 불길은 단숨에 시트위로 번졌다. "으아아아악!" 프레드의 금발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프레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으며 불을 뿜고 있는 침대 위에서 미친 듯이 굴렀다. "빠, 빨리 꺼!"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흘낏 바라보며,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 려 칸막이를 쓰러뜨린 후 라이트를 걷어찼다. 천으로 만들어진 칸막이는 침대의 불길을 더욱 가속시켰다. 곧 불길이 벽을 타고 기어올라 융단을 태우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수염 남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보드카 병을 집어들고 약에 취해있는 남자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후 병으로 비디오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데킬라와 버본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져석들에게로 던졌다. "안돼애애애!" 토요시마의 절규. 나는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최고의 미소를 선사해 주었다. "운이 없군, 당신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너무 강해서 불을 끌 수는 없었다. 토요시마와 남자들은 대마초와 헤로인을 끌어안고 허둥지둥 방에서 도망쳐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이미 경찰이 근처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체포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안됐군, 토요시마씨." 나는 불길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현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바람에 이런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방 한 가운데에는 불기둥을 뿜고 있는 칸막이에 침대, 그리고 한 걸음도 들 여놓을 수 없는 불타는 융단이 깔려 있다. 나는 맨발에 알몸이기 때문에 이 창가의 바닥만이 내게 주어진 최후의 영역 이었다. 온 몸에 흘러내리는 땀이 나로부터 체력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서 불에 던져 넣었다. 그렇다. 나는 비디오를 처분하기 위해 일부러 불길속에 남은 것이다. 비행기 사고 시 곧잘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기체의 손상은 심하지만 보이스 레코더는 무사해서 어느 정도 재생할 수 있 는 경우가 말이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그 테이프가 타지 않고 남아서 경찰의 손에 들어간다 면--그래서 시로가 그 테이프를 보게 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으리 라.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프가 녹아들어 갔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연기를 피해 고개를 들린 채 인멸작업에 전념했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유 독가스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참았다. "우와..." 나는 허둥지둥 창가에서 물러섰다. 커튼이 불타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무 심코 융단을 밟는 바람에 발뒤꿈치에 약간의 화상을 입고 말았다. "위험해..." 불길이 창가를 따라 번졌다. 책장으로 방어 벽을 만들어서 불길을 어떻게든 막긴 했지만, 슬슬 하계인 모양이다. 테이프도 전부 처분했고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영차!" 나는 의자를 들어 유리창에 박았다. 비틀거리면서 다시 한번, 쨍그랑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졌 다. 숨쉬는 게 편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공기의 역류로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나는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불길을 피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칠 곳을 찾았지만 연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 다. 눈을 뜨고 있는 것 조차 고통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타오르는 불길. 공포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뒤에 벽이 부딪혔다. 더 이상은 뒤로 물러설 수 없다. 맏다른 곳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 게 하면... 무의식적으로 체중을 싣자 등뒤의 벽이 움직였다. 그것은 벽이 아닌 문이었다. 워크 인 크로제트 였던 것이다! 용서 없이 불꽃이 쏟아져 내려 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크로제트 안으로 뛰 어들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문 표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탄내가 났다. 틈새로 연기가 새어들어 왔다. 여기도 시간의 문제다. "살... 려..." 안도가 순식간에 공포로 변했다. "살...려줘..." 절망 속에서, 나츠키---- 라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시로...라고 대답했다. 죽지마, 나츠키--------- 라고 시로가 외쳤다. 연속 살인 사건으로 죽을 뻔했던 내게, 시로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때 시로가 죽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죽지 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죽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사랑하는 살인귀 손에 죽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미움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시로에게 끌려 갔다.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내일이 되면 오늘보다 시로가 좋아질 것이다. 아까보다도 지금, 1초 전보다도 1초 후, 나는 시로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괴로운데 내일은 좀 더 괴로워 질 거라고 생각하면 심 장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다. 더 이상 시로와 마음의 거리가 벌어지기 전에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 은 충동이 느껴졌다. "시로, 시로, 시로..." 나는 웃었다. 아마도 미쳐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멀리서 뭔가가 부서져 내렸다. 형광등이 터진 모양이다. 널판지가 갈라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곧 마루가 꺼져 내릴 것이다. 이제 곧 죽는다. 겨우 끝난다. ...그래서 일까, 나는 환상을 봤다. 크로제트의 문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열렸던 것이다. 연기 너머 누군가가 있었다. 그고에 나의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그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운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 환상이 나를 그 품에 안았다. 나는 두 손으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해 서 불렀다. 이젠 아무런 여한도 없다. 나는 겨우 편해질 수 있다.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환상에 입을 맞추려고 입술을...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 환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정신차려, 나츠키. 뭐 하는 거냐!" 환상이 내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어라?"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내 눈앞에서 불기둥을 등지고 있는 남자는 그야말 로 불꽃의 남자 칸자키 시로 그 사람이었다. 시로는 물을 뒤집어 쓰고 온 모양인 듯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시...로...?" 뭐야! 진짜 시로잖아! 기적이야, 이건! 감격한 나머지 또 다시 시로의 목에 매달리려고 했지만, 시로는 나를 밀쳐 낸 후 와이셔츠를 벗어 내게 걸쳐주었다. "가자,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어." 시로가 내 팔을 강하게 잡아 끈 순간--, 나는 시로의 손을 뿌리쳤다. "...나츠키?"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순간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머리카락이 타 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절대 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난---------------안 가." 시로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이제 됐어. 여기서 죽을 거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나는 시로가 내민 손을 또 다시 뿌리쳤다. "왜 그러냐, 나츠키."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내 사랑은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츠키!" 나는 무서웠다. 시로의 모습을 본 순간 돌아가는 것이 무서워 졌다. 살아서 더 이상 시로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난 이제 갈 곳도 없는 걸."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이-------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꽉 움켜 쥔 주먹이 떨렸다. 시로의 옆에 있던 유리창이 열풍에 의해 깨졌다. 불길이 뿜어 올라 천장을 태웠다. 불꽃이 시로의 근육을 핥고 지나갔다. 이렇게나 시로를 사랑하건만, 지금은 그의 모습에서 미움밖에 느껴지지 않 았다. "이제 와서 보호자인척 하지 마! 어차피 난 음란한 남창이야! 시로에게 미움 받아도 할 수 없는 쓰레기라구! 나 같은 건 없어졌으면 하는 주제에 폼 재지 마! 구하러 갔지만 한 발 즛었다고 보고하면 되잖아! 빨리 혼자 여기서 나가!" 순간 시로가 내 뺨을 때렸다. 불길로 화끈거리던 몸이 어째서인지 차갑게 얼어붙었다. "----------작작 좀 해라." "...누가 할 소리. 내가 귀찮으면 귀찮다고 말하면 되잖아." "난 귀찮다고 한 적 없어." "그럼 왜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한 번 나를 주웠던 주제에, 왜 간단하게 날 버리려고 하는 거냐구! 내가 더러운 남창이니까 그렇지? 내 말이 맞지?" "나츠키...!" 시로가 화를 내고 있다. 결국 나와 시로는 이런 식으로 밖에 지낼 수 없다.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은 죽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지진 같은 소리와 함께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나와 시로의 관계를 이 이상 갈라 놓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 사이에 새로 운 불기둥이 솟았다. "나츠키,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시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즐거웠다. 시로가 난처해 하고 있는 것이 우 스웠다. 나는 쿡쿡 웃었다. 땀과 눈물이 뒤범벅 되어 흘러나왔다. 뭐가 전 고급 남창이냐. 뭐가 쿨한 나이스 가이냐. 사랑에 빠지면 결국 누구 나 마찬가지 아닌가. 추악하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 나는 내가 이렇게 추한 인간일 줄은 몰랐다. 사랑이 이렇게나 비참한 것인 줄은 몰랐다. 이런 건 몰랐던 편이 좋았다. 평생 몰랐던 편이 좋았다! "...나 시로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나 시로와 함께 살고 싶어 시로의 곁에 있고 싶어. 좀더 날 봐줬으 면 좋겠어. 그게 불가능하다면, 무리라면, 제발 부탁이니까 내게 신경 쓰지 마. 그냥 내버려 둬 줘...! 괴로워... 괴롭단 말이야...!" 뜨거웠다. 온 몸이 불기둥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울 생각은 없었건만. 아직 약 에 취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비디오 테이프는 처분했지만, 역시 나는 이런 한심한 모습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이고 있다. 이래서야 시로가 날 좋아하 게 되는 편이 이상하다. "빨리 가, 시로..." "나츠키..." "가란 말이야!" 방 중앙의 바닥이 꺼졌다. 지금의 붕괴로 이제는 탈출 불가능일지도 모른 다. 문득 시로가 깨진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사다리 차는 아직?" "아직입니다! 나츠키씨는?" "무사해!" 아래에 있는 것은 후지시로일까, 언제나 시로와 붙어 다니며 후배라는 명목 으로 시로를 독차지하고 있는 고상한 형사. 후지시로라면 시로가 난처해 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 을 것이다. 그 녀석은 좋은 가정에서 자란 좋은 녀석이니까, 시로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것이다. 왜 난 이렇게 비뚤어져 있는 것일까. 시로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시로의 캬라멜 색 피부가 땀에 흠뻑 젖어 있 었다. "애기는 돌아간 다음에 하자, 나츠키." 시로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직무를 수행 하는 것 밖에 머릿속에 없는 남자에게 속아넘어갈까 보냐. "어디로 돌아가자는 거야. 날 쫓아낸 주제에 이제 와서 어디로 돌아가자는 거냐구!" 자신이 한 말의 리얼함에, 나는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 이제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한테는 이제 돌아갈 곳 따윈 없단 말야..." 이별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느끼는 쪽이 이상하지만... "...시로." 시로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시베리안 허스키같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불길을 반사해서 붉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듯. 망설일 필요 따윈 없는데, 나 같은 건 내버려 두고 빨리 여기서 도망치면 되 는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새하얗게 타 들어가 버릴 것 같은 신경을 전부 입술에 집중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뭐냐." "히데아키를 체포했을 때, 왜 시로는 내게 키스를 한 거지?" 남에게 뭔가를 물을 때는 그 사람의 눈을 쳐다봐라!! 생각해보니 시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화를 낸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지금 나는 눈을 감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는 주제에,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한 거야..." "나츠키..." "난 진심으로 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나한테 왜 키스 같 은 걸 한 거야?! 시로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더러운 남창이 니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야!" "닥쳐!"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키며 시로의 노성에 압도 당해 눈을 떴다. "두 번 다시 자신을 더러운 남창 운운하지 마!" "시로..." 시로의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가슴이 찟어질 것 같다. 처음으로 시로의 진심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온 몸이 떨렸다. 또 다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시로가 움찔 움직였지만, 나는 미동조차하지 않고 불길 너머 시로의 모습에 의식을 집중했다. 잠시 주저한 끝에, 시로가 입을 열었다. "...무섭구나, 넌." "...뭐?" 색소가 옅은 시로의 두 눈은 어째서인지 몹시 온화했고, 조금도 나를 무서 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니 뭐니 하며 간단하게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어린애 같은 네가 너 무 무서워." "...알고 있어. 시로가 노말이라는 것 정도는..." "그런 의미가 아냐." 시로는 태연한 어조로 그 답지 않은 말을 계속했다. "네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난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 어." "어째서?" "...넌 알 필요 없어." "--야요이 때문에?" 시로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후지시로한테 들었어. ...미안. 시로의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죽었다고..." 시로가 눈을 감았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눈을 뜨고 색소 없 는 눈으로 툭 내뱉었다. "내가 죽였다." "뭐...?" "야요이는 나 때문에 죽었어." 시로의 눈은 마치 얼음 같았다. 나는 사실은 나보다 시로가 더욱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에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냉혹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는 그의 대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나 야요이를 사랑했어?" 시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냉정함이 오히려 사랑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야요이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에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히스테릭한 웃음은 이윽고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시로가 지니고 있던 인간다운 감정은 죽은 야요이의 망령에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시로의 마음은 내가 시로와 만나기 전에 이미 야요이가 점령하고 있었다. 나 따위가 발을 들여놓을 여지 따윈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하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꼴불견이로군, 시로." 야요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한심해. 스스로 자신을 가둬두고 있다니. 너무 한심해서 동정조차 못하겠 군."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시로가 내게 한 키스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것은 동정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잃고 새 아버지에게 당한 후 살해당할 뻔한 나를, 시로는 그저 위 로해 주려고 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그를 감옥에 보낸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담겨 있 었으리라. "사랑이니 키스의 의미니... 이런 남자 때문에 고민하던 내가 바보였어." 그렇다. 나는 바보다. 지금 여기서 죽어 버리면 나는 평생 야요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 시로에게 있어서 나는 아직 그 정도의 가치는 없다. 아직 나는 시로의 마음 속에 파고 들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동정 따위 하지 마, 시로." 나와 시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약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씨익 웃었다. 9 살아있으면 이렇게 시로와 마주 할 수 있다. 끌어안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서로 사랑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장 시로는 사랑하고 있는 이 나 뿐 이다. 이런 곳에서 망설이며 죽고 싶어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시로, 추억이란 자신을 옭아매기 위해서 있는 게 아냐." 강인한 몸과 마음을 지닌 과묵하고 차가운 외토리 늑대. 하지만 시로도 평범한 인간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녀석인 것이다. "그런 건 내가 박살 내 줄게." 나는 시로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말했다. "야요이가 시로 마음속에 쌓아올린 성벽을 박살내 줄게!" 내가 시로를 과거의 주막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테다. 진짜 사랑의 위대함을 가르쳐 줄 테다. 시로를 돌아보게 만들 때까지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좋아해, 시로." "난 어린애가 싫어." 즉각 되돌아온 대답에,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나 시로의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지?" "...싫었다면 일부러 데리러 오지도 않았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쓰러지듯 뒤의 벽에 몸을 기댔다. 시로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등뒤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시로가 재빨리 나를 안고 엎드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벽과 함께 길 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있을 것이다. 시로는 나를 불길에서 지켜주듯 내 몸을 덮고 있었다. 그 단단한 피부의 감촉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은 저, 전 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마에 핏대가 서 있었다. "가... 간발의 차이었지, 시로." 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시로는 상체를 일으킨 후 느닷없이 내 멱살을 잡고 내 뺨을 때렸 다. 얼얼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나는 굉장히 기뻤다. 시로가 진짜로 날 때려 줬다는 사실에 감동이 느껴졌다. 아아, 난 진짜 매저키스트인가 보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한 시로에게 깜짝 놀랐냐고 묻자, 그는 으르렁 거리며 당연하다고 외쳤다.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조금은 날 걱정해 줬다는 증거야." 웃는 얼굴로 분석해 주자, 시로는 작게 신음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시로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래서 어린애가 싫다는 거야..." 시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시로. 나 반드시 형사가 될 거라고. 언젠가 내가 시로를 지켜줄 거라고.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게 될 거라고. 난 의외로 운이 좋으니까 그렇 게 간단히 죽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야요이는 죽었지만 난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시로를 슬프게 만들지는 않 을 것이다. "나 시로의 곁에 있어도 되지?" "그래..." 시로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나는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시로의 입술에 살 짝 입을 맞췄다. "뭐야!" 시로가 느닷없이 얼굴을 밀쳐내는 바람에 나는 분개하고 말았다. 키스 정도로 치사하게 굴다니! 그렇게 항의하는 나를 무시하고 시로가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시로가 창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나도 시로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아찔한 높이에 느닷없이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시로의 어깨에 매달렸다. "사, 사다리차 아직인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동거 연장 허가가 내려진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삶보다도 죽음이 더욱 가까이 있었다. 노도의 열풍과 불꽃에 휩싸여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후지시로---------!" 시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후지시로가 OK 신호를 보냈다. 시로가 커 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까 하고 창 밖을 내려다 본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아래에는 덮개를 씌 운 커다란 트럭 한 대뿐. 나는 꿀꺽 숨을 삼켰다. "...시, 시로, 설마..." "아아, 만에 하나를 위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저 녀석을 스카웃 해 뒀지." 저 덮개로 뛰어내려야 하는 걸까? 나는 알면서도 물어볼 수 없었다. "나, 나, 나 성의는 고맙지만..." "괜찮아. 운이 좋으면 아마 살 수 있을 거야." "안돼, 시로! 사실 난 운이 엄청 없어! 그러니까 절대 죽을 거야!" "그렇게 간단하게 죽진 않을 거라면서?" 시로가 코웃음을 치며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덜덜 떠는 내게 용기를 주려는 걸까. 시로의 눈빛이 부드러워 졌다. "그리고 죽을 때는 나도 함께다." "시, 시로!" 생각지도 못했던 달콤한 말에, 나는 하늘을 날 듯한 심정으로 시로의 목에 매달렸다. 시로가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이봐, 잠깐 기다려, 나츠...!" 기다릴 수 없다. 구경꾼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시로가 진짜로 난처해하고 있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혀가 마비될 만큼 강렬한 입맞춤을 했다. 시로가 입술을 떼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분개했다. "착각하지 마! 착지에 실패하면 둘 다 죽는다는 뜻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 시로와 함께라면 지옥도 천국이니까." 쪽 하고 덤으로 가볍게 뽀뽀를 하자, 시로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후 힘없 이 어깨를 떨궜다. "각오는 됐겠지? 나츠키." "응. 내 목숨은 시로의 것이야. 죽어도 불평은 하지 않을게."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간다!" 키스의 여운 따윈 떨쳐버리고, 시로는 나를 안은 채 무너져 가는 바닥을 박 차고 트럭을 향해 다이빙했다. * "출장이라구--?!"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담배 필터를 씹으며 시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할 수 없어. 지명 수배중인 범인의 은신처를 알아냈거든."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갈 건 없잖아!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벌써 밤이라 구!" "범인을 체포하는 데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어." "오른쪽 어깨 탈골, 오른쪽 발목을 삔 데다 화상까지! 전치 2주일의 부상자 를 남겨두고 잘도 출장 따윌 갈 마음이 생기나 보군! 이 박정한 인간!" 반쯤 울먹이며 아우성을 치자, 시로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떨궜다. 왜 나와 시로가 또 다시 이렇게 다투고 있는가 하면... 드물게도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온 시로에게 뭔가 맛있는 걸 먹여 달라고 졸랐더니, 시로가 아무거나 시켜먹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한 데다 느닷없이 짐 을 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딜 가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오모리로 출장을 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2, 3일동안 안 돌아올 거라나, 어제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말도 안 돼! 내 오른쪽 어깨에는 붕대, 왼쪽 다리는 깁스로 단단하게 고정되러 있었다.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여기저기 화상을 입은 곳이 아파 오기 때문에 한 동안 학원도 못 가건만, 이런 나를 내버려두고 가버리다니 너무 하지 않은가. "나도 데려가 줘. 내가 걱정되지도 않아, 시로?" 떼를 쓰는 나를 완벽하게 무시하고, 시로가 속옷을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 다. "...그런 굉장한 불길 속에서 상반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는데 시 로는 상처하나 없네.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니까." 나는 투덜거리며 시로의 등을 걷어찼다. "...그렇긴 해도 맥빠지는 결말이었어. 토요시마 녀석, 날 남겨두고 잽싸게 도망친 주제에 마침 맨션 앞에 도착한 경찰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대마초 소 지 현행범으로 체포되다니. 녀석들도 진짜 운이 없군. 하지만 말야... 시로." 짐 싸기를 마치고 범인이 기다리고 있는 아오모리로 가기 위해 현관 앞에 선 시로의 등에, 나는 찰싹 매달렸다. "토요시마랑 다른 녀석들 날 모른 척 했다면서. 그런데 시로가 나츠키는 절 대 저 안에 있을 거라며 후지시로가 말리는 것도 듣지않고 불 속으로 뛰어들 었다지?" 시로가 어깨너머 나를 바라보았다. 몹시 성가셔 하는 듯한 눈빛이다. "날 버리지 않아서 고마워..." 솔직히 고맙다고 말하자, 시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살짝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기뻤다. 시로의 눈은 색소가 옅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때때로 안타까울 만큼 따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눈에 사로잡혀 버리게 된다. 언젠가, 그리고 언제까지나, 나만을 바라봐 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시로의 눈에는 범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자에게 반해버리다니, 나는 진짜로 운이 없다. 시로가 나를 살짝 밀치고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나는 시로의 몸을 짚고 부자유스러운 다리로 간신히 섰다. 시로가 그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후지시로에게 연락하도록 해라. 혼자 있기 힘들면 병실 을 알아봐 달라고 해. 알겠지?" 정말이지, 이럴 때까지 후지시로냐. 나도 빨리 어엿한 형사가 되어서 시로 를 도와주고 싶군, 빌어먹을!! 그래서 나는 필요 없다고 허세를 부리며 얌전히 집을 지키기로 했다. 물론 교환 조건을 내 걸고. "그럼 시로, 출장에서 돌아오면 시로가 날 돌봐줘야 돼?" "돌봐 줘?" "응. 옷 갈아입을 때나, 밥 먹을 때나. 아, 목용할 때도 같이 들어가 줘야 돼?" "모, 목욕?" "이런 팔다리로 혼자 목욕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시로, 돌아오면 제일 먼 저 내 여기랑 요기랑 저기를 부드럽게 씻어줘. 동거인이라면 그 정도의 협력 은 당연하겠지?" 시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할 말을 잃은 모양이다. 나는 시로의 목에 팔을 감고 달콤한 한 때를 상상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시로,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 내가 다 낫기 전에, 알았지?" 시로가 돌덩이로 변해 있는 틈을 타서, 나는 마치 신혼부부처럼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 * * 2주일 후, 나는 깨끗하게 완치했다. 시로는 겨우 범인을 체포하고 오늘 밤 도쿄에 돌아온다. 날 피하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타이밍이다. 누군가 내게 운이 좋은 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역시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 이 없다. 하지만 만전의 태세로 공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완치된게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 내 운명의 주인인 내가 결정해 야 하는 법이다. 이 날을 위해 산 야한 팬티로 갈아입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씨익 웃었다. 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운이 좋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기묘한 기억 - 행복의 대가(代價) 1 나츠키군, 안녕? 내가 도쿄 구치소에 온지 3개월이 지났어. 독방에서 그립게 떠오르는 것은 너와 함께 보냈던 날들이야. 나는 매일 밤 꿈 속에서 너랑 이야기를 나눠. 그것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야. 며칠 전, 첫 번째의 공판이 있었어. 모두진술(冒頭陳述:검사가 공소장에 의 거하여 기소 요지를 설명하는 일)을 듣고서 내가 너무나도 커다란 죄를 저질 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어쩌면 이미 사형 확정인지도 몰라. 당연하겠지. 4명이나 죽여 버렸는 걸... 하지만 그댄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었어. 밤마다 널 사들이는 남자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면 언젠가 네가 내 사랑 을 알아줄 거라고..., 그런 망상을 품고 있었어. 바보 같지? 다음 주는 두 번째 공판이야. 이번엔 꼭 와줘. 널 만나고 싶어. 하루라도 좋아. 만나고 싶어, 나츠키군. 너만을 사랑하고 있어. 옥 중에 있어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아... * * * "알겠나? 여기까지 다음 시험에 꼭 출제할 거다." 에엣? 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늘씬한 근육질의 타케와키 강 사가 흐흥 하고 득의 만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1장부터 졸고 있던 오오츠카, 도시락 까먹고 있던 바바, 책상 밑에서 게임 했던 오오미야!" 지명 당한 녀석들이 연달아 벌떡 일어섰다. 타케와키가 노려보자 세 사람은 한심하게 몸을 움츠린다. "정말이지 너희들 배짱 하나는 만점이군. 수업은 제대로 들었냐?" 오오츠카가 '안 들었어요.' 하고 자백하자 모두들 와하하 웃었다. "아마노 나츠키." 몇 명의 여학생들이 캬악 환성을 질렀다. 전체의 시선이 창가 제일 뒷자리 에 있는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타케와키가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나는 시치미 뗀 얼굴로 마스터의 편지를 책 밑에 감췄다. 사실 공판중의 피 의자와는 편지 교환이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마스터의 변호사가 어제 내 게 몰래 전해주었던 것이다. 변호사는 '요즘 바빠서...' 하고 편지의 배달이 늦어진 것을 굉장히 미안해 했는데 편지를 읽고서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 다. 마스터의 두 번째 공판은 어제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공판 일을 알고 있 었던 나는 법정에 갈까 망설이면서도 역시 이번에도 패스해버리고 말았다. 수척해진 마스터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하물며 마스터를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이 나라니 더더욱 그랬다. "굉장히 진지하게 읽고 있던데 그거 혹시 러브레터인가?" 타케와키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자, 여자들이 '너무해~!' 하고 항의의 비명을 질러댔고 타키와키 녀석은 일부러 이러는건지 내가 노려 보자 짓궃은 웃음을 지었다. "질문해도 되겠지, 아마노?"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으스대듯이 의자를 뒤로 젖히고 도전을 받아들 였다. 타케와키가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개시한다. "프랑스 혁명 발발의 해는?" "0789년." "제 3신분이 선언한 것은?" "국민의회."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뭐지?"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국민의회를 개최하지 않겠다는 것." "급진적 혁명 파가 결성한 것은?" "...자코뱅당." 타케와키 녀석, 뭐 하자는 거야? 시시한 질문만 하고 있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아나? "그럼 프랑스 혁명은 뭐지?" 갑자기 그가 뻔뻔스럽게 미소짓자 난 여유작작하게 대답해줬다. "프랑스 혁명이란 중산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 각층이 절대왕권과 그것에 기생하는 특권계급을 타도한 시민 혁명으로 혁명의 과정에서는 한때 직인, 노동자, 소시민, 하층 농민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 혁명을 철저화 한것." 너무나도 유창한 나의 대답에 모두들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감탄의 한숨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자 일동의 눈이 하트형이 되어있다. 그 녀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학교의 아이돌 적 존재라고 한다. '두뇌명석, 운동신경 발군, 쿨하고 말수 적은 초 미남, 키무라 타쿠야도 미 모에 무릎 꿇은 약간 불량스러운 나이스 가이' 라는 장황하게 긴 수식어까지 붙어있는 모양이다. 내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유 창한 원인이 들켜버린 모양이다. 그렇다. 사실 나는 그저 책을 통째로 암송했을 뿐이다. 편지를 감추려고 재 빨리 펼쳤던 페이지에 우연히 답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 성과는 특히 법 앞에서의 국민의 자유..." "아아, 이제 됐어. 고맙다." 내가 보고 있던 책을 눈치 챈 타케와키가 쓴웃음을 지었지만, 앞부분은 내 실력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정도라면 이번 기말도 완벽하겠군. 하지만 부탁이니 수업 중만이라도 날 봐주면 좋겠다." 타케와키가 윙크했다.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의미 깊은 사인이다. 사실 타케와키는 정진정명의 호모인 것이다. 이 사실은 교내에선 우리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극비사항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와 타케와키는 사제와의 관계를 넘어 이제는 완전히 허심탄회한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OK, 수업 중에만은 그렇게 하죠." 스스럼없는 대답에 여자들이 또 과잉반응을 보인다. 일일이 꺅꺅거리지 말라니까 그러네. "인기 많은 남자는 힘들겠어." 살그머니 동정의 말을 속삭인 타케와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 접촉에도 비명이 터져 나와, 나와 타케와키는 얼굴을 마주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문에 박혀 있는 조그만 창문을 들여다 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은 켄터 키 할아버지... 즉, 학장이었다. 타케와키가 급히 문을 열고 학장과 두 세 마 디 나눈 뒤에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마노, 잠깐 나와라." 순간, 학장의 뒤로 보이는 모습은... "후지시로...?"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지고 말았다. 내 이미지 답지 않은 실수에 강의실 안이 조용해진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복도로 나간 나는, 문을 뒤에서 거칠게 닫았다. "미안합니다, 나츠키씨. 수업 중에..." "시로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나는 곧바로 그렇게 물었다. 시로라는 사람은 내 동거인 겸 보호자로서 현 재 27세에 본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형사다. 유일하게 내가 몸과 마음을 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한..., 시로는 결코 내 호의(?)를 받아들여주지 않지만 말이다. 덧붙여서 이 도련님스러운 얼굴을 한 후지시로란 녀석은 시로의 후배 형사였다. "아뇨, 칸자키 선배가 아니라 저기..." 후지시로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두 번 했다. 눈 치를 챈 학장이 '그럼...' 하고 후지시로에게 인사를 하고서 북도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도 없는 편이 낫겠지?" "나중에 제대로 설명할게." 그렇게 말하자 타케와키가 갑자기 얼굴을 갖다댔다. "저 사람 형사야? 안 그래 보이는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타케와키 녀석, 눈빛이 좀 수상하잖아? 후지시로가 호모에게 인기 있을 줄 이야. 하지만, 으음... 뭐 확실히... 강아지 같은 사랑스러움은... 있을지도 모 르겠네. "순진하니까 손대지마." 내가 그렇게 못을 박자 타케와키 녀석은 예스인지 노인지 말없이 어깨를 슬 쩍 움츠렸다. 타케와키가 강의실로 돌아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학생들에 게 일갈하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근대?' 하고 후지시로를 마주보았다. 일부러 학 교까지 오다니 대단한 사정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한 후지시로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아마구치 헤이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당연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어버릴 리가 없다. 지금도 그 야마구치 세이지--마스터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날은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직 프로 레슬러 경력을 지닌 신주 쿠 2번가의 쇼트 바 '루트'의 마스터, 야마구치 세이지가 살인 용의및 살인 미 수 현생범으로 시로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2번가에서도 잘 나가기로 유명한 남창이었는데 마스터는 너 무나 나를 소중히 여긴 나머지 내게 닿지도 못했었다. 이윽고 그 마음은 내 손님에 대한 질투로 변해서 마스터를 연속 살인범으로 몰고 가고 말았던 것읻. "어제 야마구치의 2번째 공판이 있었습니다만..., 몰랐었나요?" "에...?! 그게..." 안다고 대답하긴 뒤가 켕겼고 거짓말하기도 미안해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은 그 공판이 끝난 직후에 야마구치가 굉장히 난동을 부렸는데... 그 게, 나츠키씨의 이름을 외치면서 왜 만나러 오지 않느냐고, 여기로 데려오라 고. 상당히 큰 소동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럴수가..." 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 정도로 날 만나고 싶어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법정 에 안 간 것을 굉장히 후회했다. "그러면 오늘 만나러 갈게. 그걸로 마스터가 용서해준다면 나..." "그게 곤란합니다." "안 돼?" "도망쳤어요." "도망?! 도망쳤다니 무슨 뜻이야? 도망친 걸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그게 말이죠. 오늘 아침에야 발견된 모양입니다만 간수가 한 명 살해 당했 습니다. 즉시 시내 전역에 긴급수배를 내렸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불명입니 다. 그래서..." 후지시로가 거북한 듯 날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나랑 키 차이도 별로 없으 면서 이 빋음직스럽지 못한 표정 때문에 나보다 작아 보인다. "그러니까 마스터가 도망친 원인이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내가 톡 까놓고 말하자 후지시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츠키씨를 신투쿠 서에서 보호하려고 마중 나왔습니다." 시원스럽게 말한 후지시로에게 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시로를 불러." "네...?" "시로가 붙잡은 범인이 도망갔잖아. 시로가 직접 나한테 사정 설명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동행해 줄게." 후지시로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우물쭈물하는게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후지시로를 아래에서 들여다보며 말투에 협박을 듬뿍 담아 물었다. "뭔 소리야? 이 녀석, 확실히 말해." "저어..., 그러니까 칸자키 선배는 말이지요." 후지시로의 눈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뭐야?" "오오오, 오늘은 휴가로 후쿠시마에..." "후쿠시마라고--?!" 나의 절규는 복도를 지나 건물에 울려 퍼졌다. 제길, 나 휴가라는 말 한 마디도 못 들었어. 오늘 아침에 내가 집을 나올 때 도 내가 만든 된장국과 달걀 프라이를 평소처럼 먹고 있었다고! 아무 것도 말 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그 말에 나는 그만 뚜껑이 열려 후지시로의 팔을 잡아당겼다. "와, 와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나츠키씨가 이렇게 순순히 나오다니 정 말로 기쁩니다!" 후지시로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시로가 간 고을 알고 있지? 후쿠시마 어디야? 지금부터 쫓아가자." "그야 어디인지는 알고 있지만... 아, 아니, 무, 무, 무슨 말입니까? 나츠키 씨는 이제부터 우리 서에서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제멋대로 행동하 는 건 삼가라고... 저기, 제가 아니라 선배의 상사이신 무라이 경부께서 엄격 하게 말씀하셨는데...!" "무라이씨한테는 나중에 전화 한 통 넣으면 되잖아. 누가 뭐래도 내 신병을 구속하겠다면 먼저 내 보호자인 칸자키 시로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잖 아? 공무원이라면 수순을 제대로 밟으라구." "그그, 그럼 먼저 경부께 휴대폰으로 확인을 받고서..." "시끄럽네. 오늘 중으로 돌아오면 군말 없겠지? 무라이씨한테는 수업이 끝 날 때까지 기다렸다 뭐다 해서 얼버무려." 가자고 턱짓을 하자 후지시로는 반쯤 울상이 되면서도 미적미적 나를 따라 왔다. 후지시로가 운전하는 하얀 세리카는 도쿄 자동차로를 북을 향해 달리 고 있었다. 후지시로는 핸들을 돌리며 아직도 단념하지 못했는지 나를 힐끔 힐끔 훔쳐보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그런 후지시로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서 전방의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구름이 끼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드라이브엔 최악의 날씨였다. 기분마저 우중충해지는 것 같다. "저기, 나츠키씨." 후지시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쿄를 출발한지 30분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뭐야?" "선배의 오늘 휴가 말인데요." 나는 후지시로의 조금 숙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보다 시로를 우선해준 후지시로의 배려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마스터에 대한 일은 너무 무거운 짐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만은 용서해주세요."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심각한 목소리였다. "선배에게 있어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일이나 그 무엇보다도요. 그래서 선배한테는 야마구치 탈주건에 대해서 전하지 않았어요. 연락하지 말 아달라고 제가 부탁했습니다. 공공전파를 타면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 매스컴 에도 숨기고 있습니다. 뉴스에 나올 리도 없어요. 선배는 내일 출근할 때까지 이 사건을 모릅니다." 핸들을 쥔 후지시로의 손가락이 하얗게 굳어졌다. 나는 시트에 기대어 있던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후지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후지시로가 복잡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는... 오늘, 12월 20일만은 매년 휴가 신청을 내왔습니다. 이건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암뭄적으로 양해하고 있는 일인데... 그래서 사실 오늘만은, 선배를 혼자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렇게 물어보려던 나는 예전에도 이런 대화를 후지시로랑 나눴던 것 같다 는 기묘한 감각에 동요했다. 그리고서 내가 아 하는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후지시로가 고개를 떨궜다. "오늘은 야요이씨의 기일입니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울렸다. 격렬해진 빗줄기가 앞 유리창에 부딪쳤다가 뒤쪽으로 날아갔다. 두 개의 와 이퍼가 열심히 물방울을 훔치고 있었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네요." 차도에는 통행량이 지독히 적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문득 후지시 로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이 비는 밤중까지 계속 내릴 거라고 아까부터 라디오에서도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미안, 후지시로. 담배 피워도 될까?" 후지시로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작은 목소리로 '저어...' 하고 양해를 구해 와서 나는 선수를 쳐서 대답했다. "시로는 벌써 알고 있고 야단치지도 않아." 소심한 후배님에게 그런 보험을 내려준 나는 말보로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 내어 한 개비 입에 물고는 시로를 흉내내어 산 지포를 끄트머리에 갖다대자 후지시로는 주의를 줘야하나 어쩌나 망설이면서도 결국 묵인해줬다. "...있잖아, 후지시로. 후지시로는 나와 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쏴아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한 대의 소아라가 후지시로의 세리카를 추월 해갔다. 속도 제한이 내려진 탓인지 후지시로는 아까부터 착실히 80킬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운전으로 오늘 중으로 후쿠시마 근처까지 갈 수나 있을까? "나랑 시로가 어떤 관계로 보여?" 관계라는 표현이 쑥스러웠는지 후지시로가 뺨을 붉혔다. 후지시로는 시로 에 대한 내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연인이냐는 말인가요?" 담배 연기가 닫아놓은 차내에 가득 차 있었다. 창문을 아주 조금 열자 이때 다 하는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려서 나는 당황하며 창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직 반도 피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껐다. 왠지 혼자서 묵묵히 피울 기분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나는 흡연하는 습관도 없었고 시로 의 입술에서 한 모금 두 모금 맛보는 것이 좋은 것 뿐이었다. 한 동안 생각하고 있던 후지시로가 부끄러운 모양인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저기... 키, 키스... 신은 저도 봐서..." "응." "아마도 그 이상도... 있지... 않을까..." "섹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갑자기 차가 미끄러져 후지시로 녀석이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진정해, 바보야! 무슨 짓이야!" "아, 까,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란 건 바로 나야! 어휴!" 고속 도로에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급정차하면 어떻게 될지 조금은 생각해 라, 바보! 후지시로는 팔짱을 끼고 시트에 기대어 화를 내는 내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기..., 그, 그런 관계라고... 생각해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에 사과하는 것이 후지시로의 나쁜 버릇이다. 나는 콧김으로 불쾌함을 표했다. 창 밖에 눈길을 주자 잿빛 곤크리트 벽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토호쿠 도 로에 달리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고속 도로는 어디나 인상은 다르지 않았다. "...안 했어, 한 번도..." 나는 처음 그 눈동자를 본 순간 시로를 사랑하고 말았다. 살인 용의자였던 나를 한눈에 무죄라고 꿰뚫어 본 시로,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살인범, 어디도 갈 곳이 없는 나를 성가시다고 하면서도 곁 에 있게 해준 시로, 버림받아도 어쩔 수 없는 나를 불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 출해준 시로... 나는 그런 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시로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머릿속엔 일밖에 없다. 척 만남부터 지금까지 변함 없는 나와 시로의 쓸쓸한 관계. "시로는 안아달라고 해도 절대로 안아주지 않아." 시로는 내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잘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시로가 날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렇게 내뱉은 내게 후지시로가 말했다. "...안지 않으면 안 좋아하는 건가요? 좋아하면 안는 게 당연한가요?" 나는 의외의 반론에 눈썹을 찡그렸다. 후지시로는 앞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주며 또렷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나츠키씨는 마음만으론 만족할 수 없나요?" 비판 섞인 말투에 울컥했다. 나는 즉각 대답했다. "마음 같이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게다가 좋아한다면 안 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안고 안기며 상대방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서로의 몸으로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그런데 시로는 내게 닿으려고도 안 해. 내게 흥미가 없기 때문이야. 좋아하지 않기 대문이야. 그렇잖아?" "야마구치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뭐?" "야마구치는 나츠키씨가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서 그래서 더더욱 닿지 못 했잖아요? 나츠키씨를 지키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말 았잖아요? 방법은 틀렸지만 그런 사랑도 있단 것을 나츠키씨만은 기억해 줘 야 하잖아요. 안 그러면 야마구치가 불쌍합니다." 나는 후지시로에게 압도되었다. 대꾸할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깨 달았다. 나의 막무 가내인 애정 표현은 마스터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만은 남김 없이 바치는 사랑법도 현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말하면 형사 실격일지도 모르겠지만..., 전 야마구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야마구치가 제대로 형을 살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 이상 살인을 범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사과한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에 나는 뭔가에 지는 것만은 정말 싫었다. 하지만... "후지시로..." "네?" "--미안." 말한 순간 목이 메었다. "시로의 얼굴만 보면 돌아갈게. 당신 말대로 얌전히 보호받을 테니까... 미 안해, 자꾸만 데를 써서..." 후지시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수건인지 티슈를 빌려주었다. 그게 더 미안해서 나는 조금 울고 말았다. 시로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일보다도 중요한 날인 오늘에 대해 그리고 야요이의 일, 마스터의 일, 그것 들이 한데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서 혼란해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솔직해질리가 없다. "미안해, 후지시로. 당신은 형사 실격이 아니야. 정말이야. 난..." "그런, 괘, 괜찮아요, 나츠키씨. 저야말로 잘난 듯이 참견해서... 어쩌면 좋 지? 죄송해요. 저기..." 후지시로가 울지 말아달라며 고개를 떨궜다. 내가 코를 훌쩍이며 앞을 안보 면 사고난다고 말하자 후지시로가 네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후지시로는 역시 엄청 좋은 녀석이다. 난 자신의 경솔함과 일방적인 언동을 반성하면서도 왠지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2 코오리야마의 정션에서 한에츠 도로로 들어선 우리는 아이즈 와카마츠 인 터체인지에서 내려와서 국도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도쿄를 10시에 출발해서 논스톱으로 현재 오후 2시, 이 비에 생각했던 것보 다 빠른 도착이다. 여기서 15분 정도 거리인 산기슭에 야요이가 잠들어있는 묘가 있다고 했다. "아, 분명 저쪽입니다." 후지시로가 빗줄기 저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의 경사면을 가리켰다. 좌 우로 키가 큰 나무에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길을 빠져나가자 잿빛 비석이 조 용히 서있는 작은 묘지가 나타났다. 그 순간, 내 가슴에 후회가 스쳐지나갔다. 여기까지 와서 정말로 괜찮은 걸까? 다짜고짜 후지시로를 협박해서 데려다 달라고 했지만 시로는 사실 내게 알 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이제 와서 걸음이 움츠러들고 만 것이다. 나는 야요이에 대해서 모른다. 야요이는 시로를 좋아했고 아마도 시로도 그 랬으며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주제에 난 야요이에게 질투하고 이런 곳까지 시로 를 쫓아오고 말았다. 시로의 기분도 생각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까..., 야요이씨 묘가 어디였는지 약간 헷갈리는데... 아!" 조그만 목소리를 낸 후지시로가 살그머니 몸을 감추듯이 급수대 뒤로 차를 이동시켰다. 엔진을 끄고 숨을 죽이고는 그가 '어쩌죠...?' 하고 소곤소곤 물 어왔다. "선배가 바로 저기 있는데요." "...뭐?" 나는 후지시로가 가리킨 쪽을 따라 나무 울타리 너머를 응시했다. 비는 호우가 되어있었다. 짙은 잿빛 하늘에서 지면으로 창 끝이 똑바로 꽂 히듯이 내리고 있는 그 속에서 시로는 우산도 없이 혼자 등을 돌리고 서있었 다. 흠뻑 젖은 채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서 한 비석을 향하고 있었 다. "우산..."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후지시로가 검은 우산을 내게 건네주었다. "갈 겁니까?" "하지만 감기 걸릴 거 아냐? 아무리 바보라도 말이야." 후지시로가 '그렇네요.' 하고 동의했다. 바보 같은 시로는 이렇게 긴 시간동안 야요이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 까? 뭐가 그렇게 전하고 싶은 걸까? "먼저 가지마, 후지시로. 우산만 건네주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선배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혼자 있게 해 주고 싶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입에서 나왔다. 후지시로는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 보고는 이윽고 부드럽게 눈 꼬리를 늘어트렸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문을 열자 발치에 빗방울이 튀기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온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검은 뒷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한 발 내디딘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음성에 움츠러든다. "살인자!" 그 중년의 여자는 그렇게 외쳤다. 쓰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시로에게 뛰 어가 시로를 향해 살인자라고 말이다.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딸을 성묘하는 걸 원 치 않아! 이, 이런 것 따위...!" 여자는 묘 앞에 시로가 꽂아둔 국화꽃을 시로의 얼굴에 내던졌다. "쉬--." 나도 모르게 뛰어들려고 한 나를 차에서 나온 후지시로가 말렸다. "야요이는 당신들 경찰한테 이용당해서 죽은 거야! 당신이 야요이를 죽인 거야! 야요이를 돌려줘! 내 딸을 돌려줘! 돌려주지 못할 거면 두 번 다시 여기 오지마!" 시로는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울부짖는 여자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는 천천히 묘 앞을 떠나 녀자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이쪽으로 다 가왔다. 그리고 우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우산 표면에서 비가 격렬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투두둑... 하고 마치 무수한 돌파래질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시로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후지시로를 보았다. "시로..." 핏기가 가신 시로의 얼굴에는 머리칼이 붙어있었다. 수염도 약간 자라있었 다. 요즘엔 매일 아침 수염을 깎았지만 오늘 아침엔 깎을 기분이 들지 않은 것 같다. 단벌인 검은 양복도 원래부터 싸구려여서 비에 젖자 한층 초라하게 보인다. 시로는 너무나 추워 보였다. 마음 밑바닥부터 얼어붙은 것 같아서 보고 있던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자, 시로." 그렇게 말한 내게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로는 우리에게서 시선 을 거두고는 흠뻑 젖은 채 스카이라인에 올라탔다. "시로!" 시로는 후지시로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가려고 하는 나를 무시하고서 엔진 을 한층 세게 돌리고는 아까 우리가 온 길을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뒤에서 후지시로가 조심스럽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리도 돌아가죠, 나츠키씨." 재촉하는 후지시로를 밀어젖히고 나는 야요이의 묘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비쩍 마른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아까 시로에게 내던진 국화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정중하게 줍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터트린 격정에 자신이 상처받은 것 같았 다. "성묘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흩어져 있는 꽃을 함께 주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새빨갛게 부운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친 피부와 지친 얼굴,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일하고 아이를 키워온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도쿄 사람은..." 돌아가 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시로를 원망하면서도 시로가 바친 꽃을 주워 모으는 그녀의 복잡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심정에 내가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비석에는 나가누마가 대대로 묻힌 묘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비석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야요이의 어머니에게 머리를 꾸벅 숙이고서 일어나 등을 돌린 나를 야요이의 어머니가 붙잡았다. "야요이는... 즐겁게 지냈나요?" 난 예전에 후지시로가 가르쳐준 야요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고서 '굉장히 즐 거워 보였어요.' 라고 말했다. 야요이는 분명히 시로를 바라보고 시로를 사랑 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명랑하고 굉장히 솔직해 모두에게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랬나요..." 나는 다시 한번 야요이의 어머니에게 머리를 숙이고서 도망치듯이 후지시 로의 세리카에 올라탔다. 흠뻑 젖은 내게 후지시로가 손수건을 빌려주었다. 시로는 매년 혼자서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걸음을 옮기는 걸까? 아직도 아물지 못한 시로의 과거를 눈으로 보고서 내 심장은 아플 만큼 조 여들었다. "돌아가죠, 나츠키씨." "...응." 후지시로가 엔진을 켰다. 3 후지시로는 돌아오는 길에 야요이와 시로의 과거를 말해주었다. 시로와 후지시로가 가부키초의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던 시절이니까 3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쿄를 동경했던 나가누마 야요이는 후쿠시마에서 가출하다시피 상경했다 고 한다. 신주쿠 K극장 앞에서 몇 명의 소년들이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왔을 때, 심야 순찰 중이던 칸자키 시로 순경이 구해주었던 것이다. 야요이는 그 후 며칠 뒤에 파출소를 방문했다. 그 때의 경관인 시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요, 저 모퉁이의 일식당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이제 떳떳한 한 사람몫의 사회인이니까 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넌 아직 어린애야." 시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던 야요이는 시로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여서 당장 도쿄의 주소와 일터를 고향에 연락했고 '멋진 순경 아저씨가 지켜주니 까 괜찮아.' 하고 어머니를 안심 시켰다. 그 날부터 야요이는 매일 파출소에 드나들며 시로의 근무 스케줄을 확인하 고 시로의 출근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이 연어는 말이죠. 내가 구운 거예요. 앗! 이건 시로꺼니까 다른 사람은 먹 으면 안돼! 후지시로군은 모양이 찌그러진 거란 말야." 연예계를 동경해서 상경했을 정도로 야요이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화장을 하면 분명 굉장히 예쁠 거라고 파출소의 모두가 칭찬했다. 게다가 야요이는 까르르 잘 웃었다. 성격이 좋고 명랑해서 야요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져 어느 센가 시로도 야요이의 방문 을 마음으로부터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 한가로운 풍경과는 반대로 그 무렵 가부키초에선 불온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 날도 영화관 뒤의 카바레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가부키 초 주변의 경관들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제일 선두에서 현장으로 뛰어 간 시로는 간발의 차로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가게 안이 어지럽혀져서 일단 영업정지가 된 이 카바레는 중국계 마피아가 배경에 있었다. 그들이 나중에 상대방을 치러갈 거란 사실은 명백했다. 마피아와 S계 폭력단, 두 조직의 세력다툼에 신주쿠 전체가 긴박해지기 시 작한 바로 그때, 야요이가 그 가게에 호스티스로 들어간 것이다. 그만두라고 아ㅜ리 시로가 설득을 해도 야요이는 완고하게 듣지 않고 여기서 그들의 움 직임을 알아보겠다며 이렇게 단언했다고 한다. '나는 경찰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고, 시로를 지키고 싶다고...' 시로는 그 뒤로 야요이가 들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야요이를 경찰과 폭 력단의 항쟁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 바칠 가치가 없는 차가운 남자라고 야요이가 정나미를 떨어트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멀어져야 한다. 그러기만을 빌며 시로는 야요이에게 차갑게 대 하고 계속 피했건만, 야요이는 그런 시로를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점점 진흙탕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 날, 야요이는 마피아 관계자란 걸 알고 자원해 접대를 했다. 며칠 전 발포사건을 일으킨 S계 폭력단 간부의 암살계획이라는 수상한 이 야기를 들은 야요이는 그 날 밤 마피아 단원을 호텔로 유혹해 처녀와 맞바꿔 서 간부암살의 일시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몸을 휘생해서 남자에게서 들은 정보를 가지고 시로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사정을 알고 격분한 시로에게 야요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관은 위험하잖아요! 저번에도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사건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시로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 예요! 내가 일해 시로를 먹여 살릴 거야!' '시로가 이런 짓 하지 말라면 이제 절대로 안 할게요. 이번 한 번 뿐이야. 그 러니까 날 미워하지 말아요, 시로...!' 야요이는 그 날 처음으로 시로에게 안겼지만 거기엔 온화한 안정감이나 애 정은 없고 절망과 슬픔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 뒤, 경찰은 야요이가 물어 다 준 정보로 암살 계획을 방지하는데 성공했지만, S계 폭력단 간부 대신 목 숨을 잃은 건 바로 야요이였던 것이다. "야요이씨는 다른 호스티스들에게 본보기로 살해당했습니다. 손님의 비밀 을 누설하면 이렇게 된다고 총에 맞고 벌집이 되어서. 야요이씨의 시체는 종 이 상자에 담겨서 파출소 앞에 버려졌습니다." 고속 도로를 내려오며 우리는 붉은 신호에 정차했다. 비는 어느 정도 가늘 어졌지만 아직 그칠 기미가 없었다. 재깍, 재깍, 재깍... 지시등이 깜빡이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후지 시로는 천천히 국도에서 우회전했다. "상자를 열고... 야요이씨의 무참한 모습을 눈 앞에 두고서 선배는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고 단지 망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전 두려워서 말도 걸지 못했 어요. 그러자 선배는 별안간 일어서서 갑자기 총을 빼들고 달려갔습니다. 그 가게를 향해서요. 우리가 지원을 요청하고 뛰어갔을 때는 가게 안은 이미 엉 망진창이었고 선배는 마피아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샌드백 상태가 되어있었 습니다. 그러나 결국 경관의 수가 더 많아서 거의 전원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만 뒷문으로 도망친 남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야요이씨를 살해한 실행범이었죠. 선배는 우리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 남자를 쫓아갔습니다. 남자는 통행인을 인질로 잡고 선배를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결코 총 을 버리지 않았어요. 초조해진 남자가 선배의 왼쪽 어깨를 쐈을 때, 마치 그 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선배는..." 후지시로는 총 모양을 만들어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상대의 이마를 쏜 순간의 선배의 얼굴을 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뭐랄 까... 아주 만족한 듯이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선배의 행위가 실인인지 아닌지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먼저 발포한 것은 범인이고 인질을 구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치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 뒤 선 배는 살인과로 뽑혀서 현재에 이르렀던 거죠." "...그러면 야요이씨의 마음에 아주 반대되잖아." "하지만 선배는 처음부터 죽음에 가까운 위치에 자신을 내놓고 싶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는 야요이씨를 죽인 건 자신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요. 전에 한번, 선배가 취해서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겐 죽을 권리가 없다고, 죽으의 소용돌이에서 죽음을 바라보며 죽지 못한 채 계속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그래서 선배는 그렇게까지 무턱대고 일에 몰두하는 거라고 생 각합니다. 캐리어면서도 위험한 현장만 골라... 제겐 마치 죽을 장소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그렇게 말한 후지시로 자신도 굉장히 괴로워 보여서 나는 후지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시로가 나를...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타인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시로는 언제 순직해도 좋도록,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그 리고 앞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없도록 있는 힘을 다 해 타인과의 관계를 희박하게 만들고 신변과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시로는 홀로 그 어둡고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살면서 잠도 안자고 쉬 지도 않은 채 일하며 먹지도 않고, 담배만 피우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마 음을 열지 않고, 그 감정이 없는 두 눈으로 사선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것이 다. 시로가 입고 있는 검은 양복... 그것은 상복인 걸까? 시로의 마음속에선 아직 야요이의 상이 끝나지 않은 걸까? '내가 시로를 지켜줄게.' 기묘하게도 야요이와 똑같은 말을 하며 매달려온 나를 시로는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시로는 어떤 마음으로 나랑 살고 있는 걸까? "전 나츠키씨라면 선배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뒤로 입을 다물었고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난 후지시로에게 부탁 을 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시로의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머리를 숙 인 것이다. 아직도 도주중인 마스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내에 내려진 검문 을 돌파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나츠키씨?" "괜찮다니까. 아무리 괴물 수준의 완력을 자랑하는 마스터라도 이 엄중 경 계 체제 속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 없잖아? 게다가 그저 바깥 세상이 그 리워진 것뿐일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요." "그럴 땐 당장 후지시로의 휴대폰에 연락할게. 번호는 저장해뒀으니까. 아 무튼 오늘 밤은 시로와 둘만 있고 싶어. 당신 말이야. 내 마음을 알고 있으면 좀 신경 좀 쓰라구." "하지만... 저어, 그러면 제가 불편하다면 적어도 다른 경관을 아파트 부근 에 순찰시키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지요?" 여느 때완 달리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후지시로에게 혀를 찼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스테이크 고기나 샴페인 등을 사들인 덕분에 아파트에 도착했을 무렵엔 완전히 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기가 켜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문을 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안의 기척을 살피다 손에 들고 있던 짐을 그 자리에서 털썩 떨어뜨렸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후지시로를 밀어젖히고 신사 뒤까지 달려갔다. 언제나 여기 세워두었 던 시로의 검은 스카이라인도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뭔가 말하려는 후 지시로를 무시하고서 시로의 휴대폰을 호출했지만 몇 번이나 걸어도 시로는 응답하지 않았다. 죽을 장소를 찾고 있다고 말한 후지시로의 말과 시로의 창 백한 얼굴이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시로는 그런 약한 남자가 아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전화를 끊고 다시 거는 나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는지 후지시로가 옆에서 말렸다. "나중에 돌아올 거예요..." "나중이라니 그게 언젠데?" "내일은 출근해야하니까 그때까지는 분명히..."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나는 지금 시로를 만나고 싶다구!" 벽에 집어던진 전화기는 생각보다 튼튼해서 뒤쪽의 배터리가 빠져 날아갔 을 뿐이었다. "내일이면 늦단 말이야! 오늘 만나지 않으면,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시로 는 또 내년에도 같은 일을 되풀이할 거 아니야! 알면서도 내버려둔 당신도 나 빠, 후지시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내게 후지시로가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 했다. 후지시로를 책망하는 거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비겁한 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후지시로에게 분통을 터트 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말이지!" 시로를 잃는 두려움이 덮텨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는 그런 시로의 모습 따윈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보고서 못 본 척 할 수도 없어!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해주고 싶단 말이야. 시로 탓이 아니잖아!" 나는 발치에 떨어트린 비닐 봉지를 그대로 냉장고에 처박았다. 전기 밥솥에 쌀을 쏟아 붓고 난폭하게 물에 씻어 세트했다. 현관에 우두커니 서있는 후지시로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내뱉었다. 후지시 로는 말없이 내게 등을 돌리고 문을 연 채 고개를 떨궜다. "전 보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선배가 야요이씨 에 대해 잊어버릴 때까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나는 당근에 있는 힘껏 식칼을 내리쳤다. "이 자식! 아무 것도 모르고 있잖아!" 나는 녀석을 노려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무리하게 잊을 필요는 없어. 기억하고 있어도 돼. 그런 여자가 있었다고.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말이야. 당신도 내게 그렇게 말했잖아! 마스터가 사랑 한 방법을 기억해 두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시로도 잊어버릴 생각이었다면 성묘 따윈 가지 않았을 거야. 그런 아줌마한테 머리를 숙이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야. 시로는 몇 년이 걸려서라도 스스로 조금씩 소화해서 피와 살로 바꾸 려고 했던 거야! ...그러니까 후지시로, 당신 절대로 시로한테 그 일을 잊어버 리라고 말하면 안돼. 그건 시로 탓이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시로를 몰아세울 뿐이란 말이야." "네..." 순순한 대답에 정말 녀석이 알아들은 걸까, 푸념하고 싶어졌다. 아무 것도 몰랐던 건 사실 나 였으면서, 이런 식으로 후지시로에게 화풀이 하는 것밖에 돌려줄 방법이 없는 어린애지만 그래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시로는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후지시로의 동의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는 닫힌 문 너머에서 재빨리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경관을 한 명 순찰로 돌려달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혼자 둘 생각은 없 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테고 후지시로 도 이번 사건을 시로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한, 여기서 당당히 날 지키고 있 을 수만도 없을 터였다. 전화를 끝낸 후지시로가 가버린 것을 확인한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고 내쉬고 또 내쉬고 식칼로 손가락을 베어서 홧김에 당근을 도마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젠장." 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후지시로에게 말한 대부분은 허풍이었다. 그러는 편이 나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강한 척 했 을 뿐이다. 야요이에 대해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사실은 후지시로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심장에 새겨진 상처가 간단히 아물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치유하려 발버둥치면 발버둥 칠수록 과거의 상처는 부식되어 마음을 좀먹고 번져갈 뿐이다. 그런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은 평생이 걸려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4 스카이라인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심야가 되어 더욱 격렬해진 호우에 묻혀 버릴 듯이 희미한 소리였지만 내게는 분명히 들렸다. 나는 시로의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프라이팬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고기 를 꺼내려고 하자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눈물이 흐르려고 해서 어떻게 든 참았다. 돌아와 줬다. 그것만으로도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볶은 당근과 감자 등을 접시에 담았다. 시로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고기를 불에 올릴 생각이었으나 엔진 소리가 그치고 한참을 기다려도 알루미 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시로의 애차 소리를 잘못 들었을 리도 없다. 나는 현관을 내려와 운동화를 신었다. 우산을 쓰고 언제나 시로가 주차장 대신 쓰고 있는 신사 뒤까지 가보자 작은 가로등에 비쳐진 검은 스카이라인 의 본네트에 비가 수없이 튀기고 있었다. 자박, 자박, 자갈을 밟으며 운전석 창문을 노크했다. 시로는 핸들에 양 팔꿈치를 기대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있 었다. "시로..." 불러도 반응이 없어 시험삼아 문 손잡이를 잡자 잠겨있지 않다. 나는 문을 조금 열고 다시 한번 시로를 불렀다. 차안은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상당히 마시고 온 모양이다. 자가용 통근인 시로에겐 드문 일이다. "형사가 음주 운전을 하면 어떡해? 오늘밤은 여기저기서 검문을 하고 있다 구. 걸리면 한방에 징계면직이야. 정말 위험하다니까." 잔뜩 취한 시로도 걸리지 않는 구멍 투성이 검문으로 마스터를 잡을 수 있 을까, 나는 내심 불안해졌지만 아무튼 그 일은 제쳐두고 시로의 어깨를 흔들 었다. 양복은 흠뻑 젖어있다. "이봐, 시로. 감기 걸려. 방에 올라가자." 나는 응답이 없는 술주정뱅이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운전석에서 끄집어냈 다. 이런 상태로 잘도 무사히 도라왔다 싶었다. 나는 시로를 다시 어깨에 걸치고 거의 질질 끌며 어떻게든 방에 도착했다. 현관에서 시로와 함께 고꾸라진 나는 그의 밑에서 기어 나와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잡아채고 가까스로 양복을 벗겼다. 속옷까지 흠뻑 젖어있어서 하는 김에 다 벗겼다. 차가워진 시로의 얼굴과 목과 어깨와 가슴을 닦고 아무리 그래도 다리 사이 는... 그만두기로 했다. 세상 남자들의 그곳은 수도 없이 보아온 나였지만 내 게 있어 이 곳만은 이런 기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나는 시로에게 눈을 돌리고 허둥지둥 새 트렁크를 입혀주었다. 시로는 뭐라고 신음하 고 있었다. 물... 이 마시고 싶은 건가 싶어 나는 싱크대에서 컵에 물을 담아왔다. 시로의 머리를 팔에 안고 일으켜서 컵을 입술에 대어주려고 했으나, 뭔가 치밀어 올라 난 컵보다 먼저 그 입술에 입술을 포개버리고 말았다. 무사히 여기까지 돌아와 준 시로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불쌍해서 얼어붙 은 얇은 입술에 '어서 와...' 하고 속삭이고 만 것이다. 시로가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 눈에 미소를 던지며 이번엔 제대로 컵을 내밀었다. 내 품속이 불편한지 시로는 휘청거리면서도 상반신을 일으켜 내게서 벗어나 벽에 기대고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한숨을 내쉬고서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괜찮아, 시로?" "...아아." "식사는... 못 먹을 것 같네." 시로는 빈 컵을 내게 건네주고는 대뜸 이부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런 시로에 게 기막혀하면서도 난 벗긴 시로의 양복을 옷걸이에 걸었다. 아아, 이건 드라이 줘야겠군. 내일 근무는 똑같은 검은 양복이 또 한 벌 있 으니까 그걸 입고 가겠지. 혼자서 식사를 할 기분이 안 나서 나는 준비해둔 식기들을 정리했다. 사실 은 시로에게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산처럼 많았으나, 술취한 사람한 테 다그치는 것 같아 그냥 자기로 했다. 아마 후지시로도 이렇게 시로에게 진심을 들을 기회를 놓쳐버렸을까. 나는 코타츠를 치우고 만든 내 자리에 이불을 깔았다. 시로가 술 냄새가 심 해서 좀 먼 곳으로 피신하고 싶었으나 역시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고 싶어, 나는 파자마로 갈아입고 옆자리의 주저앵이에게 말을 걸 었다. "전기 끌게, 시로."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잘 자.' 하고 속삭이고서 불을 껐다. 나는 바로 곁에 있는 시로의 얼굴 잔상에 다가가 다시 한 번 키스하자 시로 가 입술을 조금 열었다. "응..." 혀끝이 서로 닿자, 술맛이 배어있는 씁쓸한 혀는 차가워져 있다. 결코 맛있 는 키스가 아니었지만 곁에 내가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잘 돌아왔어, 시로..." 내 곁에 돌아와 준... 건 아니겠지만 나는 시로에게 감사했다. 내가 이 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래도 돌아와 줬다. 내게 드러낸 추태조차도 내 눈엔 굉장 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내가 좋아...?" "...응...?" 문득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둠 속에서 들은 그 말은 시로답지 않은 말이 었기 때문이다. 시로가 팔을 뻗어서 내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었다. 적극적인 시로는 처음이라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자 시로의 왼손이 엎드려 있는 내 몸 밑으로 들어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시로...?" 시로의 손이 내 파자마 밑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나는 시로의 품에서 도망 치려고 했다. 뭔가가 다르다. 그렇게 느껴졌다. "시로, 이봐, 잠깐...!" 일어서려고 하는 내게, 시로는 억지로 체중을 실어 물어뜯듯이 내 목덜미에 키스하며 속옷 째로 파자마를 벗겨냈다. "시로, 저기,시... 로... 앗!" 내 다리를 벌리고 밀고 들어온 시로의 욕망에, 등줄기를 스치는 쾌감에 빠 질 새도 없이 난 그만 훌쩍 엎드리게 되고 말았다. "잠깐... 그만해. 이 주정뱅이!" 시로의 손이 내 옆구리를 더듬어 주무르듯이 가슴을 만지고는 가끔씩 아플 정도로 손가락을 박아온다. 시로가 자신의 트렁크를 벗고 내게 몸을 밀어붙 였다. 단단한 피부의 감촉에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앗...!" 시로가 내게 반응하고 있다! "시... 로...!" 시로의 차가운 손끝이 내 피부를 더듬어 내려갔다. 시로의 단단한 손이, 두터운 가슴이, 그리고... 차가운 입술이 두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절규하고 싶 을 정도로 애절해서 무서웠다. 이렇게 부드럽게 안아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런 시로를 알지 못했 다. 나를 애무하는 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어느 세 나는 저항을 내팽개치고 있었다. 이젠 상관없다. 술에 취했어도 좋다. 무드고 뭐고 없어도 좋았다. 시로가 날 원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좋아해, 좋아해. 사랑해, 시로...!" 시로가 내 허리를 들어올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살짝 뺨을 비비는가 했더니 별안간 격렬하게 끌어안아서 너무 행복해 감정이 혼란해졌다. 너무 흥분해서 숨도 쉴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받아들이고 싶어서 나는 다리 를 커다랗게 벌렸다. 꿈틀대는 다리 사이에 시로가 자신을 밀어붙인 순간, 나 는 손등을 깨물어 환희를 견뎠다. 눈을 꽉 감자 기쁨의 눈물이 배어 나오고 말았다. 시로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이렇게나 이렇게나 애타게 바라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야요이--." 잔혹한 그 목소리가 내 심장을 찟고 말았다. 시로가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나는 등에 올라타 있던 남자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내 마음과 몸이 급속도로 시들어갔다. 팔다리는 뻣뻣해지고 가슴엔 분노와 슬픔만이 끓어올랐다. "바보 취급... 하지 마..." 시로는 내게 맞은 충격으로 자신이 범한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다. 이 상황 에 굳어져 버린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한심해. 너무해. 너무 심해! "바보 취급 하지 마!" 그렇게 외친 순간 온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난 여자가 아니야!" 이렇게도 명백한 사실을 필사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다. "나는 야요이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쭉 동경하고 있었다. 시로와 사랑의 하룻밤이란 것을 말이다. 처음엔 키스부터.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서로의 뺨을 손으로 감싼 다. 그리고 시로는 촉촉한 내 피부에 몇 번이나 입 맞추고 이윽고 내 중심을 손으로 감싸면 나는 온 몸으로 사랑 받으며 시로에게 몸을 겹치고 시로를 입 술로 애무하고 시로의 다리나 엉덩이의 근육을 남김없이 더듬는 것이다. 두 사람의 몸이 살짝 땀에 젖었을 무렵, 시로는 나를 마주보고 끌어안는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게 몸을 문지르고 다리를 휘감은 채 몇 번이나 나를 쓰다 듬고 나와 시로는 키스를 하며... 그렇다. 우리는 깊이 입을 맞추며 하나가 되 어야 했다. 나는 쭉 그렇게 꿈꿔왔었다. 결코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었던 입술을 시로에게 바치게 된 순간부터 우리 는 반드시 키스하면서 하나가 될 거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섹스를 시로와 나누게 될 거라고. 입술 은 끝까지 떼지 않는다. 위도, 아래도 젖을 대로 젖어서 시로에게 깊이 빠져 들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로는 지금 여자를 안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야요이를 안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게는 결코 욕정하지 않았던 시로가 야요이의 유령에게는 너무나 간단히 흥분해 버린 것이다. "...나츠... 키..." 후회인지 미안함인지,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중얼거렸 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혐오감으로 소름이 돋을 것 같다. 시로는 내게 무기력한 시선을 던지고는 술 냄새나는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으로 그 바보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 와의 섹스에 대한 흥분은 이미 사라지고 완전히 상처받았다. '그 남자, 언젠가 분명히 나츠키군을 안을 거야. 그리고 분명히 상처 입힐 거야.' 그렇게 충고했던 사람은 묘하게도 지금 도주중인 마스터였다. "마스터 말이 맞았어..." 정확히는 안긴 것도 아니다. 강간 미수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한 처사였다. 몸과 마음을 함께 능욕당한 것과 같다. "술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시로가 곤혹스러운 듯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시로를 차갑게 바라보 고는 일어섰다. 시로도 덩달아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로는 다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린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곤혹스러운 얼굴의 시로가 우스웠다. 그리고 불쌍했 다. 이런 불쌍한 시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로는 이렇게 만든 사람은--나였다. "그렇게 곤란해 할 거 없잖아, 시로. 잠깐 헷갈린 것 뿐이잖아? 나랑 옛날 애인을 말이야." "미안하다, 나츠키..." 사과하길 바라는 게 아닌데... "별로 상관없어. 시로는 취했었잖아? 형사 사건을 일으킨 범인도 범행시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무죄가 되는 일도 있어. 말하자면 지금의 시로는 제 정 신이 아니야. 아까의 행위는 치료에 필요한 약이었다고 생각 하면 돼. 그렇잖 아? 미수였으니까 그냥 잊어버리자. 그리고 말이지, 어차피 내가 야요이... 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건 어떻게 해봐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니까 말이 야." 시로는 긍정도 부정도 해주지 않았다. 잔혹한 남자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 따위를 안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쇼크였어?" 시로는 아무 것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분노인지 슬프인지 모를 감정이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진 나는, 시로의 뺨 을 때렸다. 베개를 움켜쥐고 휘둘러서 시로를 몇 번이나 때렸다. 시로는 고개 를 숙인 채 당하고만 있다. 여느 때와 달리 나약한 시로에게 나는 증오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나는 베개를 시로에게 내 던지고 일어섰다. 싱크대에는 볶은 야채가 그대로 접시에 담겨있었다. 모처럼 사온 고기와 샴페인도 요리되지 않은 채 냉장고 에 잠들어 있었다. 나의 뇌리에 시로를 위해 도시락을 내미는 야요이의 하얀 손과 그것을 맛있 게 먹는 시로의 본적도 없는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시로의 마음을 빼앗 아간 채 이 세상을 떠난 야요이라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를 격렬하게 부러워하고 증오했다. "...대용품이라면 다른 곳에서 찾아." 내 등 뒤에서 시로가 움찔 움직였다. "난 여자가 아니라구! 남자란 말이야! 남자 몸을 대용품으로 삼지 마! 그렇 게 남자랑 섹스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면 업소라도 가서 처리하면 되잖아! 야 요이를 대신하는 건... 여자를 대신하는 건 싫어!" 신기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건지 나 스스로도 놀랄 정 도다. 시로를 만나고 싶어서 후쿠시마까지 쫓아간 주제에 그 사랑하는 남자 의 상처를 더욱 후벼파는 말을 몇 번이나 간단히 내뱉어버리는 자신의 잔인 함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시로는 내게 얼굴을 돌린 채 일어섰다. 오래된 상처투성이인 등에서 둔부에 걸친 근육의 융기가 남자다우면서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이런 때도 역시 시 로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로가 등을 돌린 채 변명했다. "나는 널 야요이 대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야 그렇겠지. 나 같은 게 시로의 사랑스런 야요이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 곤 나도 생각지 않으니까!" 이렇게나 시로를 사랑하고 있는데..., 나는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로에게 사랑 받고 싶은데!! "하지만..., 그럼 왜 날 안으려고 한 거야...?!" 시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불쑥 이렇게 말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어. ...미안하다." 시로는 그렇게 말하고 욕실로 사라졌다. 술과 추태를 샤워로 씻어내고 있는 시로의 후회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식사 준비를 했다. 볶은 야채는 달걀을 넣어서 굽고 남은 야채로 된장국을 만들었다. 고기는 레어로 재빨리 굽고 육즙은 스테이크 소스로 이용했다. 이곳에 얹혀 산지 곧 4개월이 된다. 스스로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란 걸까?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달리 시로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걸로 안 된다면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얘기다. 지금이 사라질 때... 인지도 모르겠다. 샤워 소리가 그치는 것을 기다려 나는 코타츠에 식사를 차렸다. 문이 반만 열리고 시로의 팔이 쑥 나와서 밖에 걸려있는 목욕 타월과 속옷을 움켜쥐고 들어갔다. 나도 청바지와 재킷을 걸치고 배낭에 갈아입을 옷을 쑤셔 넣고는, 타월로 머리를 훔치며 트렁크 차림으로 나온 시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말했 다. "나 여기서 나갈게." 말이라는 건 신기하다. 예측하지 못했던 말이 의미없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튀어나온 말은 망설이던 내 기분의 방향까지 정해버리는 거다. "3개월 하고 20일 간... 이었나? 신세 많이 졌어. 땡큐." 나는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었다. 처음 시로와 만났을 대 나는 스스로 말하긴 뭐하지만 엄청 건방진 녀석이었 다. 어른을 삐닥하게 내려다보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노예로 만들 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 시로와 만나서 이 남자는 보통 방법으론 안 되겠다고... 손에 넣고 말 겠다고 희희낙락하게 달라붙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물러나는 자신을 상 상한 적은 결코 없었다. "남은 짐들은 나중에 시로가 없을 때 가지로 올게. 이제 내 얼굴 따윈 보고 싶지 않겠지? 나도 당신 얼굴 따윈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 저 식사는 내 최후의 요리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 "나츠키..." 당황해서 흔들리는 시로의 속삭임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나는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굳히고, 눈을 뜨고는 배낭을 짊어지고 현관을 내 려왔다. 손바닥만하게 좁고 어두운 방이 이 때만은 최고급 웜룸 맨션처럼 느 껴졌다. 이렇게 편안한 장소를 왜 제 발로 나가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후회의 파도가 밀려온다. 이 약 4개월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은 시로에게 마음 밑바닥부터 반해 버렸 단 것이다. 그리고 시로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 를 안으려고 한 것을 설령 잘못이라고 해도 후회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과하 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던 것이다. "바이... 형사 아저씨." 그리고 나는 알루미늄 문을 등뒤로 닫았다. 5 밖은 아직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양동이의 물을 쏟아 붓는 것 같다는 수식어가 딱이다. 빗소리가 계단에 울려서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위에 가본 적이 없네." 3층은 종교 단체의 사무실, 2층은 빈 집. 1층 주민은 시로뿐인 25년 된 지 독한 싸구려 입대 아파트. 그러나 내겐 최고의 거처였다. "나가버린 척하고 몰래 2층에서 시로는 지켜주는 것도 눈물겨워서 좋지 않 을까?"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혼자서 쿡쿡 웃었다. 나란 녀석은 아직 질리지 도 않고 시로의 곁에 있고 싶은 모양이다. 거의 이용되지 않는 우편함 앞에 발을 멈춘 나는 시커먼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시로가 쫓아올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이런 곳에서 어슬렁 거리는 것을 들키는 것도 꼴사납다. "우산만 가지러 돌아가는 것도 뭐하고 말이야..." 할 수 없이 빗속에 발을 내디뎠을 때,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져 심장이 뛰며 뺨이 확 달아올랐다. 발자국 소리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시로...?" 돌아보려고 한 순간, 나는 순식간에 생각을 고쳤다. 냉정하게 고막에 온 신 경을 집중시켰다. 나는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 내 바로 뒤인지, 아니면 아무도 없었던 계단에서인지 정도의 판별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발소리는 내 바로 대각선 뒤까지 내려와 멈췄다. 콘크리트 계단 몇 단 위에서 축축한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때, 뭔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것은 내 등 뒤 발 밑으로 털썩 쓰 러졌다. 고개만 뒤로 돌려 눈썹을 찡그리며 떨어진 물건을 확인하자 그것은 경찰관... 이었다. 동시에 나는 아까 후지시로가 이 근처를 순찰하도록 경관에게 연락을 취했 던 것을 이 불가사의한 광경 속에서 멍하니 떠올렸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경관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목은 기묘한 각도로 꺾인 채다.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검은 액체는 피인가? 이 경관은 후지시로가 순찰을 부탁해서 이 근처를 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왜 이런 모습으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갑작스런 공포에 사고가 마비되었다. 천둥, 섬광이 순간 주변을 밝힌 순간, 나는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헉...!" 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육체, 바위 같은 어깨와 가슴, 그리고 가늘 게 치켜 올라간 새빨간 두 눈--, 트레이드 마크인 스킨 헤드는 이 3게월 남짓 한 구류 생활동안 자란 듯 짧은 머리칼로 뒤덮여 있었다. "마... 스... 터..." 두꺼운 입술의 양끝을 천천히 들어올린 탈주중인 살인범, 야마구치 세이 지... 마스터는 나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아, 겨우 만났네, 나츠키군." 근육 덩어리 같은 팔이 내게 뻗어온 순간, 난 불에 덴 듯이 절규했다. 순간 뒤쪽 문에서 시로가 뛰어나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내 목에는 마스터의 왼 팔이 단단히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시로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야마구치인가...?" 마스터의 가슴 근육이 경련 하듯이 움직였다. 다시 울려 퍼지는 천둥 소리와 함께 시로의 눈동자가 빛났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무의식중에 현실 도피를 하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 나는 시로가 아까의 트렁크 차림이 아니라 제대로 바지를 걸치고 셔츠도 팔에 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혹시 '날 쫓아오려고 했던 걸까?' 하고 말이다. 정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시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역시 시로가 너무 너무 너무 그리웠기에 목소 리가 떨리고 말았다. "나츠키에게서 떨어져, 야마구치!" "싫은 걸, 농담하지 마. 이제와 겨우 붙잡았단 말이야." 마스터가 즐거운 듯이 쿡쿡 웃으며 내 머리칼에 뺨을 비볐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바로 이런 거지. 미안하지만 시로씨,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껴 주겠어? 혹시라도 저항하지 말아줘. 내가 맨 손으로 사람을 간 단히 죽일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마스터가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경관을 발로 가볍게 차고는 내 목도 꽉 조 였다. 전직 프로 레슬러였던 그의 살인 사건의 흉기는 바로 이 두 손이었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신음했다. 시로가 마스터의 움직임을 눈으로 살피며 신중하게 양손을 들고 뒤에서 깍 지를 끼자, 마스터가 시로에게 턱짓을 했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 2층에서 천천히 이야기 하자. 그치만 야생의 늑대는 길이 들지 않았으니까 목걸이를 채워줘야겠지. 6 패트롤 카의 사이렌이 들려온다. 그러나 상당히 멀었다. 여기 살인범이 숨 어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얼빠진 후지시로가 아마도 '오늘은 선배를 그냥 가만히 놓아두세요.' 하고 상사에게 울며 매달렸을 테니까, 우리가 구출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방구석에 구르고 있는 유일한 조명은 작은 회중 전등이었다. 비가 들이치는 방 안에 마스터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비닐 로프로 손발이 칭칭 감겨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시로는 무너진 벽에서 삐져 나온 철골에 뒤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비를 맞고 있었다. "시로..." 목소리를 짜내자 시로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폭행을 당했 는지 얼굴도 몸도 상처 투성이였고 셔츠는 찢겨 있었다. "시로, 괜찮아?" 내 질문에 끄덕이기는 했지만 약해져 있는 것은 명백했다. 총에 맞은 왼쪽 다리에서도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애벌레처럼 시로의 발치까지 기어갔다. 움직이지 못하는 손발로는 지 혈을 할 수도 없어서 아무튼 필사적으로 상처를 핥았다. 그러나 피는 끝도 없 이 흘러나왔다. 왜 멈추지 않는 거야?! "나츠키." 이름을 불린 나는 매달리듯이 쳐다보았다. "저 파편으로 네 손목의 로프를 잘라." "파편?" 난 바닥에 시선을 집중했다. 흩어져 있는 무수한 콘크리트 조각을 발견 하 자 오싹해졌다. 시로가 묶여있는 철골은 벽안의 골조였다. 그렇다는 것은 설마 마스터가 벽을 맨 손으로 파괴했다는 걸까. 주저주저 부서진 곳에서 계단을 내다보자 갈라진 콘크리트가 길바닥에 돌 더미를 만들 고 있다. 새삼스럽게 마스터의 주먹의 위력에 소름이 끼친다. "빨리 해. 야마구치가 돌아온다." "으... 응."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바닥을 웅크리고 기어갔다. 뒤로 묶인 손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파편을 반대로 거쳐 쥐고선 내 손목을 묶고 있는 비닐 로프에 끄트 머리를 문질렀다. 그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자 조금씩이었지만 끈은 확실히 잘려나갔다. 이제 조금만 더--!! 순간 문득 앞이 어두워졌다. 거대한 그림자에 나는 흠칫 굳어졌다. "뭐 하는 거야?" 마스터가 조용히 방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파편을 떨어트리고 만 나는 주 르륵 뒷걸음질 쳤다. 핏발 선 마스터의 두 눈과 내 시선이 똑바로 맞부딪친 다. 마스터는 김이 솟아오르는 머그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눈에 익은 그 하 얀 자기 그릇은 내가 시로와 커플로 산 것이었다. "이거 잠깐 빌렸어. 나츠키군의 몸이 상당히 차가워져서 말이지. ...자아, 따 뜻한 커피야, 마셔." 마스터는 내 어깨를 움켜쥐고 입술에 컵을 갖다댔지만 나는 유일한 저항으 로 압술을 꽉 다물었다. 그러자 마스터는 억지로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열고 입에 액체를 부었다. 나는 그것을 마스터의 눈에 뿜어내자 마스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한 표 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지기 싫어진 나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신용 했었던 마스터가 이미 지금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왜 시로를 쏜 거야?" 그러자 마스터가 '어머나?' 하고 시치미를 딱 뗐다. "그치만 나츠키군, 시로씨랑 싸웠잖아? 2층에 다 들렸단 말이야. 널 울리는 남자 따윈 조금 혼줄을 내 주는 편이 좋아." 마스터는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로프로 내 손목을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워서 시로와 마주보게 했다. "있지, 시로씨..." 마스터의 손이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사랑싸움 꽤 즐거워 보여서 좋았어. 그리곤 평소엔 어떻게 화해하는데? 역 시 꼭 끌어안는 걸까? 이렇게..." 마스터가 내 재킷 가슴 팍에 손을 집어 넣어 셔츠를 가슴까지 말아 올리고, 드러난 내 피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스터가 아아... 하고 감탄한다. "봐봐, 이 아름다운 피부. 있잖아, 시로씨. 당신은 매일 밤 이 몸을 어떤 식 으로 즐겁게 해주지? 어떻게 나츠키군을 사랑해주는 거야?" "그만... 해, 마스터..." 소름이 돋으며 한기가 들어 나는 몸을 비틀었지만 나를 끌어안고 있는 팔은 느슨해지기는 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좀 더 빨리 내 것으로 만들 걸 그랬어! 히으로라도 그럴 걸 그랬어! 그랬다면 시로씨, 당신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마스터는 그만 하라고 외치는 내 애원은 들어주지 않은 채 마스터의 손이 내 하반신으로 내려가 시로에게 보란듯이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조심스 럽게 내게 손을 댔다. 싫어!! 이런 건 참을 수 없어! "놔! 제길!" 그러나 아무리 내가 소리쳐도, 욕해도, 마스터는 행위를 그만 두지 않고 더 욱 커다랗게 헐떡이며 나를 집요하게 더듬었다. "어때? 분하지? 눈 앞에서 귀여운 연인이 희롱당하는 건..." "싫어... 그만해!" 옷 위에 있었던 손이 직접 브리프 안으로 들어와 오그라들어 있는 중심을 억지로 쥐고 비틀고는, 마스터의 커다랗고 긴 손가락이 나의 은밀한 곳까지 자극하며 스윽 침입해 들어왔다. 신음한 것은 마스터, 그는 음란한 손놀림으로 내 점막을 문지르며 아아, 아 아... 하고 간헐적인 흥분의 숨결을 흘리고 있다. 마스터는 단단해진 중심을 내게 밀어붙이고 마치 내 안에 실제로 삽입하고 있는 것처럼 허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아아... 나츠키군. 계속 널 이렇게 안고 싶었어! 구치소에 돌아가면 다시 널 못 만나게 돼. 그렇게 생각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가 도망 친 거야. 널 만나고 싶어서 돌아온 거야...!" 날 만지고 싶어도 만지지 못하고 그 배출구를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찾아서 시로에게 체포되어버린 마스터, 구류생활 동안 부풀어 오른 나에 대한 집착 을 질투로 변화시켜 시로에게 분노를 전부 터트렸어도 역시 마스터는 나랑 몸을 결코 섞으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혼자서 어이없이 끝나버리고 만 마스터가 나와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았다. 나는 다리 사이를 시로에게 드러내고 있는 꼴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가 없어 마스터에게 호소했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시로는 아무 사이도 아냐! 그저 내 짝사랑일 뿐이야! 시로에게 안긴 적은 한 번도 없어! ...아까도 시로는 그 저 취했을 뿐이야! 나랑 여자를 헷갈려서..." "...거짓말 하지마." "정말이야! 내가 아무리 쫓아다녀도 안 됐어! 시로는 나 따윈...!" 한심해져서 목이 메었다. 아무리 쫓아다녀도 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난 쓸데없는 행위를 몇 번이 나 되풀이하는 걸까? 스스로도 어지간히 기가 막혔다. "정말이야, 시로씨?" 시로는 말이 없다. 대답하기도 싫은 건가? 나는 시로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이런 모습을 시로에겐 벌써 몇 번이나 보이고 말았지만 그래도 역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스터가 진의를 살피려고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시로씨. 남자랑 여자는 말이야, 이게 있고 없고가 다를 뿐이야. 마 으은 똑같아. 굳이 말하자면 남자 쪽이 섬세하거든.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데... 불쌍한 사람. 시로씨도, 나츠키군도..." "그쯤 해둬, 야마구치." 내 수치심을 헤아렸는지 시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짓을 해도 나츠키를 상처 입힐 뿐이다." 마스터의 손이 딱 멈췄다. "그건 무슨 뜻이지?" 마스터가 일어서더니 날 내려놓고 물끄러미 시로를 내려다 보았다. "그 말을 받아들이란 거야? 나로선 역부족이라고. 아니면 당신 자신이 도저 히 나츠키군을 사랑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한 거야?" "이제... 됐어, 마스터..." 나는 진심으로 애원했다. 시로의 입에서 마침표를 듣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 던 나는 바닥에 엎드려 울까 보냐 하고 이를 악물었다. "불쌍해, 나츠키군." 바닥에 눈물이 똑 떨어진다.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마스터였다. 나는 마스터를 올려다 보았다. 마스터의 눈은 연민의 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는 팔을 뻗어서 부드럽게 내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마스터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나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흐트러진 옷을 가 다듬어 주고 날 방 한가운데까지 데려갔다. 그는 시로를 돌아보고 오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괜찮아. 슬픈 건 잠시 뿐이야." 마스터가 쥔 총은 시로의 이마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마스터!" "너와 난 똑같아, 나츠키군." "...뭐?" 나는 마스터를 응시했다. 마스터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넌 시로씨를 좋아해. 나 따윈 안중에 없어. 나츠키군은 어떻게 해도 날 사 랑할 수 없어. 자아, 우린 똑같잖아."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미 알고는 있었으면서... 나와 마스터가 똑같은 것을... 시로는 날 사랑할 수 없다. 내가 결코 마스터를 연애 대상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말이지. 대처 방법을 가르쳐 줄게. 그건 말이야. 시로씨를 이 세 상에서 없애버리는 거야. 그것밖에 없어. 고통의 대상만 없애버리면 넌 분 명히 편해질 수 있어. ...내가 시로씨라는 굴레에서 널 해방시켜 줄게. 그럼 괜찮겠지, 나츠키군..." 나는 시로를 보았다. 시로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 물었다. 그런 거냐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고 말이다. "결단을 내려, 나츠키군.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움직인 시로보다, 먼저 내 입에서 결론이 흘러나왔다. "알았... 어."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 말대로 할게." 시로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를 뿌리치듯이 마스터에게 미소 지었다. 시 로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구나. 시로같은 건 처음 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구나... 난 외로 웠어. 시로가 차갑게 대하는 것도 이젠 견딜 수 없어. 마스터가 더 좋아. 마스 터만큼 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어. 나... 마스터가 좋아. 지금 깨달았어." 마스터가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입술에서 '거짓말...' 이라는 속삭임이 새어나왔지만 나는 '정말이야.' 하고 마스터의 가슴에 뺨을 갖다댔다. "시로는 이제 포기할레. 이제... 됐어. 처음부터 사는 세계가 달랐는 걸. 지 금까지 미안했어, 마스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시야 한구석에서 시로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로 좋은 거냐는 질문이 내 가슴을 애태웠다. 그 말을 묻고 있는 게 시로인지 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마스터가 조심스럽게 날 들여다보더니 총을 허리에 다시 꽂고 그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눈을 감자 마스터는 힉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주저주저 내게 얼굴을 갖다대어 온다. 입술이 살짝 닿을 뿐인---키스. 그런데도 마스터는 울상을 지으며 내 머리 를 끌어 안았다. "아아... 사랑해. 사랑해. 나츠키군! 내 마음에 응해줄 줄은 몰랐어. 정말로 괜찮아? 이런 나라도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양손이 자유롭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마스터를 끌어안고 싶을 정도야." 마스터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한 순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발돋움을 해서,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린 마스터에게 이번엔 가만히 혀를 넣자 마스터가 날 끌어안았다. 정열적인 딥 키스, 이렇게 필사적인 마음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 슴이 저릿했다. 마스터가 내 팔에 감긴 로프를 잡아 끊는다. "다시 한 번 키스하자." 그렇게 말한 나는 마스터의 두꺼운 목덜미에 양팔을 감고 가슴을 애무해주 었다. 마스터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꿈만... 같아..." 마스터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사과하고, 천천히 마스터의 허리로 뻗어가--그것을 움켜쥐었다. "움직이지 마!" 나는 홱 뒤로 물러나 마스터의 허리에서 빼앗은 총을 정면으로 치켜들었다. 행복의 정상에 있던 마스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 며 나는 주저하면서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날 속인... 거구나, 나츠키군...!" 나는 심호흡을 했다. 괴로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용서해 줘. 그렇게 소리 없이 가슴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만 둬라, 나츠키. 넌 쏠 수 없어." 처음 부터 내 계획을 꿰뚫어 봤을 시로가 남의 일처럼 지껄였다. "그럼 당신이 어떻게 해봐!" 제길! 이 쓸모 없는 주정 뱅이!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바닥에 엎드려!" 나는 마스터에게 총을 들이대고 소리쳤다. 분한 듯이 이를 악문 마스터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을 보고 나는 총을 쥔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버튼 하나로 후지시로를 호출했다. 전파 저편은 격렬한 빗속, 경적 소리가 지독히 시끄러운 가운데. 여러명의 남자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호지시로는 어딘가의 거문소에 있는 모양이었 다. "후지시로! 지금 당장 시로 집으로 와!" '에... 저기, 지금 저희는 너무 바빠서...' "탈주범은 여기 있어! 시로가 총에 맞았어! 2층이야! 빨리 와!" '네에엣?!' 전화를 끊은 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총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마스터가 뿌드득 이를 갈고 있다. 사랑이 지나쳐 증오로 변한 얼굴, 나는 미 안하다고 웃으며 강한 척 해 보였다. "이런 짓을 하다니 후회할 거야, 나츠키군. 네가 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 야. 이 남자라니까." 알고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스터. 시로를 죽여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건 말도 안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시로야 말로 진작에 구원받았을 것이다. 시로는 야요이를 잊지 못한다. 두 번 다시 만질 수 없으니까 더더욱 그렇게 나 야요이를 원하는 것이다. "제일 좋은 해결책을 가르쳐 줄게." 나는 손을 천천히 구부리고는 총구를 내 관자놀이에 딱 붙였다. 시로가 내 이름을 부르고 마스터가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웃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사라지면 일단락 되는 거잖아. 그러면 우리 세 명이 모두 편해 질 거야." "그러지 마, 나츠키군!" "어어, 움직이지 말라니까. 난 목숨 따윈 아깝지 않으니까 당장 방아쇠를 당 겨버릴 거라구." 마스터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시로는... 여전히 포커 페이스였다. 녀석은 내가 죽어도 이 면상은 똑같을 거다. 난 겨우 시로를 정면에서 바라봤지만 홍채가 엷은 시로의 두 눈에서는 아무 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시로 쪽이 훨씬 귀엽다. "사실은 여기서 마스터를 체포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내가 지금 제일 죽 여 버리고 싶은 건 시로란 말이야." 시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마스 터를 다시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살아있으면 마스터가 괴롭잖아? 난 마스터의 마음에 보답해줄 수 없어. 하지만 마스터가 아무리 좋아해도 죽으면 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난 마스터를 위해 죽어도 좋아." "나츠키군..." "그러면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츠키군, 그만해. 부탁이야!" "시로, 미안해. 적어도 경찰이 올 때까지는 버틸 생각이었지만 이젠 기다릴 수 없어." 그렇다. 한심하게도 내 무릎은 이미 후들후들 떨려와 이젠 서 있는 것이 고 작이었다. 지금까지 죽겠다고 외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스스로 방아쇠 에 손을 걸고 있다는 중압감을 체험한 적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야, 총이란 건 손끝을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간단히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무기란 말이 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부풀어오르는 이런 공포는 견딜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다!! 이젠 그것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탕! 이니까." 자신과 마스터에게 다시 한 번 못을 박은 나는 기력을 짜내어 시로의 앞까 지 다가갔다. "이별의 선물이라도 줘..." 나는 관자놀이에 총을 갖다댄 채 다른 팔을 시로의 등에 두르고 몸을 찰싹 붙이고는 눈을 감고 시로에게 살짝 입술을 포개 밀어붙였다. 사랑스러움을 담아 몇 번이고 쪼듯이 키스했다. "--나츠키." "어어, 움직이지 마. 나 진심이라니까?" 겨우 내 진심을 깨들은 시로가 눈으로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 었다. "끝까지 폐를 끼쳐서 미안해. 하지만 이젠 해방시켜 줄게." 바이바이, 왠지 몸이 따뜻해진다. "저 세상에 가더라도 사랑할 거야, 시로." 나는 웃으며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7 시로의 날렵한 제지에 나는 상처 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발포한 총은 바로 옆의 벽에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내게 태클을 넣은 시로는 내 위에서 커다랗게 가슴을 헐떡이고 있었다. 마 스터는 허리에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굳어져 있다. "로프, 잘라주지 말걸 그랬어." 나는 화가 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콘크리트 조각을 내던졌다. 키스로 교란해 도와준 호의를 깨끗이 무로 돌리다니 화가 났다. 시로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내게 괜찮냐고 물어와 나는 조금 부끄러 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꼴사납다. 문득 오른 손에 쥔 총에 생각이 갔다. 관절이 뻣뻣해졌는지 도무지 손가락 이 떨어지지 않는다. "죽여버릴 거야..." 그 때였다. 별안간 땅울림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헉 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광기에 추하게 일그러진 그는 우리들에게 질질 무릎 걸음으로 기어 왔다. "오지 마!" 내가 재빨리 마스터에게 향한 총은 내 몸과 함께 후려갈겨졌다. 마스터가 내게 달려들어 내 위에 올라타고 바닥에 짓눌렀다. "나츠키!" 끼어든 시로의 얼굴을 마스터가 한쪽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시로의 후두 부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 찍었다. 무의식적으로 시로에게 뻗은 손을 너무나 손쉽게 비틀어 올린 팔이, 얼굴뼈 가 부러진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나는 방구석까지 붕 날아갔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생명의 위험을 느낀 나는 필사적으로 총을 더듬어 움켜쥐었다. 마스터는 흐느껴 울며 어색한 걸음걸이로 날 구석에 몰아붙였다. "너, 너무해, 나츠키군. 남의 마,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분해, 분해, 분해! 죽고 싶어?! 그럼 얼른 죽어버려! 죽여줄게! 내가 이 손으로 널 죽여줄게! 죽 어!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 두꺼운 손가락이 목을 감아 혼신의 힘으로 졸라오자 뼈가 우두둑 하고 연약 한 소리를 토해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있는 힘을 다해 총을 들어올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려고 했지만... 도저히, 도저히 마스터를 쏘지 못했다. "나츠키--!" 내가 반사적으로 시로에게 총을 던져주자 시로가 바닥을 받차고 몸을 날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총을 붙잡고 총을 쌌다. 마스터의 배에서 피보라 가 일었다. "우와아아악!" 거대한 육체가 무너지자마자 나는 마스터에게 매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로 물들어 가는 배를 있는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눌렀 건만 손가락 사이로 미지근한 것이 넘쳐 나왔다. 믿어지지 않아! 시로 녀석, 정말로 쏴버렸잖아! "왜 쏜 거야!" 물론 분명 총을 던진 것은 나였지만 그래도 설마 이런 일이...! "왜 마스터를 쏜 거야?!' "예전 사건에서도 야마구치의 맨손은 흉기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넌 총과 칼을 동시에 들이댄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았어." "하지만 그... 그런 건 단순한 위협이잖아!" "위협이... 아니야." 모기소리만한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마스터를 내려다보았다. "나... 정말로 나츠키군을 죽이려고... 했어..." 마스터는 미약하게 미소짓고는 내 손을 살짝 쥐고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죽인다니... 마스터가 나를?" "잃어버릴 바에야 죽인다. 그 정도로 너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시로의 단호한 말에 나는 빤히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이런 고지식한 인간이 남의 연심을 이해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안심해, 급소는 피했으니까." "정말?" "그래. 후지시로가 도착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목숨엔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안 나는 일단 진심으로 안도했다. 전에도 이번에도... 두 번이나 살해당할 뻔 했으면서 내 안에 있는 마스터의 신뢰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스터는 시로와 만나기 전의 막나가던 나조차도 진심으로 사랑해줬기 때 문이다. 나는 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는 거대한 육체에 뺨을 비볐다. 그러자 마 스터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날... 용서해 줘." "그런 말하지마... 날 정말 생각해주는 사람은 마스터 뿐이잖아." 그러자 마스터가 그렇지 않다며 내 등뒤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 이끌려서 고개를 돌리자 시로가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 하네, 시로씨..." 마스터는 숨이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왠지 동정 어린 말을 시로에게 던졌 다. "있지, 사실은... 당신..." 거기까지 말한 마스터가 훗 하고 웃었다. "역시 말 안 할래. 분하니까... 그치만 나츠키군도... 의외로 성미가 급해...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마스터가 날 밀었다. 시로에게 가라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날 놓아주었다. "나츠키군... 아까 내게 해준... 가짜 키스... 그런 거... 두 번 다시 하면 안 돼. 네가 사랑하는 사람... 하고만 진짜 키스를 해야해. 그게 바로 네 자존 심... 이잖아?" "하지만 그런 거..." 시로와 나눈 입맞춤은 언제나 거래 미슷한 것이고 내 일방 통행이라 거기에 애정의 교환은 없다. 내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나오려던 말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시로가 내 턱을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시..." 그 말은 흐느낌으로 막혀 나는 눈을 감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몸을 구부린 시로의 얼굴이 내게 포개졌다. 등뒤에서 내 턱을 들어올린 시로가 내 입술을 덮었다. 시로가 내게 키스하고 있다. 시로가 내게 그렇게 해주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고 눈을 감았다. 내 팔은 어느 새 시로의 머리를 안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집요하게 더듬었다. 나는 몸을 비틀어서 시로를 마주보며 다른 한 손으로 시로의 근육을 확인했 다. 나는 울고 있었다. 바보처럼 흑흑거리며 중간 부터는 키스도 뭐도 아니었지 만 그런 날 시로가 가슴에 감싸 안아 주었고 나는 그런 시로에게 매달렸다. 이제 이 남자 없이는 1초도 살아갈 수 없다. "...다행이야. 이걸로 안심이야." 그 때, 마치 넋이 나간 듯 황홀한 목소리로 마스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덧붙여진 '안녕...' 마스터가 무너진 벽에서 뛰어내리고 만 것이다. 계단의 돌 더미, 그 예리한 절단면으로 쏟아지는 암흑의 빗줄기를 등지고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양팔을 옆으로 커다랗게 펼치고, 행복한 듯한 웃음 을 지은 채... 털썩 하고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나는 절규하며 무너진 벽으로 뛰어가 닿을 리가 없는 지상으로 손을 뻗었 다. 마스터는 웃고 있었다. 온 몸을 콘크리트에 꿰뚫린 채, 쏟아지는 빗줄기에 씻겨 내려가는 것은 마 스터가 흘린 흥건한 체액. 이미 숨이 끊어졌으면서도 그래도 마스터는 웃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듯이...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본 마스터의 최고의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8 바람결에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패트롤 카의 무리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로에게서 몸을 떼었다. "...고마워, 시로. 이제... 괜찮아." 나는 훌쩍 눈물을 삼켰다. 행복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한순간의 꿈에 대한 대가로 나는 마스터라는 소중한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 린 것이다. "동정이라도 기뻤어."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시로가 여느 때와 같은 침울 한 표정으로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동정으로 그런 게 가능하겠냐?" "--응?" 아파트 밑에 패트롤 카가 도착했는지 여러 개의 발소리가 계단을 뛰어 올라 오고 있었다. "난 너한테 너무 응석을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로?" "미안하다." 사과의 의미를 헤아려보기도 전에 시로가 내 입술을 다시 막았다. "앗, 선배, 무사하셨습니까?!" 먼저 들어온 것은 후지시로, 경관들도 그 뒤를 따랐다. 간발의 차로 얼굴을 뗀 시로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늦었군.' 하고 대답했다. 마스터의 유체를 발견한 후지시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는지 입술을 꾹 깨물 고 눈을 내리깐 채 양손을 모아서 예를 올렸다. 사체에도 경의를 표해주는 후 지시로가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선배, 상처는..." "괜찮아. 그것보다 야마구치 탈주에 관한 통보가 내게 전해지지 않았던 원 인은 너냐?" 후지시로가 '아.' 하고 굳어진 순간,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지시로가 시로에게 맞은 뺨을 감싸며 고개를 떨궜다. "앞으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담배 있나?" "아, 네, 넷!" 따귀 한대로 용서받은 후지시로는 구급대원 중 한 명에게서 담배 한개비를 얻어 시로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면목 없습니다." 시로의 어깨에 모포를 둘러주며 사죄한 후지시로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정말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구급대원에게 응급처치로 지혈만을 받고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 시로가 '나 츠키.' 하고 나를 불렀다. 제정신을 차린 나는 당황해서 시로의 곁으로 다가 갔다. 스쳐지나가며 후지시로의 어깨를 툭 쳐서 기운을 복돋아 주자 오히려 살그머니 귓속말을 해왔다. "나츠키씨, ...뺨이 새빨개요. 맞은 거예요? 빨리 식히는 게..." "쓰, 쓰, 쓰, 쓸데없는 참견 말아!" 말투가 거칠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후지시로가 깨갱하고 물었다.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그런 것이 아니라, 얼굴이 빨간 건 맞아서 그런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시 로 탓인데... "나츠키, 빨리 와라!" "아... 네." 순순한 대답에 스스로도 쑥스러워하며 나는 시로의 옆에 섰다. 시로는 날 모포로 감싸고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에스코트 받자 더더웃 온 몸이 달아오 르고 말았다. 1층으로 내려가자 시로는 나 혼자만 패트롤 카의 뒷 좌석에 태웠다. 이제부터 시로는 현장 검증에 사정 설명 및 보고서 작성을 해야 한다고 한 다. 부상자인데도 당장 일에 덤벼드는 모습은 너무 시로다워서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도 마침 12시를 넘었으니 이제 비번도 끝이란 건가? "나츠키. 오늘은 신주쿠 서에서 하룻밤 자라. 내일 데리러 갈게." 문 너머로 그 말을 들은 나는 시로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남자다운 수염에 시선을 빼아식면서 말했다. "저기... 시로." "뭐야?" "그러니까... 다녀왔습니다."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난 시로에게 이곳으로 돌아와도 좋은 지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핶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로는 푸우 하고 연기르 ㄹ내 뱉고서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끼치지 않겠단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네가 있으면 난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아." 그 말은 바로 면죄부, 떠밀어내는 듯한 말투에 깃든 본심에 가슴이 뜨거워 진다. 그 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라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제 정말 앞으로는 절대 걱정 끼치지 않을 게. 그러니까... 시로." 나 같은 인간이라도 시로의 중요한 일 부분이란 걸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자 신을 함부로 굴리진 않을 게, 약속해. "시로도 나한테 두 번 다시 걱정 끼치지 마." 시로가 무슨 뜻이냐며 눈썹을 찌푸렸지만 나는 모포를 끌어당기고서 고개 를 숙였다. 부끄러워서 시로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이제 두 번 다시 음주 운전 같은 거 하지마. 술 마시고 잔뜩 취하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 없어. 그러니까 어디서 마시고 있다는 것만은 내게 연락 해줘. 그러면 내가 술집까지 데리러 갈 테니까." 힐끔 올려다본 시선 끝에는 진지한 얼굴로 나의 충고를 듣고 있는 시로가 있었다. "시로가 그러고 다니면 걱정이 되어서 난 여기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단 말이야." 시트에 둘둘 말린 시체가 돌 더미에서 실려 나오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날 사랑해 준 사람의 시체다. 시로에 대해선 대가가 너무 커서 결코 무턱대고 기 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스터만은 우리들을 마음으로부터 축복해줬다고 생각한다. 시로의 입술 끝에 짧아진 담배가 늘어트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빼앗아 뒷좌석 문에 있는 재떨이에 껐다. 손을 뻗어서 가슴팍에 흩어져 있는 재를 털 어주곤 모포를 벗어 시로의 등에 두르고는 그의 두껍고 탄탄한 가슴을 잡아 당겼다.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 시로의 고동이 내게 전해진다. 생명력 넘치는 또렷한 심장 소리. 시로는 죽음의 소용돌이 같은 곳이 아니 라 이곳에 살아있다. 내 곁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시로의 뜨거 운 생명을 확인할 것이다. "하지만 난 시로를 용서한 건 아니야. 또 '야요이' 하고 쫓아오면 난 사정없 이 시로를 후려칠 거야. 그런 응석은 절대 받아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평 생이 걸려도 시로의 근성을 뜯어고쳐 주겠어." 강인하고 냉철한 한 마리 늑대인 칸자키 시로. 그런데 이따금 슬픈 눈동자 로 대답도 없는 달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외로운 시로. 그러나 이제부터는 혼자가 아니다. 시로의 SOS에는 언제나 내가 대답해 줄 것이다. "--언제 나와 함께 가주겠어?" "응?" "야요이 묘에..." "시로..." 감정이 북받쳐서 끄덕이지도 못하는 나에게 시로가 훗 하고 쓴 웃음을 지었 다. "그럼 간단히 자기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바보가 또 내 앞에 나타났다고... 보고라도 할까?" 그 바보란 나야? 원망스럽게 올려다본 시로의 눈빛이 왠지 굉장히 따뜻해 서 가슴이 메였다. "야요이와 똑같은 외곬이 난 계속 두려웠다. 가능하면 너와 얽히고 싶지 않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넌 야요이가 아니야. 나츠키다." "응..." "너희들에게 약속하겠어. 난 이제 도망가지 않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시로가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다니, 나에... 대해서 말이다. "단지 여기 있겠다면 각오해 둬." 나는 웃었다. 그런 건 벌써 옛날에 했는 걸. 나는 끄덕이며 시로의 목에 팔 을 뻗었다. "난 이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시로야말로 각오해 둬. 하지만 1년 에 한 번 뿐이라면 용서해줄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 말에 시로가 되붇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1년에 한 번 있는 기일만은 야요이를 위해 울어도 좋아. 단, 내 품안에 서..." 마스터의 시체가 구급차에 실렸다. 다해한 탈주범을 한 번 보려고 경관들이 우글우글 그곳에 모여들었다. 사람들 틈에서 난 시로를 모포 채로 잡아당겨 스치듯이 키스했다. "일 터로... 돌아가." "...아아." 너무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시로는 현장으로 사라져 갔다. 마톤 터치로 허둥지둥 돌아온 후지시로가 '자, 갈까요?' 하고 운전석에 들어 왔다. 백미러에 비치는 것은 여전히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그곳에 있는 것은 눅 눅한 이부 자리와 얼룩진 벽과 천장. 그리고... 따뜻하고 편안한 시로의 규 칙적인 고동 소리. "오늘... 많은 일이 일어나 피곤하지요, 나츠키씨?" 나는 '그렇지 뭐.' 하고 대답했다. 확실히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뭔가가 끝나면 다시 다른 뭔가가 시작되는 거야..." 후지시로도 엔진을 켜면서 '그렇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도대체 이 녀석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다시 한 번 천천히 생각하자. 내 몸 속을 스쳤던 갖가지 감정들. 잃은 것과 얻은 것들... 그리고 나와 시로 의 미래. "도착할 때까지 자도 돼, 후지시로? "그러세요. 편히 쉬세요." "고마워..." 나는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어느 새 비는 그쳐있었다. 애정의 사각 1 "뭐야, 시로. 야근이라니, 연말연시 내내 계속 이런 상태잖아!" 시로는 매달리는 나를 완벽하게 무시하고서 낡아빠진 양복에 팔을 꿰고 현 관으로 내려가 역시 낡아빠진 구두에 발을 쑤셔 넣었다. 무시하고 출근한다 이거야? 그럴 수야 없지. "이봐, 시로.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크리 스마스에도 연말에도 아무데도 못 갔잖아. 게다가 우린 아직 새해 참배조차 못 갔단 말이야!" 내가 떼를 쓰자 홍채 엷은 눈동자가 어깨 너머로 날 노려보았다. 언제 봐도 칼날처럼 날카롭고 감정이 희박한 눈동자였다. 저 인간은 역시 인정이 결여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대답해, 시로!" "새해 참배정도는 혼자서 다녀와." "난 시로랑 가고 싶다니까!" "그럼 이 사건이 매듭지어질 때까지 기댜려." "그러니까 언제 되는데!" 애초 이 시로라는 남자는 나, 아마노 나츠키의 신원 인수인 겸 보호자 및 지 난번 사건을 계기로 공공연한 연인... 뭐, 이건 제쳐두고 결론만 말하자면 경 시청 수사1과의 잘 나가는 형사인 것이다. 하지만 형사는 그렇지 않아도 근무 시간이 불규칙한데 이 칸자키 시로에 대 해 말할 것 같으면 세끼 밥보다 일을 좋아해 연중 무휴로 시내 전역을 뛰어다 니고 있다. 게다가 막 새해로 넘어간 니번 달은 범죄도 신년 개업인지 시로는 매일 24시간 풀 가동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런 시로가 걱정이 되어 죽겠다. 왜냐하면 올해가 되어 1주일간, 나는 시로가 제대로 밥을 먹는 모습도, 이불에서 제대로 자는 모습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로는 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어 겨우 집에 돌아와 샤워와 옷 갈아 입는데 10분이란 엄청 짧은 시간만을 머물다 다시 현장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잠복 기간을 보내고 겨우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연인다운 대화 도, 달콤한 무드도 일절 없다. 그래서 나로선 조금... 아니, 상당히 서운하다 는 얘기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아직 키스밖에 가지 않은 사이인데 말이다. 시로의 건강상태도 그렇지만 실은 난 이 좋은 전개가 굉장히 불안했다. 더 구나 시로의 마음의 변화가 처음부터 걱정되기도 했다. 시로는 정말로 날 좋아하고 있는 걸까...? 시로가 구두를 신고 말없이 문을 열었지만 오늘 아침도 나는 시로를 붙잡지 도 못하는 원망스러움에 말없이 보내줄 뿐이다. "아... 그리고." 그때 문득 생각난 듯이 시로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나라는 존재가 있 다는 것만은 기억 한 구석에 있는 모양이다. "나츠키, 아까 말한 거 잊지 마라." "알았다니까. 오늘 부터 한 동안 돌아오지 말란 얘기잖아?" 왠지 나 신용 받지 못하고 있잖아? 돌아오면 안 되는 이유도 일절 안 가르 쳐주고 말이다. 아까의 얘기란 건 돌아오자마자 시로가 내게 한 동안 친구 집에라도 신세를 지라고 했던 말이다. 왜냐고 반론하려고 해도 오로지 '내가 하는 일에 말참견 하지마.' 라는 한 마디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로, 난 친구 같은 건 한 명도 없는데." "누구라도 상관 없어. 2, 3일이면 돼." 그게 뭐야?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나는 울컥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로는 가끔씩 이런 무심한 말을 내 뱉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해 나도 도전적으로 대꾸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한 사람 있네. 나한테 홀딱 빠진 완전 호모 녀석인 타케 와키란 강사가 말이야. 그 녀석 집에 묵으면 나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구. 타키와키는 덩치도 좋고 그쪽도 센 것 같으니까. 시로가 그래도 좋다면 그렇 게 하겠지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로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시로 는 이미 골수까지 범죄자 추적 모드에 들어간 모양인지 나의 절실하기까지 한 수작 따윈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 동안 돌아오지 마라. 너, 통장 같은 거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는데, 왜?" "인감, 통장, 그 비슷한 귀중품만 가져가. 다른 짐은 그냥 놔둬도 돼. 평소처 럼 굴고 있어. 알겠지?" "왜 그러는 건데, 이유는?" "정리되면 설명하지." 여전히 매정한 남자다. 하지만 나도 분별 있는 연인이 되고 싶다. 할 수 없이 백 보 양보해서 승낙한 나는 시로의 허리에 감고 있던 양팔을 마 지못해 풀었다. "그럼 난 호텔에나 묵을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시로의 대답엔 왠지 안도가 배어있었다. 타케와키에게 신세지지 않아서... 일까? 겨우 그것만으로도 아마도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무지 행복할 것이다. 아아, 나란 녀석은 정말 시로에게 골수까지 푹 빠져있는 것이다. 진짜로 하 루 빨리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일은 토요일이었지? 학교는?" "안 가, 이번 주말 2일 연휴." "그럼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이번 주말은 호텔 방에 얌전히 있어. 빠르면 오늘밤엔 정리 될 거다." '그리고...' 하고 시로가 묘한 표정으로 못을 박았다. "호텔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 행동을 조심해, 알겠지?" 추측해 보자면 무슨 사건 때문에 우리들의 보금 자리인 요츠야 주변이 위험 하다, 뭐 이런 얘기인 것 같았다. 형사를 연인으로 삼고 있으면 매일이 스릴 넘치는 구나. "얌전히 시로의 마중을 기다리고 있을게." "숙박처가 정해지면 휴대폰으로 연락해." "넵! 몸조심 해." 나는 빈틈을 노려서 쪽하고 입술을 훔쳤다. 대단히 민폐라는 표정을 짓던 시로의 손이 내 목덜미로 뻗어와 거칠게 뒷머리를 움켜쥐고 확 잡아당겨 내 입술을 빼앗았다. 돌연한 딥키스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이런 시로는 처음이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시로의 격렬한 구애행위에 내 몸은 순식간에 불꽃으로 변했다. 이렇게나 강렬하게 내 입술을 빼앗고서 시 로는 선뜻 내게서 입술을 떼고 무표정하게 문 손잡이를 잡았다. 이 변모의 빠 르기가 원망스러워 나는 당장 그의 등에 매달렸다. "...나랑 있어줘." 꼴사납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로가 나를 응시했다. "일이 정리되고 나서도 좋으니까 나랑 함께 있어줘, 시로..."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로는 웃어 주었다. 아주 희 미하게였지만 말이다. 그 웃음은 너무나 상냥하고 너무나 아련해서 내 가슴 을 애절하게 태웠다.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시로의 얼굴에 쏟아졌다. 오직 내게만 웃어주는 시로가 눈부셔서 현기증이 났다. 이대로 시로가 빛으 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슬픈 착각마저들 정도로. "이 일이 끝나면 한 동안 휴가를 받아서 여행이라도 할까?" "정말?" "아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데려가 주지." 시로답지 않은 배려에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기뻐야 하는데 최고로 행복해야 하는데... 왜일까? 너무 행복해서 왠지 자꾸만 두려워진다. 나는 사무치는 행복에 취해 당장이라도 깔려 죽을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시로가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줄이야... 시로를 잃어버리는 날이 올 줄이야... 2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거리를 사들고 요츠야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평일 일과였다. 그러나 오늘은 잘 곳을 찾기 위해 훌쩍 신주쿠까지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정월의 BGM이 흘러나오는 모 백화점 1층을 가로질러 바로 S호텔로 향했다. 로비에서 정중하게 맞아들인 도어맨 앞을 지나쳐서 번 쩍번쩍하게 닦인 카운터로 직진한 나는 일류 기업인이나 외국 비지니스 맨들 사이에 섞여 체크 인을 요청했다. "오늘밤에 스위트 비어있어?" "예. 3만 엔 객실부터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쪼잔한데 말고 좀 더 좋은 방은 없냐구." 호텔 직원은 컴퓨터로 숙박 상황을 확인하며 기계적으로 대응했다. "공교롭게도 10만 엔인 주니어 스위트는 다 찼습니다. 스위트와 프리미어 스위트라면 비어있습니다만." "1박에 얼만데?" "각각 15만 엔, 30만 엔부터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30만 엔짜리 프리미어로." "알겠습니다." 과연 일류 호텔의 직원이다. 어린 나에게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고 의심 스러운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 호텔에서 조용히 공 부에 열중할 거라고 해석한 모양이다. 방에 도착하자 나는 재빨리 시로에게 연락했다. 스위트 룸에 있다고 보고하 자 시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방 값은 누가 내는 거냐?' "일단은 시로한테서 빌린 비자 카드를 쓸 생각인데 나중에 경찰청에 영수증 보낼게. 그럼 무라이씨한테 안부 전해줘." '...으.' 경비를 낭비하고 싶지 않으면 한시라도 빨리 데리러 오라고 아양을 떨자 시 로 녀석은 커다랗게 혀를 차고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 * * 쏴아... 하고 기분 좋은 물보라가 일어난다. 나는 하늘색으로 칠해진 풀장 바닥을 흔들흔들 떠다녔다. 온 몸을 감싼 물은 적당한 온도로 설정되어 스위트 투숙객만이 이용할 수 있는 최상층의 풀. 하늘을 쳐다보면 통 유리로 된 천장이 보인다. 빨려 들어 갈 듯한 겨울밤 하늘을 보자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금요일 밤인데도 나 이외의 이용객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혼자 전세낸 듯 한 상태를 즐기며 여기에 시로가 와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살짝 하고 말았 다. 50m 코스를 잠수해 있던 난 중간 조금 넘은 부근에서 떠올라 숨을 쉬고 다시 풍덩 하고 들어갔다. 이 기분 좋은 숨막힘은 어딘가 시로의 키스와 비슷 해 영원히 잠겨있고 싶은데 불가능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하고 욕심을 부리 면 목숨마저 빼앗겨 버리게 된다. 나는 코스 끝까지 헤엄쳐가서 수면에서 첨벙 얼굴을 내밀었다. 풀 가장자리 에 팔을 걸치고 쉬고 있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 졌다. "깨끗한 폼이군."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을린 발을 시선으로 천천히 더듬어 올라갔다. 나랑 똑같이 호텔 마크가 찍힌 검은 수영복을 걸치고 있다는 것은 스위트 손님인가? 다리 사이의 크기는 중상, 튀어나온 복근과 불룩한 흉근. 이 녀석, 보디빌더 인가? 그런 몸으로 물에 뜰 수나 있을까 몰라. 얼굴은... 조금 계집애 같군.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고 할까. "너 혹시 수영 선수? 쓸데없는 근육이 하나도 없군. 상박근도 굉장히 팽팽 해서 느낌이 좋아." "...감사." 남자가 감탄하고 있는 건 아마 수영 포즈가 아닌 것 같다. 근육맨은 뻔히 보 인다는 것도 모른 채 하얀 이빨을 과시하며 미소를 보였다. "저기, 너 잠깐 쉬지 않을래? 저기 사이드 바에서 칵테일 어때?"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척 자력으로 풀에서 올라가자, 남자가 친밀 한 태도로 타월을 어깨에 둘러주었다. 걸쳐진 팔은 내 어깨에서 떨어질 기색 이 전혀 없었다. 남자의 말투와 눈빛은 이미 음란 모드로 변해있었다. "여기 누구랑 왔어? 부모님이랑? 아, 혹시 연인인가?" 무시하고 있자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풀 사이드로 데려갔다. 풀 사 이드엔 남국을 연상시키는 하얀 테이블 세트가 펼쳐져 있고, 웬일인지 이미 푸른색 트로피칼 드링크가 두 잔 준비되어 있었다. 이 녀석,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온 거였나? "너 대학생? 이 호텔은 자주 이용해?" "...뭐어, 그냥..." "헤에, 부자네. 부모님이 회사나 뭐 그런 걸 경영하시나 보지?" 부모님, 부모님, 시끄러운 녀석에게 난 자랑하듯이 대답해줬다. "아버지는 별장에 살고 어머니는 해외여행 중이야."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가 굉장하다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넌 호텔 생활? 스위트는 처음인가?" "나는 스위트 이외엔 안 자." 내가 신주쿠 2번 가의 잘 나가는 남창이었을 때부터 말이야. "헤에, 부자구나." 남자가 솔직하게 감탄하자 나는 쿡 웃고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아아, 어깨 근처가 기분 나쁘다. 풀장의 물로 소독하고 싶다. "난 아직 수영하고 싶으니까, 실례." 갑자기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는 민폐라고 눈썹을 찡그린 내게 구차 한 변명을 했다. "뭐, 뭔가 오해하고 있나본데. 난 그냥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 이 손은 뭐야?" 나는 손가락이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손에 턱짓을 했다.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초조해진 남자가 입술을 핥았다. 나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풀로 풍덩 뛰어들어 바닥에 스칠 정도로 깊게 잠수해 물살을 헤치며 수압과 물결에 몸을 맡겼다. 남자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서 좋았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그 눈빛으로 금세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내겐 일상다반사, 뭐 갑자기 엉덩이를 쓰다듬지 않은 것만도 아직 저 남자는 신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만들어진 근육질에 속을 만큼 순진하지 않단 말이다. 뭐니뭐니해도 내겐 칸자키 시로라는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인 최상급에 최 고로 멋진 연인이 있는 것이다. 그 실전으로 단련된 근육과 상처투성이인 두터운 피부, 강인한 강철과 같은 정신력을 알게 되면 다른 남자따윈 눈에 차지... "우왓!" 떠오르려고 한 순간, 나는 갑자기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부글 하고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간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발이 묶여있는 듯 수면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등 뒤로 고개를 돌리자 내 발을 붙잡고 물 속에서 히죽 웃고 있는 것은 아까 그 근육맨이었다. 위험해! "우... 콜록!" 필사적으로 물살을 헤치며 도망치려고 하는 나를 남자가 막았다. 산소가 떨어져 폐가 오그라들었다! 남자가 내 겨드랑이로 팔을 넣어 목을 조르며 내 턱을 들어올려 억지로 입 술을 빼앗으려고 한다. 내가 당할까 보냐! 몸을 비틀어 발버둥치며 그의 옆구리에 팔꿈치로 공격을 먹였지만 물 속이라 거의 충격을 주지 못한 것 같다. "푸앗!" 목숨만 겨우 유지한 채 떠올랐으나 나는 산소부족으로 휘청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안고 코너로 몬다. 도망칠 곳을 잃은 나는 가슴까지 물에 잠긴 채 변태 근육맨과 마주보는 처 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자식, 무슨 짓이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남자가 대단히 기쁘다는 듯 이 입술을 들어올렸다. "보기완 달리 고집이 세군." 남자는 야비하게 입맛을 다시며 내 귓가에 얼굴을 갖다댔다. "저기, 지금 내 방에 안 올래? 기분 좋은 일을 가르쳐줄게." "헤에."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수백 명의 남자를 이 몸으로 승천시켜온 날 상대로 겨우 너 정도의 송사리 가 뭘 가르쳐 주겠다는 거냐? "난 첫눈에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남자가 내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양손 엄지로 내 가슴을 만졌다. "자아... 어때? 좋지?" 남자가 신음하며 내게 가슴을 눌러댔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영복을 끌어내 렸다. 남자의 다리 사이가 물 속에서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남자의 손이 딱 멈 췄다. 유리로 둘러진 통로 너머로 OL로 보이는 한 무리의 수영복이 지나쳐갔 던 것이다. 그녀들은 머지않아 샤워를 마치고 잠시 후 여기로 올 것이다. 남자가 혀를 찼다. 단념하는 줄 알았더니 남자는 내 다리 사이에 완전히 일 어선 자신을 억지로 끼워 넣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말겠다는 꿍꿍이 속 인 모양이었다. 방해꾼이 오기 전에 끝내겠다는 듯이 남자가 성급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이어이, 멋대로 흥분하지마. 여긴 화장실이 아니라니까. "...이봐, 형씨." "시끄러! 좀 더 다리를 딱 붙여!" 남자가 감정적으로 호통을 쳐오자 내 인내의 끈이 끊겨버렸다. 그렇게 원한다면 갈 데까지 해주지. "그럼 천국에 데려다 줄까?" 나는 물 속으로 풍덩 들어가 다리를 열고 남자의 중심에 얼굴을 가져갔다. 남자가 내가 흥분했다고 오해했는지 희희낙락하게 양다리를 버티고 섰다. 나는 가까이서 녀석의 것을 관찰했다. 꽤나 훌륭한 물건이었다. 멋지게 배 까지 닿아있다. 나는 녀석의 욕망을 손에 쥐고 쓰다듬었다. 금세 남자의 허벅 지 안 쪽이 팽팽해졌다. 가까워지는 여자들의 기척을 신경 쓰면서도 녀석은 직립 부동의 자세로 쾌감을 탐하고 있다. 남자가 신음소리를 흘리는 것을 보며 급히 이를 악물자 목덜미까지 흠칫흠 칫 떨고 있다. 예측하지 못한 공격과 만나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교묘한 나의 테크닉에 패닉에 빠진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을 까뒤집었다. "어...어, 어, 어...!" 어떻게 이렇게 잘 하냐고? 뭐, 굳이 말하자면 경력의 차이지. 아까의 OL 일행이 풀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다시 물 속으로 풍덩 사라졌다. 물론 남자는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상태다. 움직이 면 폭발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OL 중 한 사람이 물 속에 잠긴 채 굳어져 있는 선객을 발견하고는 발을 멈 췄다. 어딘가 수상한 낌새에 '저기.' 하고 말을 걸어왔다. "저기, 어디 아프세요?" "아흑, 히, 히, 히익...!"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남자가 기묘한 신음 소리를 낸 순간, 여자들이 얼굴 을 마주보고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중심이 부풀어 끄트머리가 움찔거리기 시작한 순간, 물 속에 반투명 한 액체가 희미한 실처럼 떠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 한다, 아, 좋아...!" 남자의 다리 사이가 폭발하는 찰나, 나는 남자의 양 발목을 붙잡고 기세 좋 게 치켜올렸다. 숙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야 그렇겠지. 하반신을 드러낸 남자가 갑자기 천장을 향한 채 풀 위로 떠 올랐으니, 게다가 일어선 중심에선 부끄러운 액체가 고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녀석의 반쯤 열린 입에 풀장의 물이 출렁하고 들 어가도 반응이 없다. 어라, 기절해 버렸잖아? 달려온 감시원이 이 공연 음란죄 녀석을 물에서 끌어올렸다. 사정을 들으려는 감시원에게 난 천사처럼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변태예요." 뒤를 부탁한다고 윙크한 나는 아연하게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 풀장을 뒤로 했다. 방에 돌아오자 나는 신속히 시로를 맞이할 준비에 돌입했다. 먼저, 대리석 욕조에 오일을 몇 방울 떨어트리고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고 머리도, 손톱도 구석구석까지 열심히 광을 냈다. 충분히 1시간을 채운 입욕 뒤에는 마사지 사를 방으로 불러 전신의 근육에 만전의 상태로 다듬고 푹신한 목욕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룸 서비스로 배를 채운 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았다. "시로가 빨리 와주면 좋겠다." 나는 테이블의 시계를 힐끔 봤지만 시각이 가르쳐주는 것은 시로의 퇴근이 늦다는 사실뿐이었다.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는 동안 시간은 차츰 차츰 지나가 서 시계 바늘이 똑바로 맨 위에 모이고 말았다. "그 바보가 몇 시까지 일하는 거야?" 모처럼 목욕 재계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불평을 중얼거리며 담배를 물고 지포로 불을 붙였다. 시로의 채취와 똑같은 말보로 향기에 빠지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스위트로 잡으면 안색이 변해서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역시 시로는 평소와 같이 아침 퇴근인 걸까? 뭐, 새삼스럽게 화낼 일도 아 니다. 돌아오겠다고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것은 시로에겐 일상 다반사니까 말이다. 이제 딱 12시, 오늘부터는 2일 연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뭔가 있는 것도 아닌 평소와 똑같은 나날들. 다음주부 터는 다시 보통의 학교 생활이 시작될 뿐 변함없는 매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 이다. 변함없는 것은 시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시로의 마음을 확인하 게 되었는데 말이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시로와 만나기 전, 나는 신주쿠 2번가에서 이름을 날리던 남자 전문 남창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라도 일단 자존심이란 것이 있 어서 아무리 거금으 ㄹ내놓아도 결코 손님에게 입술만은 주지 않았다. 입으 로 봉사는 해도 입술끼리의 접촉은 단호히 거부를 관철해왔다. 립 버진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시로와 만난 나는 오나전히 시로에게 입술을 허락하 고 말았던 것이다. 아아, 허락했단 건 어폐가 있다. 내가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그 날 안에 시로를 함락시켜서 내 노예로 만들어야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내가 시로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낡아빠진 검은 양복과 넥타이에 다림질 안한 와이셔츠를 걸치고 머리는 덥 수룩, 게다가 드문드문한 수염까지 기르고... 수염은 요즘 내가 너무 불평을 해대니까 말끔히 깎고 있지만 말이다. 단단한 근육에 감싸인 마른 체격과 갈날 같은 두 눈. 흉악범과도 맨손으로 맞서는 용기와 배짱, 그리고 민첩하고 날카로운 몸놀림. 어디를 어떻게 봐도 야생의 향기가 풀풀 풍기는, 내가 동경하는 남자 칸자 키 시로. 나는 그 겉모습처럼 터무니없을 정도로 말 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거 친 시로를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최고의 남자라고 가슴을 펴고 단언한다.그 런 시로가 작년 말에 겨우 내 마음을 받아들여 주었건만 아직 키스까지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시로가 너무 바쁜 것이다. 아마도 시로라는 녀석은 너무나도 일본인답게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일을 우선하는 재미없는 남자인 모양이다. 연초엔 특히 범죄가 많이 일어나 바쁜 일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 시로는 내게 유혹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것이 다. 옷 갈아입는 틈을 노리려고 하면 냉혹한 그 눈빛으로 방해된다며 걷어차 버리기만 했다. "헛된 연애를 하고 있어..."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생활을 한탄하며 침실로 갔다. 킹사이즈 침대 옆에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있다. 나는 나이트 테이블의 램프 를 켜고 목욕 가운을 스르륵 발치로 떨어트렸다. 거울 속으로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나의 나체가 비친다. 마르긴 했어도 아 름다운 근육이 붙어있다. 나는 시로에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의외로 남자 다운 이 육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건만... "시로 녀석, 이런 보물이 언제나 곁에 있는데..." 나는 천천히 자신의 피부에 두 손을 미끄러트렸다. 목덜미를 쓰다듬고, 어 깨를 안고, 부끄러운 듯이 가슴을 가리고 순끝으로 살짝 양쪽의 유두를 눌러 보았다. 어느 아저씨가 이곳을 쁘띠 체리라고 표현했었지만 정말 그 말처럼 싱싱한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다. 유두는 얌전히 조여들어 있었지만 남창 시절에 손 님에게 빨린 탓인지 조금 여자처럼 부풀어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감촉이 절묘하다고 남자들에게 절찬을 받은 물건이기도 하다. 시로가 이 무르익은 쁘띠 체리를 먹는 장면을 상상하며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검토했다. "시.로." 그렇게 말해보며 자신의 얼굴이 요염해 보이는 앵글을 체크한다. 약간 턱을 쳐들고 조금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내려다보는 느낌이 꽤나 GOOD!! 나는 삐딱하게 서서 멋있는 척하다가 카펫에 발이 걸려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일어나면서 눈길을 들자 정면 거울에 비친 자신과 맞닥트렸다. 단정치 못한 포즈로 나를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 "...헉!" 별안간 수치심에 휩싸인 나는 확 다리를 오므리며 당황해 목욕가운으로 몸 을 가렸다. 도대체 나란 녀석은 뭘 혼자서 들떠 있는 거냐! 그러나 시로에겐 과거에 날 샀던 아저씨들과의 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 로 잘해주고 싶었다. "젠장! 오늘밤이야 말로 절대로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나는 쑥스러움을 떨치고 자포자기하게 침대로 뛰어들었다. 3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낙담했다. 커다란 침대 맡에는 역시 시로가 없다.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역시 화가 나 고 서운했다. '빠르면 오늘밤에라도 데리러 갈게.' 그런 그럴듯한 말로 나를 들뜨게 만들 어 놓고서 갑자기 파토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아아, 30만 엔이 날아갔잖아."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를 했다. 갈아입을 옷 같은 것도 준 비해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제 입던 옷에 팔을 꿰고 TV를 켠 채 소파에 앉아 시로를 흉내 낸 말보로로 아침의 느긋함을 맛보며 멍하니 TV 화면을 바 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반복해서 폭발 사건의 속보입니다.' 긴급 특보인가... 이상한 표정을 일부러 얼굴에 붙인 리포터가 인파를 배경 으로 어딘가 길가에 서있는 그 광경에 난 눈썹을 모았다. "저긴 요츠야잖아?" 틀림없다.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는 요츠야 신사 뒷길이었다. 단지 배경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 내 기억과 상당히 벗어나 있다. TV에 비치고 있는 것은 수북하게 쌓인 둘무더기 산에, 반쯤 보이는 것은 눈 에 익은 신사의 지붕. 리포터가 서있는 길에서, 3층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말 아야 할 그것이 왜 이렇게 뚜렷하게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거지? '...인접해있는 신사나 가옥에는 아파트 붕괴에 의한 영향이 거의 없었습니 다만, 새벽에 일어난 불의의 아파트 폭발사고라는 이 불가사의한 사건의 원 인은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경시청 형사부에 소속된 칸자키 시로 경부보 한 사람으로 경시청은 칸자키 경부보에게 개인적 인 원한을 가진 자의 범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 입술에서 떨어진 말보로는 발치를 구르다 카펫을 조금 태웠다. 나는 깜 짝 놀라 담배를 슬리퍼로 밟아 껐다. '계속해서 돌무더기의 철거 작업과 함께 행방불명된 칸자키씨의 수색이 급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 지금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돌무 더기 아래서 인체 일부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아까부터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팔 같다고 합니다. 행방 불명된 칸자키 경부보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히...' 시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입을 열 수 없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 았다. '이 발견으로 인해 현장이 갑작스럽게 혼란해졌... --상황이 알려지는대로 여러분께 전해...' 나는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심장은 움직이고 있는 걸까? TV 화면에 커다랗게 비치고 있는 시로의 사진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지만 뻔뻔함은 여전했다. 이럴 때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시로가 경부보라는 훌륭 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역시 당신 악당같은 얼굴... 이야..." 무심코 새어나온 목소리와 동시에 나는 소파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채 팽창 한 심장을 누르고 정신없이 방에서 뛰쳐나갔다. 식은 땀이 온몸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안면의 근육이 굳어져서 눈 안쪽이 아프고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다. 뼈가 삐걱거리며 심장과 폐과 뒤틀려와 목이 탔다! 나는 서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요츠야 주소를 빠른 말투로 말했다. "아아, 거기 오늘 아침 뉴스에 나온 곳이죠? 손님은 젊은데도 구경꾼 근성 이 대단하네요." 운전수의 농담도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조수석 시트 등받이에 양 손가락 을 박고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택시에서 뛰어내렸다. 인파 너머로 아까 TV에서 본 것과 똑같은 콘크리트 산이 있었다. 돌무더기 철거작업 따윈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나는 구경꾼들을 밀어젖히고 출입금지 로프를 빠져나갔다. "이봐, 택시비 내야지! 듣고 있냐, 이 녀석!"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와 그 손을 뿌리친 반동으로 나는 그 자리에 넘어져 버렸다.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 나는 굳어져버렸다. 진흙에 뒤덮인 지면에서 그릇 조각이 엿보인다. 폭풍에 날아온 걸까? 눈에 익은 그것은 내가 사온 시로와 나의 커플 머그컵 조각이었다. 나와 시로의 자그마한 행복과 그 공간이 붕괴되었다. 정말로 소 멸해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칼을 움켜쥔 채 잡아당겨 억지로 일으키 려고 안달을 했다. "이봐! 여긴 출입 금지야!" "경관님! 이 꼬맹이가 무임 승차를 했다구요! 닭장에 처 넣어줘요!" 나는 그저 우리들의 집에 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시로의 곁으로 돌아가 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데 경관이 나와 시로를 떼어놓았다. 운전수가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이 녀석! 뭐라는 거야?!" 나는 무참히 무너진 아파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시... 하는 소리가 나온 순간, 나는 절규하고 있었다. "시로! 시로! 시로--!" 팔을 휘두르고 막무가내로 날뛰며 시로의 이름을 계속 외쳐댔다. 흐느끼면 서, 기침을 하면서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유족일까요?' 하고 동정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실황중계가 TV 카메라 렌즈와 함께 나를 둘러쌌다. "나츠키씨! 이쪽입니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르며 내 팔을 잡아 끌어와 나는 그 녀석의 팔에 안기 다시피 해서 흥미진진한 시선에서 도망쳤다. 외부를 차단하듯이 푸른 시트에 둘러싸인 모퉁이에는 두 개의 긴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감식원들이 파낸 칸자키 시로의 갖가지 물건들이 정중하게 비밀 봉지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있다. 내 어깨를 붙잡고 파이프 의자에 앉힌 손은 시로의 후배, 후지시로 형사의 것이었다. 후지시로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내 앞에 몸을 굽히고는 내 팔을 붙 잡고 흔들었다. "나츠키씨, 내말 들려요? 정신 차리세요, 나츠키씨." 후지시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 다. 시로가 사라져버렸으니까 빨리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시로가 돌아오고 싶어하고 있다. "시로를... 찾아야..." 나는 일어나려고 하자 후지시로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후지시로를 바라보았다. 후지시로 녀석, 왠지 평소보다 더 얼빠진 얼굴 이다. "나츠키씨, 저어... 잠깐...!" "시로가 어제 돌아오지 않아서..." 후지시로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내 어깨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라는 등 가식적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쩐지... 우습다. "저기... 시로는 어디 있어...?" "나츠키씨, 저기 말이죠. 사정을 설명할 테니까 아무튼 진정..." 나는 후지시로의 팔을 뿌리치자 놀란 후지시로가 뒷걸음질 쳤다. "시로는 어디 있냐니까! 매스컴이랑 짜고 날 속이고 있는 거지?!" TV 뉴스를 듣고 나서 계속 마비되어있었던 감정이 분노가 되어 용솟음쳤 다. 나는 후지시로를 떠밀었다. 땅에 넘어진 후지시로에게 덤벼들어서 얼굴 과 가슴을 혼신의 힘으로 대렸다. "시로를 돌려줘! 어디 숨겼어?! 제길! 제길--!" "나, 나츠키씨, 저기, 잠깐!" 나는 일어나려고 하는 후지시로의 머리를 땅에 꾹꾹 처박았다. "시로를 돌려줘! 왜 나한테서 시로를 빼앗아 가는 거야?!" "나, 나츠키씨, 진정하세요!" "돌려줘--!" "나츠키씨, 나츠키씨! 나츠키..." 후지시로의 목소리와 모습이 멀어졌다. 두개골이 깨질 듯한 격통과 심장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듯한 구토감에 휩 싸여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시야가 흐려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4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서 링거를 맞고 있었다. "아아... 이제 정신이 들었어, 아마노?"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안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인 강사 타케와키와 눈이 마주쳤다. "TV에서 보고 걱정했어. 당장 경찰에 연락하니까 아마노가 병원에 있다고 해서 말이야. 반나절이나 잠들어 있었어. 벌써 밤이야. 내 말 알겠니, 아마 노? 아아, 안색은 그렇게 나쁘진 않네." 날 위로해주려고 일부러 명랑하게 말을 거는 타케와키의 태도가 뻔히 보여 서 신경에 거슬렸지만 얼굴을 창 밖으로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말없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줄 알고 제정신이 아니었어.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행이 아니야." 구제 불능일 정도로 둔감한 녀석, 난 머리까지 담요를 뒤집어썼다. 시로를 만나고 싶다. 나는 그저 시로를 만나고 싶을 뿐이다. 리포터는 인체의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끊어진 팔은 어떻게 됐을까? 원래 있던 곳으로 잘 돌아갔을까? ...바보같은 시로, 나한텐 위험하다고 해 놓고 어째서 자신은 그걸 짐작하지 못한 거야? 내가 아는 것은 시로가 위험한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것 뿐이었다. 어제 아 침에 내게 충고했던 것이 그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했던 시로 자신이 설마 그 아파트에 서 곤히 자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뻔히 알면서 폭발에 휘말렸다고 는 믿기 어렵다. "왜 그래, 아마노? 어디 아파?" 발견된 몸의 일부는 정말 시로의 것일까? 시로는 단지 연락할 수 없는 상황 에 처해있는 것은 아닐까? 중상을 입고 어디선가 혼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 는 건 아닐까? 너무 희망적인 생각이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로의 죽음을 확인 한 것이 아니다. 행방 불명이라고 밖에 듣지 못했다. 나는 담요에서 얼굴을 내밀고 타케와키에게 말했다. "경찰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후지시로를 불러줘." "후지시로씨라면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마침 아까, 그... 시로씨의 가족이 말이야. 서에 오셨다고 해서 사정 설명하러 갔어." 시로에게 가족이 있단 그런 당연한 사실이 난 굉장히 이상했다. 그리고 후 지시로는 나한테 사정을 설명하기 전에 시로의 가족인지 뭔지를 우선한 것이 다.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시로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연락 을 받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인간인 것이다. 나와 시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새빨간 타인일 뿐이다. "가족이라니 누구야..." 질투심에 그렇게 물어보았다. 분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동생이라고 했어. 부모님은 안 계신 것 같으니까." 타케와키는 조금 쉬라는 듯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길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렸다. 시로의 장례식에서 시로의 여동생이 조문객들에게 동정과 조문을 받고 당 당하게 시로의 관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밖에 허락되지 않는다. 흐느껴 우는 여동생인지 뭔지에게 어색하게 머리를 숙이고 말없이 분향을 마친다. 유골도 받지 못하고 유품을 나누는 것도 허락 받지 못한 채 나는 시 로와 영원히 타인으로 헤어지는 것이다. 나는 시로와의 관계가 희박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오늘밤은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 안심해도 돼. 전화하고 올게." 타케와키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나는 아 직 조금 남아있는 링거를 멈추고 팔에서 바늘을 뽑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 * * 지금은 이미 없어져버린 요츠야의 아파트엔 경비의 눈도, 감식원의 모습도 없었다. 위험을 알리는 로프만이 주변에 둘러져 있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돌무더기 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이라기 보다 지상 3m의 언덕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콘크리트를 밟을 때마다 메마른 소리가 어둠 속 을 울려서 공허함이 더해갔다. 나는 완만한 경사에 주저앉아 깨진 창문이나 콘크리트 조각을 손으로 치웠 다. 달빛에 의지해서 시로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예를 들면 찢어진 옷자락이라던가, 애용하던 알루미늄 재떨이라던가, 꽁초 라던가 뭐라도 좋았다. 시로의 물건이 가지고 싶었다. 어차피 유품도 나눠 받 지 못하는 난 스스로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 너무 비참해서 오열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울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감정이 없어져버린 걸까? 이런 데서 유품을 발굴하고 있기 보다 시로의 시체에 매달려 슬퍼하고 있어 야 하는 게 아닐까 싶건만 나는 시로의 주검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고, 현실 을 받아들일 배짱이 없었다. "우웃..." 유리 파편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초록색인 파편을 집어 올리자 아마 병 의 일부인 모양이다. 오렌지색 라벨이 눈에 익었다. "아..." 생각났다. 작년 말, 내가 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 날. 시로의 옛 연인 야요이의 기일 에 내가 시로에게 기운 내라고 사온 샴페인 병이었다. 나는 그 파편을 움켜쥐었다. 좀 더 피가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로가 없어도 이렇게 멍쩡히 살 아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데려가지마, 야요이..." 그런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넌 벌써 3년 전에 은퇴했잖아? 그럼 이제 시로는 포기해. 왜 이제 와서 우 릴 방해하는 거야? 시로는 날 선택했단 말이야. 우린 겨우 잘 되어가고 있었 단 말이야. 질투하는 거야, 야요이? 그래서 시로를 데려가려는 거야? 말해봐, 야요이!" 나는 병의 파편을 있는 힘껏 콘크리트에 내리쳤다. 팡 하는 날카로운 소리 와 함께 파편이 깨져 산산이 흩어졌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손톱 이 손바닥에 파고 들었다. "데려가지마..." 나는 발치를 노려보았다. 목소리가 한심할 정도로 쉬어있었다. "시로를 데려가지마!" 서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양 손에 쥐고 이마를 돌무더기에 찧은 채 나는 어느 새 어둠을 향해 무릎 꿇고 빌고 있었다. "제발 시로를 그 쪽에 데려가지 말아줘... 제발 내게서 시로를 빼앗지 말아 줘! 시로를 돌려줘! 돌려줘..." 난 큰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한 번 흘러나온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목 이 쉬고 터져도 보이지 않는 야요이에게 매달려 통곡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힘이 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내게 갑자기 조그 만 라이트가 비쳤다. "어라? 나츠키군... 인가?"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만졌다. 얼굴을 들어도 상대방의 위치는 식별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검은 블루종을 입은 탓도 있었으나 내 눈이 부 어서 제대로 뜰 수가 없었던 것도 요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츠키군이지? 전에 과수연에서 만낫잖아. 나, 4과의 사이키야." 남자는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며 자신의 얼굴에 전등을 비췄다. 이름은 들은 기억이 없었지만 밋밋한 얼굴은 기억이 난다. "아..." 내가 알아보는 소리를 내자 사이키는 안경 안쪽에서 희미하게 눈웃음을 지 었다. 과수연이란 것은 과학수사연구소의 약어로 예를 들면 사건 현장에 남 겨진 머리칼이나 혈흔 등에서 범인을 지목하거나 도출해내는 부서다. DNA 감정도 전문이라 살인을 주로 취급하는 시로의 1과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엇 는 관계였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과수연의 사이키와 만났냐면 예전에 내가 연관되었던 마약조직 사건의 증인으로 약물 담당인 사이키에게 호출되었던 것이다. 압수한 약의 확인 작업을 했단 얘기다. 그것도 내 몸에서 추출하는 형태로 말이다.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사이키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지? 위험해. 내일 본격적인 철거 작업에 들어갈거 야. 찾는 물건이 있다면 그 때 다시 오지 그러니?" 사이키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 손바닥의 피 를 발견하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난 시로... 를 찾..." "시로? 아아, 칸자키군 말이군. 정말로 아까운 사람이 죽었어." 죽었다. 사이키의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무릎에서 휘청 힘이 빠진 나를 사이키가 재빨리 붙잡았다. "...그렇군, 분명 칸자키군은 네 보호자 대리였었지. 그는 정말로 좋은 형사 였어. 아직 스물 일곱, 아니 여덟이었지. 경력은 짧았지만 실력도 있고 동료 에게 신뢰받았는데. 뭣보다 형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 까... 너도 괴롭겠지만 뭐,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지않니. 칸자키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뭐가 다행이란 걸까? 왜 모두 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걸까? 왜 아무도 시로가 날 두고 가버려서 불쌍하다고 동정해주지 않는 걸 까? 왜 시로의 뒤를 따라 죽으라고 인도해주지 않는 걸까? "나츠키군?" 사이키가 날 들여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이키에게 안겨 돌무더기 산을 내려왔다. 그 후, 사이키는 나를 S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는 방안까지 들어오더니 진흙으로 더러워진 내 손발을 씻겨주겠다며 내 옷을 전부 벗겼다. 저항하는 방법도 잊어버린 날 욕실로 옮겨서 두 손으로 열 심히 닦아준 그는 다시 날 침실까지 옮겼다. 사이키가 내게 속삭였다. "떨고 있구나. 춥니?"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떨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따뜻하게 해 줄까?" 사이키는 미소짓더니 날 천천히 침대에 쓰러트렸다. 5 난 분명히 미친 것이다. 그래서 난 다리를 벌린 것이다. 난 사이키의 품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너... 옛날에 매춘을 했었지? 서 내에서도 밝히는 녀석들이 많아서 네 소문 은 자주 들었었어. 2번 가의 보석이라고 말이야. 평판대로 근사한 몸이... 잖... 아... 우웃!" 사이키가 내 안에 두 번째 욕망을 내뿜었다. 나는 시든 채였지만 사이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빼낸 것을 다시 내 입 속에 밀어 넣고 허리를 흔들었다. "난 남자랑 하는 건 처음이지만... 이제부턴 버릇이... 들어도 어쩔 수... 없 겠어..." 사이키의 남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팽창했다. "이렇게 기운찬 것은 20대 이후로 처음... 이야..." 30대 중반이라는 사이키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사이키는 나를 엎드리게 하고 잘 보이도록 양손으로 내 엉덩이를 갈랐다. "하지만... 평소엔 더 좋을 테지? 뭐, 지금도 충분히 조이지만 네 자신이 즐 길 땐 얼마나 굉장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굉장히 흥미가 있어... 우웃!" 사이키가 단숨에 내 안에 들어와 감탄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혼자서 좋아하고 있었다. "아... 이렇게 좋은 걸 칸자키는 매일 혼자 맛보고 있었던 건가?" 그 말에 순간, 죽어있던 나의 신경이 꿈틀 움직였다. "시로는..." 겨우 말하는 법이 생각났다. 입안이 바싹 말라있었다. "시로는 날 안은 적 없어..." 내 등뒤에서 사이키가 웃는 것이 느껴진다. "말도 안돼. 이런 몸을 눈앞에 두고 손대지 않았을 리가 없어." "시로는 안아주지 않았어..." "설마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이자 사이키가 다시 조소했다. "그럼 지금 쯤 후회하고 있겠군. 한 번 정도 할 걸 그랬다고 말이야. 미련이 남아서 베개 맡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사이키가 '오, 무서운 걸.' 하고 과장스럽게 날 뒤에서 끌어안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나는 아직 생각할 기력도, 사고력도 회복되 지 못한 채 대답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다리를 벌린 채 사이키가 한시라도 빨리 끝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좁고 추운 아파트에서 오직 혼자 시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나, 아까 부터 알루미늄 문 너머로 시로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나는 문 앞까지 다 가가서 시로가 열고 들어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열쇠를 넣는 소리가 들리고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그런데 문은 열리지 않는 다. 대신 문 틈에서 시커먼 핏덩어리가 문 틈으로 흘러 들어와 현관에 선혈이 흘러 넘쳐, 나는 무서워서 문 밖의 시로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시로는 폭풍으로 양팔을 잃어서 문을 열 수 없는 것이다. 다리를 잃어 버려 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내게 대답하고 싶어도 머 리를 잃어버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헉!" 거기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금 니가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꿈이라고 해도 너무나도 잔혹한 꿈이다. 시로의 체온을 찾아 옆으로 팔을 뻗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여기는 시로의 이부 자리가 아니라 호텔 침대다. 이젠 결코 이곳으 로 시로가 날 데리러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아까의 꿈과 똑같은 결말...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려고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을 때, 문득 방구석에서 꿈틀대는 기척이 느껴져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옷 스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의식을 집중시켰다. 옆방의 옷장 앞에서 몸 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이키였기 때문이다. 내 옷에 가방에 구두, 마치 핥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사이키는 열 심히 내 물건을 조사하고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이키 가 무슨 목적으로 저런 짓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말을 거는 것 조차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사이키는 조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이키는 그 아파트 터에서 나와 만났을 때 '찾는 물건이 있다면 내일...' 이란 말을 했었다. 생각해보면 회중 전등조차 안 가지고 있던 나를 향해 찾는 물건이 잇냐고 물었다는 건 이상한 얘기다. 그렇다면 찾는 물건이 있었던 것은 사이키 쪽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도대 체 무엇을? 사이키가 옷장을 닫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재빨리 누워 곤히 자는 척을 했 다. 사이키가 침대로 돌아와 내 숨소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침대 커버를 벗기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내게 손가락을 삽입하기 시작한다. "응..." 나는 뒤척이는 척하며 몸을 비틀었다. "기분 좋지, 나츠키군?" 귓가에서 음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대신 신음해줬다. 곶힌 손가락 이 점막을 쓰다듬자 나는 더더욱 반응을 보여준다. "좀 더 해주길 원해?" "으... 응..." "아직 모자란 모양이군. 그럼 이제 나를 선물하지." 녀석의 흐물흐물한 녀석은 이제 지긋지긋했지만 행동의 진의를 밝히고 싶 어서 나는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온 몸이 성욕 덩어리구나... 날 원한다면 질문에 대답해."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것 따윈 필요 없었다. 그러나 사이키의 수상한 행 동에 대한 흥미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끄덕여 보였다. "아까 거기서 뭘 하고 있었지?"' 내가 가만히 있자 사이키는 마치 그것이 무기인 양 자신을 내게 꾹 눌러왔 다. "돌 더미 속에서 뭘 착고 있었... 어?" 숨결이 거칠어진 것은 내가 아니라 사이키 쪽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일 부러 가련한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아... 사이키... 씨..." 유혹하듯이 허리를 쳐들자 사이키의 중심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가볍게 조 여 주자 사이키의 숨이 헉하고 막힌다. "뭐, 뭘 차, 찾고 있..." 나는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조임을 조금 풀어주자 사이키는 단숨에 내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지, 질문에 대... 답 해...!" 어이가 없어진 내가 불쾌감을 참고 몸을 맡겨 버리자 사이키는 이미 질문이 고 뭐고 갑자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으로서 하룻밤에 4번은 칭찬해 줄만 했으나 나는 녀석의 기나긴 방출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자 사이키는 허둥지둥 옷을 입고 방을 나갔고 나는 사이키의 뒤를 밟았다. 생각대로 요츠야의 붕괴 아파트에 나타난 사이키는 마치 뭔가에 씌 인 것처럼 돌 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이걸로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내일의 철거작업을 기다리지 못 한다는 것은 경찰의 눈에 띄면 곤란한 물건일 것이다. 안 그러면 경찰 관계에 소속된 사이키가 일부러 사람 눈을 피해 행동할 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의문 인 것은 그 경찰의 눈에 띄면 안 되는 뭔가가 왜 이곳에... 이 아파트에 있냐 는 점이다. 그리고 왜 사이키가 그것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걸까? 날이 밝기 전, 사이키는 포기했는지 돌무더기 산에서 내려왔고 나는 사이키 에게 들키지 않도록 큰 길로 먼저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곧바로 호텔로 돌아 왔다. 그러나 사이키는 결국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 서 그때 침대에서 사이키를 다그치지 않았는지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 또 휴대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벌써 5번째다. 그러나 시로가 아니라는 사실 을 알고 있으니까 받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후지시로나 타케와키 바보가 한 마디밖에 모르는 것처럼, 위로해준 답시고 기운 내라는 말만 되풀이할 것이다. 혹은 내게 시로의 장례식에 오라고 하려는 건가? 따르르... 이번엔 방 전화가 울렸다. 지겨워서 수화기를 들자 르펀트에서 체크아웃 재촉이었다. 투숙을 연장하 겠다고 말하자 숙박비를 선불로 내라고 씨부렁거렸다. 나중에 가겠다고 호통 을 치자 프런트는 마지못해 물러난다. "...빨리 데리러 와줘, 시로." 시로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난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여길 체크아웃 한다는 것은 내가 시로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까 말이다. 나는 아직 시로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 발견된 인체의 일부 따윈 누구 건지도 알 수 없지 않은가? 그 뻔뻔한 남자가, 나의 시로가 그렇게 간단히 죽을 리 없다. 나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몸을 구부린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기도했 다. 무언가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교같은 데엔 흥미가 없고 믿는 것은 나 자신, 혹은 사랑하는 시로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은 본적도 없는 신이 아니라 시로 본인 이였다. 무사히 있어 달라고 내 소원이 시로의 영혼에 직접 전해지길 바라며 기도를 한 것이다. 내 목소리만으로 부족하다면 백 보 양보해서 야요이에게 힘을 빌려도 좋았 다. 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두 사람의 소원이라면 절대로 시로에게 전 해질 터였기 때문이다. 나는 믿고 싶었다. 시로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젠 그것밖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로..." 깍지 낀 손을 이마에 갖다대고 나는 마음속으로 시로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였다. 6 오늘 밤의 숙박비를 지불하기 위해 프런트에 내려간 나는 먼저 로비 소파에 앉아 신문을 구석부터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파트 폭파사건 기사는 어느 신문에도 크게 다루고 있었다. 폭발의 원인은 다량의 화약을 건물 주변에 파묻고 원격 조작으로 발화시킨 인위적인 폭발로 판명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변 가옥에 피해가 미치지 않도 록 계산해서 세트한 점에서 아파트 붕괴만을 노린 프로의 짓이라고 했다. 범인 및 범행 동기는 불명, 그리고 칸자키 시로 형사는 -- 사망. "...멋대로 시로를 죽이지 말라구." 나는 신문을 테이블로 내던졌다. 신경이 마비되어 버렸는지 시로의 사망기 사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지독히 냉정했다.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경시청에 직접 가서 무라이 경부나 후지시로에게 조사의 진행 상황을 묻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경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시로는 뭔가 위험하다고 깨달았기에 날 사건에서 멀리 보 낸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시로와 같은 일선에서 싸우면서 시로를 구하지 못 했다. 시로만 위허한 처지에 처하게 했다. 시로를 죽게 내버려둔 것과 똑같았 다. 그런 녀석들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로비에서 신문기사에 빠져있는 동안 내가 숙박하고 있던 방의 청소를 했는지 프런트 직원이 나를 카운터로 불렀다. 용건은 담배로 태운 카펫을 변상하라는 얘기였다. "50만?" 숙박비 30만 엔에 이어 카펫 비 50만이라고 한다. 황당해 하는 나를 젊은 스텝이 너무나도 바보 취급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일로 내 운동화와 옷은 진흙과 먼지 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겉모양만 보면 집 없는 극빈자다. 이래선 분명 얕보여도 할 말 없다. 나는 스텝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 호텔 내의 현금 출납기에서 남창 시 절에 번 예금을 전부 찾았다. 만 엔 지폐 3백여 장을 한 손에 쥔 채 척척 걸어 오는 날 보고 이번엔 녀석이 입을 딱 벌렸다. "현찰도 되겠지?" 뻔한 확인을 하며 나는 손에 든 지폐에서 카펫 비 50장과 연장 숙박비 30장 을 빼서 카운터에 던져주고 그 위에 2장을 더 올렸다. "그리고 이걸로 입을 걸 준비해주지 않겠어? 난 지금 쇼핑할 기분이 아니라 서." "저, 저기,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현금 배만 엔을 눈앞에 두고 젊은 스텝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 지배인을 데려왔다. 과연 지배인은 이상한 손님에게도 동요하지 않고 영업용 미소로 사례를 표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방에서 쉬시겠다면 물건 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올려 보내겠습니다. 물론 저희 호텔의 서비스입니다." 나는 땡큐 하고 미소짓고 상으로 그에게 팁을 주었다. * * * 시로가 돌아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또 오늘 밤도 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집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와 시로를 연결시키는 것은 그 날 마지막 으로 약속한 이 방밖에 없는 것이다. 샤워를 하면서도 울고 욕조에 들어가서도 울었다. 눈물샘이 고장난 모양인 지 아까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거울을 보자 눈이 부어있다. 모처럼 가꾼 것이 허사가 되었다. 나는 언제 시로가 데리러 와도 좋도록 적어도 옷차림만은 정돈하려고 갈아 입을 옷에 손을 뻗었다. 지배인이 친한 스타일 리스트에게 골라오라고 한 캐시미어 스웨터와 가죽 바지에 쇼트 부츠, 실크 셔츠와 캐주얼한 양복은 서비스인 모양이다. 이것만 으로도 내가 건넨 금액을 훨씬 웃돌았다. 숙박비와 카펫비를 현금으로 지불한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스웨터와 바지를 걸치자 희미한 전자음이 들렸다.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 나는 테이블에 내던졌던 휴대폰에 힐끔 시선을 주다 헉 하고 놀랐다. 혹시 시 로에게서 뭔가 메시지가 ㄷ들어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다. 호출음이 그쳤다. 나는 성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음성메시지를 듣기 위해 휴 대폰에 귀를 대었다. 첫 번째는 후지시로였다. 병원에 돌아오란 소리다. 시간은 어제 오후 10시. 내가 돌무더기 산에서 울부짖고 있을 때다. 그렇다는 건 시로의 메시지는 역시 없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후 지시로. 어젯밤부터 계속 내게 연락하려 한 모양이다. 다섯 번째, 목소리가 달라져서 가슴이 덜컹했지만 그냥 타케와키였다. 내용 은 후지시로와 똑같았다. 여섯 번째는 무음, 일곱, 여덟, 아홉... 역시 무음... 암울한 기분으로 전원을 끄려고 한 순간 수신음이 울려 퍼져 내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반사적으로 응답하자 약간 가느다랗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츠키군. 나야, 사이키야.' 내 번호를 알고 있는 4명 중 누구도 아닌 목소리가 내 휴대폰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제 조사한 것이 틀림없다. '용건만 간단히 전할게. 지금 내 바로 근처에 범인이 있어.' 심장이 쿵 뛰었다. 무슨 범인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로를... 사랑하는 시로를 내게서 빼앗아간 범인이다! '지금 부두 제 5창고로 와주겠어? 절대 혼자서.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고... 경찰엔 알려지면 곤란해." "어째... 서?" '범인이 경찰 내부 사람이기 때문이야.' 나는 눈을 감았다. 역시--, 사이키는 경찰에 숨기고 뭔가를 찾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시로가 경찰에게 넘기지 않은 물건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시로와 사이키가 극비로 같은 사건의 조사를... 범인을 쫓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가? 그러나 말하자면 시로가 동업자의 함정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경찰엔 절대로 알리지 말도록. 칸자키군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 면...' 전화는 거기까지, 꼭 중요할 때 전파장애다! 나는 황급히 부츠를 신고 스위트 룸을 뛰쳐나가 밖에서 호텔 손님용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도쿄 만까지 빨리! 하고 명했다. "이런 시간에 부두 구경입니까?" "아무튼 빨리!" 아직 젊은 운전수는 알겠다며 어깨를 움추리고서 액셀을 밟았다. '칸자키군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면...' 화가 나는지 슬픈지 수습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택시 뒷 좌석에서 볓 번이나 커다랗게 심호흡했다. 마구 괴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온 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아무나 패고 싶 을 정도로 살기가 느껴지며 있는 힘껏 울부짖고 싶었다. 시로는 역시 죽었다. 죽은 것이다! "제길... 제길!"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문 기사조차 믿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사이키가 확실히 단언하자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시로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면... 그런 말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시로는 언젠가 꼭 날 데리러 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손님, 취했어요?" "시끄러!"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후지시로에게 연결해 기다렸다고 외친 후지시로에게 다짜고짜 노성을 질렀다. "잘 들어, 후지시로! 너희 경찰 따위에게 더 이상 맡겨두지 않을 거야! 시로 를 죽인 범인은 내 손으로 붙잡아서 죽여 버리겠어!" '네에?' 전화 너머가 술렁거렸다. 아마도 스피커로 바꾼 듯 서 내의 전원에게 내 목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무, 무슨 소리예요. 나츠키씨! 그것보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후지시로라도 그것만은 가르쳐 줄 수 없었다. "난 지금부터 범인을 만나러 갈 거야. 그리고 녀석을 죽여 버리겠어! 시로의 원수를 같을 거야!" '서, 서두르지 마세요! 그런 위험한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관자놀이가 꿈틀 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경찰이 시로를 함정에 빠트렸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 군!"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낭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말하면 안 된다. '어떻게 나츠키씨가 그것을? 아, 아니, 일단 어디 있습니까? 그것만 가르쳐 주세요. 전화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도청되고 있을 위험이... 저기 그러니 까!' "시끄러! 날 만나고 싶으면 검문이라도 쳐놓고 네놈들이 찾아!" '나, 나츠키씨, 잠깐 기...' 나는 전화를 확 끊었다. 운전수가 '괜찮아요?' 하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엿 보고 있다. "됐어, 경찰 따윈 믿을 수 없어." "난 위험한 일은 싫은데..." "아아, 당신은 부두에 날 내려주고 얼른 돌아가."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시트에 기댔다. 그렇다. 경찰 따윈 믿을 수 없다. 시로 혼자 위험에 처하게 하고 내부의 분 쟁도 눈치 채지 못한 얼간이 놈들은 신용할 가치가 없다. "원수를 갚으면 나도 그 쪽으로 갈게, 시로." 나는 눈을 감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남자의 늠름한 모습을 뇌 리에 떠올렸다. * * * 부두에 도착하자 택시는 예고대로 도망치듯 시내로 돌아갔다. "제 5 부두... 저기로군." 거대한 콘크리트 창고가 마주보고 왼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지붕 아래에 1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자연히 빨라지는 걸음을 참지 못하고 제일 바다와 가까운 5 번째 창고 앞에 섰다. 창고의 2층 으로 이어지는 외측 계단 근처에서 회중 전등이 찰칵하고 빛난다. "누구야?" 눈부셔서 보이지 않았다. 사이키일까? 범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빨리 왔군, 나츠키군." 사이키다. 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가 손짓하자 나는 파도에 녹슨 철 계단을 올라갔다. 되도록 조용히 하려고 애썼으나 삐걱, 삐걱 울리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려 퍼진다. 사이키는 내 어깨를 안더니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폈다. "경찰에 미행 당하진 않았겠지?" 내게 그러헤 물은 사이키는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안색이 나빴다. 내가 끄덕이자 사이키가 휴우 하고 어깨를 늘어트린다. "범인이 여기에 있는 건가?" "그래, 이 안이야. 조용히..." 그가 주의를 주자 난 신중히 어두컴컴한 창고에 발을 들여놓았다. "발 밑을 조심해." 내 뒤에서 사이키가 속삭였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범인에게 들키면 곤란하니까 사이키도 회중 전등을 끄고 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정말로 여기 범인이..." 있냐고 물으려 등 뒤의 사이키를 돌아보자 뭔가 입을 틀어막았다. "읍!" 등 뒤에서 젖은 천이 입과 코를 함께 덮자 나는 순식간에 숨을 들이쉬고 말 았다. "사이키... 씨..." 아릿하고 독한 냄새, 콧속이 불타는 것 같다. 그것이 에텔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엔 난 이미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 다. 7 문득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눈을 뜨자 머리 위엔 상당히 높은 천장이 있었다. 나무 각목과 쇠파이프가 종횡무진 흩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그물이 걸려있고 천장에 닿을 듯이 쌓인 수없이 많은 회색의 사각 컨테이너. 액체가 왼팔에서 몸 속으로 침투해 가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시선을 바로 옆으로 옮겼다. 사이키가 내게 주사를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긴 이미 창고 안이고 창고에 이렇게 전기를 밝게 켜놓은 데다 내가 이 넓 은 창고 한 가운데의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당당히 누워있다는 건--. 범인 따윈 여기 있을 리 없다는 얘기다. 아니, 있는 건가? 지금 바로 내 앞에 말이다. "당신이 범인이었어?" 사이키가 말없이 주사 바늘을 뺐다. 동작이 지독히 능숙했다. "자백제다. 후유증은 없으니까 안심해." 사이키가 뭔가에 씌인 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눈이 텅 비어있다. 방금 약을 맞은 것 같은 면상이었다. 실제로 그렇겠지. 이 열리고 미친 동공은 약물중독이다. "네가 순순히 말해줬으면 이런 짓을 안 해도 되었을 텐데... 아아, 소리 지르 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아무도 안 오니까. 전부 자백할 때까지 넌 여 기서 못 나가." 말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부터 사이키는 내게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 걸까? "난 아무것도 모..." 머리가 몽롱하고 무거웠다. 입가가 느슨해졌다. 약효가 돌기 시작한 걸까? 사이키가 내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벌리고 의식의 유무를 살피고 훗하고 숨 을 토해냈다. 사이키는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다. "칸자키는 네게 무슨 말을 남겼지?" "...아파트엔 돌아오지 말... 라고..." "돌아오지 말라고 말한 거지?" 나는 힘없이 끄덕였다.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머리가 완만히 흔들렸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아무쪼록 행동을 조심하라고..." 그랬다. 시로는 내게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갚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시로가 알 면 화낼 테지만 그래도 난 시로를 위해 그렇게 한 거고 게다가 시로도 내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쌤쌤이다. 시로는 거짓말을 했다.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으면서 혼자만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니까... 자백제는 눈물샘도 약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눈가에서 흘러내린 내 눈물 을 마구 숨이 거칠어진 사이키가 집요하게 핥고 있었다. "칸자키가 맡긴 물건은 어디 있어?" "몰... 라..." 사이키가 내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뭔가 맡겼을 텐데?" "카드라면..." "카드?" "비자 카드..." 사이키의 따귀가 내 뺨으로 날아왔다. 아마도 맘에 안 드는 대답이었나 보 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 카드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마음대로 쓰라고 시로가 내게 허락해줬던 것이다. 그것을 건네 받았을 때 나는 엄청 기뻤다. 시로가 날 신용하고 있다고 정말로 울고 싶을 만큼 기뻤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기뻤다. 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 만으로도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그랬는데... "달리 뭔가를 맡겼을 거야." "시로가 내게 맡긴 건... 가사 전부와 가계부 정리..." 사이키가 다시 내 뺨을 때렸다. 찌릿하긴 했지만 아프진 않았다. 신경까지 마비된 모양이다.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냐! 약은... 약이 든 알루미늄 케이스는 어디 있냐 고 묻고 있는 거다!" 약? 알루미늄 케이스? 모른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럼 열쇠는 어디있지? 은행 비밀 금고 같은 곳의 열쇠!" "열쇠라면..." "있는 거냐?" "아파트랑 스카이 라인의 열쇠가..." 이번엔 주먹으로 맞았다. 그리고 내 스웨터를 벗기고 중앙에 있는 기둥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손을 뒤로하고 기둥을 등진 포즈로 묶인 나는, 이건 당하 는 포즈가 아니라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이키가 자신의 벨트를 풀고 그것을 휘둘러 땅바닥을 쳤다. 위협인가, 허풍인가, 어느 쪽이라도 내겐 더 이상 말할 게 없었다. "그 약을 내일까지 넘겨주지 않으면 녀석들이 날 없애버릴 거야! 네가 아는 걸 말해주기만 하면 돼. 칸자키의 곁에 있었던 네가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 어!" "녀석들이라니 누구야? 경찰...?" 난 영문도 모른 채 물었다. 이유도 없이 맞는 건 사양하고 싶다. "시치키 뗴지 마! 나... 난 말이지, 딱 한 번 거리에서 여자를 샀을 뿐이라구! 그런데 왜 폭력단한테 쫓겨야 하냔 말이야! 녀석들은 내가 4과 소속이라는 걸 알자마자 압수한 약을 빼돌리라고 하잖아!" "그래서 빼돌려줬단 얘기군." "그래! 약 같은 건 경찰에 산더미처럼 보관되어있으니까. 모은 약들로 블랜 드도 몇 가지나 만들어줬지! 코카인과 스피드의 믹스, 엑스터시와 비아그라 의 혼합물!" 러브 드럭인가? 나는 조소했다. 나도 2, 3번 그것들을 사용해 섹스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얀 캡슐인 엑 스터시는 내 몫, 한 개만 삼켜도 변태 할아범이 사랑스럽게 보여서 당장이라 도 다리를 벌리고 싶어진다. 할아범은 순수 비아그라. 상대가 아무리 늙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회춘하 여 최고의 쾌락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약효가 끊겨도 코카인 같은 권태감이나 피로감은 남지 않는다. 그러나 LSD 의 30배는 몸에 나쁘다고 듣고서 몸이 자본인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두었다. 그야말로 배드 트립해서 병원에서 못 나오게 된 녀석을 몇명이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엑스터시와 비아그라의 혼합이라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쾌락주의의 바보들이 너도 나도 시험해 보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며칠 전 어느 러브호텔에서 학생 커플이 죽었다. 사인은 급성 심부전이었 지. 신종의 위력에 견디지 못한 모양이야. 불쌍하게도..." "제대로 된 인간이 할 말이 아니군." 그렇게 말한 순간 드넓은 창고에 채찍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격통이 일어난 가슴 근처를 보았 다. 내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배에 걸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자백해! 약은 어딨어?!" 사이키가 귀신의 형상으로 소리쳤다. 맞을 때마다 몸이 뒤로 젖혀졌다. 나 는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오로지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모른다고 했잖아?" 거짓말하지 마! 그 사망 사건의 지휘를 맡은 건 칸자키였어!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구. 학생의 사인은 약물의 과잉 섭취에 의한 심장 마비. 약명은 암페타 민. 평범한 약이라고 말이야. 4과인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 녀석은 사체 를 과수연에 넘겼어. 과수연 녀석들은 사체의 체내에서 검출한 약물의 성분 을 정밀히 분석했단 말이다! 그 직후였어. 내일 야쿠자들에게 넘길 예정이었 던 약이 내 책상에서 사라졌다. 내가 블랜드한... 그래, 시체의 체내에서 검출 된 것과 같은 배합. 같은 성분의 신종의 가득 찬 알루미늄 케이스다. 칸자키 녀석이 훔쳐간 것이 분명해! 분석 결과가 나와서 그 살인 마약과 나와의 관계 과 드러나면 난 살인범이 되어버려! "그건 자업자득이잖아. 게다가 시로는 훔친 게 아니라 있어야할 장소에 돌 려준 것 뿐이잖아. 처음부터 경찰의 압수품 아냐? 당신의 책사엥 있어야할 물건이 아니라구. 뭐든지 당신 실수란 말이야." 사이키가 또 다시 벨트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몸에 붉은 균열이 그어졌다. "그래! 내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 약은 내가 만들었어! 그러니까 그건 내 꺼 다! 그래서 난 칸자키랑 같이 아파트를 폭파했다구!" "...당신, 말이 하나도 안 맞는다는 건 알아?" 사이키는 완전히 혼란 상태다. 이미 뇌가 약에 쩔어 있는 것 같다. "안 됐군..." "그럼 그 날 밤, 넌 돌 더미에서 뭘 하고 있었어? 도대체 몰래 뭘 찾고 있었 냐구? 칸자키가 나한테서 빼돌린 케이스를 찾고 있었던 것 아니야? 나보다 먼저 알루미늄 케이스를 찾아서 그 최고의 약물을 혼자서 만끽하려고 했던 것 아니야?" "이 자식, 무슨 소리냐?" "네가 어디로 감춘 거야! 네가 그걸 팔아치운 거야! 그래서 내가 아무리 찾 아도 없었던 거야! 제길!" "모른다고 했... 아악!" 사이키가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벨트를 휘둘렀다. 그는 격통에 몸을 비트는 나보다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부, 부탁이야. 돌려줘. 기한은 내일이야! 그걸 넘겨주지 않으면 난 녀석들 에게 사, 살해당할 거야..." 사이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시로를 죽여 놓고 정말 이기적인 말이로군." 사이키가 오열했다. 정말로 몸과 마음이 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러나 만일 살인 마약의 성분 해독이 행해지지 않았어도 사이키가 가까운 시일 내에 미래를 일어버렸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폭력단에게 아무렇 게나 이용당하고 이미 약에 쩔어 있는 사이키는 필경 언젠가 바다에 풍덩 던 져질 것이다. "만일 약의 소재를 알더라도 죽어도 안 가르쳐 줄거야. 포기해." "그런... 가..." 사이키가 신경질적으로 입술 끝으로 웃고는 훌쩍 일어섰다. 왼손에는 작은 앰플을 들고 있었다. 오른 손에는 주사기, 사이키의 안경이 흐릿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사이키는 광기어린 눈으로 내게 다가와 앰플에 주사기를 꽂았다. 안에 있는 액체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바늘 끝을 내게 향했다. "이건 말야. 내게 남겨진 최후의 신종 수용액이야. 즉효성이지." 사이키가 바늘 끝으로 내 피부를 할퀴다가 유두 위에서 손을 멈췄다. 추위 에 단단하게 일어선 그곳에 바늘을 따끔하게 들이댔다. "웃...!" "네가 맘에 들었었는데..." 그곳에 약을 주입하는 시늉을 한 사이키는 농담이라는 듯이 씨익 웃고는 바 늘을 치우고 이번엔 바늘 끝을 내 가슴에서 쇄골로 이동시켜 팔뚝에서 멈췄 다. "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지금도 반쯤은 죽은 것과 같다. 게다가 이걸로 시로를 잃은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기쁘다. 단지, 시로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만이 굉장히 분했다. "네가 약을 견디고 나의 아름다운 노예로 변모하게 되길 빌겠어." 나는 바보 같아서 웃었다. "죽여." 날 죽여. 그리고 한시라고 빨리 시로의 곁으로 가게 해줘. "안녕, 나츠키군. 다시 만나길 바라ㅐ." 주사기가 내 팔에 닿았을 때--. "거기까지다, 사이키!" 창고를 울린 그 목소리는 누구였을까?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무라이씨!" 어느 샌가 사이키의 등뒤로 서있는 시로의 상사. 무라이 경부는 총구를 사 이키의 후두부에 딱 갖다대고 있었다. "이 이상 경찰의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무라이 경부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한 사이키의 손에서 주사기를 빼앗자 뛰어 들어온 경관들이 사이키의 몸을 붙잡아 눌렀다. 창고의 셔터 앞에도 경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 뒤로 돌아가 팔에 묶인 로프를 풀고 있는 것은 후지시로인가? "아아, 정말이지, 진짜 걱정했다구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후지시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아무 말 도 할 기력이 없었다. 무라이 씨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이키를 경관에게 인 도한다. "유감이지만, 사이키. 알루미늄 케이스는 이미 이쪽으로 넘어와 있다. 피해 자의 체내에서 검출된 약품의 데이터와 네가 조합한 최음제의 성분과 조합이 멋지게 일치했어. 덕분에 지금 4과는 한창 체포당하고 있을 거다. 그런 극약 을 거리에 뿌렸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겠나? 널 이용했던 폭력단도 어떻게 든 일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너도 확실한 범죄자로군." 무라이씨가 데려가라고 턱짓을 했지만 나는 사이키를 이대로 놓칠수가 없 었다. 아직 시로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다. "아, 나츠키씨!" 후지시로가 말리기도 전에 나는 사이키에게 덤벼들어 사이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쓰러트려 얼굴을 연타했다. "또 이녀석이냐? 어이, 누가 좀 말려!" 무라이씨의 명령에 후지시로가 날 뒤에서 붙잡았다. 경관들이 내 밑에서 기 절 직전인 사이키를 끌어냈다. 그래도 나는 사이키의 배를 걷어차고 얼굴에 몇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이 자식! 네 놈이 출소해도 내가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그, 그만하세요, 나츠키씨!" "시끄러! 놔! 너야 말로 내 뒤를 몰래 밟았지?" 내 팔꿈치가 후지시로의 뺨을 쳤다. 그래도 후지시로는 필사적으로 날 제지 했다. "아닙니다. 저기, 택시 운전수가 위험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신고했어요. 그 래서 이 장소를 알고...!" 그 수다스런 운전수! 약삭빠르게 사건에 끼어 들다니! 흥분한 나를 후지시로에게 맡긴 무라이 경부는 사이키를 데리고 얼른 퇴장 해버렸다. "저기... 실은 칸자키 선배가 저희들에게도 사이키씨가 용의자였다는 사실 을 아슬아슬할 때까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약의 성분이 살인에 사용된 것이라고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요. 그래서 선배는 필사적이었 습니다. 오늘까지는 어떻게든 해명하라고. 오늘이 사이키씨를 구할 수 있는 기한이라고요. 선배는 사이키씨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 린 사이키씨를 체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시로가 그런 녀석의 편을 드는 거야?" "...사이키씨는 지금까지 여러 사건을 함께 해결해온 동료니까요..." 꺼질 듯한 후지시로의 변명을 들으며 나는 늘어나버린 스웨터를 주워들어 팔을 꿰었다. 부어오른 가슴의 상처가 스쳐서 조금 아팠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후지 시로의 설명은 그런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 다. "사이키씨가 과수연에서 대량의 폭약을 훔쳐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선배는 사이키씨의 자수를 단념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는 그 날 나츠키씨를 요츠야에 서 멀리 보내고 사이키씨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후지시로가 눈이 동그래진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러... 라니, 그거 무슨 의미..." 시로가 스스로 그걸 바라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선배가 그 폭발로 죽었다고 사이키씨에게 믿게 해두는 편이 약물 분석에 시간을 주어서 우리도 움직이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돌 더미 속에서 인체의 일부가 발견되었단 가짜 정보를 흘렸던 겁니다." "그럼, 저기, 시로는...?" 후지시로가 반쯤 거북한 듯, 약간 익살스럽게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펄펄하지요. 범인도 폭약을 건물에 세트하고서 안전한 장소에서 원격 조작하니까 계획을 알고 있는 선배에게도 도망칠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는 얘 깁니다." "하..." "하지만 나츠키씨가 사이키씨와 접촉했을 줄은 방금 나츠키씨의 전화를 받 을 때까지 몰라서... 오산이었습니다." "그런 건... 어쨌든 상관없어. 내가 멋대로 한, 일이니까. 하지만 왜 내게 아 무런..." 나는 어떻게든 말을 이으면서 왠지 넋이 나가있었다. 시로는 살아있다. 건강히 살아서 아마도 지금쯤 4과 사람들과 시내를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 다. 나 따윈 완전히 그리고 깨끗이 잊고서 말이다. 내 쇼크를 깨달은 후지시 로가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하고 말을 흐렸다. 알고 있다. 내가 패닉에 빠져 울부짖고 덤벼들고 말을 듣지도 않은 것이 잘 못이었다. 잠깐 눈을 돌린 틈에 병원을 빠져나가질 않나, 거처는 안 가르쳐 주질 않나, 휴대폰은 안 받질 않나... "하지만 이건 너무해..." 후지시로가 머리를 숙였지만 나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만 아무것도 몰랐었다. 분명 시로의 여동생인지 뭔지는 시로에게서 직접 사건의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가족이니까 말이다. 나는 가족이 아니다. 결국 새빨간 타인이다. "저기... 나츠키씨에게 선배가 보낸 전언이 있습니다." 나는 움츠러들어서 곤혹스러워하는 후지시로에게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 았다. 누굴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일이 끝나면 약속한 장소로 데리러 가겠다고..." 가슴이 지끈 아팠다. 반동으로 급격하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이제와서 뭐냐고 화를 내고 싶고, 이런 취급이 분해서 분노가 달아올랐다. "약속한 장소? 뭐야, 그게?" "나츠키씨..." "난 그런 거 몰라." 나는 데려다주겠다고 말한 후지시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창고를 뒤로했 다. 8 나는 신주쿠 S호텔 숙박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우고 아까부터 얼어붙어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제일 안쪽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 앞,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내 감정은 응고된 상태 였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시로가... 날 데리러 올 줄이야.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남자 에게 다가갔다. 나는 또 속는 건 아닌가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남자의 곁 에 멈춰선 난 거의 가슴 근처를 쳐다보았다. 나는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자신이 취해야할 행동이 짐작도 가지 않아서 바 보처럼 우뚝 서 있자 남자가 후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어?" 담배 때문에 갈라지고 낮은 목소리였다. "행동을 조심해라. 그렇게 말했을 텐데, 나츠키." 이름을 불린 순간, 단단히 굳어져 있던 가슴의 응어리가 산산이 부서져 나 는 한심하게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웃!"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무릎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우웃!" 드디어 오열을 터트린 나를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일으켜 세워서 스위트 룸 의 문을 열고 방안에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힌 순간, 난 남자에게 매달렸다. 떨 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끌어안았다. "이봐, 그쯤 해둬, 나츠키." 정말 민폐라는 듯이 찌푸린 남자는 날 소파까지 끌고 가 귀찮은 듯 떼어내 고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 재떨이에 비벼 껐다. "시... 로...!" 나는 남자의 이름을 있는 힘껏 외치며 시로에게 몸을 날렸다. 시로의 어깨 와 등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시로의 냄새를 폐 속에 채웠다. 마비되어있던 내 신경이 겨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들린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 넌..."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시로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질려버렸는지 커다란 한 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내 곁에 앉았다. 나는 재빨리 옆에서 시로를 끌어안았 다. "어이, 떨어져라, 나츠키. 나츠키!!" "시끄러! 떨어지면 시로는 다시 어디로 가버릴 거잖아!" 시로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사라지지 못하도록 아예 내 손으로 죽여 버리 고 싶었다. 나는 이 정도로 시로를 증오하며 격렬하게 애태우고 있는 데... "행동을 조심하라니... 죽었다고 보도되는데 어떻게 조심할 수가 있겠어?! 나한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서, 전화 한 통 주지 않고서 무슨 말투가 그 래? 이게 누구 탓인데? 네 녀석 탓이잖아! 네 녀석이 날 내팽개쳐두니까 그렇 잖아!" 나는 화내고 울부짖으며 시로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시 방치해둔 수염과 여전한 무표정, 내가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얼마 나 시로를 만지고 싶었는지! "외로웠어! 미칠 듯이 외롭고 보고 싶고 무서웠어, 시로!" "그래, 알았다, 알았어." "정말로 죽은 줄 알았어!" 여느 때처럼 시로는 내 진심을 코끝으로 웃어넘겼다. 그게 분해서 나는 시 로의 뺨을 때렸다.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시로의 가슴을 주멱으로 때리고 소파에 쓰러트려서 짓눌렀다. "엄청 걱정했는데! 근데 왜 웃는 거야?! 네 녀석한테 웃을 자격 따윈 없단 말이야!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괴롭게 하고서! 제길!" 시로가 참다 지쳤는지 막무가내로 때리는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눈을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죽지 않았어." "시끄러! 아... 알고 있다구!" "살아 있잖아? 난-- 여기 있다." 알고 있다. 시로는 살아있다. 살아서 돌아와줬다. 기뻐야 할 텐데 왠지 분하 고 괴롭고 애가 타서 역시 비참하게 울 수 밖에 없었다. 내 눈물이 시로의 뺨에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제길!" "나츠키..." 문득 뺨에 따뜻함을 느낀 나는 내가 깔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시로가 내 뺨에 손을 얹고 내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고 있었다. "미안했다." 시로가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걱정 끼쳐서 미안했다." "시로...?"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여서 그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시로... 다시 한 번 말해 줘..."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시로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시로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하자, 시로." 생각지도 않은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자... 시로." 시로가 눈을 스윽 가늘게 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겨야겠다고, 이유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시로에게 올라탄 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시로의 홀스터에 손을 뻗어 가만히 벗겼다. 셔츠의 단추도 벗기고 드러난 가슴 근육에 입술을 ㅏㄱㅈ다 댔건만 시로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시로의 피부를 확인하며 단단한 유두에 입 맞췄다. 시로의 옛 상처를 하나하나 열심히 핥고 화상처럼 오그라든 왼쪽 어깨의 탄 흔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그 혀를 천천히 어깨로 이동시켜 목덜미르 ㄹ타고 턱으로 올라갔다. "후..."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만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다를 것 같다. "시로..." 혀가 닿았다 얼떨결에 거둬들인 혀를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내밀자 시로가 거기에 응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격렬하게 탐했다. 완전히 깊은 곳까지 들어가 휘감고 삼킬 듯이 빨아들이자... 꾸욱 하반신이 수축하는가 싶더니 단숨에 부풀어올랐다. 다리 사이가 불끈 뜨거워졌다. 위험하다. 말도 안돼. 키스 정도에! "우왓!" 우와아아아!! 이래서야 색기고 자시고 없잖아앗! "시로..." 아아, 쪽팔려. 난 섹스의 달인이었는데, 이래가지곤 마치 초짜같잖아. 키스 한방에 끝나버리다니 인생 최대의 수치다. 힐끔 시로를 훔쳐보자... 아아아, 저건 절대로 질려버린 표정이다. "미, 미안, 시로. 나 왠지 무, 무드가 조금도 없어서...!" 새파래진 얼굴에서 새빨갛게 돌변해서 사과하는 내게 시로가 담담하게 말 했다. "너한테 무드 같은 건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 시로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이걸로 또 허탕인가... 하고 반쯤 포기 상태 인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시로...?" 시로는대답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안쪽 침실로 들어가 역시 말없이 나를 침 대에 내려놓았다. 시로와 나, 두 사람의 무게로 침대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내 귀는 시로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겨우 널 안게 되었군." 시로가 내게 천천히 포개진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마음과 함께 온몸을 남 김없이 사랑 받고 있는 동안 도무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은 가끔씩 뒤로 돌아가 내 등을 더듬다 살짝 확인하듯이 엉덩이에 닿아 그 사이를 손가락이 오갔다. 주무르고 움켜쥐는 손길에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시로가 내 가 슴에 입 맞추며 가끔씩 혀 끝으로 누르듯이 나의 성감대를 공략하며 굉장히 부드럽게 깨물었다. "하아..." 나는 시로의 머리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헝클었다. 아까부터 숨이 지독히 가빠진 나는 너무 괴로워서 여자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응... 으응... 응!" 내가 몸을 비틀 때마다 나와 시로의 흥분이 부딪쳤다. 시로의 늠름한 남성 이 나를 위에서 짓눌렀다. 흥분한 시로의 그곳은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 었다. 중량감 있고 강인하고 강건해서 그것만으로도 나는 몇 번이나 실신할 뻔했으니 말이다. 시로가 날 안고 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남자의 무게도, 체온도, 냄새 도 틀림없이 내가 사랑하는 칸자키 시로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눈물이 넘쳐났다. 눈을 꼭 감자 민망하게도 뚝뚝 떨 어졌다. 시로가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마시고 젖은 그 입술로 내게 키 스해줬다. 약간 짰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시로의 혀를, 나의 칸자키 시로 는 좀 더 깊이 맛보고 싶어서였다. 정말로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난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내 인생은 결코 축복 받은 환경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별 아래서 태 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미래를 포기하고 있었다. 행복 같이 인연이 없는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만나고 말았다. 낡아빠진 양복에 꼬나물은 담배와 까칠한 수염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얼핏 보면 생기가 없는 남자. 그러나 난 그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사랑하고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신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9 "키스... 하면서 안아줘..." 시로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나는 그렇게 부탁했다. "키스하면서... 내 안에서 느껴줘..." 나는 천천히 벌린 다리를 시로의 허리에 감았다. 사랑하는 남자를 몸 속 깊 숙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시로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시로가 주는 숨막힘이 너무 행 복해서 자연히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드디어 미쳐버린 듯 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된다. 난 웃어도 된다. 나는 겨우 행복을 손에 넣었다고 믿어도 된다... "아아... 아아, 실, 시로, 시... 로..." 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시로, 아, 하, 하아아, 히...!" 이제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하아아, 앗, 아, 아, 아...!" 만약 잃어버릴 바에야 아예 내 손으로 죽여 버릴까-- 아니면. "시로오...!" 이렇게 절정에 함께 오르고 싶었다. * * * 시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이고 는 나태하게 연기를 토해냈다. 나는 넋이 나간 상태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 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시로와... 해 버렸다. 겨우 몸과 마음이 통했는데도 나는 어쩐지 시로에게 말을 걸지도, 만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뜨거운 섹스를 나눴는데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시로는 지독히 냉혹하게 보였던 것이다. "너한테 하나만 말해두지." 시로의 손가락 사이에서 말보로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너무나 도 냉정한 말투에 기가 눌려서 난 침대가에서 굳어졌다. "앞으로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번처럼 이성을 잃지마." 사이드 테이블의 조명에 비친 시로의 얼굴은 어느 새 날 향해 있었다. "겨우 그 정도 일로 패닉에 빠지지 마.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컨트롤해. 그 리고 앞으로 내 일에 일절 참견하지마. 수사에 방해다. 알겠어?" "시로..." --쇼크였다. 이렇게나 진지하게 사랑을 나눈 직후에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말을 내뱉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알고 있었지만... 차가운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백 보 양보해서 두 번 다시 날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발언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건 너무했 다. 시로는 내 마음보다 일으 더 우선해버렸다. 물론 그의 말이 지극히 당연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로는 시로의 페이스가 있고 일의 순서나 방법도 있어서 아무리 사랑해서 그랬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어지럽히거나 불평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요컨대 이 남자는 지금까지의 나로서는--쉽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나로선 앞으로 시로와 함께 할 자격이 없다고 사랑할 생각이 없다고 민폐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알았어..." 시로에게 사랑 받고 싶으면 시로를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로는 일일이 날 돌봐주고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굳이 달래주지도 않는다. 시로는 그렇게 한.가. 하지 않다. 나 같은 건 시로의 일상에서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일부분인 것만도 다행 일지 모른다. "알았어, 시로." 들떠 있었던 내가 바보였다. 얇은 입술로 담배를 가져가는 시로의 냉혹한 옆모습을 눈앞에 두고 나는 쓸쓸함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사랑을 나누면 이런 쓸쓸함 따윈 날아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더욱 더 증식했을 뿐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이성을 잃지 않을게. 설령 시로가 죽어도..." 시로의 엷은 홍채가 담뱃불에 붉게 물들었다. 죽는 건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시로가 연기를 내뱉었다. "시로가 죽으면 눈물도 흘리지 않고 웃으며 유체를 확인해 줄게." 나쁜 녀석에게 반했다고 생각하고 단념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난 이미 시로에게서 발을 뺄 수 없다. 그렇다면 난 누구의 도움도 필 요없을 정도로 강인한 신경을 가지고 무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로와 함 께 살아갈 길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의 사체를 씻어서 드라이 아이스와 함께 관에 넣고 웃는 얼굴로 당신 의 여동생에게 전해주지." 강인하고 딱딱하고 끝없이 냉혹한 시로의 두 눈을 나는 불타오르는 애정과 증오의 눈동자로 깜빡이지도 않고 쏘아보았다. "그러면 되겠지, 시로?"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무슨... 뜻이야?" 시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인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이건 동료를 대하는 눈이다. "내가 죽을 때는 아마도 순직일거다. 본인이 이미 각오한 일을 남들이 굳이 슬퍼하길 바라지 않아. 난 먼저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단념해. 그럴 수 없다면 너와는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라니...?" "오늘밤으로 끝이란 말이다." 너무나 이기적인 말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격렬하게 날 안고서 어째서 나보고 남이라고... 그렇게까지 차갑게 떠밀어내는 걸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잖아! "오늘밤으로 끝이라니 말도 안돼!" 분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일생 시로에게 달라붙어 있을 거야. 시로가 죽어도 절대로 절대로 떨 어지지 않을 거라구!"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이 사람이 방금 전까지 나를 안 고 있던 남자란 말인가! 나츠키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시로는 그렇게 판단했단 얘기다. 두고 가 도 괜찮다. 먼저 죽어도 나라면 OK. 그래서 시로는 날 허. 락. 해줬단 얘기다. 그렇게 인정받아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나는 시로가 죽어도 울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관계는 계속되는 거야. 됐 지? ...대답해, 시로!" "...그래." "하지만 당신이 죽은 뒤의 일은 내 맘대로 하겠어. 나도 시로의 관에 들어가 서 시로의 시체 곁에 잠들어서 함께 화장될 거야." "맘대로 해." 질렸다는 시선이 돌아왔지만 나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이 남자에게 질려 버렸다. 그러니까 무승부다. "나는 재가 되어서 당신과 한 몸이 되겠어.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 그러니까 난 외롭지 않아. 당신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아. 오히려 기쁜걸. 안 심하고 순직해, 시로. ...말귀를 잘 알아듣는 녀석을 상대로 둬서 다행이네." "...그렇군." 시로가 담배를 문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시로에게 안기고 나서 나는 알았다. 빠져들면 빠져들 수록 이 사랑은 일그 러지고 소중한 뭔가가 사라져간다. 사랑할수록 보이지 않게 되는 풍경이 있 다. 쫓아갈 수록 사람은 사각을 헤맨다. 단념으로밖에 시작할 수 없는 관계가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팔을 뻗어 시로의 얇은 입술에서 막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빼앗아 입 술에 끼우고 빨아들였다. 시로의 향기가 내 폐 안을 가득 채워간다. 시로라는 업화가 날 불사르고 끝까지 검게 좀 먹어 갔다. "당신의 기일이 기다려지는 걸..." 그렇게 웃고 난 나는 담배를 구겨 쥐었다. 피부가 타들어 갔다. 죽음의 냄새는 그렇게 내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열사의 기억 1 "시로, 내일은 일찍 출근해?" 나는 내 이불에 눕자마자 생각난 듯이 물어봤다. 숙면 태세에 들어가려고 하던 시로가 옆자리에서 '아아...' 하고 귀찮은 듯이 대답해왔다. 나는 누워서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하는 김에 모포도 끌어왔다. 달력상으로는 지 난 주가 입춘이었으나 창 밖은 오늘도 눈이 흩날리고 있다. 기분도, 기온도 아직 한 겨울이었다. 베개의 위치를 고치며 나는 시로의 출근시간 확인에 들어갔다. "그럼 6시에 일어나면 되겠지. 아침 먹고 갈 거지?" "필요 없어." 시로가 뒤척이며 등을 돌린다. 시끄럽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가 원망스러워 진 나는 이불 채로 움직여 시로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로 녀석, 이 추위에도 트렁크 한 장만 입고 자고 있었군. 정말이지, 골수 까지 야생화 되었다니까. 나는 남자답고 선이 굵은 시로의 잠든 얼굴을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들여다 보다 그의 얼굴에 키스한 후, 몰래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치웠다. 역시 오늘도 섹스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내가 키스하자고 하면 분명 시로 는 응해줄 것이다. 안아달라고 조르면 분명히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나 는 말하지 못했다. 시로 잘못이 아니다. 단지 내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두 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1개월 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칸자키 경부 보 순직' 소동. 그 날 밤, 난 처음으로 시로에게 안겼다. 시로는 내 소원대로 키스하며 내 안에서 절정을 맞았다. 미치도록 애태웠던 컨자키 시로에게 나, 아마노 나츠키는 만족할 만큼 사랑 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나눈 뒤, 시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먼저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단념해. 그럴 수 없다면 너와는 여기까 지다.' 라고 말이다. 나는 순식간에 나락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로는 나를 행복의 절정으로 인도하고서 그 몇 분 뒤에 날 떼어버리려고 했다. 그런 말로 간단히 날 버리려고 한 것이다! 확실히 시로의 일에 참견한 내가 나빴다는 건 전면적으로 인정한다. 주변의 민폐를 생각지 않은 경솔한 행동이 스스로를 궁지에 밀어 넣었다는 것도 알 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경찰의 수사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도 반성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간단히 툭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 잖아? 사랑 받는다고 믿은 직후의 절망감, 하늘과 땅 사이보다 먼 차이다. 그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폭발하려는 광기를 억누르려고 그 날 내 손바닥에 각인한 화상이 애정에 굶 주려 쑤셔왔다. 다시 한 번 시로를 원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비정한 말을 듣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 츠러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지나도 두 번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 * "내일부터 3일간 휴가를 받았다." 주말 밤, 시로가 경시청에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시로가 양복을 벗으며 보충 설명을 해준다. "네가 가고 싶은 곳에 데려가 주지." 멍청해져서 올려다보자 시로가 스윽 눈웃음을 지었다. "가기 싫어?" 혹시 이건 신종의 왕따인가? 설마... 그러나 아무리 봐도 농담 같지는 않다. 그렇다는 건 지, 진짜? 감격한 나머지 턱이 빠져버린 내 반응을 오해한 시로가 재빨리 전언을 철회 하려고 했다. "싫다면 됐다.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 "시, 싫을 리가 없잖아!" 나는 참지 못하고 시로의 목에 매달렸다. 너무너무 기뻐서 심장이 춤을 추 고 있었다. 흥분해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시로에게 매달린 채 의미도 없이 폴짝폴짝 뛰었다. "근데, 시로, 왜?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야?" "전에 말했잖아. 일이 매듭지어지면 여행이라도 하자고."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을 때, 시로 의 억양도, 목소리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설마 진심일줄은 몰랐다. "굉장해, 시로! 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기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시로가 미간에 주름을 지 었다. "마침 유급 휴가를 땄을 뿐이야." 성가신 듯이 나를 떼어내며 시로가 시.치.미.를 뗐다. 왜냐하면 난 알고 있다. 아마 그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일만 하고 새해 참배조차 함께 못 간다고 흘린 불평을 말이다. "땡큐... 시로." 너무 감격해서 가슴이 메었다. 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시로를 꼭 끌어안았다. 두 팔을 시로의 허리에 감고 시로의 어깨에 얼굴 을 묻었다. 뺨에 전해지는 시로의 체온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가득 찼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아무리 감사의 말을 해도 모자랐다.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답답해서 나는 시로의 목덜미에 코끝을 힘주어 문질렀다. 희미하게 눈썹을 지켜올린 시로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고 있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시로의 말없는 배려가 내 몸과 마음을 만족시켰다. 나는 약해지려고 하는 눈물 샘을 조이고서 시로를 올려다보고 미소지었다. "그럼, 나 후쿠시마에 가고 싶어." "후쿠시마?" "야요이의 성묘를 가고 싶다고 하면... 시로, 화낼 거야?" 이번엔 시로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로의 눈동자 안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질투라든가 라이벌 의식 같은 마음은 털끝 만큼도 없다. 단지 나는 순수하게 야요이를 마주하고 싶을 뿐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으로서, 시로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동지로서 말 이다. "...가 주겠어?" 되돌아온 대답은 시로답지 않은 조그마한 중얼거림이었다. 내 본심을 살피 는 듯한 어려워하는 말투. 그러나 내겐 똑똑히 들렸다. "내가 야요이와 만나는 것을 시로가 허락해 준다면..." 시로의 눈을 쳐다보며 말한 내게 시로가 갑자기 눈가를 누그러트렸다. 불안 해 보였던 입가가 여느 때와 같은 쓴웃음으로 변했다. "그럼 온천 여관을 잡을까?" "온천?" "온천은 싫어?" 나는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온천 좋아! 온천 가고 싶어! 시로의 유카타 차림이 보고 싶어! 그리고, 그리 고, 노천탕에 들어가고 싶어! 나는 시로에게서 팍 떨어져 옷장으로 달려가 안에서 보스턴 백을 끄집어내 어 재빨리 갈아입을 옷을 골랐다. "있지, 시로. 모처럼 가는 거니까 2박 하자. 그럼 속옷은 2장씩이면 되겠지? 후쿠시마는 추울까? 2월이라곤 해도 아직 도쿄도 눈이 내리니까 밤엔 꽤 춥 겠지?" "이봐, 나츠키." "알았어, 알았어. 시로의 옷도 함께 넣어둘 테니까 괜찮다니까. ...아, 그리 고 칫솔과 타월은... 여관에 있구나. 그래도 묵을 곳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잖 아. 뭐, 현지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나츠키." "아이 참, 알았다니까. 난 바쁘니까 시로는 먼저 샤워하고 자. 준비는 내게 맡겨두라고..." "...먼저 밥부터 안 먹을래?"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굳어졌다. 아 하고 깨닫자 동시에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가 아직 이었나! 너무 머쓱해진 나머지 주저주저 등 뒤를 살피자 시로는 여느 때와 같이 테 이블 앞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날 보고 있는 눈은 완전히 포기 상태였다. "미, 미안! 그, 금방 데울게." 나는 횡설수설하며 주방에 서서 오늘의 메뉴인 쇠고기 덮밥 냄비를 불에 올 렸다. 국물용으로 파를 자르려고 하자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 쁨이 포화상태를 넘어서 식칼을 들고 있는 손이 웃고 있는 것이다. 우와아, 나 위험할 정도로 들떠 있잖아! "사, 사흘이나 집을 비우니까 냉장고 안을 정리해야겠네. 내일 아침은 남은 야채 된장국이라도 괘, 괜찮지?" 평상심을 보이려고 한 말까지 이상하게 나왔지만 난 정말 무지무지 기쁜 것 이다. 시로가 날 생각해줬다! 후쿠시마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야요이에게 보고해야지. 난 시로를 너무 좋 아하고 사랑한다고, 시로를 소중히 여기겠다고... 시로에겐 내가 있어. 내가 시로를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시로를 좋아하는 마 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분명 야요이는 안심할 것이다. 나와 시로를 축복해줄 것이다. "나츠키." "어, 어, 어, 왜?!" "냄비 탄다." "뭐? 우와앗!" 아이, 참! 그럼 보고 있지만 말고 도와 달라구! 2 다음 날 아침 9시, 나와 시로는 맨션을 출발했다. 그렇다, 맨션이다. 예전에 우리가 살고 있던 요츠야의 낡은 아파트는 지난 번 사건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빨리 다음 아지트로 이사를 마쳤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살 집이 필요해서 할 수 없이 경찰이 준비해준 보금자 리에 일시적으로 몸을 맡기고 있단 얘기다. 이력 상으로 시로는 독신이라 제 공된 집의 평수도 그에 맞춰 1DK. 소위 말하는 원룸 맨셔이다. 새로운 집은 맨션의 1층으로 예쁜 서양식 욕조가 있고 독립형 주방도 붙어 있다. 창문도 커서 통풍 좋고 바닥은 번쩍거리는 플로링, 그런데 우리는 이 집에서도 여전히 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최저한의 생호라 필수품은 시로의 후배인 후지시로가 본청에 신청해주었 다. 좋던 싫던 간에 시로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후지시로는 일부러 예전에 사용했던 것과 꼭 닮은 코타츠를 식탁용 테이블로 골라왔다. 확실히 시로는 그 쪽이 더 편안한 모양이지만 나로선 근사한 의자 딸린 다이닝 테이블 세트 같은 걸 받고 싶었단 말이다. 뭐, 좁더라도 즐거운 우리집이니까, 언제나 시로에게 달라붙어 있고 싶은 나로선 바라지도 않았던 신혼 살림이긴 하지만 말이다. 검은 구식 스카이 라인이 토호쿠 자동차도를 나는 듯이 달렸다. 하늘도 쾌 청해서 드라이브하기에 최고의 날씨였다. 나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끔씩 운전석에 시선을 던졌다. 오늘의 드라이버는 여전히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시로에겐 공사의 구별이 란게 없는 모양이다. 어울리니까 상관없지만 말이다. 염원하던 시로와의 드라이브는 라디오만 틀어놓은 채 지금까지 대화가 한 마디도 없었다. 가끔씩 담뱃불을 찾아 방황하는 왼손에 라이터를 쥐어줬을 뿐, 그런데도 전혀 거북하지 않다. 이렇게 같은 시간과 공기를 공유하는 것이 야말로 내가 바랬던 것이기 때문이다. 훔쳐 본 시로의 표정도 어느 때보다 온화해 보인다. 시로에게도 이 휴일이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행복한 기분에 취하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아이즈 와카마츠 인터체인지를 내려온 우리는 도중에 곷집에서 국화를 산 후, 목족지에 도착하자 물을 채워 자갈을 밟으며 야요이의 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제로는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번째는 작년 말. 야요이의 기일이었다. 나는 야요이에게 시로를 뺏길 것 같다는 초조함과 추한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신없이 시로를 쫓아왔던 것이다. 시로의 마음도 생각하지 않고... "오랜만이야... 야요이." 나는 나가누마 가문의 묘라고 쓰인 비석에 미소지으며 인사하고서 쭈그리 고 앉았다. 생전의 야요이와는 만난 적도 없으면서, 왠지 나는 야요이의 목소 리나 웃는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지시로에게 야요이의 장렬한 최후를 들었을 때, 나는 데자뷰 같은 기묘한 감각에 빠졌다. 시로를 위해 남자를 유혹하고, 시로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야쿠자에게 처 녀를 바친 슬픈 여자... 그러나 만일 내가 야요이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분명 히 같은 일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걸로 시로를 구할 수 있다면 몸을 갈기 갈기 찢겨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시로가 말없이 통 속의 물을 떠서 비석에 끼얹자 잘 닦인 비석 표면에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꽃을 영전에 바치고 선향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손으로 부채질하자 불이 꺼짐과 동시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계 속 침묵을 지켜오던 시로가 조용히 입을 열고 말했다. "데려왔어, 야요이. ...나츠키다." 무뚝뚝하게 소개받은 나는 시로를 올려다보았다. 변명도, 설명도 없다. 그 꾸밈없는 시로의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메었다. 시로는 한참 묘를 바라본 뒤 가만히 눈을 감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나도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애써 억누르면서 시로와 함께 합장했다. 시로가 손을 내리자 나는 조용히 그 손을 가만히 잡았다. 시로가 내게 온화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시로에게 미소짓고는 같은 미소를 야요이에게도 바쳤다. "또 둘이서 만나러 올게. 다음엔 좀 더 화려한 꽃을 가져 올 거야." 나는 야요이에게 웃음을 보내고 일어서서 시로에게 가자고 재촉했다. 실제 로 묘를 앞에 두니 갑자기 애달퍼져서 전에 이것저것 준비해줬던 말은 결국 하나도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에서 되뇌었으니까 분명 야요이에겐 전해졌 을 것이다. 서로 잡은 손은 막상 놓을 타이밍이 어려워서 나는 쑥스러워하면 서도 스카이 라인에 도착할 때까지 무턱대고 시로를 잡아 끌었다. 그 뒤, 우리들은 역 앞의 여행사에 들러 오늘 밤의 숙소를 찾았다. 여행 비 용은 시로가 가지고 있어서 나는 완전 노 터치다. 시로에게 완전히 맡기는 코 스인 것이다. 나는 시로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휴게실에 앉아 놓여있는 팜플 렛을 훑어 보았다. "함께 여행할 상대가 있다는 건 왠지 무지 행복한 거구나." 나는 웃으며 테이블에 놓인 팜플렛을 슬쩍했다. 팜플렛을 가진 것만으로도 시로와 그곳을 여행하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아, 나란 녀석은 얼마나 싸게 먹히는 쉬운 연인이란 말인가. 시로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자.' 하고 쿨하게 턱짓을 했다. 나는 의자에 서 일어나 시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묵을 곳은 정했어?" "아아..." "...헤헤." "뭐야?" "응, 아무것도 아냐." 낡아빠진 민박이라도 차안에서 자게 되더라도 사실 난 뭐라도 좋았다. 시로 가 정한 장소라면 어디라도 기쁘게 따라갈 것이다.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스카이 라인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숙소를 했으니 다음은 근처에서 배를 채우기로 한 우리는, 시로의 제안으로 너무 늦은 점심을 들었다. 원조 솥밥집이라는 이름을 내건 그 가게는 200년 도 더 전에 지어진 본점을 이축한 것이라는데 대들보나 기둥 하나하나에도 특유의 정취가 있는 것 같았다. 천장의 높은 다다미방으로 안내되자 그것만 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역시 일본 사람은 다다미가 최고다. 자리에 앉아 요리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와 꾸룩꾸룩 하고 뱃속이 정직하게 반응했다. 시로가 어이없는 얼굴로 웃는 다. 맛도 분위기도 대 만족이었던 점심 식사 후, 수다스러운 가게 주인에게서 토산주 정보를 입수한 시로는 곧장 술도가로 달려갔다. 휴일의 시로를 보는 일은 거의 드물어서 무심코 빤히 쳐다보게 된다. 일밖 에 흥미가 없는 남자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의외로 여행을 좋아하는지 도 모른다. "시로, 왠지 진짜로 관광하는 거야?" "그럼 안 되냐?" 즉각 되돌아온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빙고다. 역시 인간에겐 휴식이란 게 필요한 법인가 보다. 시로의 말투나 표정도 슬쩍 보기만 해도 평소보다 온화했다. 여가를 만끽하 고 있는 옆모습이 흐뭇했다. 시로의 의외의 면을 보게 되자 나는 참지 못하고 분심을 입에 담았다. "시로, 귀여워." 순간, 시로가 콜록 하고 사례가 들렸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인 하얀 술도가에 도착했다. 오래된 창고 처마에는 내 두 팔을 벌려도 모자랄 만큼 거대한--. "봐봐, 시로. 엄청 큰 벌집이 있어." "바보냐? 저건 스기다마(좋은 술을 기원하는 술도가의 신물)다." 바보라고 불린 나는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힌 채 시로를 따라 차에 서 내렸다. 아이즈는 물이 깨끗한 걸로 유명한 모양인지 시로의 설명에 따르 자면 물이 좋은 지역에서 나오는 술은 거의 모두 맛있다고 한다. 막부 말기에 창업되었다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이 주조소는 술맛도 일급으로 궁내 진상용 명품도 있다고 한다. "한 병 준비할까요?" 기계 음성과 함께 핫피(장인들이 입는 짧은 웃옷) 차림의 주인이 안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붙임성 있게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손님을 감정 하는 듯한 그 눈매는 장인 기질이란 걸까? 주인은 미성년인 나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는 모양인지 아까부터 시로만 지 긋이 살펴보고 있다. "쌉쌀하고 뒷맛이 깨끗한 것으로..." 시로가 막상 막하로 무뚝뚝하게 말하자 주인은 길다란 눈썹 끝을 꿈틀세웠 다. "맛보겠소?" "아아, 부탁드리죠." "이봐, 시로. 음주 운전할 셈이야?!" 당황한 나 따윈 완전히 무시한 시로는 주인이 권하는 대로 잔을 받았다. 킁 하고 가볍게 냄새를 맡은 그는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아!" 마셨어! 내가 초조해하자 주인이 말없이 시로의 입가에 빈 그릇을 내밀었 다. 시로도 말없이 머금없던 술을 그곳에 도로 뱉는다. "...음, 좋군." 입 속에서 혀를 쯧쯧 울린 시로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까다로운 주인의 입가가 미묘하게 누그러졌다. "형씨, 딴 것도 한 번 시음해 보지?" "그래도 됩니까?" "그럼, 괜찮네." 주인은 왠지 기쁜 듯이 시로에게 술을 권했다. 아마도 애주가 끼리는 마시 는 방법 하나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질투가 났다. 주인에게 질투하는 게 아니라 알코올은 일절 받지 않 는 이 체질이 원망스러운 것이다. 나도 술만 마실 수 있다면 지금쯤 시로와 좀 더 깊은 곳에서 맺어져서 엎치락 뒤치락 마치 숙성된 일분주 같이 농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을 텐데... 하하하. 그냥 생각해봤다, 젠장!! 진지하게 술을 음미하고 있는 시로를 곁눈질하며 나는 주르륵 늘어선 술병 들의 라벨을 읽었다. 그러나 순미주라든가, 청주라든가, 대음양이라든가, 산 폐라든가. 뭐가 뭔지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전혀 알 수 없다. "저기, 시로. 이 가게 왠지 춥고 눅눅하고 어둡지 않아? 장사가 별로 안 되 나봐." 나는 울퉁불퉁한 벽면을 수상쩍다는 듯이 둘러보며 시로의 등 뒤로 속삭였 다. 그러자 시로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술을 찾잔에 뱉으며 조그만 목소리 로 가르쳐주었다. "술은 살아있는 물건이니까 적당한 온도와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거다. 이 런 가게의 술이야말로 믿을 수 있지." 그, 그런 거였어? 몰랐다. 가게 주인과 이것 저것 검토한 끝에 시로는 한 되 들이 병을 두 병 사기로 한 모양이다. 얼마인가 주인의 계산기를 들여다보자, 뭐? 한 병에 만 엔? 이런 물에 그렇 게나 돈을 내야 돼? 애주가들의 금전 감각은 정말 알 수가 없네. 나는 그것보 다 옷을 사는 게 훨씬 이득이라 생각한다구. 게다가 주인은 시로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전화하면 당장 배 달해주겠다고 말이다. 장삿속이 아니라 오랜 친구 같은 말투였다. "그거 둘 다 시로가 마실 거야?" 나는 소외된 것이 분해서 반쯤 질투심에 물어보았다. 한 병은 톡 쏘는 쌉쌀 한 맛. 다른 한 병은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라고 했다. "이 쪽은 선물이야." 시로가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며 달콤한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내 관자놀이 가 나쁜 예감에 꿈틀꿈틀 댔다. "선물이라니 혹시 후지시로한테?" "그래." 달리 누가 있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내 머리에 피가 몰렸다. "왜 후지시로한테 일부러 이렇게 비싼 걸 사다주는 건데? 싸구려로 충분하 잖아!" 아저씨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주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 기분도 몰라주는 둔감한 시로가 당연한 듯 후지시로 편을 들었다. "이번 이사에도 그 녀석한테 이것 저것 신세를 졌으니까. 이럴 때가 아니면 감사도 못 해." 그, 그, 그렇다면 나도 맨날 맨날 식사 준비하고 청소하고 속옷 빨고 열심히 시로를 돌보고 있잖아?! "있잖아, 시로. 그럼 나도 한 병 사줘. 후지시로만이라니 비겁해." 간드러지게 매달렸더니 시로가 바보 취급하는 눈으로 노려본다. 3 시로가 운전하는 스카이 라인이 오늘 밤의 숙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내린 순간, 찌르는 듯한 바깥 공기의 차가움에 몸이 움츠러 들었다. 나도 모르게 코트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시로가 하늘 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눈이 올 것 같군." "...응." 벌써 발치에는 살짝 눈이 쌓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처마 밑 여기저기 서도 눈이 녹지 않고 남아있었다. 웬일인지 풍경도 바깥 공기도 이렇게 춥고 싸늘한데도 몸 속은 후끈후끈했 다. 손을 뻗으면 바로 곁에 따뜻하게 안아줄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추위 가 쓸쓸하지 않고 얼어붙은 받도 고독하지 않다. 천천히 해가 졌다. 먼 곳의 하늘이 차차 짙은 남빛으로 변해갔다. 토해낸 숨 결이 노을에 비쳤다. "시로..." "왜?" "...땡큐." 나는 시로의 소매를 살짝 잡아 끌어 마음에서 이끄는 대로 팔짱을 겼다. 시 로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날 말없이 에스코트해줬다. 현관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나는 환성을 지르고 말았다. 나이도 잊은 채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고 말았다. 시로가 예약한 숙소는 순수 일본풍의 전통 여관이었던 것이다. 널찍한 현관 은 수수한 분위기로 문턱엔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통 노송나무가 세워져 있 었다. 공기가 상당히 맑은 것은 주변을 감싼 나무 향기때문인 것 같다. 편안한 개 방감은 높은 천장 덕분이었나? 왼 편의 담화실은 전망실도 겸하고 있는 모양인지 한 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전망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의 시티 호텔의 호화로운 로비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점잖은 분위기의 일본 가옥에는 여태까지 거의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선해서 한눈 에 이곳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시로라면 틀림없이 싼 민박집으로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너무 감동한 나머지 생각이 그대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시로가 화가 난 표 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지금부터 너만 민박으로 보낼까?" 당황한 나는 '말도 안 돼!' 하고 거부하고서 절대로 안 가겠다고 팔짱을 꽉 끼었다. 그런 우리를 기모노 차림의 미인 여주인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 다. 여주인은 우리의 발치에 슬리퍼를 놓아주며 맞이해 준다. "도쿄에서 오신 칸자키님 이시지요?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여긴 춥지 요? 자, 올라오세요." 시로가 곧장 체크인 수속을 했다. 나는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까부 터 한숨만 쉬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아직 믿기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시로랑 여행하고 있다니 말이다. 발 밑이 둥실둥실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현실 이 아닌 것 같았다. 뭐든지 꿈만 같았다. 여관의 여직원이 시로의 가방을 들어올렸다. 방에 시중담당으로 배치된 여 직원은 통통한 아주머니였다. 자기가 들겠다고 거절하는 시로에게 아주머니 가 억지로 가방을 빼앗고서 이렇게 말했다. "손님이시니까 기운도, 신경도 쓰시면 안돼요. 여기선 느긋하게 지내셔야 해요." 친근함이 깃든 말투로 말하자 시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행복한 얼굴로 그 한가로운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나츠키." "아, 응!" 시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상기된 뺨을 손으로 파닥파닥 부채질하 면서 시로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이 안쪽이 목욕탕입니다." 아주머니가 통로 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넓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남녀 각각 대욕탕이 있었다. 노천탕은 저 안에서 간다고 한다. "묵으시는 방에도 노송 나무탕을 준비해놓고 있답니다. 부부 사이에 들어가 시려면 방 쪽이 편안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부, 부부라니? 부부라니?: 서, 서, 설마 나랑 시로가? "객실 욕탕에도 온천을 연결해놨으니 부디 이용해주세요." "하, 하아..." 아마도 날 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복잡한 기분 이었다. 힐끔 시로를 훔쳐봤지만 정정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것보다 빨리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이쪽이 소나무실입니다. 부디 편안히 지내세요. 식사는 곧 방으로 올려드 리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말차를 타주고서 식사시간에 다시 뵙겠다며 웃는 얼 굴로 물러갔다. 둘만 있게 되어 한숨 돌렸을 때 시로가 재빨리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는 맛있다는 듯이 연기를 입에 머금으며 창가에 다가가 툇마루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말차와 화과자를 먹으며 행복한 기분의 절정에서 편안한 상태 의 시로를 즐기고 있는 중. "있잖아, 시로. 밑에서 김이 솟아오르는데 저기가 노천탕일까?" "아아, 그런 것 같군." "난 노천 온천은 처음이야. 모처럼 왔으니 밥 먹기 전에 들어가자." 뭐, 뭐, 뭐야? 그 의심의 눈은! 난 흑심 같은 건 없다구.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실은 굉장히 대담하고 부끄러운 내용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난 시로의 존재를 과잉의식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교, 교대는 어때? 좋지? 시, 시로가 먼저 갔다와. 계속 운전해서 피곤하지?" 정말이지 이래가지곤 내가 2박 3일이나 버틸 수 있을까? 살그머니 서랍을 더듬어서 유카타와 띠와 단젠(솜으로 누빈 겉옷)까지 끄집 어낸 나는 자아 하고 시로에게 내밀었다. "모처럼 왔으니 천천히 갔다와. 응?" 쑥스러워하며 권하는 내게 시로가 무언의 시선을 던졌다. 뭐야? 할 말이 있 으면 분명히 말을 하지 그래? "...뭐야?" "아무것도..." "아니긴.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렇게 써있단 말이야." 입술을 삐죽 내밀자 부드러운 쓴웃음이 돌아왔다. "넌 정말이지..." 시로가 눈웃음을 짓는 모습을 본 내 심장이 두근! 하고 뛰다 두근두근두근, 박동이 급하게 빨라진다. "아무도 바보라고 생각 안해. 오히려 고마울 정도다." "시로...?"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시로의 눈에 내가 비쳤다. 내 눈동자에도 분명 시로 가 비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까워서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숨이 막힌다. 호흡이 멎는다! 괴로움에 폐가 터질 것 같을 때 시로가 휙 시선을 돌렸다. "그럼 먼저 목욕하고 올까?" "아? 아, 아아." 깜짝 놀라 그렇게 하라고 동의한 나는 즉시 심호흡을 했다. 시로의 눈에 붙 잡히면 언제나 이렇게 가슴이 조여들고 마는 것이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시로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양복을 벗었다. 옷 갈아입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도 쑥스러워서 나는 시로에게 등을 돌리고 벗은 옷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었다. 셔츠의 주름을 고치며 시간을 보내서 시로가 옷을 다 갈아입었을 부렵을 계 산한 나는 두근두근하며 뒤를 돌았다. "...웃." 나는 나도 모르게 코를 감싸 쥐었다. 왜냐고? 코피가 흐를 것 같아서. "왜 그래?" 시로가 단젠을 걸치며 여느 때쳐럼 나는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아아, 아무것도 아냐." 허둥지둥하는 내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시로가 타월과 속옷을 들고 입구로 향했다. 그 뒷모습에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들었다. 마음속에서는 '우와아아, 시로오오, 초절정 멋지고 근사해에에--!' 하고 몸부 림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로가 가버린 뒤에 나는 내 다이버스 위치에 눈길을 주었다. 추침을 읽으 며 1분을 세고, 2분을 기다리고, 기나긴 3분이 경과되었을 때 난 기세 좋게 옷을 벗어 던지고 풀 먹인 유카타를 몸에 걸쳤다. 띠 두르는 법이 얼기설기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갈아입을 옷과 타월을 움켜쥐고서 긴 복도를 달려갔다. 어딜 가는 거냐고? 그야 당연히 욕탕이지. 같이 가자고 떼를 쓰면 분명 시 로의 심기를 상하게 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도 탈의실에서 시로와 나란 히 서서 팬티를 벗는 부끄러운 짓은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근소한 시간 차로 쫓아가면 시로는 싫어도 나랑 목욕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크, 난 너무 머리가 좋아! 수치심보다 성욕이 이기는 나이니까!" 나는 기쁨에 가득 차서 대욕탕으로 직행했다. 수증기가 발치에서 솟아올랐다. 나를 감싸듯이 휘감아온 온기는 증발할 줄 알았는데, 내 맨살을 순식간에 차갑게 만들었다. 살짝 발을 탕에 담그자 징... 하고 욱신거리는 듯한 뜨거움이 찌를 듯이 차 가운 바깥 공기와 어울려 몸을 깊은 곳부터 데워줬다. 바위로 만들어진 노천탕은 그 중앙에도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다. 눈가림용 인가 했더니 표면에 더운 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포를 본 딴 온천의 분출구인 모양이다. 시로는 바위 목욕탕의 가장자리에서 가슴 부근까지 물에 담근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다행히도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엉거주춤하게 시로를 향해 소리도 없이 다가갔다. 중앙의 바위에 도착한 나는 부르려고 하다가 다리가 흠칫 움츠러 들고 말았다. 바위 뒤에 먼저 온 손님 발견. "...쳇, 재미없어." 입 속에서 불평을 흘리자 바위 뒤의 남자가 갑자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 다. "눈이 올 것 같네요." 나한테가 아니라 정면에서 명상에 잠겨있는 시로에게 말을 건 모양이다. 감 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시로가 남자의 시선의 방향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눈 인사로 맞장구를 쳤다. "관광이세요?" 질문을 받은 시로가 대답하기 전에 나는 바위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성묘 에요.' 하고 쏘아주자 남자와 시로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시로에게 다가가 찰싹 옆에 달라붙었다. 이 손님이 시로를 꼬시려고 한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지만 어쩐지 분했기 때문이다. 둘만의 목욕이 방해받은 것도, 남자가 의외로 젊고 피부가 희면서 단정한 얼굴이라는 것도, 내가 이렇게나 긴장하고 용기를 내어 겨우 시로랑 목욕할 찬스를 얻었는데 말이다. "저어, 일행이세요?" 남자의 질문에 시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뭐."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와 시로를 번갈아 보고 있다. 어떤 관계냐고 물 어보면 주저없이 '빼도 박도 못할 사이입니다.'하고 정직하게 대답해버릴 정 도로 내 투쟁심+독점욕은 불타고 있었다. 나는 물 속에서 시로의 손을 더듬었다. 마디지고 단단한 손가락에 내 손가 락을 휘감았다. 다리도 감으려고 했다가 쌀쌀맞게 발길질을 당하고 말았다. "성묘라면 이쪽 출신이십니까?" "아니, 도쿄입니다. 아이즈에는 아는 사람의 묘가 있어서..." 시로가 내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하면서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서 절대로 손가락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 속에서 필사의 격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우리 에게 온화한 웃음을 보냈다. "아아, 도쿄에서 오셨습니까? 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학창 시절의 같 은 반 친구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했었죠." 이 남자는 우리한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갑자기 나쁜 예감이 피어올라 불안감이 급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주쿠에서 야쿠자들의 싸움에 휘말린 모양인지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불쌍하게도..." 나와 시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나는 하얀 피부의 상냥한 남자를 잡 아먹을 듯이 응시했지만 남자는 상기된 뺨을 타월로 훔치며 쓴웃음을 지었 다. "벌써 3년도 더 된 얘기로군요. 하지만 그걸 듣고 전 도쿄는 무서운 곳이라 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신주쿠의 가부키초라면 일본에서 제일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정말이지, 야쿠자나 마피아를 풀어놓다니 도쿄의 경찰 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경찰은 그녀가 죽게 내버려둔 것과 같아요." 무의식에 그랬을 것이다. 시로가 진정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려고 했다. 얽혀있던 나와 시로의 손가락이 스르륵 풀어졌다. 나는 시로의 갈색 얼굴에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건 혹시 나가누마 야요이가 아닙니까?" 억눌린 목소리로 물은 질문에 남자가 놀라움의 목소리를 냈다. "당신, 야요이를 알고 있습니까? 아, 성묘라면 혹시 그녀의?" 시로의 표정에는 명백한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시로가 벌떡 일어서, 작은 목소리로 남자에게 사과하고 가버리려고 했다. "시로!" 나는 시로를 불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탄탄한 등 이 수증기 너머로 사라졌을 때 남자가 불편한 듯이 불쑥 말했다. "내가... 뭔가 실례되는 말을 해버렸나?" 멋지게 옛 상처를 후벼 파주었다. 겨우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겨우 나와 함께 걸어가려고 노력해줬는데 말이다. 그래, 노력이다. 시로는 날 받아들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시로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아직 그렇게까지 굳어지지 않 았다. 우리들은 이제부터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이번 여행에서 인연 을 깊게 할 생각이었건만 터무니없는 방해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야요이는 시로의 연인이었다구! 시로는 야요이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어! 시로는 필사적으로 야요이를 구하려고 했단 말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나 사랑했었어!" 자신이 재뱉은 말에 신경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아픈 마음을 견딜 수 없 어서 나는 노천탕에서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가버리려고 하는 날 멈추게 한 것은 남자의 의외의 말 때문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녀가 도켜에 가버리기 전에 우리는 연인 사이였습니 다." 남자는 아베라고 했다. 아베는 여관 내의 라운지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내게 야요이와의 추억을 절절하게 이야기했다. 아베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요이에게 첫눈에 반해 그 날 당장 고백 을 했고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던 모양이다. "뭐랄까, 생각해보면 너무나 깨끗한 교제였어요. 손을 잡은 적도 없었으니 까. 매일 아침 함께 등교하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원에 들러 캔 주스 를 마시거나 한 것 뿐이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언제나 두근두근했 어요. 긴장해서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뭐랄까... 그저 야요이의 얼굴을 볼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죠." 그리운 듯, 그러나 쓸쓸하게 손안에 든 잔을 흔드는 아베의 미소에 내 가슴 이 애절하게 떨렸다. 아베의 마음이 아플 정도로 이해되었다. 이해해버린 자 시닝 불쌍해졌다. "나도... 그래요." "나츠키군?" "시로의 얼굴을 볼 수만 있으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와 나의 관계를 겨우 눈치 챈 듯한 아베가 숨을 들이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눈에 부드러운 쓴웃음이 떠돌았다. 조용한 동정이 스며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내게 아베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도...?" 그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시로에게 안겼다. '그' 시로에게 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미움 받고 있지는 않다. 분명 시로는 날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언제나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어째서 매일 공연히 초조해하 고 손 쓸 수 없이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대답 없는 내 심정을 헤아렸는제 아베가 질문을 바꿨다. "시로씨는 어떤 사람이지요?" 그 질문이라면 괜찮았다. 자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굉장히 강해요. 놀라울 만큼 터프하고 냉정하고 모든 면이 다 뛰어나죠. 직감력도 뛰어나고 정의감에 넘치고 옳지 못한 일을 제일 싫어하 고 요즘 세상엔 보기 드물 정도로 고풍스러운 타입에... 뭐, 성격면에선 조 금... 이랄까 상당히 어렵지만서도. 개인주의에 타인을 별로 받아들이지 못하 는 데다 특히 연애면 같은 인간의 감정이 많이 결여되어 있지만 어쨌든 믿을 수 있어요. 야생의 늑대 같은 느낌이랄까?" "야생의 늑대라... 확실히 이미지 그대로군." 나는 그쵸? 하고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베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 적였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과 사귀고 있었으니까 야요이는 나 따윈 완전히 잊어버 렸을 테지." 아베가 하하... 하고 쓸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자푸자기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4 내가 방에 돌아왔을 때, 시로는 툇마루 의자에 앉아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 었다. 유카타에 단젠 차림인 옆모습에는 옛날 TV 영화에 나오는 낭인처럼 초 연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다. 말하자면 보통인 정도가 아니라 무진장 그림이 된다는 얘기다. "나 왔어, 시로." 고고한 사람한테 말을 걸어 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시로에게 다가가서 팔걸이에 가볍게 걸터앉아 시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자, 하얀 것이 남색의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흩날리고 있다. 눈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네." "아아." 시로가 눈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내리깐 속눈썹이 의외로 길었다. 여윈 뺨. 말수가 적은 입술. 이런 시로의 남자다운 모습을 위에서 니긋이 감 상하며 나는 시로의 빈 술잔에 데운 술을 따라줬다. 말없이 내 술을 받은 시 로가 이번에도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맛있어, 시로?" 쓴웃음을 지으며 물어보자 시로가 시선을 내게 던졌다. 홍체가 엷은 삼백 안. 동공만이 바늘로 찌른 듯이 새겨져 있다. 그 작은 한 범으로 나는 꿰뚫어 보자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애절하게 떨렸다. 뭐든지 전 부 시로에게 빼앗기고 싶다. "너도 마시겠어?"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나 알코올은 질색이거든." "아아, 그랬지." "하지만... 모처럼이니까 맛만 볼까?" 나는 미소지으며 시로에게 얼굴을 살짝 갖다대자 시로도 고개를 조금 쳐들 었다. 그러나 윗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을 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치웠다. "역시 안 되겠어. 술 냄새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겨."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팔걸이에서 뛰어내려와 시로를 등진 채 방 한 가운데 에 앉았다. 할 일이 없어서 갈아입은 옷을 개어 말없이 봉지에 넣는다. 솔직히 그렇게 술 냄새가 심하진 않았고 딱히 취해도 상관없지만... 말없이 키스에 응하려고 한 시로가 어쩐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키스를 기분전환용 술과 같은 레벨로 여기길 원치 않아싸. 기분을 풀기 위한 키스라면 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도 지금 키스해봤자 그저 시로 의 머리 속에서 야요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작업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건 결국 야요이를 서로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야요 이를 생각하며 시로와 키스한다는 건 나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는다. 안타까운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자 '실례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대답하자 식사라는 말과 함께 장지문이 열리며 일제히 들어온 것 은 수없이 많은 호화스런 요리들! "우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환성을 지른 나는 눈을 빛냈다. 나의 솔직한 반응에 아주머니가 눈웃음을 지어준다. 아주머니는 상 위의 화로에 불을 붙이고 공손히 설명해주었다. "이쪽은 다진 청어살과 파의 호오바야키(후박나무 잎에 속과 된장을 발라 구운 요리)입니다. 된장은 약간 매운 맛이니까 밥이나 구이에 곁들어 드세 요." "아, 네." 마른 후박나무 잎에 듬뿍 발라진 속이 바짝 그을어서 냄새가 좋았다. 말고 기 회, 민물고기의 소금구이, 찜 요리에 국물, 가지각색의 산채 요리도 잔뜩 늘어서 있었다. 음식 수가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망설이고 있 자 아주머니가 요리를 차리며 시로의 손안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술을 한 병 더 곁들일까요?" "아아, 부탁합니다." 이 남자, 더 마실 건가? 보통 연인에게서 술 냄새난다는 말을 들으면 술을 그만 마시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시로가 기분 좋게 마시겠다 면 별로 상관없지만 말이야. 모든 요리를 다 차려놓자 아주머니는 추가한 데운 술 두 병을 놓고 내려가 버렸다. 다다미 테이블을 끝에서 끝까지 뒤덮은 호화로운 메뉴를 사이에 두 고 나는 일단 찻잔을 들어올렸다. 내용물은 그냥 차였지만 말이다. "자아, 시로. 일단 건배!" "건배? 뭘 위해?" 시로가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자 나는 곤혹스러워졌다. 그치만 이럴 때 건배하는 것이 보통이잖아. 뭐, 확실히 시로가 싱글거리며 술잔을 부딪치 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만서도... "그럼... 그렇구나. 그러면 아, 우리의 허니문을 위해서는 어때?" 나의 제안에 시로가 술을 푸웃 하고 뿜어냈다. 콜록콜록 사례가 들린 시로를 무시한 체 난 헤벌쭉 웃고 있었다. 음, 꽤 그럴싸한 생각이다. "그러면 우리의 뜨거운 신혼여행에 건배!" 나는 찻잔을 높이 치켜들고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시로가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나는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뒤적였다. 먼저 알맞게 그을린 된장을 바벵 얹어 입에 밀어 넣었다. "우와, 맛있다! 자자, 시로도 먹어봐. 진짜 맛있다니까. 다음은 이걸 먹어볼 까? 말고기는 처음 먹거든. 그래도 왠지 불쌍한 생각도 드네. 이렇게 말하면 소나 돼지한테 미안한가? 하하하." 나는 왜 이렇게 들떠있는 걸까? ...아아, 분명 시로에게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베와 이야기 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베와 야요이가 사귀었었다는 것, 아베가 아직도 야요이를 잊지 못하고 있 는 것 같다는... 것 들을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어느새 시로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로가 대 답하지 않아서 대화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대화가 없는 건 평소와 같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무거운 공기가 방 안 가득 충만해있다. 시로는 요리에 눈길도 주지 않고 말없이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면 몸에 좋지 않은데... "이거 봐, 시로. 이 회도 엄청 맛있어. 좋아하는 거잖아. 먹어봐." 대답은 없었다. 마음이 딴 데 가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경찰이 그녀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말을 들었으니 상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시로는 야요이를 사랑... 했으니까 말이다.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맛있어야 할 요리가 지독히 맛이 없다. 그릇을 물릴 때 아주머니가 내게 '입에 안 맞으셨나요?' 하고 미안한 듯이 물어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시로의 접시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뭔가 다른 걸 준비할까요?" "아... 괜찮아요. 저 사람은 원래부터 소식이라."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시로는 다시 눈 내리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술 을 마시고 있었다. 그릇을 물리자마자 이번엔 방에 요가 깔렸다. 두 채의 침 구가 조심스러운 간격을 두고 나란히 깔렸다. 시로와 나란히 자는 것은 일상 적이라서 틀별하지 않다. 그런데 왜일까, 내 심장은 아까부터 두근두근 박동 이 빨라지고 있다. 물러갈 때 아주머니가 창가의 시로에게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말을 걸었 다. "부인이 예쁘셔서 바깥 분도 자랑스러우시죠?" 붙임성 좋은 아주머니가 엉뚱한 말을 건네는 바람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시선만 이쪽으로 향하고 있던 시로가 곤혹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 렸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쑥스러움이라고 해석한 모양인지 흐믓하게 내게 다 가와 귀띔을 해 준다. "객실 욕탕에서 보는 풍경도 근사하답니다. 꼭 만끽하세요." "하, 하하하, 하아." ...뭐, 좋긴 하지만... 덕분에 팽팽했던 신경이 느슨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아주머니는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를 민감하게 눈치 채고 일부러 명 랑하게 놀린 것이 아닐까? 과연 손님 접대의 프로다. 나는 시로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발치에 앉았다. "무슨 생각해, 시로?" 시로는 먼 곳을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야요이 생각이겠지?" 시로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 내려왔다. "설마 야요이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우리들의 시선이 얽혔을 때 나는 시로의 손에서 담배와 술을 빼앗았다. 그 리고 시로의 무릎에 앉아 시로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까는 할 기분이 아니었던 키스에 다시 한 번 도전해봤다. 나는 술에 젖은 시로의 입술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시로의 윗입술과 아랫 입술을 교대로 부드럽게 깨물었다. 슬며시 내 하복부에 열기가 일어났다. "취한다. 그래도 괜찮은 거냐?" "...그거, 언제부터 버릇이야?" 나는 시로의 입술을 마소며 물어보았다. "요즘 시로는 나한테 묻기만 하네." "...그런가?" 또 의문형이었다. 나는 쿡 웃었다. 너무나 서툰 입술을 마음을 담아 혀로 더 듬었다. 술과 담배가 섞인 맛은 상당히 씁쓸했다. "시로는 나에 대해 아직 망설이고 있지? 그렇다기보다 언젠가 내가 시로에 게 정나미가 떨어질 거라고... 시로를 단념할 거라고. 그런 술픈 생각을 하면 서 나랑 살고 있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거짓말. 전에 날 안아줬던 것도 사실은 한 번 자면 단념할 거라고, 약간은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그렇게 시로의 마음속에 나와의 긍정적인 미래가 전혀 그려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해지잖아.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 록 서로 상처만 줄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로 조금도 진전하지 못하 는 것이 아닐까?" "......" "어째서 안 떨어지지? 왜 내 곁에 있지? 도대체 내 어디가 좋아서? 지금 그 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시로? 있잖아, 시로. 그렇게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이... 새로운 상처를 낳는 것이 무서워?" 시로가 말없이 시선을 보냈다. 변명은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정곡이지?" 장난스럽게 쪽 하고 키스하자 싸늘한 방어의 시선이 돌아왔다. 시로의 상처 를 후벼파고 있는 것은 아베뿐이 아니라 나도... 그런 모양이다. 나는 웃음을 거두고 시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진지하게 시로를 바라 보며 말했다. "상처투성이인 남자가 좋다니까? 고립무원을 관철하려고 하는 자세도 말이 야. 하지만 난 시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집이 세다구." 상처 입은 늑대는 완강하게 마음을 닫은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사랑과 원망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나는 시로의 입술에 꽉 이빨을 박았다. 시로가 아픔에 눈썹을 찡그리며 턱을 내렸다. 나는 자신의 유카타 옷자락을 열어 허벅지를 드러낸 채 시로의 무릎에 걸터앉아 입고 있던 단젠을 스르륵 떨어트리고 유카타의 가슴을 요염하게 흐트러트렸다. 쇄골도, 어깨도 노출시 키고 유두도 하나만 눈앞에 드러내자 시로의 두 눈이 어리둥절한 듯이 흔들 렸다. 시로는 아직도 야요이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아베의 옛 이야기에 마음이 동요할 정도니까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지나간 일이라고 풀어버릴 만크 단순하지 않고 강하지도 않 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상처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 어째서 날 원하는 거냐?" "있잖아, 시로. 그거 쓸데없는 참견이야." 이미 나는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아서 여간해선 피도 안 난다구. 난 하복부를 시로에게 누르며 시로의 입술을 먹어버릴 듯 빨아들였다. 키스할 때조차 감지 않는 두 눈이 근접거리에서 나의 본심을 살핀다. "취한 거냐?"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마. 비겁하잖아? "그래. 엄청 취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빨을 깨물어줬다. 우리는 둘 다 서로를 너무 어려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로를 견제한 채 소중한 하룻밤을 끝내버리다니 너무 슬프지만 맨 정신으로 안기는 것은 분명히 더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사실 난 일본주만은 특별하거든." "특별?" "마시면 몸이 안쪽무터 흠뻑 젖어서 굉장히 음란한 기분이 들어. 시험해 볼 래?" 나는 희미하게 변한 시로의 안색을 놓치지 않고 시로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 어서 일부러 비웃어줬다. 어차피 안긴다면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안기고 싶 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지고 싶었다. 나는 술잔으로 손을 뻗어 바닥에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술을 혀로 할짝 핥 아 올렸다. 혀끝이 저리고 열기가 목을 단숨에 태웠다. "우...웃." 위가 불타올라 눈동자 안쪽이 어지러웠다. 손바닥의 각인이 지끈지끈 쑤시 며 좀 더 격렬한 아픔을 원한다고 내 신경을 쥐어뜯었다. "어이, 나츠키..." 괜찮냐고 시로가 걱정해 줬지만 난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난 이제 한계야. 한계란 말이야, 시로. 1초도 참을 수 없... 어..." 나는 시로의 손을 내 허벅지로 이끌어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라는 듯이 재촉 하며 우연을 가장해서 유카타 안쪽으로 유혹했다. 시로가 손을 움찔 멈췄다. 그렇다. 나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로의 다른 한쪽 손을 들어올려 시로의 마디진 검지를 입에 물고 손 톱부터 끝까지 타액을 듬뿍 휘감고선, 그 손가락을 은밀한 곳 안쪽으로 초대 했다. "크... 윽...." 시로의 손가락이 들어온 순간 나는 힘껏 조였다. 그런데도 시로는 아직도 자제심을 유지하고 있다. "시로는 사실 불감증... 아니야?" 그렇게 놀리면서도 가슴속은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없는 시로를 정 면에서 도전적으로 노려보면서 시로의 무릎 위에서 일부러 음란하게 반응했 다. "아, 아, 아, 하앗..." 나는 필사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단단한 시로의 손가락, 맛있고 기뻐서 허리가 흠칫흠칫 기뻐했다. 반동으로 유카타 사이에서 일어선 중심이 흔들렸다. "하... 으응!" 시로의 시야에서 그것이 흔들렸다. 새빨갛게 충혈 된 남성은 벌써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후...웃." 이렇게나 탐욕스럽고 음란한 몸이... 아쉬운 듯이 눈물을 흘리는 그곳이 부 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난 이렇지 않다. 오늘밤의 나는 술 때문이다. 이젠 못 참겠어. 시로의 격렬한 키스를, 강인한 기둥을 원해! "시로, 좋아해. 너무 좋아해! 시로, 제발 날 진정시켜줘. 이런 날 진정시켜 줘...!" 나는 시로의 입술을 굶주린 듯이 탐하며 시로의 유카타 앞섶을 벌리고 두꺼 운 가슴과 복근을, 염치없이 단단한 것을 쓰다듬으며 겨우 반응하기 시작한 그를 정신 없이 밖으로 끄집어냈다. "봐봐, 시로. 시로도 이렇게 커졌잖아. 사실은 날 안고 싶지? 엄청 참고 있 는 거지? 이제 와서 뭘 어려워하는 거야? 나 같은 건 시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면 돼! 뭐라고 말해 봐, 응? 시로!" 나는 시로와 나를 함께 움켜쥐고 열심히 비볐다. 있는 힘껏 시로의 손가락 을 조이면서 혀와 혀를 실컷 얽으면서 서로를 애무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시로가 나를 천천히 안아 올렸다. 그리고 나를 난폭하게 요 위로 내던지고는 말없이 몸을 겹쳐온다. "앗..." 갑자기 유카타를 헤치고 양 무릎을 커다랗게 벌려온 시로가 목덜미를 빨아 들이자 그 강인함에 오싹오싹해진다. "엉망진창이 되도 우는 소리 하지마." "시... 시로오..." 난폭한 말에 현기증이 났다. 시로가 내 허리를 안고 밀어붙이자 나는 끝없 는 기대에 몸부림쳤다. "해줘..." 나는 탄탄한 어깨를 안으며 머리칼을 헝클고 귓가에 속삭였다. "날 엉망진창으로 해줘." 시로가 내 입술을 막은 채 솟아오른 욕망을 깊숙이 꿰뚫었다. 5 눈꺼풀 밑이 따끔따끔하다. 창문에서 비쳐오는 아침 햇살 탓이다. 몸의 감각이 여느 때와 달랐다. 온몸에 기분 좋은 나른함과 달콤한 마비감 이 감돌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아직 숙면중이다. "잘 잤어...? 시로." 나는 남자다운 옆얼굴에 속삭였다. 어쩐지 시로의 표정이 후련해 보이는 동시에 초췌한 것 같기도 했다. 이렇 게 말하는 나도 가벼운 피로가 남아있다. 나는 널브러진 시로의 팔을 베개 대신 베고 기뻐하며 베개 맡의 손목시계에 눈길을 줬다. 이제 5분 후면 8시가 된다. 우리가 언제 잘들었더라? 몇 시까지 했더라? 그러나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시로가 굉장히, 굉장히 나를 원했다는 것을 말이다. 안는 방식으로 알았다. 안기면서 실감했다. 이 섹스는 누구의 대신이라든가 감정의 배출구 같은 것이 아니다. 시로가 나를 -- 나라서 이렇 게 격렬하게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몸을 겹치고 입술을 맞대고 시로의 일부를 몸 속으로 받아들이고서 나는 몸 으로 이해했다. 시로는 너무 과묵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 방황이나 괴로움 을 나를 안음으로서 내게 터트리고 있다고. 나는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였다. 시로가 날 필요로 해 주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영광이었다. 상처 같은 건 언젠가 아무는 때가 온다. 설령 흉터가 남는다 해도 아픔은 머 지않아 엷어져 간다. 그러니까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현실의 짐이 너 무 무거워도, 나는 전부 받아들일 것이다. 시로의 고뇌는 바로 내가 어디까지 라도 함께 짊어질 것이다. 방황해도 된다. 왔다 갔다 하면 된다. 조금씩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인연을 깊 게 하면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로는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신을 믿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린 서두를 필요는 없어, 시로. "시로... 아침이야." 아직 머리가 몽롱했다 하복부도 묵직했다. 몸 속 깊은 곳에 시로가 고동치 고 있는 듯한 느낌이 생생히 남아있어 굉장히 쑥스럽지만 위험할 정도로 행 복했다. 이 감촉이, 충족감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나는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남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관자놀이나 귀 밑 등을 고양이처럼 할짝할짝 핥았다. 아침이 되어도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 는 몸을 어리광 부리듯이 밀어붙이고는 팔다리를 휘감고 비볐다. 혼자서는 품고 있을 수 없는 기쁨은 이렇게 농후한 스킨쉽으로 바꿔서 상대에게 나눠 주면 된다. "저기, 시로. 곧 아침 식사가 나올 거야. 안 일어나면 위험해." 그렇게 말하며 귀를 잘근잘근 깨물어도 시로는 아직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 다. 이런 식의 접근이 허락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나게 진전한 거겠 지? 나는 시로의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끼워 넣고는 슬슬 위 아래로 움직였다. 시로의 체모가 내 피부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혹시 지친 거야? 평소엔 쓰지 않던 허리 근육을 마구 써서?" 코골이가 그쳤다. 아마도 내 목소리는 들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3변 했다고 허리가 빠졌다는 말은 하지 마시지? 아저씨." 시로의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관자놀이에 정맥이 떠올랐다. 한쪽 눈 이 열리고 나를 밉살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잘 잤어, 달링?" 아침부터 혼자서 고민했던 '우리들의 관계' 는 일단 제쳐두고서 나는 입술 을 내밀었다. 어제의 '그것'에 필적할 농밀한 모닝 키스를 기대하고 있었더니 시로는 팔베개를 치우고 노골적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명백히 기어오르지 말 라는 태도였다. 나는 마지못해 얼굴을 거뒀다. ...아이 참, 안 하면 되잖아. 어제 그렇게나 했으니 지금은 어쨌든 몸도 마음 도 만족스러워. "저기, 시로. 나 배고파. 웬만하며 좀 일어나자구." 키스를 단념하고 이불에서 나오려고 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거의 반라... 아니, 전라가 아닌가? 허리에 묶은 띠에 걸린 유카타만이 가까스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당황해서 유카타를 고쳐 입고 있자 시로도 겨우 잠이 깬 모양인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노곤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유카타의 가슴 께에서 단단한 가슴 근육이 모였다. 갈라진 목근,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하반신. 어제 나를 잔뜩 희롱한 굳세고 강인한 다리 사이도... "으..." 오싹오싹오싹. 내 등줄기가 오그라들었다. 만족하고 있을 몸이 수컷의 색향 에 현혹되어 다시 저 육체에 깔리고 싶다는 격렬한 욕구에 괴로워진다. 뭐,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 사이를 드러낸 채 느긋하게 커다란 하품을 하고 있는 시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담배를 물려고 하는 연인의 얼굴에 타월을 던져주 었다. "그 전에 목욕탕에 들어가서 정신 좀 차리지?" 귀찮은 듯이 한숨을 내쉰 시로가 나태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객실 목욕 탕 문을 열려고 하는 시로에게 당황해서 스톱을 걸었다. "그 쪽은 안돼. 내가 지금 쓸 거야. 시로는 대욕탕에 갔다 와." 삼백안이 어째서냐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어째서냐고 물어도 이유를 말하 는 건 나로서도 상당히 거북한데. 그리고 분명 시로도 듣고 싶지 않을 것 같 은데. "있잖아, 난 한시라도 빨리 샤워를 하고 싶어. 사람들 앞에서 몸을 씻는 게 부끄러워서 말이야." "아아?" 퉁명스런 목소리가 되돌아오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로 앞에서도 좀 씻기 곤란한 곳이라서. 그게... 시로의 자.식.들.이 아직 남아있거든." 히죽 웃어 보이자 시로가 헉 숨을 들이켰다. "대욕탕에서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씻는 건 꼴불견이잖아?" 나는 일부러 민망하게 설명해줬다. 시로는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담배를 내려놓고 타월을 움켜쥐고는 일어서자마자 새 빨간 얼굴로 '갔다 오지.' 하고 내뱉고는 도망치듯이 방에서 나가버렸다. 쑥 스러워하는 시로의 즉각적인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배를 잡고 웃고 말았 다. 그렇게 각각 아침 목욕을 마친 우리는 여전히 호화로운 아침식사를 밥알하 나 남기지 않고 해치웠다. 나는 아침부터 벌써 3그릇 째,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시로도 곱빼기 2 그릇은 먹었다. 배가 고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 인 것이다. 식후의 차를 마시며 나는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로 에게 몸을 기울였다. "있지, 시로. 역시 무슨 일이든지 계속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계속?" "응.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반복이 상호이해와 기초체력을 길러서 심신의 균형을 유지해준다고."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몸과 마음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 우리 매일 밤 섹스 하자, 응?" 시로의 손가락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6 오늘은 어디를 보러 다닐까 TV의 관광안내 채널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복도에서 누가 부르는 기척이 났다. 아주머니인가 싶어 밝게 대답하며 장지문을 열자 별실에 체재중인 아베다. 수수한 스웨터를 걸친 팔에는 보스턴 백과 마운텐 파카가 들려있다. 아마 체 크 아웃인 모양이었다. "안녕, 나츠키군." "아, 안녕하세요. 이제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 반갑게 인사하며 등위로 시로의 기척을 살폈다. 세면대에서 수염을 깎 는 중인 시로는 아베의 방문을 알면서도 얼굴을 내밀 기색도 없었다. 한편, 아베는 일부러 작별 인사를 하러 왔나 했더니, 이상한 얘기를 물었다. "오늘은 이제부터 뭔가 예정이 있어?" "에? 별로. 마침 지금 어디로 갈까 상의하고 있었는데." "나츠키군, 괜찮으면 내 차로 드라이브 안 할래?" "헤?" "관광 명소를 안내할게. 밧코다이에서 유명한 이이모리 산엔에 가봤어? 사 자에당의 계단도 훌륭하게 만들어졌지.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조금 멀리 나가서 이나와시로 호수를 산책하는 건 어때? 물도 깨끗하고 웅대한데다 노 을도 절경이야. 호수가 저녁 해에 물드는 장면을 나츠키군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아, 그치만, 저기..." 청산유수 같은 권유를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아베는 나와 시로의 관계 를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날 데이트... 겠지? 역시... 에 초청하려는 걸까? 당황해 대답도 못하고 있는 내게 아베가 살그머니 귀띔해 주었다. "야요이에 대해 네게 알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에?" 내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얼굴을 갖다댔지만 아베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내 눈을 보고 의미 있게 고개를 끄 덕일 뿐이다. 아마도 여기선 얘기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시로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얘기인가? 그래서 나만 초청했 단 말인가? 그런 이유라면 동행해도 좋았다. 그러나 솔직히 시로랑 러브러브한 데이트 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욕구도 버리기 힘들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정말 힘들게 연인다운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 다. 나는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세면대를 들여다봤다. 수염을 다 깎은 시로는 이번엔 송곳니... 가 아니라 이를 닦고 있었다. 나는 치카치카 소 리를 내며 칫솔질을 하고 있는 거울 속의 시로에게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물 어보았다. "어쩌지, 시로?" 아베와 나의 대화를 다 들었을 시로가 거울에 비친 내게 차가운 시선을 던 졌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거품투성이 입으로 내뱉은 말투에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별로 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어떡할까 의논하는 거잖아." "나한테 의논할 것도 없어. 그런 일은 스스로 결정해." "뭐... 뭐야, 그 말투!" 젠장, 아침부터 열 받아! 화가 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헹구는 시로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힘껏 찍어 올렸다. 시로가 쿨럭 하고 사례가 들렸다.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몇 번이나 꾹꾹 찍어줬다. "혼자서 멋대로 결정하면 같이 여행하는 의미가 없잖아! 시로는 그래도 좋 아?!" 시로가 말없이 물을 뱉으며 눈길조차 맞추지 않았다. 연인이 진심으로 싸움을 걸어왔는데 무시하기야? 나는 분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됐어! 나 혼자서 실컷 즐기고 올 테니까! 아저씨는 온천에서 불어터지 라구!" 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옷걸이에서 코트를 벗기고 나와, 시 로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어쩔 줄 몰라하는 한심한 아베에게 '뭘 봐?!' 하고 화풀이했다. 문을 닫기 직전, 나는 시로 혼자만 남은 소나무실에 절교장을 내 던졌다. "두 번 다시 시로와 해주지 않을 거야! 기억해 둬!" * * * "...왜?" "아, 아니, 그냥... 하하하." 하얀 미니 밴을 달리며 아베가 몇 번째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서 무뚝뚝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베가 그 런 나를 곁눈질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나츠키군과 시로씨는 굉장하군. 그렇게 싸울 수 있다니, 그게, 괴, 굉장히 사이가 좋다는 뜻이잖아. 아하, 하, 하하하..."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우린 별로 러브러브 한 것도 아니니까." "아, 하하하..." "그 불감증 녀석은 내가 아무리 농후하고 야한 테크닉을 써도 안색하나 안 변하는데 뭐." 아베가 말문을 잃고 새빨개져 휘둥그레진 눈을 마구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아베는 야요이의 동급생이니까 생각해보면 아직 스무 살 정도 였다. 아마도 아직 야요이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걸 보아 그 뒤로 딴 사람을 만 났다고도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혹시 이 남자 아직 동정인가?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분 전환 거리가 생각난 것이다. 나는 조수석에서 깊숙이 앉아 가볍게 다리를 벌리고서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시로 녀석은 어제도 엄청 쌓인 것 같더라고. 내 유카타 모습에 맛이 갔는지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었다니까." "그, 그, 그랬어?" "아아. 유카타 밑에 속옷은 입지 말라고 혼내질 않나. 입으론 말할 수 없는 엄청 변태적인 짓만 강요하거든." 아베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눈치 채지 못한 척하고서 가련한 어린 양을 연기했다. "난 견딜 수가 없어서 울었어. 알몸보다 부끄럽잖아? 유카타를 입은 채 다 리를 벌리다니." "그렇게 물어봐도 나, 난 잘 모르겠는데... 하하, 하." "그러니까 상상해보라니까. 양 손을 띠에 묶인 채 거기만 드러낸다구. 알겠 지? 근데 시로 녀석은 내가 싫다고 해도 다리를 오므리는 걸 허락하지 않아. 그러기는 커녕 거기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걸." "우... 웃." "'당신이 개야?' 정말이지 난 매일 밤 미칠 것만 같아." "매, 매일... 밤... 이라고? 에? 에엣?" "그치만 시로 녀석이 워낙에 터프하니까." "절...!" 풍경이 갑자기 옆으로 흔들렸다. 아베 녀석이 핸들을 놓친 모양이다. 과연 동정, 순진한 반응이 후지시로랑 똑같았다. 나는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대... 대단하... 네." "그치? 난 시로한테 너무 사랑받아서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니까." 이상, 정말 그렇다면 너무나도 즐거울 희망적인 예측이었습니다. 내가 지어낸 얘기를 진심으로 믿어버린 아베가 어딘가 넋이 나간 상태로 차 를 덜컹덜컹 갓길로 몰았다. 그는 힘없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가까스로 차를 세웠다. "어라, 아베씨? 왜 그래요?" "아... 그게, 미... 미안. 잠깐 멀미가 나서..." '흥분했다.' 를 잘못 말한 거겠지. 나는 상상 이상의 반응에 필사적으로 웃 음을 참았다. 쉬고 나서 근처 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겨우 기운을 차 렸을 무렵, 아베가 예정대로 관광 명소를 안내해줬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 는 얼른 야요이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베가 용건을 꺼낼 기색이 없엇다. 그래서 나도 왠지 재촉할 수가 없어서 아베가 말하기를 얌전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빨리 숙소로 돌아가도 시로가 저 모양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늦게 돌아가서 잔뜩 걱정시키고 싶었다. 그 정도 복수는 해도 되겠지. 아베는 우수한 가이드였다. 우리는 국도를 지나 호반을 돌고 전망대에서 맞 은편의 절경을 만끽했다. 하이킹 루트를 산책한 뒤엔 드라이브로 지친 팔다 리의 근육을 쉬게 했다. 멀리서 마주보고 있는 반다이 산을 바라보자 완만하 고 부드러운 풍경에 마음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반다이 산은 조용하다고 할까, 점잖다고 할까, 왠지... 아름답네." 무심코 새어나온 나의 감탄에 아베가 동의를 표했다. "오모테반다이는 말야." "오모테반다이?" "아아, 남쪽에서 마주보는 반다이 산을 오모테반다이. 북쪽을 우라반다이라 고 불러." "헤이." "오모테반다이는 온화한 풍경이지만 우라반다이로 가면 분화의 흔적이 생 생하지. 표면적으로는 부드러워도 뒷면은 무서운 거야." 미소지은 입가와는 반대로 아베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등줄기에 냉기가 스친 나는 아베의 단정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베씨는 반다이 산을 닮았다는 말 안 들어요?" "...무슨 의미지?" "겉 보기엔 냉정하고 청렴해 보이는 면이 말이야. 그러나 뒷면에선 의외로 엄청난 생각을 한다거나." 아베는 나의 이죽거림을 쓴웃음으로 넘겼다.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베 의 미니 밴이 오늘 최후의 방문지에 도착했다. 아베가 차도 옆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끄고 문을 열었다. 나도 따라서 차에 서 내렸다. 수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순식간에 얼렸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떨었다. 아베 혼자만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직 추울 때라 인적은 없는 것 같군. ...아아, 저기 모래언덕에 보트가 떠 있어. 내려가 보자." "여긴 어디?" "이나와시로 호수야. 모처럼 후쿠시마에 왔으니까 꼭 봐두길 바래." 넓다. 너무 넓었다. 산이 ㅈ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어두웠다. 아무도 없었다. 검은 수면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뼛속까지 얼어붙었 다. 이 계절에 오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어째서 아베는 이런 장소를 최후의 안내지로 선택한 걸까? 추위와 동시에 쓸쓸함이 밀려왔다. 이런 장소야말로 시로와 둘이서 오고 싶 었다. 춥고 쓸쓸하고 애절할 때야 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붙이고 안심이 라는 이름의 체온을 잔뜩 탐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터무니없이 시로 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해가 천천히 기울어갔다. 내 마음도 점점 시로에게 기울어갔다. 슬슬 시로를 용서해줘도 좋을 무렵, 돌아가도 될 무렵이었다. 나는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떨면서 말했다. "저기, 아베씨." "응?" "난 슬슬..." 아베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재빨리 보트 승선장으로 내려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초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나도 뒤를 쫓아 갔다. 유유한 바람이 호수의 표면을 스치듯이 쓰다듬어서 부드러운 파도가 생겨났다. 아베가 '탈까?' 하고 한 척의 노 보트를 가리켰다. "그치만... 안 추워요?" 나는 코트의 옷깃을 세웠다. 손가락도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베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주저하고 있는 내 팔을 잡아끌 어 허리를 안고 아무리 봐도 위태로워 보이는 보터에 반쯤 억지로 태우려고 했다. 무위식적으로 발을 버티고 선 내게 아베가 괜찮다며 웃었다. 그리고 내 얼 굴을 들여다보며 가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호수 위에서 얘기해 줄게. 야요이와 나의 중요한 비밀을..." 7 아베가 노를 천천히 저었다. 촤아... 촤아... 보트의 벽을 파도가 때렸다. 호 수 표면에 한둘기 균열을 그리며 아베가 보트를 저어 나갔다. 하얀 모래 언덕 은 이미 멀리 있었다. 내가 추위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아베가 말했다. "여기 야요이와 함께 온 적이 있었어." 아베가 희미하게 웃으며 노젓던 손을 멈추자, 보트가 조용히 정지했다. 나 는 바람으로부터 몸을 지키며 아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물론 그 무렵엔 차로 오지 않았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전철과 버스였어. 여행하는 기분으로 그룹 교제란 것을 즐겼지. 친구의 도움으로 나는 겨우 야 요이와 보트 위에서 둘만 있게 될 찬스를 얻었어. 그리고 나는 야요이에게 넘 치는 마음을 털어놓았어. ...그래, 바로 이 부근이었을 거야." 그립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아베의 눈에는 백일몽에 빠져 있는 듯한 아 련함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너무 어렸어. 그래서 야요이도 내 마음에 어 떻게 대답해야 좋을 지 분명 잘 몰랐던 거야.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친구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사귀고 싶지 않다고.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어. 내가 누구보다도 좋아한다고 열심히 말해도 야요이는 '미안해. 미안해.' 하고 사과할 뿐, 내 고백을 받아들여주지 않았어." "...그치만 아베씨. 당신은 야요이의 연인이었잖아?" "그래, 연인이 되고 싶었었지." 아베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헛소리처럼 내뱉었을 때 나는 진실을 깨달았다. 아베는 야요이의 옛 연인이 아니었다. 단지 아베의 일방통행인 사랑이었던 것이다. 기분 나쁜 오한이 덮쳐오는 것 같다. 아베가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체여도 난 단념하지 않았어. 그 다음날 부터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지. 전화도 빼먹지 않았어. 야요이도 말이야, 처음엔 받아줬지만 어느샌가 내 전 화를 피하게 되고 말았어.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녀 의 집에 갔어. 그런데 야요이가 그 예쁜 얼굴로 제발 이제 오지 말아달라고 하잖아. 정말 슬펐었지." 주변은 어둠이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벌써 완전히 밤이다.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 산에 둘러싸인 이 드넓은 칠흑의 호수에서 적어 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제 돌아가요... 아베씨." 말하고 있는 이빨이 딱딱 울렸다. 빨리 시로의 곁으로 돌아가고 시로의 품 에 안기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난 얼어버릴 거야! "돌아가요. 응? 아베씨...!" "...야요이는 날이 갈수록 예뻐졌어. 열여섯이 되고 열일곱이 되자 정말 놀 랄 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어. 그녀는 나의 천사였어. 그녀밖엔 생각할 수 없어...!" "알았으니까... 아베씨!" "다시 한번 그녀에게 고백하려고 결심한 날, 그녀는 별안간 학교를 그만두 고 내겐 말도 없이 도쿄에 가 버렸어. 그녀는 배우가 되고 싶었대. 그녀의 꿈 같은 건 몰랐어." "이제 됐어, 아베씨! 돌아가!" "하지만 말이야. 누구도 내게 그녀가 간 곳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녀의 친 구도, 강사님도, 그녀의 부모님도 말이야. 그녀는 결국 나 같은 건 상대도 하 지 않았던 거야..." 아베가 훌쩍 일어섰다. 낡은 보트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얼른 배 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자세를 유지했다. "이렇게나, 내가 이렇게나, 이렇게나, 이렇게나 사랑해줬는데--!" 아베가 내 어깨를 움켜쥐어온 기세에 쓰러졌다. 배가 흔들렸다. 파도가 일 어나 한쪽 노가 배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아베를 떠밀고 녀석의 몸 아래서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배가 삐걱삐걱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언덕이 너무 멀다! 나는 코트 주머니를 더듬었다. 휴대폰으로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 런데 없었다. 없는 것이다. 있어야할 그것이 어딜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뭘 찾고 있지?" 내게 체중을 실은 채 아베가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을 띠었다. "혹시 휴대폰? 그거라면 유감이지만 없어. 내가 버렸으니까." "뭐...?" "널 보트에 태울 때 손을 빌려주는 척하며 주머니에서 슬쩍했어. 중요한 얘 기 도중에 방해되잖아? 그래서 호수에 던져버렸어." 등줄기가 오싹 떨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소리치고 있었다. "시, 시로! 시로오!" 그러자 아베가 목안에서 쿡 웃었다. 그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 보트 바닥에 쓰러트리고는 내게 코끝을 눌러왔다. "시로... 라, 그는 정말로 멋지더군." 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둠 속에서 아베의 두 눈이 형형히 빛나고 있 었다. "시로씨--그가 야요이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가 야요이 의 기일이 되면 언제나 성묘를 왔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매일 갔었어. 야요이 가 잠들어있는 무덤에 말이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베가 날 양쪽 무릎으로 짓누른 채 노를 배에서 빼 서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두꺼운 손잡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쓰 다듬었다. "어머니가 주변 사람들한테 퍼트렸었지. 그는 도쿄 경찰관이고 야요이를 죽 인 범인이라고. 난 원망했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원망했어." "시로가 죽인 게 아니야! 그건..." 아베가 고개를 흔든다. 내 말 따윈 듣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어제 나는 그가 널 데리고 묘에 온 것을 그늘에서 보고 있었어. 그가 동행 을 데려운 건 드믄 일이었지. 그래서 나는 흥미가 생겨서 너희들의 뒤를 밟았 어. 역 앞의 여행사에는 말이야, 내 동창생들이 몇 명이나 취직해 있어. 너희 들의 숙소를 알아내는 건... 나도 같은 숙소를 잡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이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께 감사 드렸지. 내게서 야요이를 빼앗아간 범인에 게 겨우 복수하게 되었다고 말이야." "이 자식, 혼자서 놀고 있네!" 나는 일어나려다가 컥 하고 숨이 막혔다. 노의 손잡이에 목이 눌려서 숨쉬 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나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서 아베를 걷어차 려고 했지만 배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중심이 안 잡혀서 균형조차 유 지할 수 없었다. "...큭!" "아아, 아아, 불쌍한 야요이! 그러니까 나의 연인이 되라고 했는데! 내곁에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절대로 그를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아앗!" 아베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머리 위로 쳐든 것은 노였다! "자, 잠깐 아... 으악!" 똑바로 내리쳐온 그것을 나는 간발의 차로 피했다. 반동으로 보트가 기울어 져서 물이 들어왔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갔지만 아베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를 움켜쥐었다. 보트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아베가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하늘을 바라보고 깔려 있는 나는 공격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 그는 내 소중한 것을 능욕했어! 없애버렸어! 그러니까 나도 그의 소중 한 널 죽여 버리겠어--!" "안 돼--!" 아베가 노와 함께 위에서 몸을 날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베의 배를 걷어 찼다. "끄헉!" 끌려간다! 필사적으로 보트에 매달리자 보트가 커다랗게 기울어졌다.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뒤집히고 말았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알 수 없었 다. 단지 부글부글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 "크... 윽!" 나는 괴로워서 발버둥쳤다. 아팠다. 물이 차가워서 아팠다. 팔다리가 무거 워서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뭔가를 찾아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 단단한 것이... 보트가 닿았다! 나는 그것을 정신 없이 움켜쥐려고 했지만 뭔가가 내 팔을 잡아채고 목을 붙잡아 호수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쿨럭!" 폐에서 산소 덩어리가 빠져나갔다. 아베가 날 호수 안으로 가라앉혔다. 그 가 등뒤에서 휘감아오자 몸의 힘도 빠져나갔다. "커... 헉... 아...!" 온몸이 무거웠다. 움직일 수 엇었다. 아무리 떠오르려고 해도 점점 가라앉 는 것이 느껴졌다. "시로!" 죽기 싫어!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어! "시로오오--!" 그 찰나에 수면 위로 빛이 스쳐지나갔다. 차일까, 달일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빛이다! 서치라이트 같은 강한 빛이다! 어두운 호수 빝바닥으로 가라앉아 가면서 나는 그쪽으로 손을 뻗으며 살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랬던 내가 필 사적으로 삶을 찾아 스스로의 의지로 호흡을 구하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을 확인했다. 갑자기 목을 파고들 고 있던 아베의 손이 풀렸다. 나는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베와 물 속에서 싸우고 있는 기척을 뒤에서 느끼면서도 나는 정신 없이 물 살을 헤치고 빛을 향해 자력으로 떠올랐다. "푸하앗...!" "이봐, 너 괜찮니?!" 갑자기 청각이 깨끗해졌다. 잠수복을 입은 남자가 내 몸을 옆으로 붙잡아주 었다. 그는 내 턱을 하늘로 향해 고정시킨 채, 구조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는 고무 보트로 헤엄치며 유도해 두 사람이 나를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나는 숨 을 계속 쉬지 못하고 격렬하게 기침했다. 잠수부들이 내가 마셔버린 물을 솜씨 좋게 토하게 해줬다. "우... 콜록! 콜록!" "당황하지 않아도 돼. 자, 천천히 숨을 들이 쉬어." 산소 호흡기가 내 입에 갖다대어졌다. 나는 지시대로 깊고 천천히 그것을 빨아들였다. 혈관이 파열할 것처럼 흐트러져 있던 박동이 서서히 진정되면서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 위엔 구명 보트가 또 한 척 대기하고 있었다. 보트엔 후쿠시마 현경 이라고 쓰여 있었다. "경찰...?" "그래, 이젠 괜찮아. 안심해." 그들이 믿음직스럽게 단언하며 타월로 날 닦아주고 모포로 감싸주었다. 나 는 반쯤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아무튼 구조됐다는 현실에 안도했다. 내가 탄 구명 보트는 뭍에서 밝힌 눈부신 빛에 비치고 있었다. 나를 호수 밑바닥에서 부터 수면으로 이끌어준 빛의 정체는 3대의 패트롤카에서 밝힌 라이트였다. 그쪽을 보자 여러 명의 경관들이 모래 언덕에 집결해있었다. 이쪽을 향해 커 다랗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들에 깊숙이 머리를 숙였 다. 경찰은 누구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직 일본은 희망이 있다. 그때, 촤아 하고 호수면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완전히 그로기 상태인 아베 가 수면에 둥실 떠올랐다. 뭐야? 아직 물 속에서 싸우고 있었나? 완전히 잊고 있었네. 아마도 아베의 목을 꽉 붙잡고 있는 남자가 내게서 아베를 떼어 내준 구세 주인 모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칸자키 경부보!" "에?" 잠수부가 구세주에게 외친 격려에 나는 멍청해지고 말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력을 있는 대로 짜내어 호수 위의 인물을 빤히 쳐 다보았다. 아베를 나와는 다른 구명 보트에 연행시킨 그는 내 쪽으로 헤엄쳐 와서 무뚝뚝하게 보트에 올라탔다. "시로...?" 아연해하는 나를 흠뻑 젖은 시로가 노려보았다. ...어라라, 진짜 시로네. 어 떻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시로가???" 시로는 놀랍게도 셔츠를 입은 채였다. 밑은 당연히 바지. 신발류는 가까스 로 벗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잠수복으로 갈아입을 시간도 아까워서 호수에 뛰어들었다는 말인가? "시... 로..." 뜨거운 감동이 내 가슴을 단숨에 가득 채웠다. 시로가 경관에게서 건네 받 은 타월로 몸을 닦으며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시로, 시로.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구명 보트가 언덕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감동과 흥분으로 목소리가 갈라 진 내게 시로가 귀찮은 듯이 설명해줬다. "나갈 때 그런 얼굴을 하고 갔으니 오지 않을 수가 없잖냐." "날 화나게 해서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지 뭐. 넌 이성을 잃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시로, 혹시 우리 뒤를 밟은... 거야?" 시로가 흘깃 나를 노려보았다. '누가 그런 짓을 하겠냐?' 라는 뜻인가? 하지만 그럼. "그럼 어떻게 여기를 알았어?" 나는 바보 취급하는 듯한 시선에 위축되면서도 시로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시로의 입에서 시로의 목소리로 제대로 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시로가 성가신 듯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백했다. "네 휴대폰에 위치 정보 단말장치를 붙여뒀었다." "위치정보 단말장치?" "내 휴대폰으로 언제나 네가 있는 곳을 확인할 수 있게 해 뒀어." "어, 어, 어째서?" "넌 아무래도 사건에 말려들기 쉬운 체질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 말을 들어도 얼떨떨해진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시로. 아기도 아니고 내게 단말장치를 붙여좋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버에 과잉 보호 아니야? 저기, 시로. 왠지 그거 혹시... "마침 네 위치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전파가 갑자기 끊겼어. 그래서 당장 현장 으로 달려와서 경찰에게 응원을 요청했다." "전파가 도중에 끊긴 장소는 이나와시로 호수였다. 네가 호수에 빠졌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지." 시로가 날 엄청나게 걱정해주고 있어?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로가 불쾌를 드러내며 미간에 주름을 세겼다. 알고 있어. 웃을일이 아니라 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 그치만 시로. 자, 잠수부까지 출동시켰는데 그게 시로의 지나친 생각이 었다면 차마 눈뜨고 못 볼 일이었다구." "실제로 넌 호수 안에서 아베와 싸우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것은 틀림없어." 시로 자신은 자신의 행동을 평소와 같은 냉정한 판단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내가 볼 땐 놀랄 수 밖에 없는 변모였다. 시로가 몰래 내게 단말장 치를 붙이고서 내가 있는 곳을 살그머니 확인하며 일희일비했다는 애기니까 말이다. 그건 시로가 날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나는 의외로 걱정이 많은 시로의 참견이 재미있었다. 나에 대한 깊은 마음 을 증명해주는 과잉할 정도의 대응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느 울면서 배를 잡고 뒹굴고 말았다. "미, 믿어지지 않아. 전파가 사라진 것만으로... 하하, 하하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주 저 앉아서 몸을 비틀며 웃어댔다. 시로가 좋다. 너무 좋다. 너무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만큼 사랑한다. 나는 시로를 사랑한다! "어이, 나츠키. 그만 좀 웃어라." 시로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실수했다는 것을 느끼고 쑥스러워하며 화가 난 듯이 혀를 찼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모양이 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안 그러면 머리에 꿀밤이 날아올지도 몰랐 다. "미안. 미안. 하지만 시로는 정말 굉장해. 그 야성의 감. 최고야!" 그것은 감이 아니다. 알고 있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두기로 했다. 차가운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이렇게나 뜨겁고 격렬한 녀석 이었다. 감정표현이 서툴 뿐이지. 시로가 언제나 나를 신경 써주고 있었던 것 만으로도 여한이 없다. 시로가 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내가 시로와 만나고 싶어한 마음, 그 두개의 마음이 서로를 부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심전심이었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이어져 있었다. 이건 분명 애정--이겠지? 그렇게 믿어도 되겠지? "칸자키 경부보. 일단 그쪽도 사정청취를 부탁하고 싶습니다만..." "미안하지만 오늘밤은 이 녀석을 쉬게 해주고 싶네. 내일 내가 책임지고 출 두시키지." 아무렇지도 않은 한 마디에 날 보호하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시로가 얼어붙은 나를 감싸고 걸어가싸. 내 발치를 조심하면서 구식 스카이 라인의 조수석에 말없이 앉혀주었다. 그런 동작 하나 하나에서 시로의 상냥 함이 보였다. "춥겠지만 여관까지 참아라." 시로가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히터를 틀어주었다. 자 기도 추울 텐데 온풍의 방향을 내 쪽으로 설정해주었다. 말수는 적은 주제에 시로의 태도는 생각 외로 수다스러웠다. "어때, 나츠키? 조금은 나아?" 마우것도 말할 수 없었다. "...웃!" 나는 시로에게 매달려 물기를 닦은 시로의 가슴을 다시 적시고 말았지만 시 로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내버려 두었다. "무서웠어, 나츠키?" 시로의 물음에 나는 끄덕였다. 이제 다시 시로를 만날 수 없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고 말이 다. 8 여관에는 시로가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넣어서 사정을 알렸다. 여주인은 흠뻑 젖어서 돌아온 우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아주 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당장 뛰어와 얼어붙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열심 히 비벼주었다. "어쩌면 좋아. 추웠지요? 불쌍하게도.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따뜻한 물을 방에 준비해놨으니까요." 기운을 북돋아주는 아주머니의 눈은 걱정한 나머지 젖어있었다. "부디 오늘밤은 편안히 쉬세요. 나중에 따뜻한 음료와 식사를 가져갈테니까 요." 여주인의 배려에 감사한 나와 시로는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기분이 진정되었을 때, 뻣뻣해져있던 손발의 신경이 되돌아오자 급격 한 한기가 덮쳐온다. 뼛속까지 얼어붙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극 한 상태는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 불사신인 시로도 이번만은 힘든 모양인지 아까 까지 다부지게 핸들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우... 우웃." 나는 이미 한계였다. 손가락이 곱았다. 피가 얼어붙었다. "추, 추워...!" 무의식중에 약한 소리를 내뱉자 따뜻한 온기를 앞에 두고 잘 벗겨지지 않는 팬티를 시로가 끌어내려 주었다. 부끄럽다고 할 상황이 못됐다. 알몸이 된 난 곁눈질도 하지 않고 탕 속에 뛰 어들었다. "어이, 나츠키. 급하게 들어가면 뜨..." "앗, 뜨거--!" 이번엔 너무 뜨거워서 뛰어나왔다. 나는 당황해서 샤워기 쪽으로 되돌아갔 다. 뜨거운 물에 피부가 지끈지끈 쑤셨다. 시로가 그것보라는 듯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로는 침 착하게 샤워기 앞에 앉아서 먼저 미지근한 샤워로 발목부터 서서히 나를 덮 혀주었다. 어떤 때라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시로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뭐야?" "으응, 시로는 언제나 냉정하구나 싶어서. 그런데 내가 호수에 빠졌을 때만 은 혈안이 되어 경찰을 출동시켰구나... 앗, 뜨거!" 뜨거운 물이 촤악 끼얹어졌다. 시로가 무뚝뚝하게 탕 속에 몸을 담갔다. 이 성을 잃은 자신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시로에게 쿡쿡 웃으 며 나도 옆으로 첨벙 들어갔다. 아아... 온기란 좋구나. 육체도 신경도 메마른 마음도 초조함도 망설임도 뭐 든지 기분 좋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팔다리를 뻗으며 하아 하고 한숨 돌렸을 때, 나는 자신이 놓인 이 훌륭한 상 황을 헉 하고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좁은 욕탕에서 시, 시로와 단둘이... 게다가 그게 당연하지만 나도 시로도 알몸인 데다가 덤으로 이렇게 밀착하고... 있다니!! "이젠 춥지 않아?" 온화한 시로의 의문형. 불안이나 방황같은 것이 아니라 이건 나에 대한 배 려라고 이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응... 이제 괜찮아." 너무 행복해서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용기를 짜내어 들어 올렸다. 시로의 남자답고 날렵한 옆얼굴이 내 바로 곁에 있었다. 내 시선을 깨달은 모양인지 시로가 천천히 얼굴을 이쪽으로 향한다. 냉혹한 삼백안, 그것은 가끔 애절할 만큼 내 가슴을 치곤 한다. "구해줘서... 고마워." "그런 곳에서 죽는 건 못 보겠으니까." 나는 웃었다.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 불길속에 혼자 남겨진 나를 시로가 구하러 와줬을 때였다. 그때도 그랬다. 시로는 나를 마지막까지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었다. 자신의 의지로 살고 자신의 의지로 호흡하는, 아 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이 행위가 사실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일이라는 것 을 말이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 시로와 함께 보 낸 나날도, 이제부터 시로와 걸어갈 미래도 하루도 헛되이 하고 싶지 않기 때 문이다. 시로는 내게 살아가는 기쁨을 가르쳐줬다. 단념하지 않는 강함을 배우게 해 줬다. 내 목숨도 하찮지 않다고... 사랑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흐뭇한 타 혐을 깨닫게 해줬다. 1초씩 증폭해 가는 시로에의 사랑. 이 마음은 내 생애에 서 다할 날이 없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괴로워, 시로?" "...왜 그런 걸 묻지?" "있잖아, 시로. 내가 누군가한테 살해당하면 아베처럼... 복수하겠다고 생각 할 거야?" 야요이의 원수를 갚은 시로처럼 말이다. 잔혹한가 싶은 나의 질문에 시로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시로는 말없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하고서--입술을 겹쳤다. 시로의 입술은 아직 조금 차가웠다. 나는 얼음을 족이듯이 그리고 감싸듯이 시로의 요구에 응했다. 차가운 피부도 상처 입은 마음도 내가 치유해줄게, 시로... 녹아들듯이 달콤한 키스 사이에 시로가 말했다. 먼저 가지 마--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급의 프로포즈,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 살짝 시로에게 혀를 내밀어 깊게 휘감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는 그 아픔, 나도 잘 알고 있다. 어머니르 ㄹ 잃고 친구를 잃고 마스터를 잃으며 절망의 소용돌이로 내몰리다가 볓 번이나 계곡 아래로 떨어졌었다. 몸을 감출 곳 따윈 하나도 없는 사막, 끝없이 계속된 작열하는 모래위를 맨 발로 걷고 있는 듯한 피로감과 절망감과 살아가는 것에 지친 마음에 억지로 생겨나는 것은 죽음에의 동경. 내 마음을 좀먹고 있던 것은 언제나 이런 부정적인 감정뿐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이따금씩 보이는 것은 신기루, 손을 뻗으면 금세 사라져버리는 모래위의 누 각, 허망한 환영. 그리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웃는 것이다. 절망에 빠져, 울며 고함치며 자신 을 스스로 난도질하며 그래도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그 기억은 이 목숨이 있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 래서 더더욱 사람은 온기를 찾는다. 치유 받기를 원한다. 사랑받기를 갈망한 다. 그래도 살고 싶으니까.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니까--. "와라... 나츠키." 시로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로의 허벅지에 걸터앉았 다. 시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사랑스러운 입술을 탐하며 완전히 데워져서 상 기된 나신을 시로의 몸이 밀어붙였다. 시로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더듬고 어깨를 타고 유두를 스쳤다. 흠칫 반응한 나를 시로가 깊은 눈매로 쳐다보았다. 순가락으로 내 등줄기를 따라 허리뼈를 더듬었다. 내 엉덩이를 주무른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쓰다 듬듯이 만지고는... 이윽고 다리 사이에 도달했다. "으응... 하아." 나도 시로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시로가 해주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담아 부 드럽게 살짝 은밀한 곳으로 이끌었다. "...시로, 이제 날 혼자 두지 말아줘." 시로가 끄덕였다. 시로의 앞과 나의 뒤가 밀착하자 기다림에 지쳐 내가 부 드럽게 부풀어오르고 있다... "시, 시로, 스렇게... 아... 아아아... 앗." 천천히 안아 들어 온 시로의 단단한 욕망이 나를 깊숙이 찔렀다. 너무 행복해서 현기증이 난다. 시로와 하나가 될 수 있는 현실이 미칠듯 이 기뻤다. 시로가 '따뜻하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도 물어보았다. "목욕탕이? 아니면 내 안이...?" "둘 다." "따뜻한 거 좋아해?" "그래." "나... 좋아해?" "--그래." 나는 시로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 없이 입 맞췄다. 그것에 응하듯이 시로가 날 감싸 안아주자 기쁜 나머지 숨도 쉴 수 없다. "나도 좋아해! 시로가 좋... 아. 사랑해, 시로..." 우리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욕탕에 파도가 일어나 몰이 넘쳤지만 신경 쓰 지 않고 물 위로 떠올랐다. 잠기며 시로를 탐했다. 시로도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지탱하고 내 움직임을 도와주었다. "기분 좋아, 시로?" "...그래." "정말?" "그래..." 나를 안고 있는 동안 시로는 한시도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내 교성과 부끄러운 표정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나만을 보고 있어... 내게서 눈을 떼지 말아줘..." 나는 시로에게 미소지으며 뺨에 입 맞추고 이마에 입 맞추고, 코와 관자놀 이에 키스하며 시로의 귀에 속삭였다. "나는 절대로 시로보다 먼저 가지 않을 거야.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전에도 말했잖아? 시로..." 대답대신 깊숙이 찔러오자 나는 아아, 아아 하고 신음했다. 이 세상의 것이 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음란한 소리를 지르며 나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니까 시로는 날 죽이지 말아줘... 시로가 없어지... 면 난 살아갈 이유 를 모르게 되... 니까. 나, 날 죽이고 싶지 않으면 시로도 절대로 절대로 죽으 면 안... 돼... 앗!" 서로를 휘감고 삐걱거리는 손과 발, 혼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던 극한의 호 수에서는 이미 느끼지 못했던 육체의 아픔이었다. "시로는 나의, 나는 시로의 생명의 증거야--." 따뜻한 물 속에 안겨 우리는 강하게 맺어졌다. 마치 극한의 땅에 피어난 열사(熱砂)와 같은 기억만 이 가슴에 깊이 새긴 채... 흑의 진상 (완결) 1 시로가 내 안에 있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않고 마치 정교한 기계처럼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면서, 게 다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과묵하게 내 안을 왕래하고 있다. 시로의 밑에서 바로 누워있는 나는 말랐지만 강인한 근육으로 감싸인 시로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커다랗게 벌린 양다리를 시로의 허리에 감은 채 괴로운 소 리를 질러대는 중이다.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뒤로 젖혔다. 내 중 심에서도 뜨거운 환희를 뿜어내고 있다. "아아... 시로, 시로, 아아...!"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한껏 몸을 젖히고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남자를 조였다. 시로가 흠칫 반응하며 움직임을 멈춘다. 나는 더 없는 쾌감을 탐하며 살짝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시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나의 멋진 몸에 감동할 줄 알았더니 시로가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화난듯이 날 노려보며 너무나 불쾌한 듯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츠키."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녹아버릴 듯한 미소를 보냈다. 말보로 냄새가 밴 입술 과 수염이 까칠한 뺨을 한꺼번에 혀로 할짝 핥아 올리자 시로는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피하고 말했다. "힘 빼, 나츠키." "왜?" "왜라니. 빨리 하라는 대로 해." 시로의 냉혹한 삼백안이 정면에서 나를 쏘아보았다. 그 순간 내 등줄기에 피학 적인 쾌감이 짜릿하게 스치며 시로를 더 조이고 말았다. 시로가 은연중에 이를 악물었다. ...아아, 고뇌에 찬 얼굴도 근사해. 이럴 때 오싹오싹해지는 나도 뽸나 비정상 일 것이다. "미안, 시로. 아팠어?" 이렇게 물어볼 때 순순히 그렇다고 할 남자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괴로워 보이는 그 표정은 내 힘에 밀려 움직일 수 없다는 한심한 사정을 그대로 말해준다고, 시로.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나 아마노 나츠키는 싱싱한 미인이니 까 말이다. 뭐든지 원기 왕성한 것이 당연했다. 그에 반해 내 보호자이기도 하고 현재 나와 열애중인(이라고 내가 멋대로 결정 했다.) 연인 칸자키 시로는 나보다 연상에 경시청 형사부 수사 1과의 경부보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스페셜 캐리어인 주제에 세끼 밥보다 현장을 좋아한다. 24시 간 1년 365일, 낡아빠진 양복과 넥타이 차림으로 현장을 뛰어다니는 별종이다. 본청의 업무도 완벽하게 해치우면서 전국의 현장까지 망라하는 그의 초인적인 능력에는 경시총감도 혀를 내둘렀다고 시로의 후배이자 신주쿠 서에서 근무하 는 후지시로 형사가 자랑스럽게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그렇게 일년 내내 겉모습도 신경 쓰지 않고 일만 하니까 귀여운 연인(그게 누 구냐고? 당연히 나지.)과 밤인하는 도중 기력이 쇠해버리는 한심한 사태에 빠지 는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할 체력 정도는 남겨 달라구. 그렇게 생각 하자 나는 슬퍼지고 말았다. 나랑 일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한거야? 뭐, 이 녀석은 그 자리에서 '일.' 이라고 대답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남자란 걸 알면서도 반해버린 내 잘못이다. 이럴 땐 일단 이해심 많고 착 한 아내의 얼굴로 어디까지나 유연하고 순종적으로, 한없이 부드럽고 순조롭게 기분 좋은 절정으로 이끌어서 한시라도 빨리 쉬게 해주는 것이 형사의 아내 된 자의 의무... 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나도 시로의 기력 부족보다 도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실 난 시로와 잠자리 경렬 4개월 남짓이지만 아직도 밤인은 긴장의 연속이었 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긴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매번 언제나 내 쪽에서 '안아줘.' 하고 조르고 그것에 시로가 어쩔 수 없이 응해준다는 공식을 꼽을 수 있었다. 시로 쪽에서 날 원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되는 것이다. 야한 신음 소리를 싫어하진 않을까, 실은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여자가 더 좋은 데 참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 밖에도 너무 한심해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정적인 사고만 쌓여서 좀처럼 원래 솜씨를 발휘할 수 없었다. 1년 전까지 난 신주쿠 2번가에서 일했다. 3자리 수에 가까운 남자들을 농락하 며 생활비를 버는 장사... 즉 몸을 팔아 살아가는 남창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의 난 막 시작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님이 도망가 버렸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부모에게 버림받 았단 얘기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팔았다. 달리 팔것이 아 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어느 샌가 2번 가에서 꽤나 유명하고 악명 높 은 남창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는 그 날. 그 날이 내 운명을 바꿔버렸다. 내가 자주 드나들던 쇼트 바 '루트' 의 손님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 났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서 칸자키 시로와 만났다. 내 앞에 나타난 시로는 검고 낡아빠진 싸구려 양복에 꼬질꼬질한 넥타이, 뺨과 턱에는 그냥 방치해둔 수염이 드문드문 난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다지 나아지진 않았지만 당시엔 정말 머리마저 부스스해서 누 가 봐도 촌스런 아저씨였다. ...그런 줄 알았더니 눈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 쉬는 것을 잊고 말았다. 시로의 날카로운 안광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잿빛이 섞인 엷은 홍채, 바늘로 찌른 듯이 조여든 동공, 야생 늑대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시선.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 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위압감. 느껴지는 강렬한 적의, 그러나 무 죄를 주장하는 날 믿어준 것은 칸자키 시로뿐이었다. '넌 거짓말이 서투니까.' 하고 거짓말로 우기지 못하는 내 성격을 간파했을 뿐 만아니라 내 말을... 나 자신을 믿어주었던 것이다. 친부모도 나 같은 건 털끝만 큼도 믿어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시로의 눈에 완전히 반했다. 헤테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버려서 죽을 각오로 구애했지만 그 때마다 매 정하게 채이는 바람에 게이의 현실을 통감할 수 있었고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때는 시로에 대한 감정이 증오로까지 발전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끝에 가서는 역시 난 시로가 좋고 사랑받지 못한다면 죽는 것이 낫다고 한탄하며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도 행복하다고 체념하기도 했다. 나는 그 정도로 시로가 좋아서 결국엔 시로 앞에서 안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라는 둥, 곁에 있기만 해도 좋다는 둥, 그렇게 협박하거나 비참하게 엉엉 울며 매달리 는 것 외엔 시로를 향한 굶주림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한심한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자존심도 버린 채 오직 몸뚱이 하나 만 남았을 때, 드디어 시로가 내게 인정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은 시로와 처음 하나가 된 순간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식객으로 눌러앉았던 시로의 집... 요츠야의 아파트가 폭파되었던 그 사 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시로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 혼자서 이 세상에 남겨졌다고... 시로가 날 두고 가버렸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로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할고 몸을 던져 적지에 뛰어들었는 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범인이 잡히고 시로도 무사하자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 다. 돌이켜보자 무모한 자신이 한심했고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시로를 마음 속 깊이 원망했고 나는 울면서 시로에게 안겼다. 그 때 난 결심했다. 앞으로 만약 시로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 전에 내 손으로 죽이거나 아니면 나도 함께 가겠다고 말이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그 날의 맹세는 지금도 변함없이 내 심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2 나카노구의 3층 짜리 맨션 1층. 구조는 1LDK의 좁지만 즐거운 우리 집, 이곳 이 나와 시로의 새로운 집이었다. 사고로 붕괴된 요츠야의 아파트 대신 경찰이 마련해준 시로와 나의 사랑의 둥 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요컨대 식객으로 얹혀살고 있을 뿐이다. 여러 가지 과거 사정이나 그 식객이라는 현실 문제로 인해 나는 아직도 시로와 의 관계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시로는 여전히 무지 쿨 했다. 몸도 마음도 차가 워서 본심을 헤아릴 수가 없다. 생글생글 웃어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아도 좀 더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시로에게 내비치기만 해도 '실없는 소리하지마.' 하고 불쾌 한 얼굴을 하겠지. 하다못해 저항을 표시하고 싶어서 나는 다리 사이에 힘을 주어 시로르 ㄹ조였 다. 시로가 울컥해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도전적으로 노려보았다. 움직일 수 있음녀 어디 한 번 움직여 보시지. 그렇게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만, 나츠키." "왜?" "움직일 수가 없잖아." "뭐 어때, 이대로 아침까지 있자." 바보 같은 소리 말라는 듯이 시로가 눈 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것을 못 본척한 나는 시로의 목을 안고 재촉하듯 입술에 입술을 갖다댔다. 난 좀 더 시로랑 붙어있고 싶단 말이다. 아직 떨어지고 싶지 않다. 놓고 싶지 않다. 시로의 분신이 괴사하기 직전까지... 이대로 계속 끝까지 시로와 하나로 있고 싶다. 사정하면 시로는 바로 내게서 떨어져서 이제야 비로소 하루 일이 끝났다는 것 처럼 내게서 등을 돌리고 곯아떨어져 버릴 것이다. 시로는 그걸로 좋을 지 모르 지만 난 그런 건 절대로 싫다. 사랑의 시간이 끝나도 서로를 서로의 품에 안고 체온을 즐기며 다리를 감은 채 한없이 러브러브하고 싶었다. 시로가 그런 타입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지만 적어도 마음 속에서 만이라도 그러고 싶었다. "저기, 시로. 날 너무 외롭게 만들면 그러다가 천벌 받는다?" "천벌을 내릴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내려봐라." "...말 다했지? 어디 두고 봐." 나는 원망스럽게 내뱉고서 시로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난 요즘 아예 시로를 죽여 버릴까, 하는 위험한 생각만 하게 되 었단 말이다. 정말로 그래도 돼? 응? 시로는 끈적끈적하게 일그러진 내 생각 따윈 상상도 하 지 못하겠지. 그는 심기가 상한 눈으로 나를 힐끗 보고서 우격다짐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 했다. 어른 끝내고 빨리 자고 싶다는 의사표시다. 육체관계를 가진지 4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시로에겐 파트너를 생각해주는 마음 이란 것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젠장!! "아파! 아프단 말이야, 시로!" "그럼 힘 빼." 내가 저항을 표시할 때마다 시로는 점점 더 심기가 상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저항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역시 아직 애였다. "아... 아파, 아파. ...시로, 이봐, 시로...!" "자업자득이다." 나는 아픈 꼴을 당하고서야 겨우 온순해졌다. 더 이상 시로를 화나게 하고 싶 지 않아 최후엔 역시 순종적인 연인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알았어, 시로. 알았으니까... 좀 더 부드럽게 해줘..." 나는 의식적으로 애써 호흡을 가다듬어서 온몸의 힘을 뺐다. 그러자 아픔 대신 찾아온 것은 사랑하는 이가 주는 최상의 희열... "...아." 녹아내릴 듯한 교성이 자연스럽게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으응... 하응." 꼬리뼈를 중심으로 손과 발, 그리고 후두부까지 달콤하게 욱신거리며, 나의 온 몸이 호응하기 시작한다. 몸 이곳저곳이 흠칫흠칫 반응을 보이며, 모든 세포가 성감대로 변했다. ""아아...!! 으응, 앗." 안타까웠던 시간을 되돌리려는 듯이 시로가 내 얼굴 양쪽으로 팔꿈치를 짚고 몇 번이나 왕복하다 떠올리듯이 찔러 올리자 허리가 크게 쳐들렸다. 곧바로 허 리를 부딪치자 눈꺼풀 안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 아아앗!" 격렬한 마찰에 감정이 복받쳤다. 교성이 점차 시로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도 시로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좋아... 좋아. 아... 시로. 시로, 시로, 시로, 시로오..." 나는 헛소리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믿음직한 목덜미에 매달렸 다. 시로가 내 허리를 한 손으로 안고 다른 한쪽 손으로 자신을 지탱하고서 한층 더 강하게 안아 올린다. 시로는 계속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중심은 시로의 마음 을 말해주는 것처럼 뜨겁게 굳어져 갔다! 시로도 기분 좋은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처럼 분명히 기분이 매우 좋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에 욕정하고 있다. 그 사실이 이렇게도 기쁘다니! "아아아, 아아, 아아, 시로...!" 난 있는 힘을 다해 신음하면서 시로의 중심을 탐하기 시작했다. "빠... 빨리, 시로. 키스해줘! 이대로 나한테 키스해 줘...!" 억지로 시로의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입술에 입술을 킬어붙인 직후, 눈꺼풀 밑이 하얗게 폭발한다. "하으으으응!" 온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시로의 욕망을 여한 없이 뒤집어 쓴 행복감이란!! "아, 아, 아, 아...!" 고장난 로봇처럼 몸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에서 나사가 빠질것 같 았지만 그래도 내 육체는 아직도 탐욕스럽게 시로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자신이 봐도 싫어질 정도로 집요하게 시로의 잔재를 조이고 있는 것이다. "...후우..." 간신히 전부 끝내자 나는 안심해서 힘이 빠졌다. 내 안에서 시로가 가득차는 감촉이 미치도록 좋았다. 미묘한 변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시로의 세포와 내 세포를 융합하기 시작한다. 이때만 큼은 내가 시로의, 시로는 나의 알부가 된다는 소망까지도 이루어질것 같은 기 분이 들곤 한다. 시로의 냄새가 내 몸 이곳저곳에 배어들고 시로의 몸에도 내 냄새가 묻어갔다. 나는 가슴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달콤한 충족감을 체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무 엇보다도 행복했다. 그래서 역시 오늘도 어제보다 더 시로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이럴 때 나는 실감한다. 앞으로 내가 몸을 바칠 사람은 시로뿐이라고. 시로 이 외의 사람에게 봉사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시로가 안아주는 내 몸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예전처럼 내 몸을 함부러 굴리지 않겠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다. 난 이미 시로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을 섞을 때마다 내 몸 속에 조금씩 칸자키 시로가 쌓여간다. 내 안에 있는 시로를 소중히 하고 싶었다. 그러면 언젠가 분명 시로의 진짜 반신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말이다. "어이, 나츠키. 괜찮냐?"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아아, 나 숨이 멎었었나? 시로가 가만히 내 가슴을 눌렀다. 시로의 유도에 겨우 숨을 들이마시자 시로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시로, 설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그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괜찮아. 잠깐 심장이 멎었던 것 뿐이야. ...너무 행복해서." "넌 허풍이 너무 심해." 시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좀 더 어이없어 해줘, 시로. 난 시로를 어이없게 만드는 게 좋으니까. 적어도 그 동안은 계속 나만 생각해주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좀 더 나 때문에 고민해 줘. 좀 더 나 때문에 곤란해 해줘. 좀 더 화내줘... 시로. 나는 몸을 빼려고 하는 시로를 제지하고서 허리를 밀착시켰다. 아까보다 부드 러워진 시로였으나 그래도 좀 더 있어주길 원했다. "너무 행복해서 죽을 수도 있을까?" "글쎄..." 시로, 시로. 감정이 넘쳐 나와 멈추지 않는다. 시로, 어떻게 해봐도 도무지 멈 출 수 없었다. 나는 경련이 아직 낫지 않은 상태에서 시로에게 달라붙어 굶주린 입술을 밀어붙였다. "사랑해, 시로." 시로를 너무 사랑해서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 3 "나츠키." 밤일이 끝나자 시로의 말투가 의문조로 바뀌었다. 애정을 듬뿍 받은 나는 도중 의 고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나는 이불 위에서 피로감이 번지는 허리를 비틀고 시로의 근육질 가슴에 뺨을 비비며 뒤늦게 '응?' 하고 대답했다. "진로는 이미 정한 거냐?" 그러나 보호자다운 질문이 날아오자 나는 흠칫 몸을 움츠렷다. 혹시 전에 했던 거짓말이 들켰나 싶어 질문의 진의를 살폈다. 시로의 쇄골을 앞니로 달콤하게 깨물며 밑에서 힐끔 훔쳐보자 움찔거리는 내 시선을 눈빛 한방으로 물리친 시로의 얼굴이 슥 다가왔다. 험악한 시로의 얼굴은 갑작스런 키스 따위로는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 고 해서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변변한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시선을 피하 고 시로의 쇄골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했다. 불감증인 시로는 내 공격따윈 개의 치 않고 보호자의 태도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늘 네 담당한테 연락을 받았다. 이번 달은 진로상담의 달이라더군." 시로가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정면에 보이는 늠름한 얼굴 은... 어라? 조금 화가 나있나? "담당과 학생, 그리고 나까지 3자 면담이다. 출석 순으로 학교에 방문할 날짜 도 정해져 있어서 그 상세한 내용이 담긴 프린트도 미리 돌린 모양이다. 게다가 네 면담일은 내일이라더군. 지정한 날짜에 보호자가 출석할 수 없으면 희망하는 날짜를 알려달라는 지시가 있었다는데 넌 멋대로 내 사인을 적고 도장 찍어 안 간다고 한 거냐?" "우~." 곤혹스러움이 신음소리가 되어버렸다. 시로의 필적을 흉내내서 제출했는데 타케와키 녀석은 완전히 꿰뚫어봤단 말인 가, 젠장!! 나는 시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이불 밑으로 발과 발을 걸었다. 슬슬 허리를 문 지르며 확인한 시로의 중심 회복률은 겨우 10% 정도였다. 내 쪽은 역시 젊어서 벌써 완전히 회복했다. "있지, 시로. 이것 봐. 나 이렇게 팔팔해. 그리고 시로도 좀 쌓였잖아?" 말과 스킨쉽으로 도발해 봤지만 시로가 한 마디로 못을 박아 버렸다. "쌓인 건 스트레스다." 제 2라운드에의 기대가 꺾인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평을 토로했지만 시로는 이미 보호자의 얼굴로 설교를 늘어놓을 태세다. 그런 점이 나이보다 아저씨스럽다는 거라고. 이렇게 되면 이제 은밀한 무드는 아무리 기대해도 소용없다. 떨떠름하게 제 2 라운드를 단념하면서도 그래도 아직도 역시 스킨쉽에 굶주려있는 나는 시로의 왼팔을 끌어와서 팔베개를 하고 단단한 근육의 감촉을 뺨으로 확인하면서 얌전 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에 들어갔다. 아아, 난 정말 기특해. "잘 들어, 나츠키. 내일이 면담일이라고 오늘 들어도 갑작스럽게 일을 조정할 수 없어." "안다니까, 그러니까 안간다고 해뒀잖아."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로는 화난 얼굴로 내 머리를 떨쳐내고 이불 위에 엎드려 베갯맡의 말보로를 한 개비 꺼내, 바닥에 통통 필터부분을 두드려 담뱃잎의 밀도를 높였다. 그리고는 입술에 끼우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여 연기를 폐에 가득 채운 시로는 턱을 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보호자의 말투로 말했다. "언제나 말했잖아. 그런 건 미리 알리라고." "미리 알려봤자 어차피 못 오는 건 똑같잖아." 나도 똑같이 엎드려서 고민스러운 본심을 털어놓자 시로가 '으...' 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천장을 보고 누워 두 모금 째의 담배를 맛보며 스스로 팔베개 를 하고서 어떻게 하면 우세해질지 모색하는 듯 했다.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남자다운 수풀이 우거진 시로의 겨드랑이. 굵은 팔과 두꺼운 가슴과의 콘트라스트에 가슴이 두근거린 난 조금 변태끼가 있는 걸까? 나는 빨려 들어가듯이 시로의 겨드랑이에 코끝을 묻었다. 아아... 겨드랑이 털 이 간지러웠다. 기세를 타고 혀를 내밀어 고양이처럼 여기저기를 핥고 시로의 유두에 쪽 하고 키스했다. 그래도 아직도 멀쩡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밉살 스럽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당황하게 만들고 싶어서 나는 시로의 배에 올라탔다. 시 로의 다리 사이에 내 다리 사이를 밀어붙이고 유혹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나를 밀어붙였다. "있잖아, 시로. 한 번 더 하자... 응?" 전투를 포기하고 있는 시로와 벌써 의욕이 왕성한 나,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은 내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시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 이성을 잃고 수치심도 버리고 그에게 빠져들고 싶어진다. 나 역시 좀 이상한게 아닐까, 생각 할 정도로 시로와 뒤엉키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로는 안색이 하나도 안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내가 다리 사이 를 쥐고 있는데도 한가롭게 두 번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상태. 왠지 괜히 분해 진 나는 몸을 홱 반전시켜서 시로의 얼굴에 올라탔다. 시로가 당황해서 담배를 내던졌다. 내 다리사이를 태우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꼴 좋다. "정말이지 발정기인 고양이 같은 녀석이군." 시로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나는 대뜸 대꾸했다. "버릇이 나쁜 건 기르는 주인 탓이지." "누가 주인이냐?" "그거야 당연히." '시.로.' 하고 시로의 끄트머리에 키스해줬더니 입 마개 씌우고 우리에 갇히고 싶냐고 반쯤 진지하게 협박당하고 말았다. "시로와 함꼐라면 감금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나는 쿡쿡 웃으며 흥분한 나를 시로의 눈앞에 드러낸 채 시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보통은 눈썹을 찌푸릴 것이다. 하지만 난 더럽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로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그를 혀로 애무하며 점차 숨결이 흐트러지는 내게 시로가 질문을 던졌다. "내일 뭐라고 대답할 거냐?" "뭐가?" "진로 말이다. 담당 교수에겐 뭐라고 말할 셈이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만 돌려서 정직하게 대답했다. "경시청 채용시험을 보겠다고 할거야." 그렇게 말한 순간, 시로가 상체를 일으키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로가 내 엉덩이를 우격다짐으로 옆으로 밀쳐낸다. 아아, 정말이지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구! "진심이냐?" "뭐가?" 나는 이불 위에 앉아 뾰로통해져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넌 어째서 그렇게 형사가 되고 싶어하는 거냐?" "그건 전부터 얘기했잖아. 시로의 오른팔이 되고 싶으니까 라고." 시로가 험악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사랑을 나누는 건 아마 기대해 도 무리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계속했다. "난 시로랑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래서 수사 1과를 지원할 거야. 본청 근무라 무리라도 현장에서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게다가 역시 하루라도 빨 리 일해서 생활비를 벌고 싶어. 그러니까 난 슬슬 알바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해. 이대로는 시로에게 폐만 끼치고 있으니..." "그만 둬." 당장 대답이 돌아와서 나는 '에?'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시청은 네겐 아직 일러." "무슨...!" 지금까지 내가 '형사가 될 거야.' 하고 주장해도 진심으로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난 시로가 내뱉는 말투에 울컥했다. "그렇게 내가 귀찮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무슨 문제야? 그것보다 귀찮냐고 물었음녀 먼저 귀찮지 않다고 대답하는 게 연인이지!" 지리멸렬한 말이라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시로의 머리를 베개로 때 렸다. 그치만 열 받지 않는가? 이 목석은 내 마음 따윈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다.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드디어 분노의 한계를 넘어버린 나는 파자마를 잡아채 팔을 꿰고 일부러 본노 의 한숨을 마구 내쉬며 팬티에도 다리를 집어넣었다. "아무튼 난 내일 타케와키한테 말할 거야. 내 진로를 바꾸게 하고 싶으면 4시 에 학교로 오시지. 엄청 바쁜 경부보님께선 어차피 올 수도 없겠지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빈정거리고서 잘 자라며 등을 돌렸다. 시로는 아마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 것 같았다. 말보로가 타들어가는 소리에 겹쳐진 것은 무거운 한숨. 시로야말로 무슨 생각 을 하는 건지... 자기보다 어린애를 돌보는 건 피곤하다던가, 뭐가 좋아서 남자랑 자야하는 거 지 라던가, 직장에서까지 함께라니 좀 참아 달라던가 시로로서는 불만이 산더미 처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 좀 해봐, 시로. 본청 소속인 칸자키 시로 경부보에게 있어 생활지 도가 필요한 전과자인 나는 마땅히 그의 보호 관찰 아래 있어야할 요주의 인물 이라구!! 그리고 뭣보다도 시로는 날 맡아주겠다고 내 부모와도 같은 사람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루트의 마스터에게 약속을 했잖아. 고로 시로는 개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날 돌봐줄 의무가 있단 말이다, 젠장!! 물론 이런 건 내 이기적인 논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시로, 난 아무리 더러운 수단을 쓰더라도 이 권리와 위치를 버릴 생각 은 없어. 절대, 절대로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없다구! 4 다음 날. 오후 4시 정각. 나의 3자대면 시간이었다. 내 앞에서 면담을 끝낸 것은 재색을 겸비한 아다치 카오리였다. 그녀는 어머니 와 함께 복도로 나와 교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교내 제일의 인기를 자랑하는 내 담당인 타케와키 마코토는 여전히 상큼한 청 년다운 얼굴로 '희망하는 곳의 취업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합시다.' 하고 하얀 이 를 반짝 빛내며 아다치의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뭐, 재원인 아다치라면 어느 곳이라도 한방에 합격하겠지. 아다치가 복도에서 대기하던 날 발견하고 '다음이니?' 하고 물어왔다. 내가 대 답 대신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보고 뺨을 붉히며 '저 남자애 멋지구나.' 하고 아다치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치?' 하고 솔직하게 말한 아다치가 어머니와 똑같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날 향해 '내일 봐.' 하고 살짝 손을 흔들었다. 모녀란 건 어느 집이나 저렇게 자매같은 걸까? 함께 쇼핑을 가거나 옷을 바꿔 입거나 하는 건 꽤 보기 좋은 걸. "들어와도 돼, 아마노." 타케와키가 날 부르자 나는 기대어 있던 창문에서 등을 떼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계단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안 늦었다!"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그 녀석은 시로가 아니라... "후지시로?" --어이어이, 왜 네가 온 거냐? 시로의 후배이자 신주쿠서에서 근무하는 도련님 형사 후지시로 마사토. 마리 가 아니라 마사토로 읽어달라는 이 녀석은 은행에서 일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제나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선량한 청년이었다. 겉모습과 같이 성격도 순종적, 특히 시로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는 숭배의 자 세는 감탄할 만 해서 시로의 명령이라면 불 속도 마다 는 충견다움을 발휘했다. 시로도 시로라서 이 녀석을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듯 하다. 즉, 내겐 조금 눈에 거슬리는 녀석이라는 뜻이다. 뭐, 후지시로가 좋은 녀석이란 건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후지시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타키와키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모 사 건으로 얼굴을 익힌 이후로 타케와키는 아마도 후지시로가 맘에 든 모양이다.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었는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타케와키가 태어날 때부터 호 모란 사실을 밝히는 편이 손쉽게 진상이 설명될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나츠키씨가 신세지고 있습니다." 후지시로가 머리를 깊숙이 숙이자 타케와키가 너무나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 다. "야아, 후지시로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전 후지시로씨가 잘 지내시는 지 매일 걱정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전화로 확인할까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핫핫핫." "아, 네..." 타케와키, 바보인거 티 내냐? 난 나도 모르게 미간을 눌렀다. 자신의 실언을 헉하고 깨달은 타케와키가 헤벌 어진 얼굴을 긴장감 있게 조이고 자신 있는 하얀이를 반짝 빛냈다. "그런데 후지시로씨. 오늘도 뭔가 사건이 일어났나요?" 나는 아니라며 타케와키를 팔꿈치로 찔렀다. 내가 설명할 것도 없이 후지시로 가 웃으면서 사정을 말했다. "실은 나츠키씨의 보호자이신 칸자키 선배가 도저히 학교에 오실 수 없어서 오 늘은 제가 대리로 면담하러 왔습니다." 후지시로가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렇군.' 하고 어이없어하는 날 밀어젖히고 타케와키가 한 걸음 나아가더니 두 팔을 내밀었다. "그러면 오늘은 당신과 제가 천천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얘기로군요. 이거 영광입니다. 왠지 아마노보다 제 쪽이 더 긴장하게 되네요. 핫핫핫!" 타케와키는 후지시로의 손을 잡고서 '자,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나보다 먼저 상담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봐,타케와키." 내가 원망스럽게 노려보자 타케와키가 얼버무리듯이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렇고 타케와키 녀석, 예전엔 나 밖에 안중에 없었던 주제에!! 뭐랄까 복잡한 심경이었다. 뭐, 내 몸과 마음은 100% 시로의 것이니까 이제 와서 타케와키가 어찌되든 전혀 상관없지만 말이다. 나는 준비한 의자에 벌써 편안히 앉아있는 후지시로의 뒤로 지나치며 팔꿈치 로 뒤통수를 콩 하고 때려 주었다. '아얏!' 하고 신음하는 후지시로와 '아마노!' 하고 눈을 치켜뜨는 타케와키. 둘 다 똑같은 녀석들을 차갑게 쳐다본 나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후지시 로 곁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뾰로통해진 내 태도에 후지시로가 눈을 휘둥그렇 게 떴다. 그리곤 '죄송합니다.' 하고 타케와키에게 사과하더니 '얌전히 있어요, 나츠키씨.' 하고 어머니처럼 주의를 준다. "죄송합니다. ...자자, 나츠키씨. 그런 태도는 실례라니까요." "시끄러. 계속 엄마인척 하면 가만 안 둔다." "그... 그러니까 그런 말투는 삼가주세요!"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지시로를 안심시키려는 모양인지 타케와키는 너그러운 웃음을 안면에 띤 채 무의식의 후속타를 가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마노는 언제나 이러니까요." "에? 어, 언제나 이렇다고요?" 후지시로가 '정말로?' 하고 후칫 놀란 눈으로 묻자 나는 대답 대신 책상위에 두 다리를 쾅 하고 올려놓았다. 후지시로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대로 전하시지?' 하고 히죽거리자 후지시로가 '흑흑...'하고 고개를 떨궜다. 틀림없이 나의 수많은 나쁜 행동에 대해 설교를 들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을 후지시로는 타케와키의 입에서 넘칠 듯이 흘러나오는 내 칭찬에 그저 눈을 동그 랗게 뜨기만 했다. "뭐랄까요, 아마노는 감이 좋아요. 공부를 해도 스포츠를 해도 모든 일에 관해 이해가 빠릅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르치면 전부 흡수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큰 학생입니다. 뭐... 태도는 이렇지만 할 일은 제대 로 하니까 태도만 빼면 두말 할 나위 없는 학생입니다." 멍해진 후지시로의 옆에서 내가 득의만만하게 '거봐.' 하고 가슴을 뒤로 젖혔 다. 이렇게 칭찬할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시로를 데려올 걸 그랬다. 날 다시 보게 될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다. "그저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잘 해서 그런지 전력을 다하지 않고 끝내 버리는 점이 안타깝군요. 하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하니까 대단한 겁니다. 아 마노가 진지하게 덤벼든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정도입니다. 아마노는 더 크게 성 장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성장할 지 그 미래가 기대됩니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 본인은 취직을 희망하는 것 같지만 최종목표가 경시청이라면 그렇게 서 두를 필요는 없겠죠. ...아아, 그건 후지시로씨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죠." 타케와키가 핫핫핫 웃었다. 따라 웃는 후지시로의 얼굴엔 아직 반신반의한 표 정이 남아있었다. 그런 후지시로에게 타케와키가 스윽 다가가서 눈꼬리를 내렸 다. "그런데 다른 얘기지만, 후지시로씨는 특정한 분이 계십니까?" "에?" "이봐, 타케와키!" 공사를 혼동하지 말라고 노려보자 타케와키가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나에대한 칭찬을 혹시 그 떡밥이었던 건가? 이 망할 에로 호모교수!! "아니,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아서 결혼은 아직이신가 해서요. 아, 실은 저도 후 지시로씨와 동년배인 셈이니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서요." "아, 네. 결혼은 아직 안 했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한 후지시로에게 타케와키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안 했지만 연인은 있습니다." 하지만 가볍게 되돌아온 대답에 타케와키가 쩍 하고 굳어졌다. 나도 깜짝 놀랐 다. 후지시로에게 연인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우리들은 더욱 놀랐다. "10년 전부터 잠들어 있지만요." "하..." 후지시로의 고백에 타케와키뿐만 아니라 나까지 굳어져 버렸다. 얼떨떨해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시로는 여느 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속사정을 말했다. "학생시절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인데요. 비 오는 날 하교 길에 달리는 차에 치 여서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식..." 나와 타케와키는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내용과는 반대로 느긋한 말투의 설명 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보는 앞에서 치여서... 서둘러서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경찰에도 차번호 와 차종을 말하고 필사적이었지요. ...범인은 금방 잡혔지만 각성제 상용자라서 차로 친 것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군요. 너무너무 분해서 이렇게 불공평한 일을 세상에 일소하고 싶어서 형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건만 해 결하고 자신의 여자친구는 낫게 해 줄수 없어서... 범인은 벌써 사회로 복귀해서 인생을 재출발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선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래뵈도 의외로 집요하거든요. 하하하." 하하하 하고 웃는 건 좀... 당혹스런 얼굴로 타케와키를 훔쳐보자 타케와키는 그 이상 쇼크를 받고 재기 불능이 되어 재로 변해 있었다. 불쌍한 타케와키. 실연 확정이다. 깨진 사랑이 괴로운 건지 후지시로의 갸륵함에 감동한 건지, 나는 어느쪽이든 안 되셨다고 마음속으로 타케와키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런 여자가 라이벌이라면 절대로 승산이 없겠지. 나도 시로의 마음속에 야요이가 있으니까 비슷한 경우지만 말이다. 야요이는 시로를 위해 목숨을 잃은 여자다. 분명 평생 시로의 마음속에서 사라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난 타케와키의 복잡한 심경이 무지 이해 된다구. '저어...' 하고 후지시로가 타케와키를 불렀다. 타케와키가 재로 변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된 모양이다. 후지시로도 꽤나 죄 많은 남자로군. 후지시로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타케와키가 깜짝 놀라 의자에 고쳐 앉고 헛기침을 하더니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어트리며 말을 흐렸다. "후지시로씨." "네." "포...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타케와키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후지시로가 눈을 휘둥그래 떴다. 타케와 키가 애써 단어를 고르면서 솔직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절대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 여자친 구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아... 네." "후지시로씨의 여자친구분은 분명 언젠가 깨어날 겁니다. 제가 단언합니다. 의 사도 아닌 제가 이런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후지시로씨를 슬프게 만드는 건 여기 있는 제가 용서 못합니다." "네..." 후지시로가 목이 메인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타케와키의 말에 조 금 찡 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후지시로씨, 그러니까 그게..." 타케와키가 책상 위에 놓인 후지시로의 손을 갑자기 움켜쥐었다. 눈이 휘둥그 레진 것은 후지시로보다 내 쪽이었다. "열심히 하세요!" "네, 넷!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세에 눌려서 대답한 듯한 후지시로였지만 옆에서 훔쳐본 얼굴은 왠지 상쾌 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은 언제까지 손을 잡고 있을 건지... 내 시선을 눈치 챈 타케와키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을 확 놓고는 일부러 손목시계와 벽시계를 번 갈아 보았다. "그... 그럼 슬슬 다음 면담시간인 것 같네요. 아... 오늘은 일부러 와주셔서 감 사했습니다. 그럼 진로 건은 일단 검토하는 쪽으로...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칸자키 선배에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감 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나츠키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네?" "기운을 북돋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지시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타케와케가 깜짝 놀라서 몇 번이나 늠름한 상 반신을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왠지 나까지 마음이 부드러워지 고 말았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른들을 힐끗 쳐다보고 '먼저 갈게.' 하고 쓴웃음을 던진 나는 얼른 강의실을 나왔다. 후지시로가 당황해서 일어섰 다. "기다려주세요, 나츠키씨! 저어, 그럼 다시 뵙지요." "네, 다시 와주세요! 저기... 후지시로씨! 다음엔 느긋하게 차... 아니, 식사는 어떻습니까? 근간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꼭!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타케와키 녀석, 혼란한 틈을 타서 후지시로에게 제이트 약속을 했다. 제법인데, 라고 생각한 나는 쿡쿡 혼자서 웃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재빨리 1층 승강구로 향했다. 아, 선배. 접니다. 방금 면담이 끝났습니다. ...네, 네. 아니요, 그런 말씀마세 요. 그것보다도 선배, 나츠키씨는 정말 우수한 학생이에요. 깜짝 놀랐습니다. 공 부도 스포츠도 굉장히 잘하는 학생이라고 아주 칭찬하셔서... 왠지 저까지 흐뭇 해졌어요!" 흥분한 듯한 후지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 으로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칭찬 받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대학원을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봐, 후지시로!" 그런 얘긴 곤란해! 내가 당장 제지를 걸었지만 늦었다. 나의 곤란함을 깨닫지 못한 후지시로가 신이 나서 나불나불 얘기한 것이다. "후지시로!" 난 '이리 내!' 하고 후지시로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잡아챘다. '히로, 부탁이니까 이 녀석의 말에 휩쓸리지 말아줘...' 하고 빌며 변명하려 했더니, "머리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 시로가 코웃음을 쳤다. 울컥해진 나는 건방지게 대답하고 말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머리랑 얼굴은 훌륭하다구. 나라면 박사도 가뿐하지." 시로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진로는 결정되었군. 제 1지망은 대학원이라고 전화 드리지." 나는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얼이 빠지고 말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나는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시로?! 난 이제 와서..." "나츠키. 네 머릿속에 학교는 어떤 이미지냐?" "에? 어떠냐니 그야... 아, 그러니까 자신이 배우고 싶은 분야를 전문적으로 배 우는 곳... 인가?" 질문을 받으면 고분고분 답을 말하는 난 역시 우등생이라는 거겠지. "그 정도 인식이 있으면 충분해. 유원지라고 했으면 기각했겠지만." 그, 그, 그, 그러니까 당장 기각하면 되잖아! "오늘이라도 학원을 찾아서 등록 수속을 마치고 와." "무, 무슨 소리야, 시로?!" 초조해하는 내게 시로가 더욱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진지하게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삼는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는다." "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난 형사가 될 거라니까! 자기는 일의 화신이면서 왜 내 근로의욕을 그렇게까지 떨어뜨리려고 하는 거야?!" 휴대전화를 양손으로 고쳐 쥐고 침착함을 잃은 나에게 아무리 말해봤자 쇠귀 에 경 읽기인 시로가 쉴 틈도 주지 않고 명령조로 말했다. "진학비용도 전액 내주겠어. 그러니까 너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라. 지금 경시청으로 오는 것보다 네겐 그 편이 더 의미가 있을 거다." "헛소리하지마, 시로! 본인의 의사는 무시하고 갑자기 치마 바람... 이 아니라 바지 바람이라도 된 거야?" 그렇게 말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시로가 낮고 엄한 목소리로 '나츠키' 하고 서두를 시작했다. "잘 들어, 나츠키. 어젯밤에도 말했지만 경시청은 네게 아직 무리다." "어째서? 내가 경시청에 가면 곤란한 이유라도 있어? 혹시 시로는 역시 내가 방해되는 거야? 내가 곁에 있으면 싫은 거야?" "그런 유치한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시로가 진짜로 호통을 쳤다. ...엄청 충격이었다. "...나츠키, 정말 형사가 되고 싶으면 조급해하지 마라. 좀더 천천히 자신을 돌 아볼 시간을 가져. 그 쪽이 네 장례를 위한 길이다. ...반면에 대학원에 진학한다 면 준비기간은 거의 없어." "...내 장래를 멋대로 결정하지마." "대답은 어디 갔어? 나츠키." "...네네." 시로는 힘으로 나를 억지로 굴복시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어진 순 간 내 신경도 뿌직 하고 끊어졌다. 화를 이기지 못해 휴대전화를 치켜들고 패대 기를 치려고 하자 후지시로가 뒤에서 그만두라고 말렸다. "말리지마, 후지시로!" "무슨 말이에요! 그건 제 휴대전화입니다!" 그리고 곧 후지시로는 어색하게 손목시계를 보고서 '전 슬슬...' 하고 도망칠 태 세에 들어갔다. "저기... 나츠키씨. 실은 나카노사카우에에 꽤 평판이 좋은 대학원 진학 학원이 있어요. 거기라면 학교와 맨션의 중간지점이라 다니기도 편해요. 아마 아직 아 는 강사가 있을 테니 소개해 줄게요. 지금 같이 가죠, 네?" 후지시로는 불량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얼굴로 나를 유도하려고 했다. 너무 속 보인다구, 바보 녀석!! 나는 그런 후지시로가 귀찮아서 얼른 가버리라고 뿌리쳤다. 전혀 갈 생각도 없는데도 일부러 그런 데까지 끌려갈 줄 알고? "체험 학습도 받을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잠깐 수업을 받아 봐도..." "시끄러." "하지만 나츠키씨. 선배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생각난 날이 길일이라는 말도 있 으니까..." "귀찮다니까." "하지만 나츠키씨..." "더 이상 말하면 가만 안 둔다! 얼른 돌아가!" 완강한 나를 보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후지시로는 슬픈 듯한 얼굴 로 나를 보고는 설득은 단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구두를 신고 아쉬 운 듯이 발걸음을 돌리고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저기, 그럼 나츠키씨. 부탁이니까 선배 말씀만은 제대로 들어주세요. 선배는 정말로 나츠키씨의 장래를 걱정하세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를 비난하는 말에 내 가슴이 따끔하게 아팠다. "그런 건 나도 알아." "그럼 진학학원 등록 안내 책자 정도는 가지러 갔다 오세요. 일단 그걸 읽어보 고 검토 정도는 해주세요. 선배한테 반항하는 건 그 다음부터 입니다!" 거의 화를 내지 않는 후지시로까지 진심으로 화를 내니까 꽤나 마음을 울렸다. 엄마 대리 후지시로는 보기 드물게 내게 웃음도 보이지 않고 엄격한 얼굴로 돌 아갔다. 후지시로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나는 힘없이 신발장에 기대어 주르 르 미끄러져 내려가 주저앉았다. "좀 봐줘, 남의 일엔 신경 끄란 말이야." 투덜대면서 머리를 부스스하게 휘저었다. 나는 대학원보다 경시청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진학학원에 다니기보다 아 르바이트가 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식비 정도는 벌어 조금이라도 대등한 관계로 진전하고 싶다구!! 시로에게 부담을 강요하기만 하는 나 따윈... 기대기만 하는 관계따윈 꼴불견 이고 한심해싸. 그래서 더더욱 나는 학생 따윈 끝마치고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 서 시로의 진짜 오른 팔이 되고 싶었다. 시로가 날 구해줬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시로를 구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시로 는 나의 일편단심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짜증과 서운함이 혼재하는 한숨을 내쉬고 현관에 주저앉은 채 나는 배낭에서 얇은 타운지를 꺼냈다. 사실 이것은 역에서 나눠주는 무료 구직정보지였다. 눈 에 들어와서 그냥 가져왔지만 진지하게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로가 날 억지로 대학원에 보내려고 한다면 나도 오기로라도 알바를 찾고 싶었다. 대 학원 같은 데 다닐 새가 없을 정도로 매일 빡빡하게 알바를 다녀서 시로를 포기 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지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눈에 띄는 직종이 좀처럼 없었다. 시로와의 밤의 커뮤니케이션 시간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심야 알바는 논 외였던 것이다. 전단지 나눠주는 일은 시간적으로도 자유로웠지만 수입이 적었다. 신문배달은 소중한 러브러브 아침식사 시간이 줄어들 것 같고... 조건에 맞춰서 생각해보면 하나도 걸려들지 않았다. "편안하게 돈 벌 수 있는 일이 그렇게 간단히 찾아지지는 않겠지." 5 포기하고 타운지를 덮자 뒷표지에도 정보가 실려있었다. 어디 보자. 덮밥집? 아아, 장소는 역 뒤편이다. 여기라면 다니는 것도 편하고 학교 녀석들이 일부러 역 반대편까지 먹으러 오 지도 않겠지. 게다가 어쩌면 남은 소고기를 나눠줄지도 몰라. 그러면 시로한테 먹여줄 수 있어. 하지만 매일 소고기 덮밥만 먹으면 오히려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 같으니까 메뉴 작성에도 주의해야지. "좋아, 지금부터 가볼까?" 배낭을 짊어지고 손안의 정보지를 둥글게 말아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쾅!' 하는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문을 있는 힘껏 때려 닫은 모양이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고개를 비틀자 '기다려라, 켄.' 하고 남자의 목소리가 소심하게 울렸다. 난 그 목소리를 뿌리치 고 기세 좋게 1층으로 내려온 장신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치가야?" 그렇다. 같은 과인 이치가야 켄이었다. 이치가야는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 첫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인가? 하지만 수업엔 안 나왔다. 아마도 진로상 담 때문에 강제적 혹은 눈물어린 호소로 학교에 끌려온 것 같았다. 누가 데려왔 냐고? 그야, 니트 스웨터에 부드러운 스타일의 재킷을 맞춰 입은 꽤나 소심해 보 이는 아버지겠지. 이치가야는 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난 이른바 '문제아' 였다. 녀석은 작년도 거의 학교에 오지 않았다. 이치가야는 블릿지를 잔뜩 넣은 자유분방한 섀기 커트의 헤어스타일에, 귀에는 무수한 피어스가 바람구멍을 뚫고 있었다. 가끔 학교에 나오면 수업 중인데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나, 주의를 준 조교를 흠씬 두 들겨 패지 않나, 그렇게 심하게 규칙을 어기는 이치가야에 비하면 주위 사람들 몰래 매춘을 했던 나 따윈 귀엽게 봐줄 수 있을 정도다. 녀석이 유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기부금 덕분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학교 체육관의 개축비용도 다음달에 완성 예정인 클럽 하우스도 출자원이 녀석의 아버지라고 했다. 말하자면 녀석의 뒤에서 비장한 얼굴로 쫓아오는 저 아저씨가 응석을 받아준 결과, 저렇게 상식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바보 아들로 자랐다는 얘기다. 뭐, 일반 상식 제로인 내가 바보 취급할 자격은 없겠지만 말이다. 이치가야가 돌진하는 기세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 같은 건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가 같은 반이라 는 사실도 아마 모르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일어설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이치가야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녀석의 아버지만이 애써 아들의 뒷모습에 말을 걸고 있는 것이 괜히 불 쌍해 보일 정도다. "켄, 그러니까 아버지는 모두들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역시 켄 도 좀더 학교에 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떠냐, 켄? 오늘밤은 오랜만에 집에서 느긋하게 식사하지 않겠니? 학교 이야기도 들려주렴. 아아, 아니면 외식하러 나갈까? 알잖아. 전에 자주 가던 긴자의 T호텔. 켄은 거 기 중화요리를 좋아했었지? 응? 켄..." "기다리게 했군." 이치가야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의 긴 말을 끊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녀석 의 뒤에 붙어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지만 이치가야의 눈은 웬일인지 승강구 에 앉아있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후 문맥과 맞지 않는 말은 나한테 한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의문을 풀기 전에 갑자기 팔꿈치를 붙잡혀서 억지로 일으켜졌다. 우와 하 고 소리쳐버린 나는 겸연쩍어서 화를 냈다. "무,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라니, 기다리다 지쳐서 화가 났냐? 넌 여전히 성질이 급하군." 이, 이, 이 녀석이 무슨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런 나를 너무나 간단히 붙잡아두고 있 는 이치가야가 내가 전혀 들은 적도 없는 말을 아버지에게 던졌다. "꼴사납게 잔소리하지마. 난 이 녀석이랑 약속이 있다구. 빨리 가버려!" 이치가야는 폭언을 퍼붓더니 동시에 '가자.' 하고 날 잡아끌었다. 체격에 걸맞는 엄청난 힘이었다. 아마도 나는 멋대로 이용당한 모양이다. 이치가야가 날 승강구에서 반쯤 끌고 가다시피 해서 나갔다. 아들의 응석을 너 무 받아준 아버지는 쫓아와서 철썩 때린다는 초보적인 제지법조차 모르는 모양 인지 현관에서 우물쭈물할 뿐이다. 요즘의 한심한 부모를 보고서 나는 슬퍼지고 말았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남에게 위해를 가한다구? 아니, 이것을 위해라고 해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치가야의 말을 전면적으로 신용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하지만 나의 '이 봐, 구해줘! 당신이 아버지잖아!' 라는 슬픔에 가득 찬 눈과 반항적인 태도를 보 면 우리 둘이 친구도 뭣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텐데 말이다. 나는 이치가야의 팔을 뿌리칠만한 수단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동안 우리는 벌써 교정의 절반까지 와있었서 아버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 서 사라졌다. 덧붙여 말하자면 클럽 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누구도 날 구해주지 않았다. 나는 교문까지 왔을 때야 간신히 저항의 소리를 냈다. "그만하지 못해!" 내 호소를 들어준 건지 단순히 아버지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와서인지 (분명히 후자겠지.) 이치가야가 내게서 손을 팍 놓았다. 그 바람에 나는 교문에 뒤통수를 있는 힘껏 부딪쳐서 순간 별이 보였다. 뒤통수를 문지르며 매섭게 이치가야를 노려보자 녀석은 나 따윈 거들떠 보지 도 않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거만한 태도로 역 쪽으로 가버리려고 했다. 나는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이치가야!' 하고 호통을 쳤다. 이치가야의 발이 딱 멈추고 녀석이 천천히 굵은 목을 이쪽으로 돌렸다. 쌍거풀 이 없는 날카로운 두 눈이 성가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타인을 전혀 믿지 않 는, 어딘가 완전히 거절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에도 울컥하고 말았다. 이치가야 녀석, 날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나는 녀석의 앞으로 돌아가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턱을 치켜올려서 녀석을 삐 딱하게 노려보았다. "어이, 이치가야. 이게 무슨 짓거리냐? 엉?" 도전적인 내 말에 이치가야가 희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양손도 주머니에 감 춘 채로 동요의 기색은 전혀 없다. ...이 녀석,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잖아?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사선이라면 지금까지 무 수히 넘어왔다. 이 정도는 가뿐하다구. "질질 끌고 가지 않나. 날 걸레로 착각하는 거야 뭐야? 잘 들어, 이치가야. 난 네 녀석의 친구가 된 적이 없고 부자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단 말이다. 꼴사나 운 낱짝을 보인건 네 아버지가 아니라 네 녀석이잖아!" 이치가야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하고 위협하기 전에 나도 이치가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나와 이치가야 사이엔 넉넉잡아 15센티의 신장차가 있었지만 기백만은 지지 않는다. 이치가야가 희미하게 눈을 크게 떴다. 학교 제일의 문제아 (나와는 다른 의미로) 에게 정면으로 반항한 녀석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 다. 의외라는 얼굴이 우스워서 나는 코웃음을 쳤다. "쫄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사실 난 그렇게 귀여운 녀석이 아니야. 겉보기엔 초 미형이라서 곧잘 오해받지만 말이야." 히죽 하고 입술을 치켜올리자 이치가야가 턱을 당겼다. 나를 감정하는 듯한 눈 빛이다. 체격은 불리했지만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구. 문득 내 멱살을 잡고 있던 팔의 힘이 느슨해졌다. 이번엔 내가 녀석을 의아해할 차례였다. 다시 보니 이치가야의 얼굴에서는 날 업신여기는 듯한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했지만 이 상황을 왠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아마노 나츠키였지?" 확인하듯이 물어보자 나도 녀석에게서 손을 뗐다. 웃옷 앞섶을 고치며 '학교에도 안 오는 녀석이 잘도 아네?' 하고 빈정거리자 이 치가야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튀는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단 건가." "칭찬의 말이라면 대놓고 말해줘." 진지한 얼굴로 대꾸하자 이치가야가 쿡 하고 코웃음 치며 나를 시선으로 핥아 오더니 내 오른손에 시선을 멈추고 턱을 흔들었다. 에? 그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아아, 아직도 구직 정보지를 움켜쥐고 있었나? ... 젠장. 시간 잡아먹었잖아.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덮밥집 알바로 결정되면 어떻 게 할거야? "알바 찾는 거야?" "에? 아..." 여기서 긍정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자 이치가야가 내 손에서 정보지를 빼앗아 넘겨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 치 며 '변변찮은것들 뿐이군.' 하고 욕을 곁들여 다시 던져주었다. 울컥하면서도 정보지를 집어넣는 날 보며 이치가야가 의외의 말을 했다. "편안히 돈 벌 수 있는 가게를 소개시켜 줄까?" 놀라 고개를 들자 이치가야는 따라오라는 듯 먼저 등을 돌려버렸다. "이봐... 잠깐 기다려. 이치가야! 난 역 뒤에 있는 덮밥집에 면접 보러..."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아직 교문 앞이란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건 만 그래도 이치가야는 나의 당황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먼저 가버렸 다. "이봐, 기다려! 이치가야!" 이대로 무시할 수도 없어서 나는 서둘러서 이치가야의 뒤를 따라갔다. 6 우리는 신주쿠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시부야에서 내렸다. 사실 난 떠들썩하고 다채로우며 생기 넘치는 이 거리를 꽤나 좋아한다. 시로는 시부야는 일 이외로는 올 곳이 못된다고 했지만 나는 가끔씩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훌쩍 나오기도 한다. 실은 내가 시로를 위해 산 머그컵이나 찻잔도 중앙 거 리에 늘어서 있던 노점에서 산 것이었다. 초보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가 자신의 작품을 길거리에서 파는 모습은 여 기 시부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게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 는 것이 즐거웠다.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 제품이 아니라 바로 자신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것 같은 만족감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치가야가 말한 아르바이트란 어쩌면 그런 가게일까? 그렇다면 의외로 재미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돈은 안 되겠지... 이렇게 멋대로 상상을 부풀리는 반면에, 이치가야의 소개라면 수상한 약 따위 를 취급하는 가게가 틀림없을 거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저기, 알바란 거 점원이야? 아니면 가게가 아니라 학원인가?" '웬 학원?' 하고 신기한 얼굴로 이치가야가 말해준 단어는 '부티크' 였다. "부티크라면... 옷?" 나는 이치가야의 등을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이치가야와 부티크라는 존재가 잘 매치되지 않아.' 라든가 '왜 그런 가게에 날 소개해주겠다는 거야?' 라든가 하 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는 것도 뭐해서 그대로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내 안색을 재빨리 읽은 이치가야가 귀찮다는 듯이 설명해주었다. "아는 사람이 디자이너 겸 점장을 맡고 있는 가게야." "아는 사람이란 거 어차피 클럽에서 낚은 여자 아냐?" "남자다, 클럽은 맞아." "어떤 남잔데?" "그냥 입 다물고 들어. ...취급하는 소재는 가죽뿐이야. 우리보다 5살 연상인 와타루라는 녀석이 붕제작업까지 전부 혼자서 해치우지. 옷에 구두에 액세서리, 뭐든지 가죽으로 만들어. 지금은 프리 스페이스로 가게를 경영하고 있어." "프리 스페이스가 뭔데?" "장소비만 내면 반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주는 전세 점포야. ...그런데 와타루 는 거기서 벌써 1년 반 가까이나 계속하고 있어. 뭐, 일단 장소비는 낼 수 있단 얘기다. 하지만 와타루 혼자서 뭐든지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들어서... 판매나 장식은 내가 가끔씩 도와주지만 와타루가 디자인하는 옷은 나랑 성격이 좀 안 맞아서 말이야." 그야 너랑 성격이 잘 맞는 녀석이 있겠냐? 아, 미안. 옷 얘기였지? ...이렇게 얼 버무리기도 했다. 아직 이야기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이렇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긴 뭐하지만 이치가야는 보기보다 나쁜 녀석이 아닌 것 같았다. 나 로선 게임이나 아이돌 얘기밖에 안 하는 같은 반 녀석들보다 말하기 편했다. "말하자면 도와줄 일손이란 거지? 이치가야, 의외로 좋은 구석이 있네?"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 이치가야가 날 노려보았다. 칭찬받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가? 나는 말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뭐, 속사정은 관계없다. 장소는 시부야, 게다가 부티크. 시부야도 좋아하고 옷 에도 까다로운 내겐 꽤나 운 좋은 아르바이트일지도 몰랐다. 그 때, 갑자기 이치가야가 걸음을 멈춰 난 녀석의 등에 부딪치고 말았다. 뭐하는 거냐고 어깨 너머로 날 힐끔 쳐다본 이치가야가 골목길에서 조금 들어 간 왼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린 역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 지 걸어와 있었다. 떠들썩한 역 앞과는 상당한 간격이 있다. "여기다." 이치가야가 가르쳐준 가게는 담쟁이 덩굴에 뒤덮인 낡은 3층 건물의 1층이었 다. 칠흑으로 칠해진 벽에 가죽제 간판이 매달려 있었다. 거기 뚫린 '반죠' 라는 한자 2개가 이 부티크의 이름인 듯 했다. 외견이 좀 수상했지만 어쨌든 이치가야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 내 발은 쇼윈도우에 장식된 옷을 가까이서 목격한 순간, 허공에서 그대로 멈춰버리 고 말았다. "하..." 순간 느낀 나의 놀라움을 이치가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변했다. "엄청난 센스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 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게 진짜 옷이냐고 생각하고 있지?" 덧붙여진 말에는 물론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취급하는 소재는 가죽 뿐이야. 브랜드 칼라는 검은 색이 기 본. 와타루는 어줍잖게 색깔을 쓰면 야해진다고 했지만 와타루가 디자인하는 옷 은 색기를 넘어서서 발정적이야." "...이치가야." "응?" "너 표현 끝내준다." "그거 고맙군." 패션에 까다로운 나도 아무래도 이건 좀 핏기가 가셨다. 철사로 만들어진 마네 킹인 듯한 오브제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거의 속옷이었다. 그... 여성용 란제리랑 똑같잖아? 다리 근처에 장착된 벨트 비슷한 것은 아마도 가터벨트. 솔직히 내 눈엔 정조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난 수상하면서도 섹시 만점인 의상을 겁에 질린체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저기, 이치가야. 여기 본디지 속옷 전문점?" "본디지보다 소프트한 노선을 추구하는 것 같아. 속옷은 일부 취급해." 반죠의 이것은 아무리 봐도 일상적으로 입을 옷이 아니다. 물론 세계적인 패션 쇼에서 입는 옷이라면 이 기발함이 먹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코스튬 플레이 파티나 매직 쇼, 아니면 뮤지컬 무대 의상인가? 아니, 그래도 망설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옷을 입고 한 발짝이라도 걸어 다니면 외설물 진열죄로 잡혀갈 것이 틀림없다고 질려있을때, "켄!" 종소리와 함께 중국계 음악과 화사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새까만 문을 연 인물에 나는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눈에 반죠 브랜드라고 알 수 있는 가죽 롱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사람은 긴 머리의 절세의 미녀... 가 아니라 가냘픈 몸매의 미청년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 이 와타루씨인 모양이다. 와타루씨가 입고 있는 슬립리스 드레스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거트 홀이 입혀 진 정방형의 가죽 천을 몇 장이나 이어서 만든 것이었다. 천끼리 거친 지그재그 로 꿰매져서 여기저기서 보이는 맨살이 묘하게 하얗고 에로틱하게 느껴졌다. 걸 치는 타입인 그 드레스엔 단추나 지퍼 같이 옷의 좌우를 연결해주는 장치가 아 무것도 없이 그저 여러 겹으로 허리에 두른 가느다란 벨트만이 드레스 앞이 벌 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고 있었다. 그래서 와타루씨의 목... 옷깃에서 발치... 옷자락까지에 거대한 한 줄의 슬릿이 들어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실용성 제로의 옷을 잘도 디자인했다고 와타루씨의 센스를 의심하 고 싶어졌다. 하지만 확실히 섹시하긴 했다. 본 적도 없는 의상의 세계를 눈앞에 두고 말을 잃은 내 옆에는 와타루씨와 정 반대로 어깨도 넓고 덩치도 있어서 남자다운 이치가야가 뭐라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켄, 오늘은 제대로 학교에 다녀왔구나." "그래?" "그렇다니까. 새 학기 들어서 아직 1번 밖에 못 봤는걸. 안돼, 학교는 열심히 다녀야지. 아버지께서 걱정하셔." "그런 녀석 걱정하라고 냅 둬." "못 말려! 켄은 사실은 아버지를 좋아하면서 또 그런 말을 한다니까."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이치가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렇게 상냥 하게 웃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니 처음 알았다. 대담한 의상과는 반대로 너무나 순수한 미소의 와타루씨가 내게 시선을 보냈 다. 그가 생긋 미소지은 순간, 반짝반짝반짝 하고 소녀틱한 효과음 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켄이랑 수다를 떨어버렸네. 그러니까, 나는 루비 완샹의 디자이너 겸 점장인 토리카이 와타루. 와타루라고 불러줘." 반죠가 아니라 완샹이구나. 혹시 광동어인가? 와타루가 오른손을 내밀자 나는 망설이면서도 악수에 응했다. 하얗고 가냘픈 손이었다. 내가 몇 배나 건장해 보였다. "저기... 넌 켄의 친구?" '친구가 아니라. 그냥 클래스메이트예요.' 하고 정정하려고 한 날 밀치고 이치 가야가 말했다. "같은 과인 아마노 나츠키. 아르바이트를 찾는다고 해서 데려왔어. 어때, 와타 루? 이 녀석 쓸만해?" "이... 이봐, 이치가야!" 잠깐 기다려! 나는 얼른 이치가야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건 아마도 이 점장... 그러니까, 와타루씨처럼 선정 적인 의상을 입고 손님을 상대하라는 거잖아? 난 란제리 펍의 호스트가 될 생각 은 전혀 없어! "난 아직 여기서 알바 하겠다고 결정하진..." 그럴싸한 핑계거리가 없을까 고민하는 내 앞에 와타루씨와 이치가야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정말? 우와, 기뻐! 고마워, 나츠키! 실은 널 본 순간 꼭 루비 완샹의 옷을 입히 고 싶다고 생각했어. 나츠키가 알바로 들어와 주면 가게가 확 이미지 업 할거야! 아아... 감격했어. 고마워! 근데... 학생은 아르바이트비가 시급으로 어느 정도 야? 800엔? 너무 싸서 미안하네. 1000엔은 어때? 사실 나츠키가 왠지 나의 창 작 욕구를 자극해주거든. 벌써 나츠키를 위해 한 벌 디자인하고 싶어졌어." "그럼 결정이다, 아마노." "겨... 결정이라니. 어이, 이치가야!" "아아, 다행이다! 이제 나도 조금은 신작을 만들 시간이 생길 것 같아!" 완전히 안심한 와타루씨가 망연자실해져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나를 돌아보 고 솔직한 감격을 터트렸다. "그래서 말이야, 나츠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 온 김에 오늘부터 가게에 서 보지 않을래? 봐봐, 나츠키에게 어울릴만한 옷이 잔뜩 있잖아. 평범한 옷보다 조 금 기발하지만 나츠키라면 절대 입을 수 있어. 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의 선 이 곱고 흔치 않을 정도의 미인이니까. 자아, 이쪽으로 와봐. 옷을 입어보자, 응?" "으..." 이치가야가 '가.' 하고 엉덩이를 무릎으로 걷어차자 나는 원망스럽게 그를 노려 보았다. 내가 불평하기 전에 이치가야가 예방 선을 쳤다. "나랑 안 맞는다는 의미를 잘 알겠지?" "...네가 입으면 무시무시한 오카마 같겠다." 이치가야가 중지를 세웠다. 나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와타루씨가 빨리 오라 고 재촉해서 나는 각오를 하고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멋져...!" 감동과 한숨을 동시에 흘린 것은 와타루씨였다. 피팅룸에서 나온 나를 보고 거 만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이치가야까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입은 것은 믿어지지 않지만 팬츠 수트... 라고 했다. 엄청 짧아서 배꼽이 다 드러나는 상의는 개목걸이... 가 아니라 목 벨트가 붙은 튜브 탑. 하지만 이 옷은 아이디어가 꽤 기발해서 벨트를 몇 개나 거칠게 꿰매서 한 벌의 옷으로 만 든 것이었다. 이 옷을 몸에 걸칠 때는 벨트를 채우는 요령으로 입으면 되는 것이 다. 단지, 역시 와타루씨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같이 피부의 노출도가 상당히 높 았지만 말이다. 가죽을 맨살에 입는 것이 루비 완샹의 법칙인 모양인지 보통 속옷을 입는 것은 금지. 대신 와타루씨가 제목대신 내게 준 것은 가죽제 T백 브리프였다. 그래서 지금 가까스로 내 국부를 감싸고 있는 것은 그 브리프 한 장과 굵은 벨트 한 개 뿐!! 허벅지나 종아리, 그리고 팔꿈치에서 손목까지도 상의와 같은 벨트천으로 두르는 것이 이 벨트 팬츠 수트를 바르게 입는 법인 것 같다. 허리를 감은 굵은 벨트에 이어진 가죽끈이 허벅지를 감은 벨트 팬츠를 균형있게 묶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해주었지만 내가 볼땐 팬츠는 이름뿐이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레 그워머 비슷한 이 옷은 앞에서 보면 거의 비키니, 뒤에서 보면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날엔 그냥 변태나 노출광인 줄 알 것이다. "몸에 이걸 붙여줄게. 호랑나비 분신이야. 좌우 크기가 달라. 섹시하지?" 와타루씨가 그렇게 말하며 내 드러난 엉덩이와 배꼽 왼쪽에 나비 스티커를 붙 여주었다. 이게 의외로 옷의 대담함과 매치되어서 나는 무심결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빠져들고 말았다. 감동하는 내 옆에서 와타루씨가 내 중심의 헤어라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모하면 편리해. 난 전부 깎았어. 패션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거든." 와타루씨가 천사처럼 웃었다. 혹시 이 사람 엄청 순진한 거 아냐? 이리하여 나는 T백을 입은 다리 사이를 굵은 벨트 밑으로 슬쩍슬쩍 드러내며 가게에 서게 되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봐, 아마노. 너 살인적으로 잘 어울린다. 와타푸랑 막상막하인걸." 이치가야가 쿡쿡쿡 하고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이치가야가 일부러 칭찬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난 정말로 이런 걸 입으면 일본 최고라니까!! 생각해보면 난 장사하러 2번가에 출몰할 때, 가끔씩 본디지를 즐겼다. 굶주린 남자들을 도발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하드게이인척 한 것이다. 물론 루비 완샹의 디자인은 '하드 게이' 와는 좀 인상이 틀렸지만 가죽이라는 근사한 소재를 맨살 에 걸치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게다가 디자인도 아주 도발적이고 외설적이라 입고 있기만 해도 몸이 묘하게 뜨거워진다. 나를 핥듯이 감상하던 와타루씨가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어떡하면 좋아. 가슴이 두근거려. 내 옷이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을 보 는 건 처음이야. 보면 볼 수록 흥분돼. 어째서 이렇게 섹시한 거야? 굉장해. 나 정말 기뻐!" 와타루씨가 감격하자 나까지 그런 기분이 들어 '그렇게 기뻐해 주면 뭐...' 하고 굽 높은 부츠까지 빌려 거울 앞에서 빙글 돌기도 했다. 호들갑스럽게 기뻐한 와타루씨가 선반에 디스플레이 해놓은 초커나 뱅글까지 출동시켜서 더 장식해 주었다. 내 목세 초커를 장식하던 와타루씨가 문득 내 가 슴으로 시선을 떨어뜨려 덩달아서 그곳을 보자 거칠게 꿰맨 틈새로 유드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깜짝 놀라서 조금 움직이려고 하자 그보다 빨리 와타루씨가 그곳을 눌러 난 무심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와타루씨는 내 유드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어떻게 할래? 피어스 홀을 뚫어줄까? 이 '단층' 시리즈를 입을 때는 니플 피어스를 매체하면 멋진 액세서리가 되는데." 어때? 하고 사심없는 얼굴로 물어보자 나는 등줄기에 희미한 한기를 느끼면서 도 슬쩍 와타루씨의 가슴을 훔쳐보았다. 가슴 슬릿 안쪽에 단단하게 솟아오른 유드를 발견, 엷은 복숭아색인 그곳엔 백금 피어스가 꽂혀있어서 자랑스럽게 고 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확실히 아름답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나는 되도록이면 몸에 손을 대지 않는 편이 몇 배나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다. 액세서리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본 질적인 아름다움으로 승부하고 싶다. 게다가 유두에 피어스 같은 걸 장식해봤자 시로는 절대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풍스러운 면을 가진 남자였다. 그래 서 난 웃으며 와타루씨의 손을 밀어냈다. "난 귀 이외엔 구멍을 뚫고 싶지 않아요." "그래? 하지만 평범한 니플을 남에게 보이는 게 오히려 부끄럽지 않아?"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는 듯한 와타루씨의 뒤에서 이치가야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와타루씨는 얼굴은 예쁜데 하는 말이 묘했다. 정말 뭐랄까, 지나치게 순수하달까... 하지만 순수함으론 완패라도 대담함이라면 지지 않는다. "이대로 놔두지 않으면 미움 받아서요." "미움 받아?" 나는 그렇다며 조금 득의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거인이 태어난 그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해서요." "아마노, 가족이 아니라 여자랑 살고 있었냐?" "여자가 아니라 남자야." "남...!" 이치가야가 눈을 휘중그래 떴다. 나는 불만이라도 있냐며 허리에 손을 대고 가 슴을 폈다. "뭘 놀라고 그래, 이치가야? 너 호모 처음 보냐?" "호...?! 아니, 그게..."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대답을 하며 이치가야가 왠지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갑자기 우위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난 호모다. 호모라서 뭐가 잘못 됐냐? 흥. "나의 시로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나만을 진지하게 사랑 해주는 초일류 남자야.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나는 내 몸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 그렇게 말한 나는 시선을 거울 속의 자신으로 돌렸다. ...아아, 사랑을 실감하는 나는 평소보다 몇 배로 빛나는구나. 이렇게 비뚤어진 저항의식이 여기저기서 제 무덤을 판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물어보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더 많 이 그 말을 입에 담아서 언령의 위력을 가지고 싶었다. 계속 말하면 언젠가 절대로 현실이 될 테니까. 시로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 을 정도로 내게 홀딱 빠질 날이 언젠가 꼭 올 테니까 말이다. 거울 속에 있는 평소와는 다른 세계에서 숨쉬는 나를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자 종소리가 울렸다. 와타루씨가 '어서오세요.' 하고 드레스 자락을 펄럭였다. 그 쪽 을 보자 꽤나 멋진 남자였다. 그 뒤로 다른 손님이 더 들어왔다. 이쪽은 여자 두 사람. 좁은 가게 안이 그것만으로도 꽉 찼다. 순간, 누가 이런 차림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쑥스러워하면 손님은 그 이상으로 쑥스러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담하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치가야를 보자 소파에서 몸을 일으킬 기색도 없었다. 들고 온 MD를 듣고 있 는 줄 알았더니 시선으로 '가.' 하고 명령했다. 손님을 상대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이치가야에게 명령받는 것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소개인이니까 말이다. 와타루씨는 아마 단골 손님인 듯한 남자를 접대하느라 바빴다. 여자 손님을 힐 끔 보고서 내게 '부탁해.' 하고 윙크를 보내준다. 와타루씨의 시선을 따라 나를 본 남자 손님이 갑자기 눈이 둥그레졌다. '새로 온 애야?' 하고 물어보는 입이 벌써 헤벌어져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쪽으로 걸어와서 집요하게 날 훑어보았다. "오늘 막 들어온 신입이예요." 와타루씨가 날 소개해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려고 하자 갑자기 그가 엉덩이 를 만졌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사람은 와타루씨였다. "안돼요, 토시야씨! 여긴 호스트 클럽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아시겠어 요! 예전 아르바이트생도 토시야씨가 엉덩이를 만지니까 그만 뒀잖아요. 정말이 지! 그렇게나 만지고 싶으면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제 엉덩이를 만지세요." 그 발언은 충분히 호스트 클럽 같은데, 와타루씨... 곤혹스러워하는 내게 토시야라는 손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미안, 미안.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지고 싶어졌어. 그런데 알바생의 이 귀여운 엉덩이는 얼마야?" "나츠키의 엉덩이는 파는 물건이 아니라구요. 살 거라면 옷을 사주세요, 토시 야씨." "으음. 그럼 신작을 볓 벌 볼까?" 진담인지 농담인지 잘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이 치가야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루비 완샹의 일상대화인 모양이다. 게다가 와타루씨와 토시야의 대화는 왠지 신기하게도 불쾌하지 않았 다. 그야 이곳 손님들은 루비 완샹의 디자인에 매혹되어서 오는 거니까 엉덩이 노출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눈앞에 엉덩이가 있으면 만져보고 싶어지는 기분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라도그렇게 납득하자 왠지 기운이 생겼다. 괜찮아. 오늘의 난 아주 근사해. 좋아, 맡겨두라고!! "어서 오세요." 나는 와타루씨처럼 웃는 얼굴로 여자 손님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다 상당히 키가 크고 워킹도 아름다웠다. 이런 기발한 옷에 흥미가 있다는 것은 혹시 연예계에 관계된 사람인가? 마네킹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날 본 순간 노골적으로 눈 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의 뺨이 홍조가 돌고 눈동자가 흥미로 빛나기 시작했 다. 나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2번 가에서 배운 화술을 개시했다. "어라? 혹시 누님들 그러니까... 아, 분명 그거다. 전에 무대에 나왔었죠?" 여자 손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자신들을 도대체 누구와 착각하고 있 는지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나는 그녀들이 기대하고 있을 대답을 완벽한 미소와 함께 선물했다. "지난 주에 파르코 극장에서 댄스 뮤지컬을 봤는데... 저기, TV에서도 소개 했 었잖아요? 그 무대 제 2막에서 무지 목잡한 스텝을 췄던 두 사람... 에? 아니라 고요? 하지만 둘 다 그때의 예쁜 누님들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러니까 워킹이 장난 아니게 멋있어서 그때의 댄서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아니에요? 에에, 정 말? 절대로 그 때의 두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녀들은 내가 연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하의 미소년이 이렇게까지 칭찬 을 퍼부은 데다 숭배의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도저히 빈손으로 가게를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그다지 싫지 않은 얼굴로 '댄서설' 을 부정했지 만 '우린 재즈 댄스를 배워. 그 때문인가?' 하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너도 멋있어. 그 바지 정말 근사해. 야하지만 입을 만 하겠어." "이번에 무용회를 하거든. 작은 무대지만 거기서 입을 옷을 찾고 있어." 그렇게 말한 그녀들이 흥미진진하게 내 하반신을 분석했다. '이거 좋네.' 하고 몇 번이나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게 어디에 어떤 상품이 놓여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 녀들을 안내하며 비슷한 디자인을 찾아 헤맸다. 그녀들은 물건을 볼 때마다 '아, 이거 멋지다.' 라든가 '클럽에서 덛보일것 같 아.' 하고 완전히 뭔가를 구입할 마음이었다. 잘 보니 이치가야는 어느새 안쪽으 로 피해 있었다. 손님 앞에서 뒹굴거리는 건 이미지적으로도 안 좋다고 깨닫고 배려한 거라면 그 녀석, 의외로 상식이 있잖아? 이리하여 누님들은 드레스와 바지를 1벌씩 사주셨다. 첫 접객 매상은 세금별도 금액 6만 7천엔, 감사합니다!! "있잖아, 나츠키. 나중에 우리랑 춤추러 가자." "나츠키랑 같이 다니고 싶어. 응? 어때? 셋이 여기 옷을 입는 거야." "진까? 정말 기뻐. 그럼 약속." 나는 시로가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를 때려눕힐 만큼 경박한 대화를 나누 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쉬움을 가장하며 그녀들을 배웅하고 이제야 돌아갔 다며 무을 닫고는 뻐근한 목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 돌아서자 와타루씨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뛰어왔다. "굉장해! 너무 굉장해, 나츠키! 혹시 접객이 특기야?" 으음, 특기라고 하자면 특기일지도 모르겠네. 손님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솜씨 로는 2번가에서 나를 따를 자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떠올리고 싶지 도 않은 옛날 이야기다. "그냥 어쩌다보니까. 운이 좋았어요." 그런 말로 일단 얼버무렸다. 7 와타루씨가 맡았던 남자 손님은 액세서리만 사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렇겠 지. 그렇게 남자다운 타입한테 루비 완샹의 옷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역시 나 정도 미인은 되어야, 하하하. 자화자찬에도 싫증난 난 손님이 헝클어트린 의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와타루씨는 나의 그런 세심한 점도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내가 지시하기 전에 정리해주다니 정말 감격했어." "정리는 내 일상이거든요." "아, 알겠다. 나츠키의 시로씨는 혹시 퇴근하고 돌아오면 현관에서 상의, 복도 엔 바지, 거실엔 양말, 소파엔 넥타이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그런 타입이 지?" "정답. 그래서 내가 일일이 시로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워서 개는 것이 일상이 에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서로 아하하하하 하고 웃고 있자 쓴웃음이 날아왔다. "너희들 완전히 친구가 되었군." 조금전까지 안쪽에 틀어박혀 있던 이치가야가 적당하게 물이 빠진 청바지와 재킷 (루비 완샹의 제품이 아닌 극히 정상적인 브랜드였다.) 으로 갈아입고 나타 났다. 옷에 맞춰서 머리형까지 바꿨다. 왁스를 사용해서 가볍게 쓸어 올린 앞머 리느 은발에 검은 블릿지가 악센트를 줘서 지독하게 멋있었다. 사복을 입은 이 치가야는 너무 멋있었다. 이 녀석 꽤 잘생긴 녀석이잖아? 이치가야가 여기서 알바했을 땐 분명 이런 차림으로 일했을 거라고 납득한 나 는 안심했다. 투박한 이치가야가 T백으로 거기를 감추고 다리털을 드러낸 체 접 객하는 것은 상상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봐, 이치가야. 너 왜 학교에 안 오는 거야?" 그냥 물어봤던 질문에는 무성의한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재미없어서. 그것보다 아마노." 나는 '응?' 하고 이치가야를 올려다보았다. 이치가야는 다시 한 번 나를 꼼꼼히 감상한 뒤, 흠 하고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이런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문제아 이치 가야 켄 그대로다. 부드러운 시선이나 말투는 와타루씨 전용인가? 혹시 이 녀석 와타루씨에게 특 별한 감정을 가진 게 아닐까? "그런데 아마노. 너 여기서 일하기로 한 거지?"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대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치가야의 질문에는 아까 팔린 상품 자리에 다음 상 품을 추가하면서 와타루씨가 대답해버린다. "있잖아, 나츠키. 바지는 한 벌 더 선물로 줄게. 그리고 일할 때 의상 말인데 일 단 3벌 정도 더 골라줄래? 그렇지... 지금 입고 있는 수트와 다른 타입이 좋겠다. 입어보는데도 용기가 필요할 정도로 강렬한 걸로 하자. 나츠키가 실제로 입고 손님들에게 이미지를 확실하게 전해주면 좋겠어. 예전 알바생은 쑥스러워하는 바람에 노출도가 높은 옷은 점처럼 입지 않아서 곤란했지만 나츠키라면 괜찮겠 지. 정말 다행이야." "으..." 이렇게 해서 나의 아르바이트는 결정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치가야는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질 않나. "타케와키한텐 입 다물어 줄 테니까 안심해라." 그렇다 이제 와서 변명하는 것도 뭐하지만 우리 학교는 아르바이트 전면 금지 인 것이다. 몰래 일할 생각이었는데 이걸로 이치가야에게 알려지고 말았단 얘기 다. 말하자면 약점을 잡힌 것과 다름없었다. "타케와키에게 입 다물어 주는 대신 혹시 우리 아버지가 여기 오면 나랑 와타 루가 같이 나갔다는 건 절대 비밀로 해줘. 알았지?" 어째서 아버지가? 그리고 나간다니 어디로? 추궁하려는 내게 이치가야가 빙글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팔린 상품의 금액을 매상 표에 기입하고 있는 와타루씨에게 가서 얼굴을 갖다대고 뭐라고 말했다. ...그렇다기보다 '지금부터 밥 먹으러 안 갈래?' '뒷일은 아마노한테 맡기면 된다 니까.' '오랜간만에 춤추러 가자, 응?' '맨션까지 확실히 데려다줄 테니까.' ...등 등. 너 아저씨냐?! 하고 뒤에서 말참견하고 싶어질 만큼 뻔한 말로 꼬시고 있었 다. 그에 반해 와타루씨는 곤란한 듯이, 하지만 딱히 싫은 건 아닌 듯한 쓴 웃음 을 입가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이치가야를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꽃봉 오리가 터지는 듯한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아하... 나는 씨익 웃고 말았다. 이 두 사람 어쩌면... 아마도 아직 연인은 아니 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식하는 관계인 모양이다. 왠지 상대방이 신경 쓰여서 마음을 떠보는 단계. 나는 그런 풋풋한 공기르 ㄹ 두 사람의 사이에서 느꼈다. 아아, 난 정말 어른인가봐. "가게라면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말한 날 돌아본 이치가야가 입술을 한쪽만 치켜올렸다. 눈치가 좀 있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주저하는 와타루씨에게 반쯤 강제로 가죽코트를 입혀주는 이치가야는 '아마노도 저렇게 말하잖아.' 하고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와타루씨도 망설이면서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금전등록기 쓰는 법은 알고 있어요. 아, 몇 시쯤 가게에 돌아오세요?" "안 돌아올 거니까 매상금과 가게 열쇠는 와타루네 신문 투입구로 넣어줘. 폐 점은 8시 정각에 부탁해." 일방적으로 말한 이치가야는 성큼성큼 계산대로 가서 종이와 펜을 꺼내 슥슥 간략한 지도를 그려서 그 메모와 열쇠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이쪽이 바깥 셔터고 이 열쇠가 뒷문, 이 놋쇠열쇠가 와타루의 맨션 키. 이걸로 오토록이 해제돼. 맨션을 나올 땐 열쇠 없이 열리니 안심해." 이치가야는 빠른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거만하게 덧붙였다. "절대로 돈 들고 내빼면 안돼. 그랬다간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다." 나로선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안심해. 나의 시로는 사쿠라다몬(일본 경시청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니까." 웃는 얼굴로 정체를 밝히자 이치가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잠시후에 최고의 신원보증인이라며 눈가를 누그려트렸다. 그는 안심한 얼굴로 내 손에 열 쇠를 쥐어주었다. "와타루의 맨션은 여기서 걸어서 3분이야. 괜찮겠지?" OK하고 대답하자 이치가야는 다시 와타루씨에게 돌아가서 그 가느다란 허리 에 살짝 팔을 감았다. 감은 팔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노 골적으로 히죽거리자 이치가야가 울컥해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 녀석, 불만있냐?" "별로?" "나츠키, 미안해. 첫날인데 이런 부탁까지 해서. 그리고 내일도 와줄래?" "정말 괜찮아요. 이쪽이야말로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 아마노. 아, 돌아갈 땐 조명 전부 꺼둬. 폐점하는 순서는 그 전화옆에 있 는 파일에 전부 써뒀어." "네네, 알았습니다." 빨리 가라고 쫓아내는 내게 와타루씨의 허리를 안은 이치가야가 몰래 혀를 내 밀었다. 나도 지지 않고 한쪽 눈을 까뒤집어 줬다. 뭐, 열심히 해라. 와타루씨에 대해선 어쨌든 응원해주지. "편한 알바를 소개해주기도 했고 게다가 사랑 문제에서 나는 지금 이치가야보 다 축복 받았잖아. 누가 뭐라도 나랑 시로는 남들이 부러워할 러브러브 커플이 니까. 이 정도 봉사는 내가 참아야지." 이런 소리를 시로가 들었으면 애차인 스카이 라인으로 치어죽일 것이다. 나는 혼자서 쿡쿡 웃으며 가게 안의 BGM을 재즈 태널로 바꾸고 아직 천천히 보지 못했던 많은 의상들을 보았다. 아까 와타루씨가 이 중에서 3벌 정도 골라도 좋다고 했었지? 실은 난 옷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쇼윈도우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의 모 습은 지금은 없었다. 계산대 옆에 있는 시계로 확인한 시각은 6시 반 조금 넘었 다. 보통 사람들은 옷을 사기보다 밥을 벅으로 갈 시간이라고 멋대로 상각한 나 는 희희낙락하게 의상 고르기에 전념하며 내일은 뭘 입을까 하고 들뜨고 말았 다. 어떻게 입어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어진 드레스에 게이의 향취가 풍기는 재킷. 여성의 속옷을 그대로 가죽으로 만든 듯한 옷이나 강렬한 섹스어필을 느낄 수 있는 옷 등, 흥미를 자아내는 디자인은 셀 수 없었다. 이것 도 저것도 와타루씨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만들었다는 느낌이 여실하게 전해져 오는 작품이다. 옷에 대한 애정이랄까? 그런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치가야도 와타루씨의 그런 면에 끌린 걸까? 어쨌든 지금 가게 안엔 아무도 없으니까 제일 뇌살적인 드레스를 입어볼까? 하고 두근거리고 있자 종소리가 딸 랑 하고 울렸다. 손님이다. 재빨리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고 어서오세요 하고 웃는 얼굴로 문 쪽으로 돌아 서자 이게 웬일인가? "......!" 이, 이, 이 이치가야네 아버지잖아?! 뭐라고 인사해야 좋을지 고민한 끝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당연히 그쪽도 내 정체를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토리바이 점장 있습니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아들이 아니라 와타루씨였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침착한 분위기였다. 그것보다 도대체 여긴 뭘 하러 온 걸까? 어떻게 와타루씨를 아는 걸까? 그렇다 는 건 아마도 아들이 루비 완샹에 드나드는 것도 알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설마 아버지도 아들처럼 루비 완샹의 고객... 일 리 없지. 하하. "저어, 점장님은 아까 식사하러 나가셨는데요." 거짓말을 하는 건 고역이었지만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술술 둘러 댈 수 있었다. 내 설명을 듣는지 마는지 이치가야의 아버지가 소파를 가리키고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평범한 아저씨가 눌러앉아 있으면 루비 완샹의 이미지가 망가져서 난처했지만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었다. 어쩌 면 뭔가 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근데 벌써 앉아 있잖아. "점장님은 오늘은 안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편히 앉아서 후우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 희미한 혐오 감이 스쳤다. 그야 그렇겠지. 분명 와타루씨도 아버지 세대가 이런 패션을 이해해주길 바라 지도 않을 테고 나도 '어울리네요,' 하고 칭찬해줄 거라곤 애시당초 기대하고 있 지 않았다. '뭐냐! 그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꼴은!' 하고 호통 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당신은 여기 판매원인가요?" "오늘부터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입니다." 내가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시선은 가게 안 을 방황했다. 피팅 룸이나 계산대 안쪽에 있는 사무실. 그것은 마치 와타루씨가 숨어있는지 의심하고 찾는 듯한 시선이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용건이냔 말이다. 문득 아버지가 나를 보았다. 한동안 빤히 감상하더니만 '자네...' 하고 입을 열 었다. "잠깐 걸어봐 주겠어요?"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하게 소파 앞을 지나쳤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도 중에 빙글 돌기도 하고 대담하게 포즈까지 취해 주었건만 아버지는 공감하지도 감동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신기한 듯이 루비 완샹의 옷을 입은 내 모습 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좀 더 걸을 까요?" "이제 됐습니다. 고마워요." 감사의 감사도 느껴지지 않는 인사와 함꼐 패션쇼가 끝났다. 아버지가 서류가방에서 외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는 명품 라이터로 불을 붙 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 부자가 독같이 흡연가로군. 아까 이치가야가 담배를 피울 때도 느꼈지만 이 가게는 바로 위에 커다란 환풍 기가 있어서 냄새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 "경영은 순조롭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물어봤자 가게에 선 것은 오늘이 처 음이고 매상목표도 모르는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지만 역에서 엄청 떨어져 잇 는 악조건의 입지를 보면 순조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 대로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도 뭐해서 그냥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재떨이에 재를 털던 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치가 야의 꽁초가 거기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치가야가 왔던 것이 들켰나 싶어서 몸이 굳어진 내게 아버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손님의 꽁초는 금방 처리해야 합니다. 나중에 재떨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불쾌 하지 않도록..." "...아, 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참견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옳은 말이라 참고가 되었다. 뭐야, 이렇게 보니까 의외로 좋은 아버지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치가야는 아버 지를 질색하는 걸까? 뭐 부자지간이란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가족이 랍시고 참견하는 것이 귀찮아서 죽을 것 같겠지. 나도 옛날엔 그랬다. 아버지의 과도한 애정이 거추장스럽고 곤란하고 두려워 서 숨이 막힐 것 같았으니까 이치가야의 아버지는 그렇게 거의 폐점 시간까지 눌러앉아 있었다. 혼자서 느긋하게 패션쇼를 즐길 생각이었지만 벌써 8시, 유감 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8시에 가게를 닫으라고 해서 슬슬..." 돌아가시길 바란다는 뜻을 은근히 전하자 아버지는 지금 처음으로 깨달은 것 처럼 손목시계를 보고 쇼윈도우 너머로 바깥을 쳐다보고는 이번엔 다시 벽시계 를 확인했다. 당연히 와타루씨는 돌아오지 않는다. ...안되셨습니다, 아버님. 와타루씨는 지금 당신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와타루씨를 만나고 싶으면 휴대전화에 전화를 하면 될 텐 데, 안 한다는 것은 휴대전화 번호를 모른다거나 혹은 와타루씨는 휴대전화가 없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와타루씨가 아니라 혹시 자기 아들을 기다 렸던 건가? "저기, 뭔가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면 제가 전할게요." "아니, 됐습니다. 대단한 용건도 아니니까요." "그래요..." 왠지 무뚝뚝해서 말도 붙일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발걸음을 돌려서 금전등록기 안에 있던 현금과 팔린 옷의 가격표를 지정된 주머니에 채워 넣었 다. 남은 세세한 계산은 와타루씨가 해줄 것이다. 피팅룸에서 나를 보고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제 겨우 내 정체를 깨달은 건가? 너무 늦다구. "자네 혹시 켄의 학교의..." "같은 과인 아마노예요." 예의바르게 인사하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나 켄이 신세 많이 지 고 있다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덩달아서 나도 몇 번이나 몸을 숙이고 말았다. "아아... 같은 과 친구인 아마노군이었군요. 그렇군요.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는 군요. 이것 참... 아아, 오늘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우리 아들과 사이좋게 지 내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켄과 함께 하교했던 것 같은데 켄도 여기에?" "에...?! 아뇨, 역에서 헤어졌는데요." "...그렇군요." 알바는 금지라고 설교할 줄 알았는데 아들에게 무른 아버지는 그 친구에게도 물러 터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이제 폐점할 건데 죄송하지만 나가주시겠어요?" 나는 다시금 어렵사리 재촉하며 열쇠와 매상금을 배낭 속에 넣었다. 아버지가 내가 손에 든 지도를 보고 물었다. "지금부터 어디 갈 건가요?" "에? 아, 네. 점장님 댁에 매상금과 가게 열쇠를 전해드리려고요." "...제가 전해줄까요?" "에?" "시부야는 흉흉하니까요. 게다가 거금을 들고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요." "아니... 그게, 괜찮아요." "그렇다면 토리카이 점장 댁까지 데려다주죠. 돌아갈 때는 역까지... 아아, 택 시가 안심할 수 있겠군요." 그... 그렇게까지 과잉보호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래선 이치가야도 곤란했겠다. "정말로 괜찮아요. 혼자가도 충분합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만 전 이치가야가 당신한테 반항적인 이유를 왠지 알것 같 습니다... "하지만 만약 토리카이 점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처할 텐데요." "아뇨. 정말로 괜찮아요. 맨션의 신문 투입구에 넣어두라고 했거든요." 나는 완강하게 아버지의 호의를 사양했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 맨션 앞에서 이 치가야와 아버지가 마주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치가야는 내게 분명히 말했었다. 아버지한텐 비밀이라고 말이다. 약속을 지 키는 것이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 이치가야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벌써 8시가 넘어서요. 죄송해요. 저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고집 센 나를 보고 아버지는 마치 이치가야를 앞에 두고 있을 때처럼 난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체념한 듯이 문으로 향했 다. 그리고 '조심해서 들어가요.' 하고 자식을 가진 아버지다운 말을 남기고 루비 완샹을 나갔다. 아버지가 간 것을 확인한 나는 드디어 가게의 전기를 끄고 셔터 를 내렸다. 이치가야가 적어준 지도대로 길을 따라 맨션까지 가서 정문 현관에서 넘버가 적힌 키 홀에 열쇠를 밀어 넣고 돌리자 자동문이 열렸다. 한 걸음 들어간 바로 정면에는 4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와 바로 왼쪽에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엘리베이트를 선택해서 401호로 향했다. 신문 투입구에 열쇠와 매상금을 밀어 넣자 괜히 사랑의 둥지가 그리워져서 나 는 걸음을 재촉해서 역으로 향했다. 8 나는 여느 때처럼 느지막이 저녁식사 준비를 끝내고 그릇이나 수저, 찻잔등을 코타츠에 늘어놓았다. 원룸 맨션인데도 여전히 만년 코타츠 생활이다. 쿠션을 몇 개 끌어 모아 바닥에 누워서 리모콘으로 TV를 켜자 수염이 드문드문난 뉴스 캐서트가 근엄한 얼굴로 주가폭락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 뉴스가 나온다는 건 아아, 벌써 10시가 넘었잖아? 무지 배고프다. 하지만 사실 난 지금까지 한번도 먼저 밥을 먹은 적이 없다. 혼 자 먹는 것보다 시로와 마주보며 먹는 편이 맛있기 때문이다. 아이즈 여행 이후로 시로는 어쨌든 거의 매일 밤 집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성실 하게 귀가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내가 혼자 밥을 안 먹는다는 것도 관계과 있다고 생각한다. 날 굶겨죽이면 곤란하다는 책임감의 표시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오기로라도 먼저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시로를 1초라도 빨리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선 공복 상태로 기다릴 것. 이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시로는 이렇게 강요젹인 날 성가시게 느끼겠지만 나 로선 효과가 좋으면 그걸로 좋았다. 시로 생각만 하고 있었더니 여느 때처럼 뒤가 꾸욱 수축하고 말았다. 나는 단 단한 바닥 위에서 허리를 꾸물꾸물 움직이면서 시로의 매끄럽지 못한 애무나 좀 난폭한 혀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난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기분에 가득 찼다. "빨리 돌아와... 시로. 함께 밥을 잔뜩 먹고 오늘도 잔뜩 사랑을 나누자. 내가 서비스 잘해줄게, 응? 시로..." 시로 생각으로 마음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눈을 감자 자연히 입가가 느슨해 지고 말았다. 자식이 없는 전업주부란 어쩌면 이런 느낌일까? 24시간 서방님 생각만 하면서 서방님만을 기다리며 '오늘은 어떻게 해서 하루의 피로를 풀어줄까?' 라든가 '요 즘은 원 패턴이니까 야한 속옷으로 바꿔볼까?' 하고 말이다. 나라면 그런 생각만 으로도 굉장히 행복할 것이다. 물론 나는 하루라도 빨리 형사가 되어 명실상부한 시로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 꿈이지만 말이다. 이 꿈이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기쁠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 내가 여 자였다면 전업주부도 나쁘지 않았다. 시로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잔뜩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일이 낙 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거렸더니 마음이 따끈따끈해져서 그대로 잠들 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뭔가가 몸을 감싸 안는 기척에 눈을 떴다. 시야에는 잠이 들었을 때처럼 수염 캐스터가 말하고 있었다. 함께 웃고 있는 사람은 야구 선수인가, 아마도 주가폭락 뉴스는 벌써 끝이 난 모양이었다. 등뒤에서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샤워 물줄기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 시로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내 어깨에서 담배냄새가 배인 양복이 떨어졌다. 시로가 덮어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냥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시로는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말 이외의 상냥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보여주 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시로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아, 시로, 시로, 시로. 어째서 이렇게 좋은 거지, 시로? 고마움을 담아 양복을 끌어안은 나는 참지 못하고 목 깃에 키스했다. 시로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기에 몸 이곳저곳이 시로에 굶주려 신음했다. 양복을 옷걸이에 걸어놓은 손은 자연히 가슴으로 들어가 셔츠의 단추를 전부 풀고는 전라가 되어 샤워 소리에 빨려 들어가듯 욕실 문을 열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함께 있던 시로 (이쪽은 물론 실물 이다.) 가 서있었다. 눈이 아찔해질 정도로 탄탄한 근육, 상처투성이인 짙은 빛 피부, 시로는 머리 부터 뜨거운 물을 맞으며 무뚝뚝한 시선을 내게 주었다. 나는 등뒤에서 문을 닫고 '어서 와.' 하고 미소지으며 그리고 살짝 몸을 붙였다. 좁은 서양식 욕조가 이럴 땐 정말 쓸모있다. 물도 시로의 몸도 뜨거웠다. 나는 '하지만 내 마음은 훨씬 뜨거워.' 하고 혼자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복한 기분에 잠기고 말았다. "너무 늦게 들어왔잖아, 시로. 나 이미 굶어죽기 직전이야." 난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며 단단한 근육에 감싸인 몸에 두 팔을 감았다. 시로는 내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결코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나 먼저 먹으라고 했잖아. 기다리라고 부탁한 적 없어." 그렇게 노려봐도, 사랑의 고백을 한 마디로 끊어버려도 난 전혀 서운하지 않았 다. 언제나 이러니까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서 나는 시로가 날 안아줄 마음이 들 도록 시로의 자존심을 배려하며 교묘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좋은 아내란 것이겠지? "굶주린 건 배가 아니라..." 나는 의미심장하게 속삭이며 시로 앞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벽을 등지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시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의 배꼽에 입술을 갖다댔다. "밑의 입이 굶어죽기 직전이야." 머리를 감던 시로의 손이 멈췄다. 들리는 것은 물줄기가 우리를 때리는 소리뿐 이었다. 하얀 거품이 시로의 남자다운 육체의 표면을 흘러내렸다. 나는 멋지게 새겨진 복근에 넋을 잃은 채 혀를 움직이며 그 거품을 두손으로 떠올려 모아주었다. "식사 전엔 손을 씻읍시다." 난 킥킥 웃으며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시로에게 거품을 냈다. 몰론 다른 곳도 확실히 마사지 해줬다. 시로의 그곳은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나는 열심히 손 바닥으로 굴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시로를 흥분시켰다. 시로가 어딘가 불편한 듯 한 손놀림으로 온몸의 거품을 씻고 샤워기를 벽에 붙은 스탠드에 놓고는, 열심 히 봉사하던 날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시로가 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길이 약간 난폭했지만 나는 그게 더 기뻐서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졌다. "학원은 어떻게 했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처럼의 즐거움이 영문도 알 수 없는 말로 중단된 것이 왠지 굉장히 충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화난 얼굴로 무슨 얘기냐고 되물으려고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 잊고 있었다. 학원, 학원! 대학원 진학에 대한 변명. 그걸 생각하는 것 을 잊었다! 그런데 이봐, 시로. 지금 이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해도 그냥 부끄럽기만 할 뿐 이고 무지 난처한데 말이야... 나는 놀란 다리 사이를 두 손으로 감추고 진지하게 일어섰다. 가슴으로 얕은 호흡을 하며 벽에 기대어 시로를 흘겨보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알아보고 왔어..." "정말이냐?" 양심의 가책이 내 다리 사이에 박차를 가했다. 거짓말일 들킬까 하는 두근거림 이 더욱 혈액순환을 좋게 만들어 완전히 일어선 중심을 향해 '이래도 버틸 거 냐?!' 하고 체액을 집중시켰다. 시로가 의혹의 눈초리로 노려보자 나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몸 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다리 사 이가 지금이라도 파열될 것 같았다. "학교 근처에 있는... 오늘부터 체험입학을... 해줘서..." 내 거짓말은 여기서 중간부터 끊어졌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 나는 눈빛으로 위기를 일리며 시로의 목에 매달려 폭발 직전의 중심을 시로의 것에 밀어붙였다. 스스로 난폭하게 허리를 흔들고 시로의 입술에 입술을 부딪쳤 다. "시로 미안, 진짜 미안... 먼저... 나 이제..." 나의 절박함을 대충 눈치 챈 시로가 정말 민폐라는 형상으로 내 등을 벽에 밀 어붙였다. 그리고 내 오른쪽 무릎을 귀찮다는 듯이 들어올려 조금도 부드럽지 않은 손길로 옆으로 벌린 순간, 의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아?" "이게 뭐냐?" "에?" 난폭하게 골반을 움켜쥐자 난 가슴이 철렁했다. 거기엔 바로 호랑나비 문신이! 낭패다. 스티커를 떼는 걸 잊었다. 나는 당황해 양손을 엉덩이로 돌렸다. 엉덩이의 스티커를 가만히 떼어 손안에서 뭉쳐 샴푸 뒤에 살짝 감췄다. "그러니까... 이건 요즘 학교에서 유행하는 거야. 진짜로 새기면 아프니까 스티 커로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거지." 그 자리에서 만든 변명이었지만 시로는 별로 흥미도 없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을 뿐이다. 그런 시로에게 나는 '그건 됐으니까 빨리...' 하고 달콤하게 속삭 이며 스스로 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나를 보는 시로의 눈은 언제나 성가신 듯한 시선, 하지만 그런 눈으로 나를 뿌 리치면서도 어느새 완전한 수컷의 형태가 된 강인한 중심을 물어뜯는 듯한 거친 키스와 동시에 사정없이 안아오는 것이다. 나는 시로에게 매달려 턱과 입술을 물어뜯으며 흰자위를 드러내고 일어선 채 로 도달하고 말았다. 애가 탔던 만큼 기세도 두 배였다. 쾌감의 덩어리가 '이래도 버틸 거냐?!' 하고 내 정수리를 직격해 온다. 나는 키스 받지 않으면 절정을 맞지 못했다. ...아니, 맞을 수는 있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것이다. 키스가 빠진 섹스는 왠지 남창취급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도무지 마음이 만족 스럽지 못했다. 반대로 굴욕감이 더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페팅하는 도 중에 내가 키스를 오구할 때는 보통 안아달라는 사인이었다. 안아 줘. 그리고 키스한 채로 함께 느끼고 싶다는 뜻인 것이다. 역시 시로는 무뚝뚝하면서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로가 말없이 일단 물러났다. 나는 시로의 허리에 팔을 감고 세게 끌어 안았 다. 왜냐하면 시로가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해도 돼, 시로..."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로를 올려다보고 매정해 보이는 입술 윤곽을 혀끝 으로 따라가며 시로의 목에 양 팔을 두르고 한쪽 다리를 시로의 다리에 휘감었 다. 시로가 내 다리를 안아 올려서 아까의 돌입과는 사뭇 다른 진지함으로 나의 내부로 다시 한번 들어오려고 했다. ...시로도 내 몸 좋아해? 전보다 날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어? 응? 시로... "사랑해... 시로." 한 번 도달해버리면 이제 초조할 것도 없었다. 천천히 몸으로 사랑을 잔뜩 나 누며 2번째 충전을 기다리면 되었다. 아까는 시로의 페인트를 읽지 못하고 완전 히 타이밍을 착각했지만 이번이야말로 나의 보조에 맞춰서 시로에게도 최고의 천국을 보여주고 싶다. "좋아해... 시로. 너무 좋아. 으응... 하아... 으응!" 이렇게 내가 힘껏 애쓰고 있는 데도 무드가 전혀 없는 시로는 섹스 도중이라도 흥을 깨는 화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그래서 체험 입학은 어뗐지?" "어떻... 다니... 아, 아... 그냥 그랬... 앗." "좋아 보이면 내일이라도 등록하고 와라." "그런 것... 보다... 시로. 너무... 기분 좋... 아. 응, 으응, 으응!" "어차피 할거라면 시간낭비가 없도록 연간 스케줄을 상담하고 와라. 전화로도 말했지만 지금부터도 너무 늦었을 정도다." 아아아아아! 정말이지! 집중이 안 되잖아! 나는 시로에게서 입술을 잡아떼고 바로 코앞에서 폭언을 퍼부었다. "피의자를 심문할 때도 이렇게 안으면서 하는 거냐?!" 아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배짱 한 번 좋구나." 내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 그게... 아, 아하하하하." 온몸에 식은땀이 스며 나왔다. 화가 나서 내게서 몸을 뺀 시로가 난폭하게 날 뒤집었다. 그리고 시로는 내가 절대로 싫다고 했던 뒤에서의 삽입을 억지로 실 행에 옮긴 것이다! "아야! 아파, 시로! 이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바보!" 난 벽을 상대로 소리치며 어쩔 수 없이 벽을 향해 2번째 절정을 맞았다. 시로라서 기쁘다. 기쁘지만... 이건 초특급 굴욕이라구! 젠장! 9 나는 어제 욕실부터 질질 끌어온 험악한 무드로 아침식사를 끝내고 출근하는 시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배웅했다. 뒷정리를 마치고 등교해서 학교생활도 적당히 마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 과후. 이치가야는 오늘도 수업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의기양양하게 시부야를 향해 전철을 탔다. 평소에 할 수 없는 차림을 하는 것은 역시 즐거웠다. 마음도 다리도, 나도 모르게 가벼워져 있었다. 쇼 윈도우에서 안을 들여다보고서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기운차게 문 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카운터에서 장부정리를 하고 있던 와타루씨가 고 개를 들고 어서 오라며 웃었다. 장부를 덮고 들뜬 발걸음으로 다가온 와타루씨 는 오늘도 한층 더 곤란한 의상을 몸에 걸치고 있다. 몸의 뒷부분만 감싼 테일 코트라고 부르면 될까? 앞은 거의 가로지르고 있었 다. 그리고 물론 가스엔 피어스. 오늘은 길다란 체인 타입이다. 일부러 교차된 틈새로 노출시킨 그것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빛났다. '오늘의 포인트는 아마도 가죽끈인 모양이지만 왠지 서커스단 같아요...' 하반신은 더했다. 허벅지까지 올라온 그물 타이즈(가죽 끈으로 짠 것이다.)에 가죽 가터벨트. 그 밑엔 역시 가죽제 T백 브리프. 아니, 오늘은 완전히 정조대였 다. 남성 부분만을 입체적으로 감싸서 감출 정도의 극히 작은 삼각형 천을 잡아당 기고 있는 것은 가늘고 납작한 가죽 끈 3줄. 와타루씨의 가냘픈 골격에 액센트를 주고 있는 그 3줄의 가죽끈은 잘 보면 꼬리뼈를 경유하여 길다란 1줄의 벨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리 사이를 감고 뒤로 돌아간 삼각천의 머리부분과 골반을 경유한 가죽 끝이 뒤에서 이어진 것이다. 뛰어난 기발함에 시선을 빼앗긴 동안 여기저기 섬세하게 분석해 봤지만 이 코 디네이트는 아무리 봐도 섹스어필이 목적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 지 와타루씨가 입으면 이렇게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굉장한 것이다. "오늘은 한층 더 굉장하네요." 가까스로 평가를 말해주자 사심없는 얼굴이 '그래?' 하고 미소지었다. 와타루씨는 가만히 있어도 일반인으로선 너무 요염해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와타루씨는 내가 간담이 서늘해진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즐거운 듯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츠키. 어제는 혼자 둬서 미안해. 그래서 말이야, 나츠키를 이미지로 어제 철 야하면서 만든 옷이 있어. 오늘은 이걸 입어봐, 응?" 와타루씨는 날 피팅룸으로 밀어 넣고 어제처럼 T백으로 갈아 입혔다. 나는 와타루씨처럼 다리 사이를 처리하지 않아서 그 부분을 감추는 작업이 성 가셨지만 그것도 와타루씨가 일일이 도와주려고 했다. 패션계 사람은 타인의 알 몸따윈 마네킹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곳까지 만 지면 내 쪽이 쑥스럽다니까. "나츠키는 엉덩이 형태가 굉장히 귀여우니까 대담하게 내놓는 편이 좋아. 봐 봐, 너무 부드러워. 색도 예뻐. 살결도 곱고. 허리뼈 형태도 섹시하니까 아예 나 정도로 보이는 편이 좋을 텐데." "그것만은 참아주세요." 나는 정조대 비슷한 것의 착용을 재빨리 사양하면서 아하하하 웃었다. 와타루씨가 날 위해 철야로 만들어준 의상은 차이나 드레스를 방불케하는 옷 이였다. 물론 루비 완샹다운 어레인지가 충분히 들어갔으니까 이국적이고 에로 틱한 분위기가 만점이었다. 굉장히 매끄러운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맨살에 달라 붙는 감촉이 말도 못할 만큼 기분 좋다. "아아... 역시 너무 잘 어울려! 가죽에 가려진 왼쪽 팔과 옷깃이 금욕적인데도 맨살을 드러내서 대담하게 어필한 오른쪽 어깨부터 배에 걸친 노출균형이 최고 야! 안 그래? 나츠키." 와타루씨는 자신의 작품이 상상한 것보다 잘 만들어져서 완전히 흥분하고 있 었지만 나도 조금은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매끄러운 가죽 소재가 촉촉하고 풍부한 광택을 뿜고 있었다. 골반에서 위쪽까지 파고든 깊은 슬릿과 살짝 엿보이는 T백 브리프의 가느다란 끈, 거울에 비친 섹시한 자신의 모습에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 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워졌다. 이런 도착적인 감각은 빠지면 중독 된다. 나는 의 외로 코스튬 플레이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저기, 와타루씨. 나 위험한 길로 빠질 것 같아요. 루비 완샹의 옷은 왠지 각성 제 같아..." 그렇게 말한 나는 허둥지둥 입을 닫았다. 그래도 와타루씨는 각성제 발언을 경 험자로서의 예가 아니라 단순히 비유라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아 하고 눈 꼬 리를 내리고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평가해준다면 나로선 대 성공이지. 왜냐하면 루비 완샹의 테마는 '몸 에 걸치는 엑스타시' 니까." 난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죄악감이나 수치심의 편린조차 없이 말해버리 니까 내 쪽이 더 동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와타루씨는 좋은 이해자를 얻었다는 듯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나츠키라면 알아줄 줄 알았어. 그래. 난 입기만 해도 절정에 오르는 그런 옷을 추구하고 있어.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을 때마다 그 사람이 평범한 일상생활 속 에서 억눌러온 감정이나 이성을, 있는 힘껏 해방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해. 짐승 가죽 밑에서 보일듯 말듯한 진짜 자신의 피부... 보고 싶지만 보는 것이 두려운 본성의 노출에 두근두근한다면 대 성공! 그러니까 나츠키도 빼지 말고 해방하는 쾌감을 만끽해 줘." 유창한 판매 문구를 끝맺으며 생긋 미소짓는 와타루씨를 보고 나는 격렬한 현 기증에 휩싸였다. 루비 완샹에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 스타일이 좋다. 게다가 얼굴도 일류에 자신 의 몸매에 자신이 있는 녀석들이고, 더 나아가 남들에게서 주목받는 것에서 쾌 감을 느끼는 타입뿐이다. 그 증거로 노출도가 높은 옷이 잘 팔렸다. 손님이 '입 은 걸 보여줘요.' 하고 부탁해서 일부러 갈아입고 '이런 느낌이 됩니다.' 하고 가 르쳐주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내 쪽더 서서히 여기 옷에 익숙해져서... 아니 어느새 중독 되어 버려서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쾌감을 느낄 정도가 되고 말았다. 단지 그것은 루비 완 샹의 점원으로서 근무시간에 한해서였지만 말이다. "너 이름이 나츠키? 헤에, 미인이네." 그런 식으로 손님이 작업을 걸어와도 '옷 덕분.' 이라고 얼버무리고, 손님한테 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아양을 떨어서 오늘의 매상도 순조로웠다. 손님의 출입은 드문드문 했지만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최저 1벌은 구입해가 니까 (용기를 내서 왔다가 용기를 내서 사가는 것이다.) 단가가 꽤 높아서 하루 몇 명의 손님으로 가까스로 수익을 얻는 모양이다. 혼자서 10만 엔 가까이 사간 남자를 배웅하고 문을 닫자 와타루씨가 후훗 하고 얇은 어깨를 부딪쳐왔다. 와타루씨의 가슴에 달린 체인 피어스가 귀엽게 흔들렸 다. "잘 하네, 나츠키. 저 사람 옷보다 나츠키가 더 마음에 들었나봐." "유감이네요. 나한텐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이 있으니까." "시로씨였지, 나츠키의 그이." 와타루씨가 장난치듯이 다시 어깨를 부딪쳐오자 내 눈꼬리도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맞아요, 칸자키 시로. 깜짝 놀랄 만큼 멋진 남자에요. 와타루씨도 보면 절대로 반할걸요?" "에? 보여줘, 보여줘! 사진은 없어? 반하고 싶어!" "휴대전화의 수신 화면이 시로지만... 아, 역시 안돼. 반하기 없기!" 여학생들의 대화처럼 꺅꺅거리고 있자 종소리가 울리며 이치가야가 들어왔다. 오늘의 사복은 맨살 위에 초커를 몇 개 걸치고 가죽 바지에 칼라가 없는 재킷, 어제보다 멋있었다. 옛날의 나였다면 한 번 정도는 자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난 이미 시로 이외엔 욕정하지 않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치가야는 고양이들처럼 장난치는 우리를 위에서 바라보며, 웃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너희들 같이 있으니까 왠지 고양이 같다." "페르시안?" 넉살좋게 물어보자 이치가야는 '당연히 검은 고양이지.' 하고 웃었다. 담배를 손에 들고 소파에 가서 앉아 한참 나와 와타루씨가 노는 것을 바라보던 이치가야가 내가 앞을 지나쳤을 때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뭐야? 하고 눈썹을 치켜뜨고 몸을 굽히자 이치가야가 '오늘도 잘 부탁해.' 하고 귓속말을 했다. "...그것보다 어제 왔었어. 너네 아버지." 말하자마자 이치가야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두 번 다시 오지 말라 고 했는데.' 하고 밉살스럽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부자간의 불화가 상당해 보였 다. "토리카이 점장은 계십니까? 켄도 여기에? 하고 물어봤어. ...너 여기 드나드는 거 다 들켰잖아. 감출 필요가 있겠어?" "없어. 없지만 와타루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아버지가 왔다는 건 와타루에겐..." "말 안 해. 걱정마." 나는 이치가야에게 그대로 얼굴을 갖다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근데... 이치가야. 너희들 잤냐?" 이치가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놀라며 '아직.' 하고 정직하게 고백했다. "아직이란 건 이제부터라고?" "이제부터랄까..." 나는 말끝을 흐리는 이치가야에게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와타루씨도 싫지 않은 것 같은데.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난 그랬 어. 헤테로인 시로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찍고 또 찍어서 간신 히 안겼어. 밀어붙이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고 기다린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구. ...난 시로를 밀어붙여서 쓰러트렸어. 몇 번이나 차이고 비참하게 울면서 매 달린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최고로 행복해." "...넌 그런 얘길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이치가야가 질렸다는 듯이 말하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난 시로 얘기를 하면 서 부끄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좀 더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밀어붙여 볼까..." 담배를 비벼 끄며 이치가야가 불쑥 말했다. 이치가야는 오늘도 와타루씨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서, 나는 '오늘밤은 드디어 저 두 사람이...' 하고 외람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미모인 와타루씨가 멋진 이치가야 밑에서 이성을 잃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흥분되었다. "저기... 나츠키. 그럼 열쇠는 내..." "맨션의 신문투입구에 넣어둘게요." "매상금은 모아서..." "그쪽도 신문 투입구에 넣어들게요. ...근데 정말 훔쳐가지 않아요?" "응, 4층엔 거의 아무도 안 오니까. 옆집은 언제나 아침까지 안 들어오고 그러 니까 정말 괜찮아." 돈을 도둑맞는 걱정보다 빨리 이치가야와 외출하고 싶은 분위기여서 나도 더 이상의 추궁은 그만 두었다. 난 정말 눈치가 빠른 알바생이다. 그건 그렇고 와타루씨는 이번에도 저렇게 대담한 차림으로 식사하러 갈 셈인 가? 제발 바깥에선 코트를 벗지 말아줘.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고 말았다. 분명 남의 시선엔 익숙할 와타루씨는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나를 정말 미안한 듯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그래 도 왠지 수줍은 웃음을 띠며 이치가야와 함께 나갔다. 바로 앞에 있는 길에서 택시를 잡고 출발하기 직전에 다시 가게 안에 있는 내 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정말 귀엽다고 할까, 상냥하다고 할까, 와타루씨는 패션은 대담해도 정말 순수 한 사람이었다. 순수하다고 한다면 이치가야도 그랬다. 나는 이 이틀 간 녀석에 대한 평가가 180도 바뀌었다. 자신에게도 주위에도 멋대로 굴고 모든 일에 불성 실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치가야는 그저 학교보다 더 소중한 곳을 빨리 발견해버린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타루씨와의 사랑이 사실이라면 와타루씨는 이치가야에게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학교에 열 심히 다니라고 말이다. 그러면 분명 이치가야는 와타루씨의 말을 듣고 의외로 나보다 성실하게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흐뭇한 미 래를 간단히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실현되면 좋겠다고 쑥스 럽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원해 주기로 했다. 와타루씨와 이치가야가 나가버린 루비 완샹은 텅 비어서 재미없었다. 한숨소 리조차 커다랗게 울린다. 꼭 이럴때만 무지 한가하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가게를 둘러보자 상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청소도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꾸물꾸물 책을 꺼내들고, 놀랍게도 내일의 예습을 하고 말았다. 할 일이 없었다기보다 사랑하는 시로에겐 비밀로 알바를 하는 것이 뒤가 켕켜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난 정말로 기특하다니까. 책을 한 번 읽어보고 내일은 무슨 질문을 당해도 충분할 만큼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고서 벽시계를 보자 10분만 있으면 폐점 시간이었다. "그럼." 난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내 물건들을 배낭에 밀어 넣고 거울에 비친 나의 미모에 다시 기슴이 두근거려 한참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말았다. 아아... 역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시로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처음엔 저항감이 들었던 옷도 익숙해지자 애착이 생겼다. 나는 내일 근무를 기 대하며 아쉽다는 듯이 의상을 벗고 학생으로 돌아왔다. 나는 가게의 문단속을 끝내고 어제와 같이 매상금을 배낭에 집어넣고 조명을 껐다.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셔터에도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 다. 10 도로에는 퇴근길인 예쁜 누나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지나쳐 와타루 씨의 맨션으로 향했다. 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바로 맞은편에 약간 낡고 자그마한 맨션이 있었다. 그 4층 건물의 최상층이 와타루씨의 집이었다. 걸음을 재촉해서 정문 홀에 들어가 열쇠를 써서 오토 락인 현관을 지나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버튼을 누르자 금세 딩동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목적지인 4층에 도착했다. 실은 이 4층엔 두 집밖에 없엇다. 401호와 402호다. 각각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끼고 좌우에 있는 것을 보아 집주인들끼리 복도에서 스쳐지나가는 일이 거의 없도록 세심한 배려가 되어 있었다. 토리카이라는 명패가 붙은 401호 앞에서 나는 배낭을 어깨에서 내려서 신문투 입구를 눈으로 확인하고 매상금이 들어간 봉토를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헉하고 손을 멈췄다. 가느다란 문손잡이가 조금 열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와타루씨...?" 난 조그맣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어 의아해서 문에 귀를 가까이 했다. 노크를 할까 생각했을 때, 찰칵 하고 문손잡이가 커다랗게 움직였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와타루씨의 괴로운 듯한 목소리! "아... 응... 아앗." 나는 얼른 나의 기척을 죽이고 귀를 갖다댔다. 이번엔 확실히 그것이 와타루씨 의 '신음소리' 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아... 아아." 문 사이로 울리는 리드미컬한 숨결, 나는 알 수 있었다. 시로가 날 안아올릴 때 자연스럽게 이런 소리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으응... 하아... 아아... 아하..." 나는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여긴 현관이라구! 현관에서 하고 있단 얘긴가? 한다니 누구랑? ...이봐, 이봐, 설마! "아앗, 케... 켄!" 역시 그렇군. "아... 좋아, 켄. ...아, 이제 안 되겠어. 그렇게... 아... 켄, 켄, 아앗...!" 신음 소리는 더더욱 격렬해지며 가느다란 비명으로 변해갔다. "켄, 켄... 살려줘! 하아... 흐응... 사, 살려줘, 켄...!" 난 웃음을 억누르고 숨을 삼킨 채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대로 엘리베이터까지 돌아가 재빨리 1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힌 순간,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스워서 웃은 것이 아니였다. 왠지 기뻐서였다. 나는 쿡쿡 웃으며 다시 정문 홀로 나갔다. "해냈군, 이치가야." 이치가야 녀석, 아마도 침실까지 참지 못하고 현관에서 덮쳐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드디어 소원을 이룬 이치가야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이럴 때 신문투입구에 매상금을 던져 놓고서 '밖에까지 들려요.' 하고 빈정거리 는 촌스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아서 잠시 여기서 대기하기로 했다. 빨리 돌아가서 시로를 위해 식사를 만들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휴대전화로 뉴스라도 보면서 시간을 죽이자. 방금 전 와타루씨의 상태를 보아하니 분명 절정이 가까울 테니까, 그건 그렇고 와타루씨의 목소리는 굉장히 야했다. 그건 아무리 들어도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나는 10분을 기다렸다가 슬슬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와타 루씨도 이치가야도 8시가 넘으면 내가 여기로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언제까지나 현관에서 섹스에 빠져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와타루씨 는 대담하니까 의외로 내가 그 장면을 목격해도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4층에서 내렸다. 혹시 아직도 그러고 있다면 인터폰을 눌러서 소리를 내보자고 결심하고 문으 로 향했을 때, 나는 문이 조금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누군가 나올 기색도 없거니와 닫힐 기색도 없었다. 아마도 문 사이에 뭔가가 끼어있는 것 같았다. 틈새를 따라 시선을 내린 난 '아, 역시...' 하고 쓴웃음을 지 었다. 구두라도 끼어있나 하고 느긋하게 몸을 굽힌 나는 순간 헉하고 뒤로 물러 섰다. 놀랍게도 그것은 손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오른손, 손목보다 위쪽 말이다. 설마 절정을 느끼고 쓰러진 순간에 조우하고 말았나? 하고 쑥스러워진 나는 곧 바로 그게 아니라고 이건 이상하다고 직감했다. 외벽과 철제 문 사이에 끼인 손목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을 확 열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쓰러져 있던 것은 와타루씨 였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에서 약간 열린 눈이 빛나고 있었다. 와타루씨는 왠지 황홀한 표정으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나는 즉시 주머니를 더듬어서 플립 타입의 휴대 전화를, 떨리는 손으로 끄집어 냈다. 그리고 버튼 하나로 연결된 시로에게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다. 입이 말라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로, 빨리 와 줘! 빨리!" 빨리 집으로 들어오라는 러브 콜이 아니란 것을 순식간에 알아챈 시로가 형사 답게 정확한 질문만을 짤막하게 던졌다. "장소는?" 나는 그 목소리에 힘을 얻어 주소를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와타루씨가 차갑게 굳어져버릴 것 같아서 두려움에 무릎이 떨렸다. "빨리 와 줘! 와타루씨가... 와타루씨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도 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상황만 말해." "그러니까... 아는 사람이 주, 죽어있어. 자기 집 현관에 반쯤 눈을 뜬 채로 하 늘을 쳐다보고 누워서... 하지만 10분 전까진 살아있었어. 분명해. 내가 와타루 씨의 목소리를 틀림없이 들었거든." 나는 내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그렇다는 것은 혹시 아직 방안에 와타루씨와 사랑을 나눴던 장본인인 이치가 야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방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어쩌면 이치가야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동반 자살' 이란 단어가 날 공포에 빠트렸다. 무릎이 덜덜 떨렸다. "시로, 어쩌면 방안에 한 명 더 쓰러져 있을 지 몰라!" 이치가야마저 죽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져서 나는 그 자 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는 핏기가 사라진 와타루씨의 손가락이?! "우웃!" 나는 와타루씨의 오른손을 집안으로 밀어 넣고 끼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만 히 문을 닫았다. 그대로 문에 기대고 싶었지만 무의식적인 판단으로 반대편 벽 까지 휘청거리면서 걸어가 겨우 심호흡을 했다. "빨리 와 줘. 사, 살려줘, 시로..." "알았다. 감식반이 갈 때까지 주변 물건엔 일절 손대지 마." "으..." 미안, 시로. 와타루씨의 손이 문에 계속 끼어있는 것이 너무 딱하고 불쌍해서 거기만 조금 달라졌으니 좀 봐주길 바래. "시로, 의사... 구급차도 부르는 편이 좋을까? 어쩌지, 시로?" "그건 이쪽에서 할거다. 나츠키, 일단 진정해라." 휴대 전화 너머로 몇 사람의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시부야서에 연락해!' 라 든가 '순찰차를 보내!' 하고 한시라도 빨리 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 때 내 가슴에 밀려온 것은 커다란 안도감과 와타루씨와 이치가야의 생사가 명확해지는 것에 대한 이상한 불안, 그 때 시로가 모호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 를 베어버릴 만큼 날카롭게 말했다. "끊지마, 나츠키." "에... 왜, 왜 그래?"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전화 끊지마.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정신 단단히 차리고 말을 계속 해." "에? 어째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내가 혼란한 상태로 굳어져 있자 시로가 빠른 말투로 설 명해 주었다. "만에 하나 타살이라면 아직 범인이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제일 위 험한 곳에 있는 건 너야." 온 몸이 떨려와 난 무심코 귀에서 전화를 떼고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잘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도망칠 수 있는 자세로 있어 라. 아는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겠지만 일단 네 안전을 우선하는 거야. 이제 곧 경관이 도착할 거다. 그때까지만 참아라, 알겠지?"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시로의 응원은 직접적으로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시로, 시로. 나 좋아해? 응? 시로..." 이럴 때 뭘 물어보고 있는 거냐?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목숨과 관계된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을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이런 공포를 도저히 버틸 수가 없 었다. "나 좋아하는 거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거지? 대답해, 시로! 빨리!" "...좋아한다." "거... 거짓말하지마. 진심을 말해줘." "유감스럽게도 거짓말 할 여유가 없다." 시로다운 사랑의 고백. 나는 무지 감동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현재 시로도 나 만큼 긴박한 상황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못했다. 전화 너머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시로가 애차인 스카이 라인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동시에 사이렌 소리도 울려 퍼졌다. 초조함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전파가 몇 번이나 꺼지려고 했다. 심박수가 단숨 에 높아졌다. 지금이라도 그늘에서 살인범이 뛰어나올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로... 빨리!! 날 좋아한다면 빨리...!" 갑자기 나약해지고 말았다. 시로가 너무 상냥한 탓이다. 날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빨리 와 줘, 시로! 젠장... 어째서 나만 언제나 이렇게...!" 시로에게 터트린 화풀이는 거의 비명으로 들렸다. 11 현장에 손대면 안된다. 그 정도 지식은 있었기에 나는 집안에는 한 발짝도 들 어가지 않고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뻣뻣하게 굳어져서 시로의 도착 을 기다렸다. 시로가 예고했던 것처럼 처음엔 가까운 파출소의 경관이 왔다. 경관은 휴대 전 화를 움켜쥐고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날 발견하고 즉각 '아마노 나츠키군이 지?' 하고 확인한 뒤 무선으로 '제 1발견자 신병 확보.' 하고 가까운 순찰차에 알 려주었다. 시로도 내 안전을 무선과 휴대 전화 양쪽으로 확인하고서 간신히 통화를 끊었 다. 휴대 전화가 이렇게 마음 든든할 줄은 몰랐다. 전파라는 강한 끈으로 지켜줘서 고마워... 시로.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며 맨션 밑에서 멈췄다. 비상 계단에서 올라 온 것은 작업복 차림의 감식반 2명, 그 뒤에 검은 양복을 발견한 나는 남의 이목 도 아랑곳없이 그의 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시로는 날 밀쳐내지 않고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시로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울퉁불퉁한 얼굴의 아저씨였다. 시로가 날 그 아저씨한테 소개했다. "신고자인 나츠키입니다. 나츠키, 이쪽은 시부야서의 카와마루 형사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카와카룬지 카바마룬지(카바는 일본어로 하 마)에게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시로는 일단 자신의 두 배는 나이를 먹은 카바마루 형사에게 존댓말을 써서 존 중해주는 모양이지만 경부도 아니고 경부보도 아닌 카바마루는 말하자면 시로 보다 지위가 낮다는 얘기다. 지위에 격차가 있어도 붙임성 없는 것으론 막상막하. 붙임성 좋은 형사는 후지 시로 정도밖에 모르지만 말이다. 후지시로의 잘 교육받고 단정한 얼굴이 그리워 지자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나츠키씨!" 숨을 헐떡이며 비상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애교만점인 후지시로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놓인 반면 조건반사로 울컥하고 말았다. "신주쿠서 형사가 무슨 용건이야?" "나츠키씨가 사건에 말려들었단 소리를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목이 멘 후지시로가 내 머리에 손을 내밀어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뭐냐, 후지시로 녀석. 내 엄마라도 된 줄 아나? "이제 괜찮아요, 나츠키씨. 선배랑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괴로웠죠? 그래도 이 제 괜찮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관할 구역도 아닌 주제에.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 따 윈 개의치 않고 진지한 얼굴로 걱정해주니까 괜히 더 울고 싶어지잖아. ...바보 녀석. 감식반 반장은 401호의 상태를 보고 한눈에 타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안에 내 친구가... 이치가야라는 녀석이 있을지도 몰라."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녀석까지 죽었다고 생각하기 싫었다. "이봐, 누구 있나?!" 반장이 방 안쪽으로 소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범인이 숨어있을 가능성도 고려 하면서 파출소 경관과 시로가 흰 장갑을 끼고 신중하게 안으로 들어가 각 방을 수색했지만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당장에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난 계속 정문 홀에 있 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면 알았을 테고 계단으로 내려왔다면 밑에서 딱 마 주쳤을 것이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한다면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잔뜩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에도 지휘관이 휴대 무선기로 아래층에 있는 감식 반에게 지시를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켰다. 즉시 엘리베이터 안의 조사가 개시되고 비상 계단으로도 감식반의 정예들이 흩어진다. 타살일 경우, 현장과 도주경로 사이에 범인이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흔적은 모발, 타액, 땀, 발자국, 의복의 섬유 등 여러 가지였다. 물론 1초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지금쯤 1층 정문 홀에서는 출입 금지 로프가 둘러졌을 것이다. 주민들에게 상 당한 민폐였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민폐보다 와타루씨의 죽음이 괴로웠다. 겨 우 이틀, 그것도 몇 시간 신세진 것뿐이지만 그는 정말로 상냥했다. 연상인데도 묘하게 귀엽고 순진하고 조금 아방해서 말할 때마다 기분이 부드러워졌다. 나는 정말로 와타루씨가 좋았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계속 사이좋게 지내 고 싶었다. 소침해지는 내 어깨를 후지시로가 계속 안아주었다. 시로는 한 번 이쪽을 힐끔 보고 후지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내 모습에 안심했는지 지휘관과 이것 저것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현장 검증과 촬영이 일단 끝나자 반장이 시로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이, 신주쿠서. 애를 딴 데로 데려가." 카바마루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주쿠서라는 건 후지시로를 말하는 것 이고 애라는 건 아마도 나인 것 같았다. ...뭐야, 이 녀석. 열 받게 하는 녀석이네. 내가 후지시로를 신주쿠서라고 부르 는 만큼 저항감은 없었지만 다른 녀석이 부르면 무지 열 받는다구. 시로가 날 힐끔 보고 턱짓을 했다. 저쪽으로 가라는 뜻이였다. 방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 보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배려라고 금방 알 수 있었다. 돌아가라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제 1신고자이기 때문이다. 이후엔 사정 청취가 날 기다리고 있다. "밑에서 기다리죠, 나츠키씨." 시로도 재촉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좋아했던 사람의 시체가 어 떻게 취급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난 와타루씨 곁에 있고 싶어.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야." "...그럼, 만일 기분이 나빠지면 주저 없이 말해주세요." 문이 활짝 열렸다. 와타루씨는 아까 내가 슬쩍 봤을 때와 같이 문 쪽에 머리를 두고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조금 구부러진 한쪽 다리 가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었다. 와타루씨는 가게에 있을 때와 같은 루비 완샹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 는 없었다. 가슴 피어스가 잡아 뜯겨져 바닥에 떨어져서 검붉은 핏줄기가 가슴 그물에 말라붙어 있었고 사이드 벨트 타입인 정조대는 스스로 벗었는지 아니면 누가 벗겨버렸는지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 공들여 손질해서 깨끗한 국부나 머리카락, 그리고 이마에 붙은 점액을 감식반이 스테인리스제 스푼으로 떠서 플 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만약 이것이 정액이라면 이치가야의 것이나 아니면 와타루씨 자신의 것,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치가야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녀석은 여기 없었다. 분명히 있 어야 하는데 없었다. "감겨 있던 것은 가죽끈이군요. ...아아, 단단합니다. 상당히 파고들어 있습니 다. 자기 힘으론 이렇게까지 하지 못하겠죠. 이건 교살되었을 가능성이 높군요. 사법해부로 보내죠." 와타루씨를 감고 있던 것은 정조대의 사이드 부분에 쓰였던 가느다란 벨트였 다. 목이 졸려 죽었다고 납득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와타루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숨이 끊어 진지 거의 시간이 경과되지 않아서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고 생각했다.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와타루씨는 비장하게 아름다웠고 황홀한 표 정도 애절해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참았다. 울어봤자 와타루씨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해야할 일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확히 증언하는 것이었 다. 카바마루가 시로에게 실내조사를 맡기고 복도로 나왔다. "잠깐 보지." 잠깐이고 자시고 난 그것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거다. 얼른 시작해 줘. 각오는 되어 있어. 내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듯이 후지시로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괜찮아. 아무리 괴로운 얘기를 물어봐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감추지 않 고 정확하게 대답할 거다. 그것이 이치가야에게 불리한 증언이라도 시로가 진상 을 규명하고 싶다면 난 어디까지라도 그것을 따를 것이다. "먼저, 네 주소와 연령부터 물어볼까?" 카바마루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늘어나 있던 형사가 카바마루와 똑같 이 수첩을 펼치며 내 증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어, 나츠키씨의 신원이라면 제가 증명할 수 있는데요." 후지시로가 말참견을 하자마자 카바마루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신주쿠서는 입 좀 다물어 주겠나? 여긴 시부야서 관할이다." 나는 무심코 후지시로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런 TV드라마 같은 대사를 내뱉는 형사가 정말 있었구나 싶어서 좀 우스워지 고 말았다. 난처해하는 후지시로에게 이번엔 내가 응원하듯 괜찮다고 질문에 솔직히 대답 했다. 주소를 말함과 동시에 경시청 형사부 소속 무라이 경부의 승인하에 시로 의 보호감찰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칸자키 경부보의 보호감찰? 어떻게 된 일이냐?" 그 일에 대해선 후지시로가 신주쿠서 관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설명했다. 내가 남창이었다는 사실만 숨기고 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 내 아버지였다는 것, 그 아버지가 칸자키 시로에게 체포되어 현재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이라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나의 비참한 과거에 카바마루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잃고 있었다. 내 과거보다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빨리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나츠키씨는 피해자와 어떤 관계인가요?" 그렇게 물어본 것은 후지시로였다. 나는 신고를 하기까지의 경위를 순서대로 증언했다. "피해자는 토리카이 와타루씨. 루비 완샹이라는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겸 점 장이야. 가게는 여기서 걸어서 3분. 장소는 나중에 안내하겠지만 나는 어제부터 거기서 알바를 시작했어.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부터 밤 8시까지.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와타루씨는 이치가야... 이치가야는 나랑 같은 반으로 나한테 알바로 루 비 완샹을 소개해준 녀석인데 와타루씨는 그 녀석과 함께 6시에 가게를 나갔어. 남은 2시간은 나 혼자서 가게를 지키다가 문단속을 하고 이 맨션 신문 투입구에 매상금과 열쇠를 넣고 가기로 되어 있었어. 어제는 그걸로 괜찮았어. 하지만 오 늘은 이 문 앞까지 왔을 때 목소리가 들려서..."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냐?" 펜 끝을 할짝 핥으며 카바마루가 재촉했다. "와타루씨의 목소리였어." "어떤 목소리였지? 이야기의 내용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이야기가 아니라 말하잠녀 신음 소리랄까..." "신음 소리?" "그러니까... 굉장히 기분 좋은 듯한 막 섹스 중인 목소리 말이야." 말한 나보다 물어본 카바마루가 새빨개졌다. 후지시로도 똑같이 얼굴을 붉혔 지만 애써 의식하지 않고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신문 투입구에 매상금을 넣으려고 하자 문이 움직였어. 난 틀림없이 와타루씨 가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깜짝 놀랐어. 그러자 바로 문 너머로 와타루씨의 목소리가 들렸어. 아... 안돼. 아아, 켄...! 하고 말이야." "켄?" 되돌아온 질문에 나는 순간 말할까 주저했지만 진실을 위해서는 무시할 수 없 는 이름이었다. 나는 입안에서 모래를 씹고 있는 것 같다. 젠장! "이치가야의 이름이야." 카바마루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기록 담당에게 뭔가를 명령했다. '요 체크' 라는 뜻이겠지. '그래서?' 하고 재촉하자 난 무거운 입을 힘들게 열고 말을 토했다. "말했잖아? 와타루씨는 6시에 이치가야 켄과 둘이서 나란히 가게를 나갔어. 식 사 후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하지만 오늘은... 그런 목소리를 들었으 니 맨션에서 데이트하기로 한 게 아닐까? 이치가야 녀석이 오늘이야말로 와타루 씨한테 고백한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는 건 그 이치가야 켄은 피해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단 거냐?" 아아, 정말이지 내가 아까부터 그렇다고 말하고 있잖아. 나는 울화가 치밀어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튼 나는 8시 정각에 가게를 닫고 옷 갈아입고 정리를 하고 문단속을 한 뒤에... 여기까지 걸어서 3분. 여기 도착한 것은 8시 10분쯤이야. 그 시간에 녀 석들은 현관 앞에서 섹스하고 있었단 거겠지." "하지만 네가 칸자키 경부보에게 신고한 것은 8시 26분이다. 여기 오고 나서 10분간 넌 이 복도에서 계속 소리를 듣고 있었단 거냐?" "...그런 촌스런 짓은 안 해. 1층에 내려가서 기다렸어. 엘리베이터 홀에서 말 이야. 10분 정도 있으면 끝날 것 같아서 말이야. ...그야 내가 8시가 넘으면 여기 올 거라고 와타루씨도 이치가야도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질질 끌 면서 섹스에 빠져있을 수야 없을 거 아냐? 나한테 들려주고 싶다면야 얘기가 달 라지겠지만. ...아무튼 10분 뒤에 다시 여기까지 올라오자 이번엔 문이 조금 열 려있었어. 와타루씨의 손이 끼여 있었다구. 섹스로 실신해서 쓰러졌다기엔 좀 이상해 보여서 문을 열어보니까 이런 상태였던 거야." 어느새 내 주변엔 카바마루와 후지시로, 기록담당 뿐만 아니라 감식반장과 시 로까지 와있었다. '이상.' 하고 말을 끊은 내게 반장이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감탄한 듯했다. "너... 아직 학생이지? 아는 사람이 이렇게 되어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텐데도 침착하게 잘 증언해줬군. 배짱이 좋구나." 위로인지 칭찬인지 반장이 온화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책임을 완수하고 겨우 안도한 순간 억양이 사라진 시로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런데 넌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에 전념하고 있었던 거냐?" 시로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수첩을 탁 닫았다. ...제 무덤을 판 꼴이었다. 물론 나는 맨션 복도에 서서 얘기한 것만으로 사정청취가 종료될 거라고 느긋 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자신이 피의자가 될 가능성은 상상조차 하 지 못했다. 나의 고전은 카바마루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네 증언을 100% 신용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그 10분 동안 이 맨션에는 외부로 부터의 침입도 내부로부터의 외출도 없었단 말인가?" 미묘하게 돌려서 하는 말이 걸려서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후지시로도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시선으로 시로에게 설명을 요 구했지만 시로는 떨떠름한 얼굴로 하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설마? 설마 시부야서가 날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 나는 당황했다. 범인 취급을 받다니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와타루씨를 죽인 후에 범인이 도망갔을 가능성도 있잖아?" 내 질문에는 시로가 자세히 대답해주었다. "지금 베란다의 흔적을 조사중이지만 본 바로는 창문은 전부 안쪽에서 잠겨있 었다. 범인이 창문에서 도망친 뒤에 피해자가 잠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따라 서 출입구는 네가 어슬렁 거리고 있던 1층 정문 홀... 말하자면 비상 계단과 엘리 케이터 이용구인 그 장소 이외엔 없다는 말이다." 시로가 힐끔 나를 보았다. 일이 귀찮게 되었다는 눈빛이었다. 어째서? 설마 시로도 날 범인으로 의심하는 거야? 그럴 리 없지? 응? "...아무튼 장소를 서로 옮기자. 여기선 감식 작업을 방해하게 된다." 그렇게 말한 시로는 바로 걸음을 돌려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이... 이봐, 시로!" "자, 가자. 빨리 걸어." 카바마루가 내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나는 혼란해진 나머지 바로 후지시로에 게 매달렸다. "후지시로! 설마 나 의심받고 있는 거야?" "하아... 저기, 아니..." "하아... 가 아니야, 후지시로! 너도 일단 형사잖아! 분명히 해!" 당황해서 소란을 피우는 날 보며 카바마루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보아하니 신주쿠서는 꽤나 한가한 모양이군요. 다른 관할에 참견할 정도로 한 가하면 피해자 가족에게 연락이나 해 주실까?" 카바마루가 후지시로에게 와타루씨의 면허증이나 의료보험증, 그 외에 신분 증명서류를 내밀었다. 성실한 후지시로는 카바마루가 하라는 대로 전화번호를 찾아 수첩에 기록했 다. 그런 후지시로를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삐딱하게 재려다보던 카바마루가 다 시 비뚤어진 말을 입에 담았다. "어라? 정말로 해주시는 겁니까? 고맙기도 해라.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승진 시험 공부나 하시지? 우리한테 협력하는 것보다 그쪽이 촐세가 빠를 텐데 요." 비아냥의 칼끝은 후지시로와 아마도 시로한테도 향하고 있었다. 이 카바마루 는 젊어서 경부보의 지위에 오른 캐리어인 시로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 본인인 시로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말하게 내버려두라 는 느낌으로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여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시로. 과묵한 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그에 비해 이 카바마루 녀석은... 나는 붙잡힌 팔을 휙 뿌리치고 카바마루를 올 려다보았다. 카바마루도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다. "뭐야?" "당신이 그런 말 할 때야?" "저어, 나... 나츠키씨!" 어쩔 줄 몰라 하지마, 후지시로. 난 이런 한심한 어른을 보면 확 물어뜯어주고 싶다구. "남 걱정말고 자기 걱정이나 하시지? 응? 카바마루." 내 폭언에 후지시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밑바닥이란 건 당신 자신한테 책임이 있는 거야. 당신한텐 안됐지만 시로는 경부보가 될 만 하니까 된 거라구. 비아냥에 머리 쓸 시간이 있으면 일반 상식부터 다시 공부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 밑바닥인 채 정년퇴임할 거다." 카바마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헤헹, 꼴 좋다. "쓰... 쓸데없는 말 말고 얼른 와!" 카바마루가 내 멱살을 들어 올려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갔다. 후지시로는 입을 쩍 벌린 채 재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억지로 순찰차에 태워졌다. 날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후지시로와는 헤 어져버렸지만 그래도 시로가 남아있었다. 시로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무서울 것 이 없었다. 얼른얼른 묻고 싶은 걸 묻고 얼른 집에 보내달라구. 카바마루. 장소가 바뀌어 어느덧 이곳은 시부야서 취조실, 그렇다면 그리운 장소다. 시 로와 처음 만났던 날도 나는 신주쿠서의 취조실에서 사정청취라는 이름뿐인 심 문을 받았다. "다시 한 번 맨 처음부터 설명해라. 네가 최초로 그 집 앞에 갔을 때부터 두 번 째로 4층으로 올라갈 때까지의 10분간, 아무도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하지 않은 거지?" "몇 번이나 말을 시켜야 만족할 거야? 이 하마! 맨션 주민 비슷한 녀석도 안 왔 고 아무도 안 내려 왔어! 엘리베이터 작동음도 못 들었다고!" "그러면 피해자와 함께 실내에 있어야할 인물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니까! 모르는 건 모른다구!" 탕 하고 책상을 내리치자 내 뒤에서 벽에 기대어 있던 시로가 난처한 듯이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시로에게 시선으로 구원을 요청했지만 슬프게 도 이런 긴급하테에서조차 공평함을 잃지 않는 시로는 여기서 날 감싸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시로가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담뱃재를 재떨 이에 털면서 불쑥 말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형세가 불리하군." "누... 누가?" '너.' 하고 시로가 차가운 시선으로 턱짓을 했다. 이럴수가!! "시로까지 그런 말 하지마! 날 못 믿는 거야?" "믿기 위해선 그 나름의 증거가 필요하다." "시로!" 어디까지나 쿨한 나의 연인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소리쳤을 때, "건드리지 마!" 문 하나를 사이에 둔 복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난 아냐!' 라든지 '그 녀석이 했어!' 하는 소리도. '조용히 해!' 하고 주의를 주는 것은 시부 야서 쪽인가? 아무튼 여러 명이 뒤얽혀서 벽에 부딪쳤다가 복도에 쓰러지며 힘 들게 누군가를 잡아 누르려 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가 시부야서로 연행되어 온 모양이다. "왔나." 시로가 담배를 재떨이에 껐다. 동시에 카바마루가 일어나 기세 좋게 문을 활짝 열었다. 경관을 상대로 날뛰고 있던 인물도 헉 하고 놀라 이쪽을 돌아본다. 나도 놀랐다. 하지만 저쪽도 상당히 놀란 모양인지 커다랗게 벌어진 두 눈이 차차 증오의 색으로 물들어 날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마노!" "이..." 양쪽에서 경관에게 붙잡혀 있던 이치가야가 갑자기 그들의 팔을 뿌리쳤다. 그 리고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절규와 함께 취조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 자식! 죽여 버릴 테다!" 내 멱살을 움켜쥔 이치가야가 오른손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제지한 것은 시로였다. 시로는 재빨리 날 등 뒤로 감 싸고 이치가야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크윽..." 이치가야가 주춤한 틈에 경관들이 이치가야에게 우르르 덤벼들어 그대로 바닥 에 잡아 눌렀다. '내 아들을 난폭하게 대하지 말아줘요!' 하고 비통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 은 동행한 이치가야의 아버지였다. 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뒤로 붙잡힌 채, 이치 가야는 그래도 그 강렬한 눈으로 내게 증오를 뿜어냈다. 나는 시로의 뒤에서 그 저 말을 잃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이치가야가 날 원망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받는것 만큼 이해할 수 없고 슬픈 일은 없었다. 시로가 경관에게 턱짓을 했다. 경관들이 당황해서 문을 닫았다. 순간 방안은 치묵에 빠졌다. "이치가야 켄인가?" "몇 번이나 물어봐야 만족할 거야?!" 이치가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시로가 그를 앉히라고 경관에게 명령했지만 이 치가야는 경관들이 준비해준 파이프 의자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물론 날 노리고 말이다. 벽에 부딪친 파이프 의자를 냉정하게 일으킨 시로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리카이 놔타루에 대해 두, 세 가지 물어보고 싶다." 그 순간 이치가야는 욕설을 퍼부으려고 한 듯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시로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순간 폭언 대신 퉤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차피 또 어떤 관계냐, 오늘은 몇 시에 어디에서 뭐 했냐, 와타루와 무슨 얘 기를 했냐 하는 지루한 얘기를 물어볼 거지?" "네겐 지루해도 우리에게 있어선 중요한 일이다." "뭐야, 이 자식! 헛소리하지마!" 이치가야가 테이블 다리를 콱 걷어찼다. 그럴 때마다 소심한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평정을 잃었다. 나는 이치가야보다 아버지 쪽이 걱정되었다. "...형사님. 우리 아들은 이래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착한 아이입니다." "당신은 입 다물고 있어! 망할 염감!" "아아... 그, 그래? 그러지 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바마루가 '요즘 부모들이란...' 하고 인상을 찌푸 렸다. 카바마루는 주는 것 없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지만 그 의견엔 조금 동 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 강제로 연행되어 왔는데도 뭐라고 한마디 변호하기는 커녕 범인 취급하지 말라고 싸울 기개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래선 자식에게 바보취급 당해도 당연하지, 아저씨.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살인자!" 이치가야가 외친 그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이 자식, 잘도 와타루씨를 죽였겠다!! 그렇게 돈이 탐났었냐?! 제길!" "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물음표만이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 시야 한 구석에서 기록 담당이 재빨리 테이블에 앉았다. 노트를 열고 당장 에 뭔가를 써 내려갔다. 이치가야를 잡아 누르고 있던 경관들이 두 명이나 붙어 이치가야를 의자에 앉혔다. 나도 망연해져서 시로에게 의지해서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처음 깨달았지만 나는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앞머리가 젖어 있었 다. 땀이 가슴으로 뚝 떨어졌다. 나와 이치가야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더웠다. 이치가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치가야의 눈이 아주 붉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분노로 피가 몰렸는지 아니면 울어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들 뒤로 각각 경관이 한 명씩 붙었다. 시로와 카바마루가 테이블 좌우로 떨어져 섰다. 문에도 경관이 한 명, 이른바 만전의 태세였다. 나는 꼴깍 숨을 삼키고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치가야, 난 와타루씨를 죽이지 않았어." "거짓말하지마!" "거짓말이 아니야. 네가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가게를 닫 고서 매상금과 열쇠를 전해주기 위해 와타루씨의 맨션에 갔어. 그러자 거기에... 문 너머로 너랑 와타루씨가 있어서..." "뭐? 이 자식,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치가야가 손바닥으로 탕 하고 라이트를 내리쳐 내 설명을 가로막고 몸을 앞 으로 내밀었다. "난 와타루씨의 맨션에 가지 않았어." "에?" "와타루랑 가게를 나와서 그대로 밥 먹고 헤어졌어." "에...?! 하지만 너 오늘이야말로 와타루씨한테 고백한다고..." "시끄러! 못 했단 말이야! 그 녀석은 절대로 방에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오늘밤 도 허탕 쳤다구! 밥 먹었을 뿐이야! 평소랑 똑같이! 학생은 일찍 들어가 일찍 자 라며 집에 돌아가면 도착했다고 꼭 보고하라고... 완전히 애 취급당했단 말이야! ...그 녀석, 그런 차림을 하는 주제에 몸가짐은 무지 신중하다구. 내가 녀석을 어 떻게 해볼만한 그런 관계가 아니란 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그런 건가? 하는 당황스런 마음이 격렬하 게 교차했다. 나는 몇 번이나 숨을 삼키고 증언을 반복했다. "하지만 난 분명히 들었어. 현관 앞에서 와타루씨가 널 부르는 목소리를... 그 신음 소리를..." 신음 소리라고 말하자마자 이치가야가 이상하다는 듯이 날 보고 나서 밉살스 럽게 노려보고는 갑자기 화가 난 것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너 바보냐?! 난 그 녀석과 키스한 적도 없다구! 그런데 갑자기 섹스?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응?" "잘못 들은 건 아닌가?" 그렇게 내게 물은 것은 시로였지만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와타루씨의 신음 소리를 들었어." 이치가야가 헷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조한 거냐? 아니면 의외로 네가 신음 하게 만든 거 아니야? 열쇠랑 매 상금을 전해준다는 명목으로 문을 열게 해서 와타루를 억지로 덮친 거지, 그렇 지?" 이치가야가 있는 힘껏 책상을 걷어찼다. 나도 머리에 피가 몰려서 벌떡 일어났 다. 그러나 시로가 '나츠키.'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제지하자 분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어떻게든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치가야가 시로를 확인하려는 듯이 힐끔 보았다. 내 연인인 시로라는 걸 눈치 챈 걸까, 하지만 그런 건 지금 관계 없었다. "...아마노. 이 자식,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거냐?" "그건 네 쪽이겠지?" "뭐라고?" 이번엔 이치가야가 일어섰다. 그는 카바마루와 경관에게 양팔을 붙잡혔으면서 도 몇 번이나 내게 덤벼들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치가야가 눈물을 뚝뚝 흘 린 것이다. 거기엔 나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이치가야가 울다니 그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울다니... 울만큼 고통스럽다고 보여주다니... 비겁했다. "왜 내가 와타루를 죽여야 하는데?! 내게 있어 그 녀석은... 와타루는 무지 소중 한 녀석이었어! 좋아했어! 반했었다구! 엄청나게 반했었다구! 지금도 아직 믿어 지지 않아! 그 녀석이 죽다니...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니...! 난 와타루가 너무 귀 여워서 계속 지켜주고 싶었어. 그런 내가 어떻게 그 녀석을 죽인단 말이야?! 와 타루를 돌려줘! 바보 자식아!" 이치가야의 눈물이 내 가슴을 압박했다. 이치가야의 통곡이 내 고막을 갈기갈기 찢었다. 난 와타루씨를 생각하는 이치가야의 마음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만약에 내가 형사였다면 이 시점에서 이치가야의 혐의를 풀어주었을 것이다. "데려가." 시로의 명령에 경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가야는 아버지와 함께 복도 맞은 편 방으로 이동되었고 방에는 나와 시로 둘만이 남겨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시로가 '괜찮냐?' 하고 보기 드물게 위로해 주었다. 나는 '응.' 하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동요가 너무 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심 호흡을 하고서 상당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빠진 후로 처음나온 목소리 는 자신도 생각치 못한 말이었다. "저 녀석... 무사했구나." "무사?" 나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지독하게 피곤해서 테이블에 얼굴을 얹고 서 말했다. "나... 이치가야까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와타루씨를 죽이고 뒤를 따라 자살 이라도 한 건 아닐까...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었거든..." 고개 숙인 내 뒤통수를 시로가 말없이 뒤섞었다. 나는 시로의 손바닥 온기에 이끌리듯이 말했다. "...있잖아, 시로." "왜?" "시로는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나? 아니면 이치가야?" "지금 단계에선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나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만도 고마워."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자 시로가 내 머리를 통하고 때렸다. ...응, 고마워. 난 괜찮아. 시로가 지켜주니까. 12 나는 시로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내 뺨에 눌렀다. 차갑지만... 따뜻했다. 나는 단단한 마디를 입술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있잖아, 시로. 곧잘 '죽을 이유가 없다.' 라고 하지만 난 왠지 거기 반론하고 싶어져.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신기하지 않잖아? 나 도 시로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항상 시로따윈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시로를 죽여 버리겠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그러면 시로는 평생 나만의 것이 되니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자 시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군." "스릴이 있어 좋잖아?" 내가 미소를 지어주자 시로가 조그맣게 쓴웃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카바마루가 돌아왔다. '이치가야 켄의 알리바이가 밝혀졌습니다.' 하고 짧은 중 간 보고를 던졌다. "이치가야 켄이 8시쯤에 택시로 자택인 맨션으로 돌아온 것을 1층 주민이 목격 했습니다. 어린 주제에 언제나 택시를 탄다는 것에 대해 전부터 흥미가 있었던 모양이라 오늘도 이치가야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을 창문으로 확인했다고 합니 다. 택시 운전수도 이치가야 같은 인물을 맨션 앞까지 내려줬다고 증언하고 있 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바마루가 자신감있게 나를 보았다. 완전히 날 흑(黑)이라고 보 는 눈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칸자키 경부보. 아마도 경부보와 이쪽이 아는 사이인 모양 이군요.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아는 사이엔 조사에 사감정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까... 여기서 단 5분만이라도 좋으니까 제게 맡겨주시 지 않겠습니까?" 카바마루는 이렇게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비아냥을 섞어서 말했다. 시로는 아주 잠시 망설임을 보였지만 역시 그러는 편이 좋다고 객관적으로 판 단했는지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곧장 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봐, 이봐, 여기 버리고 가는 거야? 그런 줄 알았더니 시로가 빙글 돌아보며 '나중에 다시 오겠다.' 하고 일단 재등장을 예고하고 사라졌다. 그리하여 현재 네모진 얼굴에 콧구멍이 벌어져서 그야말로 하마의 얼굴인 카 바마루가 내 시선을 점령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비로소 진심을 말할 수 있겠군." 비아냥을 서두로 내세운 카바마루가 거만한 태도로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짚었다. 지금까지는 시로를 어려워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담배를 꺼내서 한 입 물고 연기를 뿜어내더니 별안간 천박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너지? 죽인 거..." 너무나 요점에서 빗자가서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농담을 할 새가 있으면 하나라도 더 많은 물적 증거를 찾아오라구. 반응이 미약한 내게 약간의 초조함을 보인 카바마루가 비겁한 수단으로 방법 을 바꿨다. "이봐... 너 예전에 신주쿠 2번가에서 남창이었다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뻔한 나는 스스로 자신을 제지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뒷말을 재촉하자 그제야 겨우 꼬리를 잡았다는 것처럼 카바마루가 입가를 천박하게 일그러트렸 다. "너 그 피해자와 어떤 관계였냐? 응?" "가게의 점장과 알바생의 관계였어." "그것뿐만이 아니겠지. 사실 너 그 피해자랑 정을 통한 거 아니었어?" 정을 통한다는 표현에 저질적인 상상을 강요하자 난 당장에 불쾌해졌다. 안색 이 변한 내가 재미있는지 카바마루가 더더욱 말로서 나를 희롱했다. "신주쿠서의 자료에 따르면 넌 1년 전까지 남자를 상대로 엉덩이를 흔들어 생 활비를 벌었다고 하더군. 그것이 원인으로 그... 신주쿠 2번가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예쁘장한 얼굴로 장난이 아닌데? 아아, 예쁘장한 얼굴이라 남자도 피가 끓는 건가? ...저 목속같은 칸자키도." "--시로는 관계없잖아?!" 순간, 나는 카바마루에게 격렬한 증오를 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녀석을 후 려칠 것 같아서 나는 자신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내가 여리서 날뛰면 폐 를 끼치게 되는 것은 시로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시로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 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귀찮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 카바마루가 더러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난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녀 석의 입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직접적으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봐, 아마노. 그 귀여운 머리로 잘 생각해봐라. 응?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 가 안 맞잖아. 자살도 자연사도 아니고, 그건 살해다. 토리카이 와타루는 널 고 용한 이틀째에 숨을 거뒀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냐? 말하자면 네가 잘못 들었 거나 위증을 했다는 거다."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말했었지?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정문 홀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그 시간에 맨션을 드나든 인물이 없다면 맨션 내에 거주하고 있던 주 민이 범인이냐? 계단을 이용해 토리카이 와타루의 방에 가서 네가 돌아올 때까 지 10분 동안에 죽였단 말이냐? ...뭐 일단 그 쪽으로도 조사하고 있지만 너밖에 없어. 말하자면 넌 필요 이상으로 자세한 증언을 하는 바람에 자신이 범인이란 것을 자백한 거라구. 내 말이 틀렸나?" "난 안 죽였어!" "범인은 다 그렇게 말하지만, 네가 안 죽였다는 증거야말로 어디에도 없다." 카바마루가 실실 코웃음 치자 나는 이를 부득 악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죽였다고 낙인찍고 있는 녀석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설 명해야 생각을 고쳐먹을 것인가? "좋은 거 가르쳐줄까, 아마노? 나는 널 신용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너는 좀 더 이른 시간에 토리카이 와타루를 죽였다. 루비 완샹과 맨션은 걸어서 3분. 보 통 남자가 달리면 1분도 걸리지 않겠지. 루비 완샹은 너 이외의 점원은 없다. 그 걸 빌미삼아 넌 영업시간 내에 루비 완샹을 빠져나가 맨션 앞에서 대기하고 있 다가 토리카이 와타루가 귀가하자마자 살해했다. 그리고 시치미 뗀 얼굴로 가게 로 돌아가 폐점시간까지 일했던 거지. ...사망 추정시각은 어차피 다소의 차가 생기게 되어있어. 예를 들어 7시 반부터 8시까지라고 치자. 그 30분 동안 초반 에 죽여도 후반에 죽여도 추정시각은 변하지 않아. 그런 거다. 넌 아마도 감식에 빠삭한 모양이니까 그런 주변머리는 돌아갔던 것 아니냐?" 카바마루의 말에 나는 지금 여기서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반론을 찾을 수 없 었다. 내가 아니라는 말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난 안 그랬어! 와타루씨의 몸에 분명한 증거가 남아있을 거야!" 범인의 땀과 혈액, 정액을 포함한 체액 전반, 그리고 머리털이나 의류의 섬유. 그것들의 존재를 넌지시 비쳤지만 카바마루는 그것도 비웃었다. "피해자의 엉덩이에서 네 정액 반응이 나오길 빌겠다." "내가 형사가 되는 날에는 제일 먼저 당신의 부정한 수사를 내부에 고발할거 야. 각오해, 하마 녀석아!" 카바마루는 이 결사적인 비장의 한마디조차 맘대로 해보라고 비웃었다. 분해. 정말 분해! 이런 형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야. 이런 녀석이 제 대로 수사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 뒤로도 나는 카바마루에게서 말도 안 되는 말을 잔뜩 들었다. 육체관계를 거부해서 홧김에 죽인 건 아니냐는 둥, 매상금을 건네주는 것이 갑자기 아까워 져서 발작적으로 죽여 버린 건 아니냐는 둥...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져석에게 아무리 진실을 외 쳐봤자 통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만큼 에너지 낭비다. 한참 뒤에 겨우 시로가 돌아왔다. 시로는 방으로 돌아와 먼저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얼굴에 폭행 흔적이 없는지, 옷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그런 것 들을 일단 확인하고 내가 무사해서 안심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하는 눈이 뛰어난 시로였다. 내 굳어진 표정을 보고 자신이 자리 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던 모양이었다. 내가 어떤 심한 말을 계속 듣고 있었는지, 얼마나 멸시를 당했는지...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로가 나를 카바마루에게 맡기고 옆방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시로는 시로대로 이치가야에게서 사 정을 듣고 진실의 소재지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카바마루가 무슨 말을 해도 참을 수 있었다. 시로가 싸우는 한 나도 어디까지라도 싸우겠어! '난 괜찮아.' 하고 눈으로 말하자 시로도 '그러냐.' 하고 무언의 시선을 보내주 었다. 시로가 감정을 지우고 카바마루에게 돌아섰다. "감정 결과가 나오기 전에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어쨌든 이치가야 켄이 도망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일단 자택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로는 '너도.' 하고 나에게 턱짓을 했다. "에, 석방? 진짜? 만세!" 들떠서 의자에서 일어나자 카바마루가 '아니, 아니.' 하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 어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칸자키 경부보. 이쪽은 중요 참고인이니까 그럴 수야 없 지요." 시로가 말없이 카바마루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카바마루가 '으...' 하고 기가 죽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색소가 엷은 시로의 홍채는 흘겨보면 한층 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다. 먹잇감을 물어뜯기 직전의 허스키견의 눈 같은 느낌이었다. 카 바마루는 완전히 기가 죽은 것 같았지만 나는 과거에 여러 번이나 이 눈에 뇌살 당했기에 오히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카바마루에게 시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와마루씨, 살해범으로 판정되는 물적 증거는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 니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구류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린 그에 게 협력을 구하는 입장에 있으며 이건 어디까지나 임의동행입니다. 피의자를 강 제 연행한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마." 말꼬리에는 카바마루를 생각해서 어색하게 붙였던 존댓말이 깨끗이 사라져 있 었다. 시로의 박력에 압도된 카바마루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우와아아, 역시 우리 시로는 너무 멋져! 하지만 돌아가는 차안에서 시로는 한 번도 내 눈을 봐주지 않았다. 사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학원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다음 신호에서 왼쪽으로 돌면 우리 집에 도착하지만 이런 기분인 채 집에 돌아 가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무엇부터 사과해야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사과해야할 일이 많아서 입을 열 용기가 없다. 전방의 신호가 붉은색이 되어 시로가 스피드를 줄여서 정지했다. 채칵, 채칵 방향 지시등의 점멸음. 시로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지포로 불을 붙이고 초조한 듯이 두, 세 모금 피웠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자 시로가 불쑥 말했다. '거짓말만은 하지마.' 라고 말이다. "...미안." "사건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얘기다." "알아." "돈이 필요하면 그렇다고 말해. 너한테 들어가는 돈 정도는 어떻게든 돼. 그것 보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걸 먼저 생각해라." 시로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아르바이트하고 싶었어.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생활비에 보태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난 계속 시로에게 신세만 지고 조금도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으니까..." 시로가 난폭하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뻑뻑 담배를 피우다가 재떨이에 난폭하 게 비벼 껐다. "대등하게 되기 전에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을 거 아니냐!" 신호가 파란색이 되었다. 시로가 난폭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꺾었다. 어쩐지 시 로가 이렇게... 부모처럼 야단치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아서 나는 매우 침울해졌 다. 그랬지. 난 어쩌다보니 시로가 내 보호자가 되어서 시로는 내가 올바른 사회생 활을 할 수 있도록 지도 및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지, 참. 그래서 공부하라고 귀찮게 잔소리도 한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내주겠다고, 그렇게까지 말해줬다. 하지만 난... 난 정말로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되어 시로의 오른팔이 되고 싶었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미안... 시로." 사과했지만 시로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뭘 사과하는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나도 그걸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 다. 13 다음날인 수요일. 나는 학교를 쉬고 와타루씨의 명복을 빌었다. 집에서 혼자 빈 것 뿐이지만... 밤 중에 들어온 시로는 방안에 선향 냄새가 나는 것에 눈썹에 주름을 새겼을 뿐이었다. 이 선향이 와타루씨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이해해준 모 양인지 사법해부의 결과를 약간 가르쳐 주었다. 사인은 교살. 그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와타루씨의 얼굴과 다리 사이에 붙어 있던 체액은 와타루씨 본인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와타루씨는 문을 향해 선 채 사정하고 문에 기대어 쓰러졌다.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항문부를 중심으로 찰과상과 열상이 다수 발견되었다. 지금으로선 외 설행위 강요에서 교살로 발전되었다는 설이 농후하다. 현재 너와 이치가야 켄을 포함한 대인 관계를 조사중이다." "...조사 경과를 용의자한테 말해도 돼?" 괜한 질문을 해버렸다. 실수를 지적당해서 아연해진 시로는 그 뒤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게다가 시로 녀석, 밥도 안 먹고 출근했다. 요즘은 계속 둘이서 함께 아침식사 했는데, 느긋하게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은 몇 시에 들어와?' 하고 아내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즐거움 중 하나였는 데. 그런데 오늘 아침엔 등 돌린 채 '아침은?' '필요 없어.' 이 한마디를 내뱉고 뚱한 얼굴로 나가버린 것이다. 어제 내게 괜한 소리를 해버린 것을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만 화풀이할데가 틀 린 거 아냐, 시로? 시로가 너무 매정하다보니 작년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버렸다. 내가 처음 시로의 집에 굴러들어 왔을 무렵, 시로는 오늘 아침처럼 날 무시했 었다. 날 완전히 방해꾼 취급을 하고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어쩐지 음울한 기분을 질질 글면서도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나도 시로와 똑같 이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우중충한 기분은 하루 쉬는 정도로 밝아지지 않는다. 창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어두치침하게 흐려있었다. 몇 시간 뒤에는 본 격젹으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우산을 들고 괴로워하면서 문을 열고 집합 우편 함 앞을 빠져나가 밖으로 나가자 가랑비가 발킽의 콘크리트를 적시고 있었다. 날씨가 변하는 것은 정말 빨랐다. 어제는 와타루씨의 발인제가 있었을 터였다. 이치가야는 거기 갔을까? 아니, 용의자가 갈 수 있을 리가 없나? 가면 친족들에게 몰매 맞을 것이다. 나도 녀석을 반죽음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기분이니까 말이다. 와타루씨가 사라졌으니 루비 완샹은 어떻게 되는 걸까? 와타루씨가 사랑했던 옷들은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누군가 와타루씨가 좋아했던 옷을 관에 넣어줄 까...? 내가 학교아ㅔ 도착한 것은 수업 시작 10초전.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멍하 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작종이 울리고 시간에 딱 맞춰서 영어 조교가 들어왔 다. '헬로.' '하우아유.' 하는 인사가 울려 퍼지는 중에 갑자기 뒷문이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반사적으로 그 쪽을 돌아본 나는 가슴이 철렁해서 굳어져버렸다. "어머나, 이치가야군이지? 자아, 모두들. 이치가야군이야. 아아, 겨우 등교할 마음이 생겼구나. 내 수업은 처음이지? OK. 노 프라블럼. 아임 글래드 투 씨 유. 자아, 플리즈, 싯다운." 호들갑스러운 환영을 받은 이치가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 제일 끝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복도 쪽 제일 끝자리에 앉은 이치가야를 눈 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난폭한 동작으로 가방을 책상에 내던지고 책상 위에 책 대신 양발을 올린 이치가야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것은 영문 예제가 써진 칠판이 아니라 나였다. 그저께 그런 일이 있었기에 설마 등교할 줄은 몰랐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치가야가 도발적으로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원망스럽다는 듯이 혐 오감마저 드러냈다. 그리고 이치가야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척 밑으로 꺾었다. * * * 최근엔 어느 학교나 개축공사를 진행하고 시설을 보충하는데도 우리 학교는 엄청 낡았다. 대외적으로는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 뭐다 잘난 척하지만 내부자들 의 말에 의하면 그저 낡아 있을 뿐이었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교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예를 들어 2교시 수업 을 받기 위해선 다른 건물에 있는 강의실까지 이동해야한다. 이동할 땐 쌍방의 건물을 연결하고 있는 복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연결 복도란것이 또 장난이 아닌 것이 3층 부분에는 지붕이 없었다. 말하자면 3층짜리 육교같은 것이다. 그 래서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은 무지 불편했다. 여자애들은 계단으로 일일이 2층까 지 내려가서 2층 복도로 별관으로 넘어가 다시 계단을 올라가 들어가는 모양이 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귀찮아.' 라는 명쾌한 이유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번 개가 치나 3층 연결 복도를 달음박질 쳐서 건너가 버렸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런 타입이다. 옥상의 비가 홈통을 타고 쏴아쏴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스타트 지점은 언제나 물에 잠겼다. "지금은 별로 안 내려. 갈까?" "응, 뛰자." 한 무리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서 나도 책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었다. 발 밑에 서 첨벙첨벙 물이 튀었다. 이제 2미터 정도면 특별동에 도착한다고 생각했을 때, 복도 전용구에 장신의 그림자가 지나쳤다. ...이치가야였다. 녀석은 이 비를 피해서 2층에서 올라온 모양이었다. 이치가야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 러 넣고서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기가 눌러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책 표면으로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튀었다. "왜 그래, 아마노?" 험악한 공기를 느꼈는지 먼저 갔던 카츠라이 일행이 돌아보았다. "거기 있으면 젖어. 빨리 와." 나는 카츠라이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뗄 용기를 얻어서 어떻게든 전용구로 뛰 어 들어갔다. 이치가야와 나 사이의 분위기는 긴박했다. 서로의 고동 소리가 두 근두근 들리는 것만 같다. 이치가야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녀석의 앞을 지나쳤다. "자아, 책을 덮어요. 오늘 여러분은 테르밋 반응이라는 무서운 실험을 하게 될 거에요. 위험하니까 저 혼자서 할게요. 모두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폭발 실험이라는 이유로 나도 그렇지만 모두가 들떠있었다. 흥미 없다는 듯이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이치가야 혼자뿐이었다. "내가 떨어지라고 하면 떨어져야 돼요. 그때까지는 이쪽을 잘 보고 있어요. 네, 그럼 시작합니다. 이건 초벌구이한 사발이에요. 구멍이 뚫려있죠? 이것을 삼각 대에 고정시켜요. 여기까지 오케이인가요?" 야마네 조교의 말투를 훙내 내서 '오케이에요.'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왔 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설명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그럼 사발 바닥에 이 종이를 깔겠어요. 삼각대 아래에는 여기 있는 금속 트레 이를 놓습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뭔지 알겠어요?" "모래?" 정답이라고 웃은 야마네 조교는 짤막하게 '그럼.' 하고 진지한 얼굴이 되어 갈 색 유리병 마개를 열었다. "이것은 산화철과 알루미늄 분말입니다. 이것을 3 대 1로 섞은 것을 지금부터 사발에 넣겠어요. 그리고 이 안에 이걸 세우는 거에요." 야마네 조교는 그렇게 말하며 짧은 리본을 꽂았다. 우리가 마른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자아, 여러분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지금부터 이 마그네슘 리본에 불을 붙일 거에요.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벽에 붙어서 떨어지지 말아요. 저도 금방 책상 밑으로 숨을 거에요." 비명을 지르며 여자들이 교탁에서 떨어졌다.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뒤쪽 벽 까 지 물러났다. 책상 밑에 숨는 녀석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으로 찾아본 이치 가야는 이미 약품 선반 앞을 지나 베란다로 도망가 있었다. 그야 비 오는 것만 빼면 거기가 제일 안전할 테지. 신호와 함께 점화. 순식간에 불기둥이 솟았다. 캬아 하는 비명 속에서 초벌구 이 사발이 깨지며 대량의 연기가 발생했다. "창가에 있는 사람들 창문 열어요!" 창가에 있던 여학생이 그 말에 따랐다. 베란다에 있던 이치가야가 성가시다는 얼굴로 강의실로 돌아왔다. 무사히 실험을 마친 선생이 안심한 얼굴로 우리를 다시 불러 모아 실험 정리에 들어갔다. "여기 모래 위에 검은 것이 있는 게 보여요? 이걸 여러분에게 돌릴 테니까 식으 면 쇠망치로 쪼개보세요. 뭐가 나올지 기대되죠?" 야마네 선생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말라고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댔다. "이 실험은 산화철이 가지고 있는 산소를 알루미늄에게 빼앗겨 가는 과정에서 대량의 열이 발생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난 설명을 노트에 필기하면서도 내 눈은 시야 한 구석에 있는 이치가야를 강렬 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본인인 이치가야는 강의실 안에 있을 뿐이지 실험 따위 는 전혀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수업을 받을 생각은 원래부터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잊으면 안돼요. 산화철과 알루미늄을 한꺼번에 많이 쓰면 굉장 히 위험해요. 일촉즉발로 대폭발이 일어나니까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하자면 이치가야야말로 일촉즉발의 위험분자라구... 나는 어째서 이치가야가 학교에 나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나 때문이었 다. 녀석은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제의 모습으로 보아 이치가야는 날 범인이라고 낙인찍고 있었다. ...하지만 잊지 마라, 이치가야. 나도 널 의심하고 있다구. 왜냐하면 난 와타루씨의 목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 나만이 널 부르는 와타루씨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내가 형세가 불리하지만 얼마 있 으면 감식 결과가 모두 나온다. 그러면 흑백이 뚜렷해질 것이다. 내 결백은 증명 된다. 흑은 너다. 내가 아니야. 기세등등하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다. "자아, 이제 다 식었네요. 그럼 쇠망치로 쪼개보세요. 뭐가 나올까요?" 흑은 흑이다. 흑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을 리 없어! * * * 나는 검은 모래 덩어리를 향해 있는 힘껏 쇠망치를 내리쳤다. 수업이 끝나도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더 심해질 뿐이었다. "다음은 체육관이었지? 아, 시간 없다. 늦겠어." 클래스메이트의 목소리를 득고 네, 다섯 명의 남학생들이 일제히 복도로 뛰어 갔다. 나는 첨벙첨벙 뛰어가는 무리들을 지켜보고서 어쩔까 조금 고민하다가 힐 끔 계단을 보았다. 분명 이치가야는 2층 계단을 경유했다. 제일 먼저 강의실을 나갔지만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앙갚음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올 때 와 같이 책으로 머리를 가리고 다른 애들보다 조금 틎게 연결 복도를 뛰기 시작 했다. 별로 젖지 않고 복도를 통과하자 남은 건 본교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대 한 물 웅덩이를 뛰어넘기만 하면 되었다. '좋아,' 하고 기세를 타서 넘어가려고 한 순간, 아마노! 하고 누가 위에서 날 부 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옥상 위로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떨어지는 빗줄기와 팔, 순식간에 사라진 그 팔이 하얀 덩어리를 떨어트렸다. "에..." 그것은 내 발치에 있는 물웅덩이를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그때만은 내 기억력과 민첩한 반사 신경에 감사했다. 덩어리가 물에 닿기 직 전, 난 몸을 비틀어 왔던 방향으로 슬라이딩해서 몸을 피했다. 그 직후에 들려온 커다란 폭발음. 뿜어져 나온 화염과 연기도 상당했다. 본 교사 복도에 있던 여학생들이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연결 복도와 교 사를 차단하는 문이 닫혀있어서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것은 나뿐이었다는 이야기다. 한 발 먼저 가있던 카츠라이 일행이 의리 있게 되돌아왔다. "뭐야? 지금 엄청난 소리가... 우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놀란 그들은 펄쩍 뛰며 물러나 '소화기 가져와!' 하고 번지수가 잘못된 도움을 주었다. 나는 하하 웃고 말았다. 우습고 허리에 힘이 빠져 콘크리트 복도에 쓰러진 채 일어날 수가 없다. 날 겨냥하고 떨어진 덩어리는 필경 나트륨이었다. 한 순간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깨끗하게 잘린 사각형과 갈색 기름이 달라붙은 그 특유의 느낌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수업 덕분이었다. 나는 테르밋 반응 이외에도 폭발하는 것이 있었지... 하고 난 고교 1학년 때 배 웠던 수소발생 실험 순서를 멍하니 떠올리다가 깨달았다. 떨어진 엄지 손가락 크기의 나트륨은 방금 전에 위력을 잃고 이미 폭발의 위험 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폭발을 그대로 얼굴에 뒤집어썼다면... 생각하는 것만으 로도 오싹했다. "아마노! 괜찮아?!" 보고를 받고 타케와키가 뛰어왔다. 그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뛰어와 날 일으키고는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마노?! 무슨 일이야?! 상처는? 정신 차려!" "...시끄러. 정신도 멀쩡하고 상처도 없어. 괜찮..." 나는 말도 다 끝내기 전에 안아 올려져서 본교사로 옮겨졌다. 타케와키가 날 복도에 내려놓고 다시 한번 괜찮냐고 걱정했다. 나는 타케와키의 굵은 팔에서 도망쳐서 어떻게든 내 힘으로 일어섰다. 아아... 무릎이 떨린다. 꼴사나워. "폭발음이 있었다던데 사실이냐? 어떻게 이런 사고가 일어난 거지?" 카츠라이가 아까 벌어진 실험에 대해 상세하게 타케와키에게 말했다. 타케와 키가 화학 담당인 야마네 조교를 불러오라고 거칠게 말했다. 다른 학생들이 허둥지둥 특별동으로 뛰어갔다. "사고가 아니야. 이건 사건이야." "아마노...?" 말없이 덮어둘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비열한 녀석을 감싸줄 만큼 성격 이 좋지 못했다. "이건 사고가 아냐. 어엿한 범죄야. 내 미모가 엉망이 될 뻔 했다구!" "범죄라니 허풍이 너무 심해, 아마노." "허풍이 아냐. 누군가 옥상에서 나트륨 덩어리를 떨어트렸단 말이야!" "정말이냐?"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학교에서 범죄가 일어날리도, 일으킬리도 없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던 교사의 안이함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굳어져 있을때가 아니야. 이 학교 학생을 의심하고 싶지 않은 기분은 알겠지만 난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을 뻔 했다구." 야마네 조교가 남학생에게 이끌려 뛰어왔다. 타케와키가 사정을 설명하자 에 엣 하고 놀랍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약품은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데요. 저기 수업 중에 약품을 사용할 때 이외엔 언제나 열쇠를 채워서..." "그렇다는 건 수업 중에는 열쇠를 채우지 않는다는 거지?" "에, 하지만 수업 중엔 내가 강의실에 있으니까..." "아까 실험할 때처럼 모두가 당신 주변에 모여서 당신 손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약품을 슬쩍 하는 건 엄청 쉬울 거 아냐!" 관리 소홀을 지적당한 쇼크 때문인지 야마네 조교는 스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 고 말았다. 어째서 위험한 상황에 빠졌던 나보다 당신 얼굴이 더 창백해지는 거야?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나는 얼른 허리를 폈다. 타케와키와 야마네 조교가 약 품 취급방법에 대해 아직도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타케와키가 약을 다루는 위 험한 수업은 즉각 금지라고 말하자 야마네 조교는 그것은 빠트릴 수 없는 필수 과제라고 반론했다. "야마네 조교, 전부터 당신한테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학생의 흥미를 끌 고 싶다고 그렇게 과격한 실험만 하면 언젠가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은 예측 못 했습니까?!" "뭐가 과격하단 말이에요?! 전 제 나름대로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 지게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로 공부하고 있다고요!" 평행선과 같은 말다툼을 들으며 나는 진심으로 울화가 치밀어 버렸다. 이건 단 순한 장난이나 사고가 아니다. 살인 사건에서 비롯된 긴급사태인데 그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머리에서 지우고 번지수가 틀린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답답해 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 나트륨을 훔친 장본인을 잡는 게 먼저잖아!" 나의 일갈에 두 사람이 웃 하고 말문이 막혔다. "일단 나는 이 흠뻑 젖은 옷부터 어떻게든 하고 싶어. 어떻게든 갈아입고 그대 로 수업에 들어갈 테니까 뒷일은 맡길게. 그럼." 겉으론 용감하게 말했지만 속에선 덜덜 떨릴만큼 무서웠다. 혹시 범인이 내가 생각한 녀석이라면 녀석이 있는 수업에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어떻게든 본인을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공포보다 그 호기심이 더 강했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날 눈앞에 두고 그 녀석이 얼마나 분 한 표정을 지을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맘껏 비웃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고 기분이 좀 진정되자 투지가 활활 끓어올랐다. "범인이 누군지는 잘 알고 있어. 그렇지, 이치가야?" 그리고 빗속에서 춤추듯 펄럭인 은발을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꽤나 늦게 체육관으로 향하자 이미 농구 시합이 시작되어 있었다. 체육 담당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내가 지각한 사정을 들은 모양인지 흔쾌히 게임에 참가시켜 주었다. 아까 소화기다 뭐다 소란을 피웠던 카츠라이가 나의 생환을 환영하는 모습을 받아들인 나는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치가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이치가야는?" "아? 그러고 보니 못 봤네. 벌써 집에 간 거 아닐까?" 기세가 꺾인 기분이었지만 솔직히 반쯤은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면 어쨌든 이 체육 시간 이후로는 녀석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농구는 내 특기종목이다. 기분 전환으론 그만이었다. 골대를 이치가야라고 생각하고 있는 힘껏 두들겨 주지. "좋아. 패스해!" "아마노로 교체됐다! 조심해!" 더블 마크따윈 식은 죽 먹기였다. 나의 민첩함은 선수급이다. 나는 빈틈을 노려 마크를 벗어나 스스로 볼을 가지러 갔다. 볼을 잡은 순간 빙글 몸을 돌려 우리편의 눈도 보지않고 패스를 했다. 전혀 읽 을 수 없는 내 움직임에 따라오는 것은 농구부 녀석뿐이다. 농구는 스피드가 승부의 열쇠, 난 이미 골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막아라!" 적이 외쳤을 때는 난 우리 편에게서 볼을 빼앗아 (우물쭈물 하길래 가로챘다.) 그대로 골대에 때려 넣었다. "이봐, 아마노. 역시 농구부로 와라. 여름까지만 있어줘도 좋으니까. 응?" 카츠라이의 권유에 나는 어떠냐 하고 득의에 차서 가슴을 폈다. "부 활동엔 흥미 없어. 게다가 난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귀중한 시간이라니 뭔가 달리 하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그 질문에 좀 망설인 끝에 쓴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허스키 견을 돌보느라 바빠. 시로라고 하는데 그 녀석, 내가 없으면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리는 바보 개거든." 탈의실로 돌아온 나는 그 자리에 기둥처럼 굳어져 버렸다. 탈의실 안에 이상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원인은 내 옷이였다. 옷걸이에 걸어서 로커 밖에 매달아 두었던 옷이 너덜너덜하게 녹아있다. "이거 심한걸..." 코를 막고 들여다본 카츠라이 일행이 비참한 상황을 보고 말을 잃었다. 난 너덜한 걸레로 변한 불쌍한 옷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섬유가 녹은 모습으로 보아 불이 아니라 약품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자 의심가는 사람 은 역시 이치가야였다.이치가야는 분명 화학실에서 나트륨이외의 약품도 동시 에 훔쳐낸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내 옷에 끼얹은 것이다. 그렇게 납득한 순간, 차가운 것이 등줄기를 스쳤다. 녀석이 날 원망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이치가야가 그밖에도 위험한 약품을 손에 넣었다면 나는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아마노!" 나는 카츠라이의 목소리를 뿌리치고 화학실로 달렸다. 학과장과 타케와키가 지켜보는 가운데 야마네 조교가 약품 재고 검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세 사람의 앞으로 성큼성큼 나가서 교탁에 옷을 내던졌다. 너덜너덜하게 녹은 옷을 보고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문이 막힌 야마네 조교에게 나는 애써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불산 혹은 황산이야. 도둑맞지 않았는지 알아봐줘." 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야마네 조교는 약품 선반으로 달려들어 떨리는 손 으로 병의 라벨을 확인하고는 나약한 목소리를 내며 나를 보았다. "불산 병이... 없어..." 역시 그렇군. 나는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없어진 약품은 없습니까?" 초조해하는 학과장에게 야마네 조교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에텔 병이 없어졌어요." "뭔가 효능... 이랄까, 쓰는 방법은?" "마취에 사용될 때가... 갑자기 냄새를 맡으면 의식을 잃을 수도... 그게." 야마네 조교는 말꼬리를 흐린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치가야를 다그치라고. 녀석의 부모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당장이라도 경찰이 개입해야 할 일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경찰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학과장에게 나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에요. 살인 사건이 얽혀있어요." 그렇게 말한 나는 이치가야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전부 말했다. 나는 학과 장이 당장 움직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아마노군. 학교측도 어느 정도의 사정은 경찰에게서 들었다. 네가 아르바이트에 종사했던 일도 포함해서 말이야." 학과장의 말에는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을 내게 자각시키고, 경찰을 부르자는 내 말을 어떻게든 어둠 속으로 묻으려고 하는 교활함이 배어있었다. 그 증거로 학과장은 자꾸 내 열악한 가정환경을 예로 이치가야를 옹호하기 시 작했다. 내가 살인범의 아들인데 반해 이치가야는 자산가의 아들로 대외적으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치가야의 아버지가 사립학교 수준의 기부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비뚤어진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학과장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 들기 위해서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운 비교만 줄줄 늘어놓았다. "이치가야군의 아버님께서는 이치가야군을 부디 잘 부탁드린다고 몇번이나 말 씀하셨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 재적해 있는 학생의 처분권은 경찰이 아니라 학 교측에 있다."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타케와키가 끼어들자 학과장은 타케와키를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자네도 교육현장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헤아려주게. ...우리 학교로서는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네. 그렇지 않아도 사립학교에 학 생을 빼앗기고 여기저기서 우리한테 불리한 상황만 계속되고 있네. 우리 학교의 존속자체가 위험하단 말일세. 알겠나? 이럴 때 경찰이 소동을 일으키면 곤란하 다구. 학교의 명예가 걸린 중대한 사태일세. ...아마노군. 자네는 정말 트러블을 자주 일으켜. 로커 바깥에 옷을 걸어둔 자네의 실수 아닌가? 그런 사소한 장난을 일일이 신경쓰지 말게." "학과장님!" 학과장의 멱살로 팔을 뻗은 타케와키를 말린 것은 나였다. 타케와키가 놀란 얼 굴로 나를 보았다. 왜 말리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 었다. 나는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소한 장난에 겁먹고 싸우기 를 포기하는 근성없는 녀석도 아니다. 나는 학과장도 카바마루랑 똑같다고 슬그머니 조소했다. 나를 처음부터 '모든 악의 근원' 이라고 낙인찍고 나를 그 생각 안으로 밀어넣어 자신은 안전권에 있 으려는 최악의 어른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이런 녀석에게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도 기운 낭비라는 것을 신물이 나도록 배워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녀석들이 구제해주길 바란 내가 바보였단 것이다. 난 '알겠습니다.' 하고 학과장에게 미소를 지었다. 입은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다는 것을 학과장은 당연히 눈치 채고 있었다. "학교로서는 나 같은 트러블 메이커가 눈에 가시란 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자퇴해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소원만은 이루어줄 수 없을 것 같군. 난 더 이상 내 보호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아. 앞으로는 내 자신의 문제니까 당신들 학교측과 는 관계없는 걸로 해두지." "이봐, 아마노." 나가려고 하자 타케와키가 내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나는 말없는 미소로 어깨 에 놓인 팔을 피했다. "이런 돌대가리한테 말해봤자 손해야. 지구상의 이산화탄소가 쓸데없이 증가 할 뿐이야." "아마노..." "이치가야가 등교를 거부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학교가 이렇게까지 오염 되었을 줄이야. 오존층에 비할 바가 못 되는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야마네 조교를 힐끔 보았다. 그러자 흠칫하고 노골적으로 몸을 움츠려서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즐거운 수업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사람도 이렇게 되니까 그저 한심한 아가씨였을 뿐이다. 나는 '그럼.' 하고 타케와키에게 눈썹을 치켜뜨고 학과장에게는 일부러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하지만 학과장은 눈을 피한 채 나 같은 건 보지도 않았다. 14 이렇게까지 되면 거의 오기다. 학교측이 날 성가셔 한다면 내가 앞으로 하루라 도... 아니, 1시간이라도 수업을 쉬어줄 것 같아? 그러기는 커녕 등하교 할 때마 다 직원실에 들러서 학과장을 찾아가 상큼하게 인사해주지. 그게 내 방식의 복수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치가야도 몹쓸 장난의 소재가 떨어 진 모양이라 일단 오늘은 안전히 학생의 본분을 다할 수 있었다. 귀가할 준비를 하던 내게 타케와키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는 미안해.' 하고 사 과하길래 어째서 사과하는 거냐고 웃어주었다. 학교에 고용된 몸인 타케와키는 더 이상 문제삼아봤자 소용없다고 느낀 모양인지 그는 억지로 웃는 얼굴로 내 옷을 턱으로 가리켰다. "체육복 차림으로 돌아가는 거냐?" "꼴사납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오늘만 운동부인 셈치고 뻔뻔해지지 뭐." 타케와키는 겉모습에 남들보다 두 배는 신경 쓰는 내가 체육복 차림으로 전철 을 타는 것에 대해 얼마나 저항감이 있는지 잘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훗 하고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실은...' 하고 말을 꺼냈다. "지금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라고 연락한 참이야." "갈아입을 옷? 연락이라니 누구한테?" 타케와키 녀석, 설마 시로한테 연락한 건가? 내가 학교에서 위험한 일을 당했 다는 걸 설마 시로한테 밝힌 건가? 그러자 타케와키가 들뜬 말투로 고백했다. "후지시로씨가 와주신다고 했어." 뭐, 뭐라고? 후지시로? "비 때문에 길이 막히지 않으면 30분쯤 뒤에 도착한데." 나는 무심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후지시로라면 당연히 내가 위험한 일 을 당했다는 걸 알면 또 어쩔 줄 몰라하며 이성을 잃고 '괜찮아요, 나츠키씨?' 하 고 목소리가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후지시로가 자세한 사정 을 시로에게 전하면 또 시로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나는 그게 싫은 것이다. 학 교측이 이번일을 사건으로 인정하고 '피해자' 인 내 보호자를 그에 걸맞는 태도 로 불러들여 나한테 죄가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해결하기 위해, 사정을 설명 해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난 내 손으로 해결할 것이다. 학교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해줄 생각이 없다고 시로에게 울며 매달리는 것은 싫은 것이다. "타케와키, 오늘 일은 내가 시로한테 제대로 이야기할 때까지 말하지마. 후지 시로가 학교측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면 내가 불쾌하고 그렇다고 사실이 경찰에 알려지면 학과장이 히스테리를 부릴 거 아냐?" "학과장은 어쨌든 간에 아마노를 난처하게 할 말은 안 했으니까 안심해. ...화 학 실험 중에 옷이 망가지고 말았다고 죄송하다고 설명했어. 그리고 그 일을 시 로씨에게 연락해도 좋을 지 그걸 후지시로씨에게 상담했을 뿐이야. 그러자 그런 일이라면 자기가 대처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해 주셨어." "변명도 잘하네." 밑에서 삐딱하게 노려보자 타케와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후지시로를 불러 들일 구실이지? 하고 놀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어싸. 놀려준다 한들 이 사랑은 타 케와키의 일방 통행일 기색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난 강의실에서 레포트라도 쓰고 있을게." "유감이지만 강의실은 안돼. 개인 면담 기간이니까.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있 어서 너도 피곤할 테니까 1층 양호실에서 쉬고 있어. 후지시로씨가 오면 그쪽으 로 안내할게." 나는 그럼 그럴까? 하고 배낭을 어깨에 메고 강의실에서 일단 헤어졌다. 1층 양호실에는 사람의 모습이 모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자리를 비웁니다.' 라고 쓰인 두꺼운 종이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아아... 피곤하다. 이렇게 있으니까 피로가 저릿하게 배어 나왔다. 후지시로는 30분쯤 있으면 온다고 했지? 그렇다면 갈아입을 옷만 받아들지 말 고 녀석의 세리카로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자. ...하지만 아무리 지쳤다고 해 도 저녁거리는 조달해야하니 슈퍼를 경유해서 귀가다. 오늘 밤 메뉴는 뭐가 좋을까? 시로도 현장을 뛰어다녀서 피곤할 테니까 역시 기운이 솟는 고기류가 낫겠지. ...아아, 그러면 스테이크보다 깔끔한 돼지고기 생강구이가 좋겠다. 슬슬 쌀이 떨어져가니까 후지시로한테 쌀자루를 옮기라고 하자. 그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호 선생이 돌아온 건가? 하지만 발소리 는 멈추지 않고 침대로 점점 다가왔다. 나쁜 예감이 든 난 숨을 멈추고 인기척이 나는 쪽을 커튼 너머로 응시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기분 나쁜 땀이 온 몸에 서 배어나왔다. 옆자리의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가 아니라 침대에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내참, 놀래키지 마라. 나는 힘이 빠져서 다시 누워 후지시로가 오면 깨워주겠지 하고 눈을 감았다. 순간, 커튼 너머에서 갑자기 팔이 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강렬한 힘이 머리를 붙잡고 다시 침대로 눌렀 다. 그와 동시에 천 같은 것이 코와 입을 덮었다. 그 녀석의 정체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소리칠 수조차 없었다. 두꺼운 흰 천에 듬뿍 배어있는 에텔, 그 손을 떼어내려고 있는 힘껏 발버둥칠 수록 자극적인 냄새가 코로 들어와 내 신경을 잠재워갔다. "우... 우..."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는 풍경 너머에서 이치가야가 웃고 있었다. 15 가벼운 두통에 현실로 되돌아 온 나는 눈을 떴다. 그런데도 어두웠다. 온통 새 까매 한점의 빛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위도 아래도 좌, 우도 알 수 없 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 호흡하자 코 속에 남아있던 에텔 냄새 대신 다른 냄새가 들어왔다. 지독한 곰팡이 냄새, 공기가 눅눅하고 차가웠다. 체육관 용구실, 혹은 운동부 부실인 것 같다. 다음달 완성 예정인 클럽하우스가 아니라 부수기로 결정한 옛날 건물?! 아마도 맞을 것이다. 오래된 땀이 방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배어들어있는 듯 한 느낌이 났다. 발밑으로 지면의 존재가 느껴진다. 나는 아마도 서있는 모양이 었다. 아니, 예수처럼 양팔을 벌리고 묶여있는 것 같다. 게다가 다리도 한껏 벌려진 형태로 고정되어서 무릎을 굽힐 여유조차 없었다. 이미 이것은 서있다고는 말하기 힘든 상태였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도 오므릴 수 없고 무릎을 굽히고 싶어도 굽혀지지 않았다. 손목과 양 어깨, 그리고 발목이 묶여있는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거기 있어, 이치가야?" 난 암흑을 향해 외쳤다. 대답 대신 조금 떨어진 정면에 불빛이 일어났다. ...라이터 불빛이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떠오른 것은 담배를 문 이치가야다.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토해낸 이치가야가 말없이 일어나 스위치를 켜자 접촉 이 나쁜 형광등이 성가실 정도로 깜빡거리며 실내를 밝혔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두 눈에 혼신의 힘을 넣어 정면 에 서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이치가야가 기분 나쁘게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법 어울리잖아? 역시..."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치가야가 즐거운듯이 턱짓을 해서 깜짝 놀라 내 몸을 내려다보자, 목이 흠칫 굳어졌다. "...읏!" 나는 분명히 방금 전까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몸에 걸치 고 있는 것은 검은 가죽 의상이었다. 너무나 눈에 익은 디자인에 나는 순간 비명 을 질렀다.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때... 와타루씨가 숨을 거둔 그 날, 와타루씨 자신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루비 완샹의 드레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와타루씨의 수의...?! "안심해. 경찰에서 훔쳐온 것이 아니야. 디자인이 같은 다른 물건이다. 와타루 는 언제나 나기 것과 손님용으로 2벌씩 만들어 놨거든." 몸의 뒷부분만을 감싼 테일 코트. 앞부분은 그물처럼 엮은 가느다란 가죽끈이 가슴과 복부를 가로지르고 있는 대담한 디자인이다. 가죽제 카터 벨트에 허벅지 까지 올라오는 그물 타이즈와 중심만을 감쌀 정도로 작은 삼각 천으로 만든 사 이드 벨트 타입의 정조대. 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치가야가 내 몸을 자유롭게 만졌다는 사실에 희미한 오한이 느껴졌다. 수치와 굴욕과 슬금슬금 밀려오는 생생한 공포... "어... 째서 이걸..." "복수다." 이치가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는 듯이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복수라니... 그러니까 난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어!" 하지만 이치가야는 내 말을 무시하고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접는 방식의... 나이프? "...웃!" "겁먹는 건 아직 일러." 창백해진 나를 보고 코쁱으로 웃은 이치가야가 찰칵 하고 소리 내어 칼날을 열 었다. 그는 날카로운 칼끝을 내 미간으로 향해서 콧등을 타고 입술을 건드렸다. 그리고 목에서부터 밑으로 천천히 내려와 다리 사이를 표적으로 삼았다. 나의 급소가 희미하게 오그라드는 것이 느껴진다. "떨고 있잖아?" "...일부러 안 가르쳐줘도 돼." "입만 살았군. 여긴 당장이라도 지릴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말한 이치가야가 칼끝으로 정조대를 쿡 눌렀다. 지금 나를 지키는 것은 얇은 가죽 한 장 뿐, 섣불리 움직였다간 간단히 찢어질 것이다. "너야말로 나트륨 폭탄에 불산 공격이냐? 최악의 오타쿠 녀석이군." 이치가야는 나의 오기와 다리 사이의 탄력을 한동안 즐긴 뒤 골반과 사이드 벨 트 사이로 칼을 밀어 넣었다. 옆으로 눕힌 칼이 닿은 순간, 벨트가 슥 하는 소리 를 내며 끊어졌다. 한쪽이 끊어졌을 뿐인데 벨트 전체가 헐거워져서 삼각천이 천천히 내려간 안쪽에서 내 중심이 스르르 흘러나왔다. "큭..." "너 상당히 놀았던 것치곤 꽤나 깨끗하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 허리에 걸려있던 정조대를 이치가야가 칼끝으 로 떨어트렸다. 발목에 떨어진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겨우 깨달았다. 내 다리를 고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은 역기였다. 철봉 좌우에 각각 철고리가 장착되어 있어 한계까지 벌려진 내 두 발목은 그것 에 정지 장치 대신 단단히 묶여있다. "이건 없애줄게. 이런 게 있는 녀석이 루비 완샹의 옷이 어울릴 리 없지." "그... 그만둬!" 나의 절규를 웃어넘긴 이치가야가 나를 움켜잡고는 아픔에 신음하는 나를 아 랑곳하지 않고 이치가야가 주저 없이 나이프를 놀렸다. "아, 아아, 아앗!" 검은 수풀이 사각 사각 소리를 내며 난잡하게 깎여 떨어졌다. 음모를 빼앗기는 굴욕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곳을 잘리는 것보단 나았다. 단지 이런 짓 을 당하면 시로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한동안 시로와의 사랑스러운 시간을 참아 야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무사히 돌아가기만 한다면 시로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제모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곳에서 의식을 피하려고 나는 시야에 비친 광경에 시선을 보냈다. 역기와 에어로 바이크, 러닝 머신등 이 좁은 공간엔 신품인 운동 기구가 몇 대 나 놓여있었다. 잘 보면 내 팔이 매달린 것도 발처럼 좌우에 쇠고리가 달린 역기 가 파이프 스탠드에 세트된 것이었다. 휘트니스부 같은 건 이 학교에 없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고 있자 나의 전부를 제거한 이치가야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고 무뚝뚝하게 대답해줬다. "휘트니스 룸이 완성되면 이 기계들은 그 쪽으로 이동되로 거야. 지금은 이 구 클럽하우스에서 대기중이지." 나는 레슬링부의 클럽 하우스라고 알고서 납득했다. 생각한 대로 이곳은 학교 다. 모르는 장소에 끌려온 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다이어트 붐 덕분이지. 휘트니스부가 학교에 생기면 좋은 선전이 될 거라더 군. 학생의 유출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학과장이 기뻐했어.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기부한 거다. 녀석의 냄새가 물씬 나는군." "좋은 아버지잖아? 불량아들이 기 못 펴는 일이 없게 필사적인데... 큭!" 이치가야가 별안간 다리 사이를 움켜쥐어서 숨이 막혔다. 그가 나의 중심에 손 톱을 세우고 거칠게 흔들고서 밉살스럽게 내뱉었다. "학과장과 아버지가 옛 친구야. ...고등학교 때부터 불량아로 불려온 날 아버지 의 백이 통하는 이 학교에 억지로 밀어넣은 거지. 여기라면 출석일수가 모자라 도 학과장이 손을 써주니까 퇴학당할 걱정도 없어. 성적에도 자유롭게 손댈 수 있단 얘기다. ...그 바보 아버지는 그게 날 위한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엿이나 먹으라지!" 이치가야가 복잡한 얼굴로 친부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나 내 시선을 깨 닫고 손을 풀고는 시시한 얘기였다고 자조했다. "정말 시시한 얘기로군." "...뭐라고?" 이치가야는 나도 모르게 입에 올린 비아냥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위험 하다는 걸 알면서 그만하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깎여버린 원한이었을까, 나는 웃었다. 이치가야 부자의 바보스러 움이 우스웠다. 비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네 녀석은 구제불능의 파더 콤플렉스다. 아들을 생각해주는 아버지에게 의미 도 없이 반발하고 그래서 그렇게 비뚤어진 성격이 된 거냐? 네가 이상해진 걸 아 버지 탓을 하는 거냐구. 어리광도 작작 좀 부려라. 네 엉덩이 정도는 네가 닦으 란 말이야!" 그렇게 외친 순간, 목을 움켜쥐었다. 움켜쥐었다기보다 조르는 것에 가까웠다. 이치가야는 한 손만으로도 충분히 날 죽여 버릴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입만 살았군." "크... 윽!" 벌어진 두 다리는 1밀리도 오므려지지 않았다. 바로 정면에 있는 이치가야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생각만 할 뿐 실행 불가능. 맨손이라면 이런 녀석한테 지지 않을 텐데, 싸움 실력엔 자신이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당하기만 할 뿐 저항조차 할 수 없다. 그게 분했다. 목을 눌려 있어서 가슴을 뒤로 젖힌 채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아? 하고 이치가야를 노려보자 갑자기 그가 히죽 웃었다. 놀라움에 눈을 커다랗게 뜬 찰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아앗...!"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도가 지끈지끈 욱신거렸다. 날카로운 아픔에 휩 싸여 몇 번이나 의식이 멀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산소를 폐로 들여 마시며 설 마 하고 경악하면서 아픔의 발신지를 응시했다. 유두에 꽂혀 있는 것은 바늘, 긴 체인이 붙은 피어스였다. 와타루씨가 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타입의 피어스다. 이치가야는 날 와타루씨와 똑같이 만들어서 어떻게 할 셈일까? 새삼스러운 예측이 머리를 맴돌며 나를 공포에 빠트렸다. "아파 보이는군, 아마노. 살인자도 남들만큼 아픔을 느끼나보지?" 웃음을 흘린 이치가야가 다른 한 쪽 유두에도 사정없이 바늘을 꽂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녀석에게 비명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애써 가슴으로 호 흡하며 지끈지끈거리는 아픔을 억누르려고 했다. 머릿속에서는 시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때 역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 은 시로 뿐이다. 시로, 시로, 제발 날 지켜줘...! 이치가야가 내 살을 찌른 피어스를 손가락으로 핑 하고 튕겼다. 전류와도 같은 격통이 나의 이성을 공격해 온다. "하아... 아앗!"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치가야가 체인을 튕길 때마다 바늘의 접점에서 피가 배 어 나와 핏방울이 순식간에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 다. "봐라, 아마노. 아무리 내가 거절해도 학교는 날 지켜준다고. 하지만 한 걸음 만 밖으로 나가면 네가 유리해. 네 연인은 형사니까. 그래서 나는 교내에서 너와 결판을 내고 싶은 거다." "결판...?" "와타루가 된 기분은 어때? 응?" "...웃." "와타루와 똑같은 차림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 당하는 건 어때?" "이치..."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온 몸에서 핏기가 가셨다. 입가에 광기어린 웃음을 띤 이치가야가 내 발치에 몸을 구부렸다. 발목에 떨어져있던 정조대의 가느다란 벨트는 이치가야가 끝을 잡아당기기만 해도 스르륵 벗겨졌다. 이치가야가 두 손에 쥔 그 벨트는 채찍으로 변해있다. 혹은 교살용 로프일까? 숨을 삼키는 나를 눈앞에 두고 이치가야가 채찍을 철썩 내리쳤다. "와타루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어떤 상태였는지 ...전 부 경찰한테 들었다. 사진도 보여주더군. 잔혹하지 않아? 너무 심해. ...이봐, 아 마노. 너도 들었어? 와타루의 다리를 적시고 있던 건 와타루 것이라더라. 와타루 의 몸에서는 와타루 자신의 것 이외에는 검출되지 않았다더군. ...너 도대체 어 떻게 해서 와타루를 승천시킨 거야? 응? 와타루에게 절정을 맞게 하고 목졸라 죽인 거냐? 넌 상당한 변태다." "내가 아니야!" "시끄러. 잠꼬대는 듣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내가 뭐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건가..." 철썩 하고 다리에 격통이 스쳤다. 벨트로 있는 힘껏 맞았다. 계속해서 배와 가 슴. 두 번, 세 번 채찍의 먹이감이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 다. 내가 아픈 것은 심장이었다. "말해봐! 네가 와타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말해!" 나는 벌떡 고개를 들었다. 범인 취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몸보다 아픈 마음 속을 정면을 향해 터트렸다.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이치가야의 관자놀이가 꿈틀 하고 튀어 올랐다. 나는 다시 포효했다. "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날 범인으로 몰고 싶겠지만 난 지지 않을 거야!"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다. 난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죄 를 뒤집어쓴 채 이치가야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너 나한테 혐의가 있는 걸 빌미로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는 거지!" "그건 네가 그렇겠지!" "너야, 이치가야! 그저께 넌 와타루씨를 맨션까지 바래다 줬어. 혹시 현관 앞에 서 고백했던 거냐? 와타루씨를 절정을 맞게 하고 이제 너도 즐기려고 할 때 채인 거 아니냐구. 그래서 넌 발끈해서 근처에 있던 그 벨트로 와타루씨를 목 졸라 죽 인 거야?!" "...뭐라고? 이 자식 다시 한 번 말해봐!" 이치가야의 형상이 변했다. 나도 눈매가 변해있었다.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알지만 할 수 없다. "몇 번이라도 말해주지. 넌 알리바이가 있는 모양이더군, 이치가야. 밴션 주민 이나 택시기사. 모두가 널 기억하고 있더군. 하지만 반대로 그런 우연이 가능한 거냐? 혹시 날조한 거 아니야? 네 아버지가 돈을 써서 뒤에서 입을 맞춘게 아니 냐구!" "아마노...!" "와타루씨의 신음소리를 들은 건 나뿐이다. 와타루씨가 그 시간까지는 살아있 었다는 것, 그리고 10분 남짓한 동안 살해되었다는 것, 그것을 명확하게 증언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내가 유일한 증인이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해서든 날 범 인으로 몰고 싶은 거야. 진짜 범인인 네가 살아날 방법은 내 증언을 막아버리는 것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넌 가지가지 수단으로 날 겁줘서 입을 다물게 하려는 거지. 내 말이 틀려?!" 이치가야가 이를 부득 갈았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는 형상이 었다. 그러나 이치가야가 머리 속에서 멋대로 내 범행 장면을 상상하며 원한을 증폭 시킨다면 나도 이 정도 상상은 당연히 해도 될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감식 결과가 나오면 내가 이길 거야. ...이치가야, 애타게 좋아해 왔던 와타루씨를 드디어 덮친 기분은 어땠어?" 거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기세를 멈출 수 없었다. 그치만 살인범은로 낙인 찍혀서 일방적으로 미 움 받고 이렇게 심한 꼴을 당한 채 묶이질 않았는가?! 아무리 폭언을 쏟아 부어도 모자란단 말이야. 단지 진정하고 생각해보면 내 말에 이치가야가 생각을 고쳐먹을 리가 없다는 건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뭐라고...?" 이치가야의 목소리 톤이 떨어졌다. 그 직후, 나는 당장에 후회했다. 자신의 지 기 싫어하는 성미를 마음 깊숙이 원망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뭐라고 주장해 도 이미 이치가야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졌다. 이치가야가 스르륵 움직였다. 그는 내 뒤로 돌더니 내 양팔에 매달려 있는 철 파이프를 조금 들어올려 내렸다. 몸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위에서 돌을 떨어트린 듯한 묵직한 중력을 어깨로 받고 강제적으로 앞으로 몸을 굽힌 자세가 되었다. "우웃..."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엎드린 내 배에 이치가야가 팔을 감아왔다. 그리고는 뒤 쪽으로 비스듬히 잡아 올렸다. 어깨는 커녕 고개도 들어올릴 수 없는 나는 이치 가야가 강요하는 대로 엉덩이를 높이 치켜올렸다. 이치가야가 나이프를 다시 손에 들고는 나의 등... 테일 코드 안쪽으로 칼끝을 집어넣어서 등에 붙은 가죽을 찢어갔다. 지직지직 하고 옷이 찢어져 갔다. 등뿐 만 아니라 어깨도 잘려서 남은 천도 난폭하게 잡아 찢었다. 와타루씨가 사랑한 작품이 이런 형태로 찢어져 버리다니... 나는 꼴사납게도 가터와 그물 타이즈만 걸친 모습이 되었다. ...아니, 더 있었다. 양쪽 유두에 늘어트려진 체인 피어스가 남아있다. 싸울 수 없는 나는 그것이 흔들리는 모습을 허무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치가야는 나의 가터벨트에 손을 대고 내 등이나 엉덩이를 채찍으로 몇 번이 나 때렸다. 반응할 때마다 이치가야는 벨트를 더욱더 세게 내리쳤다. "마치 SM클럽 같군. 오싹오싹한데? 카메라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싫어... 나는 나약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만해... 갈라진 비명으로 호소 하고 있었다. "와타루를 덮친 기분이 어떠냐고? 이 자식, 그런 잔인한 말을 잘도 하는군. 그 런 걸 내가 알리가 없잖아. 하지만 네가 녀석을 죽이지만 않았으면 나랑 와타루 는 맺어졌을 거야. 둘이 즐겁게 지냈을 거라구. 하지만 와타루는 죽었어. 너한테 살해당한 거야! 억지로 당하고 목까지 졸렸단 말이야!" 이치가야가 자신을 꺼냈다. 무슨 짓을 당할지 이 상황에서 모른다면 바보다. 하지만 난 바보라도 좋으니까 그렇지 않기를 그저 빌기만 했다. 땀이 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똑똑 밑으로 떨어졌다. 아아...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네 발상은 저질이야, 아마노. 네 연인이라는 형사가 꾸민 짓이냐? 형사란 야비 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 형사... 시로라고 했던가? 시로는 매일 밤 너랑 하는 거 냐? 응?" "시..." 목이 말랐다. 입천장에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목소리가 되지 못한 애원이 입술까지 넘쳐 나왔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시로를 부르고 싶은 거냔? 그럼 불러봐. 아니면 네 휴대전화로 시로한테 연결 해 줄까? 네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시로한테 잔뜩 들려줄까? 살려달라고 자랑스런 연인한테 울며 매달려 봐, 응?" 녀석의 말에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살려달라는 말이 뉘앙스에 말이다. 하지만 그 위화감의 정체를 더듬기도 전에 뒤로 녀석이 밀고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너무너무 아파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경치 좋은데, 아마노. 네 안쪽이 훤히 보여." 억지로 벌린 공간에 이치가야가 자신을 밀어 넣었다. "아앗!"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파서가 아니다. 아팠지만 그게 아니다. 그런게 아니다! 순간, 이치가야긔 남성이 찰싹 밀착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은 나의 몸, 나는 지금 시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젠장, 움직일 수 없어." "시... 싫어...!" 시로의 것인 나의 몸이... 시로가 겨우 안아주게 된 사랑스러운 몸이, 소중하게 지키려고 결심했던 사랑스러운 몸이 다른 사람을 허락하고 있었다. "시... 싫어. 싫어. 싫어. 시...ㄹ ...아아아앗!" 가슴이 아팠다. 어깨가 아팠다. 다리가 아팠다. 온 몸 구석구석이 삐걱거렸다. 나는 은밀하게 신음했다! "싫어... 아아아아... 아아아..." 이럴 리가 없는데, 벌써 끝난 줄 알았는데... 시로 이외의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생활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조금씩 조금씩 몸 속 깊은 곳에 몰래 쌓아온 나의 시로 가... 시로의 단편이, 시로의 냄새가, 나와 시로의 둘만의 궤적이 거침없이 능욕 당했다. "싫어... 싫어...!! 살려... 사, 살려줘... 살려줘... 시... 로..." 시로를 위해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자신이 안쪽에서부터 더렵혀져 간다. 붕괴되어 간다! "시로... 시로... 시로, 시로!"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은 느낌에 절규했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피어스가 눈에 비칠 때마다 나는 정신없이 시로를 불렀다. 그러자 나의 변모에 두려워진 이치가야가 나를 힘으로 잡아 누르고 더욱 더 난 폭하게 꿰뚫었지만 나는 그래도 오로지 시로를 불러댔다. "시로, 시로, 시로, 시로, 시로, 시로, 시로오...!" 미칠 것 같아... 시로. 이치가야가 들어올 때마다 내부가 부패한다. 역시 나는 더러웠다. 썩은 내를 물씬 풍겼다.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더렵혀진 생물로서 이 세상 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치가야는 그런 날 바라보고는 '더러워.'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정에 도달했다. "느껴라, 아마노. 응? 와타루처럼 절정을 느껴봐. 네가 들었다는 신음소리를 재 현해봐. 나한테 들려줘, 응?" 이치가야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명령하며 가슴의 체인을 움켜쥐고 빼앗을 것처 럼 강하게 잡아당겼다. 나는 정수리를 꿰뚫는 듯한 격통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실신할 것 같았다. "죽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난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야." 조금 제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갑자기 이치가야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앞으로 손을 둘렀다. 깜짝 놀라는 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내 중심을 휘감 고 난폭하게 몸과 마음 양쪽에서 날 몰아세웠다. "그만 둬... 그러지마, 이치가야...!" "사양하지마, 좋으면서..." 이치가야가 뒤에서 움직이며 억지로 나를 흥분시킨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녀석을 상대로 흥분하고 싶지 않지만 계속 희롱당 하면 싫어도 그곳에 피가 몰렸다. 그렇게 녀석의 손안에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시로가 사랑해주게 된 소중한 내 자신이 안쪽에서 너덜너덜하게 무너져 갔다. "너... 정말 좋군. 엄청 굉장한 걸 가지고 있잖아? 여자랑 비교가 안 되는데, 한 동안은 인이 박히겠어." "싫어. 놔... 놔, 이치가야! 아, 아, 앗! 아앗!" 드디어 폭발했다. 울고 싶다. 분했다. 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내 몸을 이 정도로 증오한 적은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등뒤에서 바라보며 이치가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복수하는 건 죽여 버리는 것보다 이쪽이 효과가 크군. ...넌 시로란 녀 석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는게 훨씬 괴로워 보이니 말이야." "...큭." "네가 당했다는 걸 시로한테 알려주지. 네가 헉헉거리며 이성을 잃었다고. ... 아니면 그렇지. 그 형사가 매일같이 널 덮쳤다는 사실을 경찰에 고발하는 편이 재미있을까?" 내 등이 흠칫 튀어 올랐다. 내 약점을 확인한 이치가야가 내 얼굴을 상상하면 서 '그게 좋겠다.' 하고 등뒤에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와마루... 라고 했던가? 그 시부야서 아저씨, 그 녀석 너의 시로랑 사이가 나 빠 보이니까 그 녀석한테 가르쳐주면 좋은 먹이감이 될 거야. '캐리어의 추문' 하 고 말이야. 형사가 그것도 남자를 범하다니 충분히 스캔들이 되겠지? ...이봐, 아 마노. 연인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은 알겠지만 나한테 말한 건 바보같은 짓이었 어. 상당히 부주의했다구." 이치가야는 난폭하게 나를 꿰뚫으며 폭력적으로 독을 토해냈다. "최고야, 아마노. 너 때문에 시로는 파멸이다! 너 때문에 와타루도 죽었어! 네 녀석은 역병신이냐? 괴로워해라, 아마노!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한 끝에 학교 옥 상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해버려! 와타루는 말이야... 그 녀석은 말이야. 네 수백 배는 괴로워했을 게 틀림없어!" 난 멍하니 생각하거 있었다. 범인은 이치가야가 아닌 것이 아닐까, 이치가야 이외엔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틀렸던 걸까 하고 말이다. 범해지면서 말로 마음을 갈기갈기 찢기며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감식 결과가 나오면 누가 흑인지 확실해 질 것이다. 조급하게 답을 내려했던 내가 바보였다. 복수에 불타는 이치가야도 엄청난 바보였다. 너무 흥분했다구... 바보 녀석. 하지만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도 만약에 시로가 살해당했다면 의심스 러운 녀석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차례대로 죽이고 다닐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테니까. 감식 결과를 느긋하게 기다리기 보다 내게서 시로를 빼앗아 갔으면서도 멀쩡하게 지상의 산소를 마시고 있는 녀 석을 1초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말살하고 싶다고,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 까 말이다. 적어도 시로가 받았던 것과 같은 고통을 그 녀석에게 맛보게 하고 싶 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다. "제길...! 와타루를... 와타루를 돌려줘...!" 아아... 그래서 이치가야는 내게 와타루씨와 똑같은 차림을 시킨 거다. '범인' 인 내게 죄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이 치가야는 이런 내게서 조금이라도 와타루씨의 환상을 구하고 있었다. 와타루씨 를 부르며 내 몸속에서 절정을 맞으려고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보답 받지 못했던 마음을 이런 형태로 달래려... 하고 있는... 걸까? "와타루를 내게 돌려줘...!" 그렇다면 정말로 이치가야가 범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이번만은 내가 용의자 확정일지도!! 하하, 웃을 수도 없는 농담이군. ...젠장. 16 나는 간신히 풀려났다. 풀려나면서 난 '안 죽일 거냐?' 하고 물었다. 이치가야가 쿡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완전히 나보다 우위에 섰다는 얼굴이다.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바 닥에 웅크리는게 고작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없었다. "뭐야? 너 나한테 죽고 싶냐? 그거 유감이군. 넌 아직 못 죽어. 이렇게 재미있 는 장난감을 놓아줄 것 같냐?" 이치가야가 내 허리를 걷어차고는 푹 엎드린 내 등을 짓밟으며 비웃었다. "이걸로 나도 비로소 학교에 등교할 기분이 들었어. 매일매일 성실하게 다니며 널 희롱해주지. 네가 나한테 당하는 걸 비디오로 찍어서 유료 상영회라도 열까? 짭짤한 알바가 될 것 같은데? 번 돈은 전부 너한테 줄게." 눈을 부릅뜨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치가야가 커다랗게 웃었다. "뭐야, 너? 설마 한 번으로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웃기지 마. 난 너한테 와타루를 빼앗겼단 말이다. 그러니 너도 시로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 "...큭." "뭘 노려봐? 응? 시로를 죽인다고 말하진 않았잖아. 착한 사람입네 하고 네 보 호자를 맡은 경찰관이 사실은 밤이면 밤마다 외설 행위를 즐기기 위해 널 돌보 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을 카와마루한테 입 다물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 대신 네 가 몸으로 죄를 갚아. 그게 시로를 살려두는 조건이다. ...감사하라구." 이치가야가 발로 내 몸을 뒤집고 운동화 밑바닥으로 다리 사이를 짓밟았다. 중 심을 꽉꽉 짓뭉개자 으깨지는 공포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잘 들어, 아마노. 넌 평생 와타루 대신이야. ...그렇지, 내일은 여기를 좀 더 깨 끗하게 해줄게. 와타루처럼 매끈매끈하게. 피어스 홀은 막힐 때마다 바늘을 꽂 아주지. 네가 저지른 일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거라구." 이치가야가 내게서 발을 떼었다. 그리곤 내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고 발걸음 을 돌렸다. "싫으면 시로한테 울면서 매달려. 그 몸을 보여주면 단방에 상해죄 성립일 테 니까." 이치가야가 웃었다. 이런 몸을 시로에게 보일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 면서 하는 말이었다. 한참 동안 천장을 모고 있던 나는 새어나온 눈물을 주먹으 로 훔치고 느릿느릿 체육복으로 손을 뻗었다. * * * "어디 갔었어, 아마노? 그 이후로 1시간이나 지났잖아!" "많이 찾아다녔어요, 나츠키씨. 아아, 정밀이지. 걱정 좀 끼치지 말아주세요. 우와, 많이 젖었네요." 양호실에 돌아온 순간 타케와키와 후지시로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잔소리를 듣고 나는 조그맣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몸 이곳저곳이 지끈지끈거렸다. 그 래도 절대 눈치 채게 해선 안됐다. "왜 타케와키까지 여기에 있는 거야? 사랑의 밀회야? 열심이네."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진지한 얼굴의 타케와키에겐 통하지 않았다. "학생이 없어졌는데 느긋하게 상담하고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낮에 약 품소동이 일어난 참인데, 사정을 설명하고 방문 일시를 변경했어." 없어진 학생이란 아마도 나를 말하는 듯 했다. 타케와키의 성실함이 우스웠다. 우습고 미안해서 마음이 안타깝게 조여들었다. "...그 사건이라면 이제 됐어. 해결했어." "해결했어?" "범인은 이치가야가 아니었어. 내가 착각했어, 미안." 나는 히죽 웃으며 두 사람 앞을 지나쳐서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배낭을 들어올 렸다. 손목에 지끈 격통이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떨어트릴 뻔한 나는 당 황해서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팔에 힘이 들어간 탓에 유두에서 피가 스며 나온 것 같았다. 감색 체육복 밑에 입고 잇는 T셔츠엔 아마도 피가 배어들었을 것이 다. 나는 후지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하고 후지시로가 나를 보았다. "네, 가 아니야.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아, 그렇지. 그랬지요 참." 부시럭부시럭 종이 봉투를 들어올린 후지시로가 갈아입을 옷 한 벌을 건네주 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자 프리 사이즈 건빵 바지와 하얀 T셔츠, 후드 달린 파 카가 들어있다. 싼 가격에 제품 수가 많은 모 브랜드의 기본 제품이었다. 후지시 로의 취향이라기보다 내 나이대의 이미지에 맞춘 모양이었다. 색깔 선택은 나쁘 지 않았다. 가격표도 깨끗이 떼어놓았다. 땡큐 하고 받아든 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로 걸어가다가 도중 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반창고를 슬쩍 해서 커튼을 닫으려고 했다. "뭐냐, 아마노. 부끄러운 거냐?" "그치만 타케와키는 우유잖아." 호모를 의미하는 조어를 입에 담자 타케와키는 노골적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유가 뭐예요?' 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본 세상물정 모르는 후 지시로 때문에 나도 타케와키도 데굴데굴 구를 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후지시로 녀석은 쓸데없는 데만 날카로운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저기... 나츠키씨. 다리 다친 거 아니에요?"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어서 나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얼른 변명했다. "아아, 체육시간에 불타올라 발목을 접질렀을 뿐이야. 대수롭지 않아." 히죽 웃어주자 후지시로는 그러냐고 납득하고 웃어주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후지시로. 하지만 난 시로에게 들킬 수 없어. 그래서 너 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할거야. 나는 커튼을 닫고 숨을 들이쉬고... 토해냈다. 체육복을 벗자 불쌍한 유두가 다 시 눈에 들어왔다. 반창고를 꺼내서 거기 붙였다. 이치가야 녀석, 엄청 날뛰었군... 나는 분함에 입술을 깨물며 옷을 재빨리 몸에 걸치고 피가 묻은 체육복을 뭉쳐 서 종이봉투에 넣었다. "어이, 아직이냐?" 타케와키가 재촉하자 나는 커튼을 열었다. 후지시로가 '사이즈가 딱 맞아서 다 행이네요.' 하고 타케와키에게 생긋 미소지었다. "오늘은 정말로 많은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이틀 전에 그런 사건이 있던 터라 나츠키씨도 마음이 동요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경찰은 학교에 서 신고해주시면 움직이기 쉽겠지만... 일단 이번 약품소동은 선생님께 맡겨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후지시로씨. 장난치고는 정도가 지나치지만 학생들에겐 두 번 다 시 이런 나쁜 장난을 하지 않도록 엄중히 말해주겠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 그래도 날 위해 여러가지로 애써주고 있다. 하지만 그걸론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건은 지금 막 시작되었으니까. "그럼 나츠키씨. 돌아갈까요?" 어쩌지? 갑자기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가 맞물리지 않게 되었다. 나 어쩌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시로의 집에 돌아갈 수 없어. 난 어떤 얼굴 로 시로를 봐야하는 거지? 어떤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거지? "타케와키... 나 오늘 타케와키 집에서 재워줘." 타케와키가 놀란 얼굴을 했다. 민폐라서가 아니라 순수한 놀라움이었다. "왜 그러세요, 나츠키씨?" 후지시로가 한 발짝 다가와 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둔한 주제에 내 미 묘한 변화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했다. "나츠키씨, 약품소동에 대해선 선배에겐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만약 그게 신경 쓰인다면..." "그게 아니라 그저 집에 돌아가기 싫은 기분이야." "어째서요?" 후지시로는 이럴 때만 끈질겨 난 거짓말을 하는 게 괴로워지고 말았다. "돌아가면... 알잖아?! 시로 녀석이 학원이다 뭐다 잔소리하니까." "정말?" 거짓말은 안 된다고 후지시로의 눈이 화가 나 있었다. 엄마의 얼굴로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노려보았다. 후지시로가 그런 얼굴을 하면 괴로웠다. 하지만 나도 괴로워, 후지시로. 이해해줘. "시로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것은 진심이었다. 100% 나의 진심, 정확하게는 시로를 볼 면목이 없어서... 였지만 말이다. 후지시로가 후우 하고 어깨를 떨궜다. 그리고 '선생님.' 하고 타케와키에게 몸 을 돌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선배께는 제가 사정을 설명할 테니, 그러니까 저기..." 후지시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타케와키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노는 제게 맡겨주세요. 괜찮습니다. 후지시로씨는 안심하시고 직장으로 돌아가 주세요." 타케와키가 하얀 이를 반짝 빛내며 웃었다. "아마노의 상태는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아, 사실 전 후지시로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단축 1번으로 설정해뒀어요. 핫핫핫."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학교 후문을 나갔을 때보다 좀 더 격렬해졌다. 타케와키가 와이퍼의 움직임을 한 층 더 빠르게 했다. 앞 유리의 물방울을 와 이퍼가 부지런히 좌우로 닦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자 타케와키가 불쑥 말 했다. "저기, 아마노. 아까 양호실에서 아마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타케와키가 말을 끊고 배 때문에 사이드 미러가 잘 안 보이는지 약간 몸을 내 밀어 안전을 확인하고 좌회전을 마치고 나서 다시 대화를 계속했다. 여기부터 한동안은 직선 코스라서 핸들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말을 꺼내 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그저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후지시로씨한테 들었어. 나 는... 일단 두 사람의 담당이니까 어제 아침 학장실에 불려가서 경찰 관계자한테 서 사정을 듣긴 했지만 역시 실제로 그 현장에 있던 사람한테 듣는 것과는... 그 러니까 사정이 상당히 다르게 들리니까 말이야. 후지시로씨는 절대로 아마노가 아니라고 단언했어." 절대로 내가 아니라고 후지시로가 단언한다는 것은 내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녀석도 있다는 얘기다. 타케와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 수 없었다. 그 래서 나는 대답을 생략했다. 그것을 묵비권으로 받아들였는지 타케와키가 힐끔 나를 훔쳐보았다. 말하기 불편한 듯이 단어를 찾으며 내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알아, 제일 의심스러운 인물이 나라고 경찰이 보고하러 온 거지?" 말문이 막힌 타케와키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내게 사정을 설명했다. "카와마루라고 했던가? 얼굴이 울퉁불퉁한 형사였어. 그 카와마루 형사의 말로 는 이론적으로 제 1발견자를 용의자 후보에 넣는 것이 당연하다는거였어. 어디 까지나 이론적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일단 제 1발견자를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 로... 말하자면 범인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사항을 입증해서 용의자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어." "말하자면 카바마루는 내가 제 1용의자라는 사실을 일부러 학교에 알리러 왔다 는 거지? 그래서 학교측도 확신이 없는 정보를 경찰에 알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나를 요주의 인물로 인정했다. 그런 거잖아?" 나는 '묻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 하고 역으로 되물었다. 내가 강하게 나가자 타케와키는 진심으로 곤혹스러워 했다. 설마 이 녀석까지 카바마루의 말을 알지 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 만 아마도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저기, 아마노... 진실을 가르쳐 줄래?" 어려워하며 물어보는 타케와키의 말이 굉장히 멀리서 들려왔다. "피해자와는 어떤 관계였어? 그... 아마노도 알고 있듯이 난 남자밖에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피해자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피해자도 아마도 동성애자였던 것 같던데. 지금 경찰은 그 사람의 과거 남자관계를 몇 명 조사하고 있다고 하고... 그런 성벽의 소유자가 아마노를 만나서 그러니까... 아 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해도 될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슥메슥해서 속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아마노가 그 사람의 맨션에 매상금을 건네주러 갔다 가 거기서 그 사람한테 억지로 강요받았다면... 아마노가 시로씨에 대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경우도 있다는 얘기야." 나는 매섭게 타케와키를 노려보았다. 아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억측을 늘어놓는 것 은 지긋지긋했다. "확실히 말해. 내가 죽였다고. 그러면 당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게. 그냥 나 라고 해! 그렇게 날 범인으로 만들고 싶으면 내가 그랬다고 하라고!" "나, 난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어. 나는 아마노가 걱정되서..." "그러면 정신 차리고 잘 생각해봐! 카바마루의 말에 현혹되지마! 형사중에서도 쓸모없는 바보는 발에 걸릴 만큼 많다구!" "아... 알았어, 아마노. 그렇게 흥분하지마. 내가 말이 심했어. 응?" 타케와키는 다리위로 아무렇게나 놓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미안하다고 재 빨리 사과했다. 아직도 비는 상당히 쏟아지고 있었다.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서 주택가로 향하는 길의 양 사이드는 보도는 있어 도 보행자는 없다. 이제 곧 있으면 앞에 나타날 육교도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 오는 밤 에 이 주변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람이 없었다. 가끔씩 차가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6시가 족므 넘어있었지만 악천후도 겹쳐 바깥은 이미 캄캄했다. 오른쪽에 서있 는 중학교의 불빛도 꺼져 있었다. 녹색 비상등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역에서 걷 기엔 멀고 버스 정류장에서도 거리가 있는 불편한 장소였다. 타케와키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나도 애들처럼 외면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걸어 다니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서 나도 타케 와키도 주의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건 인정한다. 비도 상당히 심해져 있었다. 시야가 흐렸다. 그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설마 육교 위에서 갑자기 유모차가 떨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 못하지 않 았을까? 위험해! 하고 외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떨어진 유모차를 있는 힘 껏 치어 버린 뒤였다. 속도계는 아마도 제한 속도 10km 오버, 그것도 비가 오는 날이라 속도를 내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부딪친 순간의 충격은 상당했다. "우와아아앗!" 동요한 타케와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유모차와의 재 충돌을 피하려고했는 지 핸들을 무의식적으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격렬하게 울린 클랙션. 한순간 내 시야를 덮친 것은 반대편 차량의 강렬한 라 이트, 상대도 피했고 타케와키도 피했다. 정면 충돌은 면했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속에서 타케와키의 차는 그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다. 타케와케가 반사적으로 내 상반신을 눌러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머리로 앞 유리를 박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노... 아마노!! 괜찮아, 아마노...?" 타케와키가 열심히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타케와키의 목소리는 상당히 괴로 운 듯했다. 몇 사람의 발소리. '괜찮나!' 하고 외치는 소리. '빨리 구급차 불러!' 하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제 학생이... 조수석에, 빨리 구해주세요. 아기... 유모차의 아기도 빨리... 무 사한지 봐주세요! ...아아, 아마노, 아마노, 대답해줘. 무사해? 아마노!" 차 밖으로 옮겨진 타케와키가 헛소리처럼 나를 불렀다. 조수석 문이 찌그러져 있다고 누군가가 비통한 소리를 질렀다. 내 왼발은 찌그러진 차체에 끼어있었 다. 아픔보다 그 사실에 실신할 것 같았다. "부숴! 거기 당신들도 도와줘!" 나는 무의식중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머 리가 멍해져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목소리 내는 법을 알 수 없었다. 목소리... 그렇다. 아기의 목소리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제발 울어줘, 아기야. 살아있다는 증거를 나와 타케와키에게 들려줘. "아마노, 아마노...!" 어른 주제에 울지마, 타케와키. 나는 가까스로 살아있으니까... 17 "나츠키씨! 타케와키 선생님!" 굉장한 기세로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조용히 하세요!' 하고 야단치자 후 지시로는 끼잉 하고 꼬리를 내렸다. 간호사가 방을 나간 것을 확인하고 후지시 로가, 두 대가 사이좋게 놓여있는 침대로 달려왔다. "괘, 괘, 괘, 괜찮아요, 두 분?! 까, 까, 까, 깜짝 놀랐어요! 서로 돌아가자마자 사고란 소식을 듣고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만큼 놀라서, 전 정말 놀라서 이 병 원에 도착할 때까지 제, 제가 다 사고가 나는 줄 알았어요!" 후지시로는 너무나 이성을 잃어서 내가 아무리 진정하라고 달래도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내 머리를 가슴에 꽉 끌어안고 내가 아프다고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 머리나 뺨, 어깨, 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아아... 다행이다. 나츠키씨,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사고나서 다행이란 거야?" "그게 아니라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거죠. 금방 말꼬리를 잡는다니까." 여전한 내 밉살스러운 말투에 후지시로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기뻐보였 다. 잘 보니까 두 눈이 새빨갰다. 설마 이 녀석, 울면서 차를 몰고 온 건가? 궁극의 걱정 병아리라니까. 뼈에 이상은 없냐고 왼발을 가리키며 물어보자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고 순 간에는 완전히 왼발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창백해졌었다. 그러나 난 의외로 튼튼 하게 만들어졌는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정도로 그쳤다. 그리고 양쪽 손등과 얼굴에 조금 찰과상이 생긴 정도였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사고를 내서 마음이 격앙되어 있으니까 진정될 때까지 쉬라는 병원측의 상냥한 배려였다. 그에 반해 타케와키는 반 미이라화 되어 있었다. 날 감싼 왼쪽 팔과 무게를 지탱했던 오른발은 멋지게 골절, 그 밖 에 여기저기 열상을 입어서 하얀 붕대가 더더욱 눈부셨다. 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옆자리 침대로 돌아선 후지시로가 타케와키를 매 섭게 노려보았다. "선생님!" "네, 넷!" 반 미이라화 된 타케와키가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아픔에 얼굴을 찡그 렸다. 뚜벅 하고 구두소리를 내며 타케와키의 옆에 선 후지시로는 아까까지 내 게 보여주었던 무한한 애정과는 확연히 다른 아주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설마 후지시로가 '우리 애한테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하고 터무니없 이 과보호적인 분노를 터트릴 생각인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걱정하게 만들지 마세요!" 후지시로는 온몸을 격렬하게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네... 그리고... 죄, 죄송합니다..." 박력에 눌린 타케와키가 당황해서 사과했다. 나쁜 짓을 어머니에게 들켜서 야 단맞는 듯한 모습이었다. 보기 드물게 눈 꼬리를 치켜 뜨고 있는 후지시로의 입 에서는 분노의 감정에 어울리는 말만 퐁퐁퐁 튀어 나왔다. "차는 위험하다고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 연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면 좀 더 조심하셔야죠! 빗길엔 제한 속도를 지 켜도 사고를 당할 확률이 무지 높단 말입니다. 드라이버 경력이 길어서 자신이 있으실 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더욱 사소한 방심이 사고로 이어지는 거예요! 실력을 과신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주의해도 모자랄 정도라구요! 당신까지 큰 부상을 입었다면 전 어쩌란 말이에요?!" 후지시로는 말을 마치고 하아아 하고 떨리는 숨결을 내뱉고서 입술을 꽉 깨물 었다. 나는 타케와키를 힐끔 훔쳐보았다. 망연하게 후지시로를 올려다보고 있던 타케와키는 아마도 너무 감격한 나머지 넋이 나간 모양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담긴 특별한 감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후지시로가 더 더욱 타케와키를 위협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래도 선생님이 다시 사고를 일으켰을 때는... 죄송하 지만 선생님을 주먹으로 힘껏 때려줄 겁니다!" "네... 네." 압도당해서 고개를 끄덕거린 타케와키가 '영광입니다.' 하고 열에 들뜬 듯한 말 을 중얼거렸다. 타케와키의 뺨이 빨갰다. 하지만 후지시로는 자신의 말이 상대 에게 준 영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 걸음 전진한 것 같지만 아직 상당히 어긋나있는 두 사람의 위치관계가 우스워서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뭐예요? 뭐가 우스워요, 나츠키씨?" "아니, 별로. 하지만 후지시로, 너 최고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동안 깔깔 웃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빠졌었는 데도 왠지 마음속에 반짝 하고 따뜻한 온기가 밝혀진 듯한 부드러운 기분이 들 었다.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똑똑 하고 짧은 노크와 함꼐 검은 양복이 나타났다. 들어온 사람은... "시로..." 시로는 나를 바라보고 경상이란 것을 확인하자 타케와키에게 고개를 숙이고 후지시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라? 내가 제일 푸대접 받는 거 아냐? 사소한 일로 뾰로통해지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맨 발로 시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늠름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늘면서도 의외로 힘센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시로의 체온을 느끼자 어쩐지 단숨에 힘이 빠져서 갑자기 눈물샘이 느슨해지고 말았다.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자신에게 어리둥절하면서도 눈물은 뚝뚝 떨어져 서 멈출 수가 없었다. 후지시로나 타케와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꼴사납다고 생각했지만 멈춰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론 모자랐는지 나는 유치원 꼬마처럼 훌쩍훌 쩍 흐느끼며 나중엔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순회하던 간호사가 왜 그러냐고 말을 걸자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시로의 가슴에서 얼굴을 일으켜 거즈가 붙어있는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았다. "미안... 시로." 한참을 울고 후련해지자 비로소 사과할 수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된 날 두고 볼 수 없었는지 후지시로가 포켓티슈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두 세장 뽑은 시로가 내 얼굴 한가운데를 눌러 코를 집었다. 난 시로에게 달라붙은 채 거침없이 소리 내어 코를 풀었다. 티슈를 뭉쳐 코밑을 가볍게 닦아준 시로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빨개진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난 다시 한번 시로의 눈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 시로. 정말로... 미안해." 콧물 처리를 시킨 것. 애들처럼 출어버린 것. 무지 걱정을 끼친 것. 시로를 보 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 마주 볼 면목이 없는 짓을 해버린 것. 거짓말하고 알 바 했던 것.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수없이 많았다. 다시 꼭 끌어안자 시로가 어이없어하며 등을 부드렵게 두드려주었다. "아프냐?" 그 질문에 '마음이.' 하고 바로 대답하고 싶어졌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그 말을 다시 삼켰다. 이 이상 시로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 아픈 것 같지만 전혀 이상이 없데.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 "...그럼 됐다." 나는 시로를 볼 면목이 없어서 타케와키의 집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고 만진 순간 역시 시로가... 시로만이 그립고 또 그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시로의 가슴에 뺨을 비비고 있는 나를 지긋이 관찰하고 있던 후지시로 가 '호오...' 하고 의미 불명의 한숨을 쉬며 뺨을 붉혔다. "뭐예요. 역시 나츠키씨는 솔직하고 귀엽잖아요." "네가 몰랐던 것뿐이지 난 원래 무지 솔직하고 무지 귀여운 녀석이었어!" '그치, 시로?' 하고 동의를 구했지만 시로는 '몰라.' 하고 코웃음 쳤다. 그 때 타케와키가 말을 꺼내자 얼빠진 분위기가 깨졌다. "죄송합니다, 칸자키씨. 이번 사고는 완전히 네 부주의입니다. 학생에게 상처 를 입혀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타케와키가 머리를 숙였다. 그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는지 침대 위에서 정좌 하려고 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진 녀석에게 그건 무리였다. 누워 있으라고 시로 가 달래고 후지시로가 타케와키를 부축해 눕혔다. 마지못해 눕긴 했지만 역시 타케와키는 시로 앞에서 누워있을 수는 없었는지 상체를 일으켜 다시 고개를 숙 였다. 아니, 숙였다기보다 떨구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단한 상처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선생님 탓이 아닙니다." "아니요.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무서운 일을 당하게 해서 아마노에게도 면목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나 사과를 하면 내 쪽이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묻는 것이 무 서웠지만 나는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을 바꿨다. "저기, 시로. 유모차 안의 아기는 어떻게 되었어?" 타케와키가 헉 하고 시로를 응시했다. 그는 몸을 내밀어 사정을 고했다. "간호사한테 물어봐도 아기에 대해선 모른다고 합니다. ...저어, 아마도 우리와 함께 이쪽으로 실려 온 건 아닌 모양이라 소식을 모릅니다. 경찰쪽으로 뭔가 정 보가 들어와 있나요?" 타케와키가 간절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시로는 말없이 날 침대에 앉히 고 손가락으로 누워있으라고 지시한 뒤 다시 타케와키에게 돌아섰다. "그 일이라면 안심하십시오. 유모차는 무인이었습니다." "네?" 눈이 휘둥그레진 타케와키에게 시로가 다시 한번 알기 쉽게 설명했다. "선생님이 친 유모차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도?"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뜬 타케와키가 하아 하고 힘 빠진 소리를 흘렸다.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양어깨에서 단숨에 긴장이 풀 려갔다. 너무 풀어져서 해파리 상태가 되어버린 타케와키가 흐물흐물 침대로 무 너졌다. 다행이라며 미소지은 후지시로가 타케와키의 베개를 고쳐주었다. ...뭐야, 후지시로 녀석. 나한테 지지 않은 만큼 꽤 좋은 아내 같잖아? 뭐, 후지 시로는 누구에게도 상냥하지만 말이다. "시로. 사실 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말참견을 하자 타케와키와 후지시로가 흥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시 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허락을 얻은 나는 내 생각을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병원에 호송되고 나서지만 사람이 없었다고 듣고 역 시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어." "어째서 역시라고 생각했지?" 시로의 질문은 모르니까 가르쳐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자신의 추리와 같은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야 잘 생각해보면 가랑비라면 모를까 보통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유 모차를 사용할까? 게다가 일부러 빗속에서 유모차를 짊어지고 육교에 올라갈 까?" '그치?' 하고 타케와키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타케와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좀 더 자세히 견해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유모차는 내 기억에 따르면 젖어 있었어. 그러니까 커버를 전혀 씌 우지 않았어. 굵은 비가 좍좍 내릴 때 유모차에 커버도 씌우지 않고 밖에 나갈 것 같아? 게다가 만약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면 반대로 난 유모차라고 깨닫지 못 했을 거야. 아기의 체온으로 안팎으로 온도차가 생겨서 아마 내부에 김이 서렸 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야 형태나 색깔을 거의 못 알아보잖아. 특히 난 보통 생활에서 유모차란 물건과 인연이 없으니까 말이야. 사람이 밀면 설령 커버가 씌워져서 내부가 수증기로 흐려졌다고 해도 유모차라고 인식할 수 있겠지만 그 냥 하늘에서 떨어지면 한눈에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난 한눈에 그게 유모차라고 판단했어. 타케와키도 그랬지? 그래서 날아온 유모 차에 커버가 씌워져 있지 않았던 것을 안거야. 사람이 없었다고 듣고 더욱 확신 이 깊어졌어." 말을 잃던 타케와키가 입을 열자마자 '굉장해, 아마노.' 하고 중얼거렸다. "그 한순간에 거기까지 잘도 꿰뚫어봤네." "한순간에 꿰뚫어본 게 아니야. 잘 생각해보니까 라고 말했잖아." 관찰력이 너무 없다고 노려보고 '그렇지?' 하고 시로를 올려다보자 시로의 눈 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나는 안심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달느 차가 유모차를 떨어트렸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 왜냐하면 우리 앞에 차가 달리고 있지 않았고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 트럭은 가끔 봤지만 유모차는 옆에서 굴러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위에서 떨어졌어. 틀림없어. ...다 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가령 부득이한 급한 일이 있어서 빗속을 커버도 씌우지 않고 황급히 나가야 했다고 치자. 그리고 육교를 이용했다고 해도 유모 차가 아래 도로까지 날아갈 만큼 바람이 강했던 도아니야. 그러니까 역시 고의 로 떨어트리지 않앗으면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기를 해할 목 족 이외에는 말이야." 시로의 눈... 엄격하지만 온화한 눈. 조용히 나를 감싸는 시선. 시로, 그거 혹시 나한테 감탄하고 있는 거야? 입가가 조금 누그러진 시로가 장황한 나의 추리를 짧게 정리해줬다. "아무도 타지 않은 유모차를 누군가 육교 위에서 차도로 던졌다.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타당하겠지." 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추리를 뒷받침했다. "유모차에 쓰여 있던 주소와 이름으로 주인은 금방 판명되었다. 차도 변에 있 는 아파트 주민의 것이었어. 접어서 1층 처마 밑에 놓아뒀는데 도난당한 모양이 야. 그 주민에겐 알리바이도 있어서 범인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단지 육교까 지 1분도 안 걸리는 그 거리에서 추측하건데 유모차가 눈에 들어온 누군가가 충 동적으로 던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충동적으로?" "그래. 범인은 유모차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라 필시 돌이나 뭐라도 상관없었을 거다. 밑으로 달리는 차를 놀라게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이번엔 우연히 유모차 가 손에 잡히는 데 있었던 지 그래서 유모차로 한거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줄 정신적인 충격을 고려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렇게 계획성 있는 범행으로 보이진 않는다. 분명 충동적인 범행이야." 그 말을 듣고 바로 이미지가 겹쳐진 것은 나트륨 폭탄. 위에서 떨어트려서 놀 라게 하다니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수법이었다. 날 겁먹게 하고 만족하고 있는 쾌락범, 너무나 창의성이 부족했다. 동일범이라 는 것이 뻔히 보인다. ...아니, 동일범이란 것을 구태여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다. 타케와키까지 끌어들이다니 저질이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시로가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속 독백까지도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이 두려웠다. 뭔가 추궁하는 줄 알았더니 시 로는 타케와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광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두, 세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타케와키씨?" 다시 돌아온 심문시간이었다. 문병보다 조사를 우선하는 시로에게 나는 추욱 머리를 떨궜다. 하지만 그것이 시로의 시로다운 점이니까 뭐. "참고로 여쭤보는 거지만 최근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이 있습니까?" "아뇨... 특별히 짚이는 것은 없는데요." 얌전히 말한 타케와키가 나를 힐끔 보았다. 그렇게 미안한 얼굴 안 해도 알고 있다. 남에게 원한을 산 것은 100% 나였다. 타케와키와 나의 시선을 읽은 시로가 '역시 표적은 너냐?' 하는 듯이 어깨를 움 츠리며 말을 계속했다. "사고 직후, 육교 근처에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비가 내렸고 이쪽도 전방의 안전에만 신경을 빼앗기고 있어서... 아무튼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떨어졌습니다. 주 변을 확인할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겠지, 나도 그랬어." 나는 타케와키의 증언에 동의하고 '그리고?' 하고 시로를 재촉했다. 참고로 타 케와키의 증언은 후지시로가 부지런히 메모하고 있었다. 후지시로의 필기가 멈 출 때를 노려 시로가 질문을 계속했다. "통근은 언제나 그 길을 그 차로 다니십니까?" "네, 같은 경로를 같은 차고 다닙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됩니까?" 타케와키가 으음 하고 생각한 후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었다. "차는 언제나 학교 전용 주차장에 놓아두니까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압니다. 물 론 학생도 포함해서요. 통근 경로도 사무과에 지도를 제출하는 것이 의무라서 누구라도 관람할 수 있고 신학기 첫날에 배포하니까..." "배포?" "네, 파는 지도를 확대 복사해서 올해는 개학식 후에 돌렸습니다." 나는 타케와키의 설명을 듣고 역시 이치가야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원한을 이 글이글 불태웠다. 와타루씨 살해의 핵심에 대해서는 아직 증거 불충분이고 녀석 도 꼬리를 내밀 기색이 전혀 없다. 단, 유모차 같이 더러운 방법을 쓰는 것은 절 대로 그 새디스트인 이치가야가 틀림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 치고 관계없는 타케와키까지 말려들게 하다니...! "나츠키." 갑자기 이름을 불려서 가슴이 철렁해졌다. 이를 부드득 가는 얼굴을 똑똑히 목 격당하고 말았다. "네가 차에 탄 것을 아는 인물로 짚이는 사람은 없냐?" "으음..." 어떻게 설명하지? 필시 이치가야는 양호실에서 나눈 대화를 문밖에서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 고 녀석의 18번인 택시를 출동시켜서 우리를 노리기 쉬운 곳에 먼저가 있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그 추리를 시로에게 말하기 위해선 전후 사건도 빠짐없이 자백해야 했다. 지금의 내겐 고발할 용기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상황을 심각하게 보게 된 타케와키가 만약 이 시점에서 입을 열면 약품사 건에 관해 들키고 만다. 그리고 사고에도 이치가야가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되면 시로는 이치가야를 중요 참고인으로서 서에 출두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한 의 화신 이치가야가 더더욱 날 원망해서 클럽하우스에서 벌어진 일을 터트릴 수 도 있었다. 그것만은 싫었다. 난 생각하기도 싫은 경험을 죽어도 시로에게 알리고 싶지 않 다. 그 때 후지시로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타케와키 선생님 댁으로 가는 걸 아는 건 저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뒤로 제 가 금방 선배한테 전화를 드렸으니까 당사자를 포함해서 4명뿐입니다. 그렇죠, 나츠키씨?" "아, 응." 땡큐, 후지시로. 덕분에 살았다. 하지만 시로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받아들 일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로는 정보가 새어나가서 범죄가 일어난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 시각, 이치가야가 다른 누군가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한 녀석이 아직 교 내에 있었던 것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나뿐이다. 나와 타케와키가 그 길을 통과한다는 것을 간단히 예측할 수 있었던 녀석이 이 렇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양호실에서 나눈 대화를 몰래 듣고 의기양양하게 현장에 먼저 가 있었던 녀석 이 말이다. 그렇게 날 희롱하고도 모자라서 끝까지 쫓아와 괴롭히려고 일을 꾸 민 녀석이!! "너한테도 짚이는 곳이 없다는 거냐?" "...미안." 내 대답의 이면을 보고도 못 본 척... 아니, 시로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 부러 깊이 파고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추궁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는 건지 아니 면 나와 타케와키가 방금 전 사고를 당한 부상자라는 상황을 어쨌든 신경 써주 는 건가? "있잖아, 시로. ...와타루씨를 살해한 범인은 지목되었어?" 나는 상당한 각오를 하고 물어보았다. 후지시로와 타케와키가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로 혼자서만 차가운 눈 으로 조사중이라고 쿨하게 피해버렸다. 18 나는 주말 내내 자주적으로 자택요양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를 쉬는 것은 이 치가야나 학과장을 피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지만 좀처럼 체력과 기력이 회 복되지 않아서 단념했다. 조금 우울해져서 입원중인 타케와키 병문안도 못 갔다. 뭐랄까 혼자서 외출하 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하하, 한심해.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지금 어떻게 하지 않으면 또 이번 주 내내 등교거부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거야말로 그저 밥만 축내는 식 객, 이런 나로선 아무리 지나도 시로와 대등해질 리가 없다. 나는 멍하니 보던 TV를 끄고 일어섰다. 아직 머리와 몸이 약간 무거웠지만 악 몽같은 지난주는 끝났다고 자신을 강하게 납득시켰다. 시로는 아직 내 몸 상태를 모른다. 그곳의 털과 피어스 홀이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절대로 이 끔찍한 육체를 시로에게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나는 시로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시로는 원래부터 담백해 서 성욕 자체가 희박했기 때문에 섹스 없이도 괜찮다. 아니... 없는 편이 후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인이 매일 밤 옆자리에서 자고 있으니까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었지만 말이다. 이치가야의 때가 달라 붙어버린 이 몸으론 시로에게 안길 자격이 없었다. 이런 몸으로 안기면 시로까지 더러워질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나에겐 두번 다시 시로와 보내는 그 행복 가득한 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해버린 내 몸은 앞으로 평생 사랑 받을 수 없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깜짝 놀라 뺨을 훔치며 '뭘 울고 그래?' 하 고 거울 속의 자신에게 기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봤자 어쩔 수 없잖아." 그래, 어쩔 수 없다. 자업자득이다. 시로와 처음 만났을 무렵엔 시로곁에 있는 것만도 만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무렵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생각하 면...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겹치는 기쁨을 알아버린 지금은 이미 예전의 마음으 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는데 말이다. 나는 양 뺨을 찰싹 때렸다. 다시 우울증에 빠질 뻔했다. 이런 생각만 되풀이하 고 있으면 아무리 지나도 전진할 수 없다. 이대로 있으면 난 정말로 시로의 짐이 되어버린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서 전투 준비 완료. 배낭을 등에 메고 머릿속으로 뚜렷하 게 떠올렸다. 사건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로도 나 와 똑같은 것이다. 시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시로는 벌써 2시간도 전에 토 스트를 입에 물고 출근했다. 나만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다니 무지 꼴불견이었 다. 이래서는 앞으로도 계속 이치가야에게 져버린다. 이치가야는 오늘 학교에 나왔을까? 주말엔 등교했을까? 학교를 쉬고 있는 나에게 장난 전화라도 걸어올 줄 알았지만 그것까지는 귀찮 았는지 휴대전화는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나도 타케와 키도 죽었을 터였다. 그런데 이치가야는 멀쩡한 얼굴로 수업을 받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시 질리지 도 않고 나를 희롱하고 학대하며 소리 높여 웃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하복부가 지끈 하고 수축했다. 시로에게서 잡아떼어지는 공포, 내부에서부터 파괴당하는 절망, 몸을 쥐어뜯고 싶은 혐오감까지 그 날의 아픔이 몸과 마음에 극명하게 되살아나서 집어삼키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연인의 이름을 음미하듯이 되뇌었 다. 시로의 모습만을 필사적으로 뇌리에 떠올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고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괜찮아. 시 로가 내 등을 떠밀어 주고 있어. 시로가 날 배웅해주고 있어. 나는 마음을 먹고 뒤를 돌아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괜찮아. 나는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어. "그럼 다녀올게, 시로." 나는 미소지었다. 담배를 문 채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시로의 환영 이 말없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으로 돌아오자고. 얼마나 괴로운 일이 있어도 시로에게 서 도망치는 것만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나는 다녀오겠다고 방안을 향해 키스를 날리고 문을 닫았다.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각오하고 등교했는데 강의실에는 이치가야의 모습 이 없었다. 대신 나를 둘러싼 것은 같은 과인 카츠라이 녀석들이었다. "뭐야, 아마노. 팔팔하잖아? 지난주에 그런 일이 있어서 등교거부인가 하고 걱 정했었는데." "옷 새로 샀네. 자비로 산 거야? 아니면 학교에서 준비해 준거야?" 약품사건을 아는 만큼 모두가 내 정신면을 염려해서 되도록이면 활기차고 밝 게 대해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애당초 우정이란 것에 기대하는 타입이 아니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 지만 이렇게 걱정해주면 친구란 것도 좋다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그러나 감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학교에 전쟁을 하러 온 것이다. 2교시에 도 3교시에도 점심시간이 되어도 올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가정이지만 이치가야 쪽이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어서 짓눌린 건가? ...그럴 리가 없지. 그 새디스트에게 양심이 있을 리가 없다. 수업이 끝난 후, 승강구로 내려가려고 하자 '아마노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 렸다. 고개를 든 나는 무심코 '우와.' 하고 비명을 지를뻔 했다. "이치가야네 아버지..." 베이지색 재킷을 팔에 걸친 아버지가 내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귀가하 는 학생들의 흐름과는 반대로 말없이 내게 걸어와 걸음을 멈추고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말투로 말을 꺼냈다. "아들 문제로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와 이치가야의 아버지는 옥상에 있었다. 아아... 날씨 좋다. 바람이 기분 좋았다. "용건은 뭐죠? 말해두지만 그 살인사건은 내가 범인이 아니에요." 나는 싱긋 웃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아버지에게 원한은 없지만 아들에겐 평생 분량의 원한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상냥한 말을 건넬 수 있을것 같지도 않 고 건넬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치가야를 그렇게 키운 것은 지금 눈앞에서 미 안해하고 있는 이 지나친 과잉보호 아버지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겨우 결심이 섰는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나는 아마노군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 켄의 상태가 이 상해요." 나는 높은 울타리에 손가락을 걸고 등으로 기대어 헷 하고 코웃음 쳤다. 이제와서 눈치채면 어쩌라고?! 정말 못 말리는 아버지로군. 하지만 아버지는 내겐 개그로밖에 들리지 않는 바보같은 말을 간절한 목소리 로 계속했다. "아아... 물론 그전에 그런 참혹한 사건이 있었으니까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거 라고 이해는 하지만 켄이 너무 이상한 말을 해서요." "이상한 말?" "말하기 뭐하지만... 죽어버렸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죽일 생각은 없었어. 조금 위협할 뿐이었는데... 하고 자신을 힐책하는 거에요." 온 몸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그건 드디어 살해범이 자신이라고 밝힌 거란 말인가? 이거 조기해결로 달려가 는 거 아니야? 와타루씨 살해사건일까? 유모차 낙하사건일까? 이 자백이 어느 쪽으로 굴러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증언 을 나만 듣는 것은 아까웠다. 녹음해야지! 휴대전화 어쨌지? 지금 당장 시로를 여기로 불러야지! "저기... 자, 잠깐 기다려주세요. 그건 분명히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저말고 경찰 관계자에게 직접 말씀하지는 편이..." 초조해서 떨어트린 휴대전화를 아버지가 주워주는 줄 알았기에 나는 '감사.' 하 고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내 손으로 돌아오기 전에 하 늘에 커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에...?" 내 휴대전화는 아버지가 내던져서 이 옥상보다 한층 높은 장소에 있는 급수탑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멍청해진 내 시야 한 구석에서 아버지가 장갑을 단단히 고쳐 끼고 있었다. ...그렇다. 아버지는 베이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렇게 따뜻한데 어째서 장갑을...?' 하고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그 손은 방 금 전까지 팔에 걸쳤던 재킷밑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내 휴 대전화를 잡은 손도 이미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정이 있는 행동이었다면 이유는 지문 부착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그 정도밖 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지, 이미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위험한 분위기에 가득 찼다는 건 상상할 수 있지만... "용서해주게." 난 도망칠 길을 찾았지만 유일한 출입구인 계단 홀까지 뛰어가기 위해서는 눈 앞에 서있는 아버지를 밀어젖혀야 했다. 완력으론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만 약 칼을 숨기고 있는 날엔 최악의 결과를 부를 것이다. 역시 상대방의 속셈을 알 때까지 상황을 보는 쪽이 좋을까? 빨리 최종적인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초조해하는 내 사고를 공포가 손쉽게 중 단시켰다. 잘 보자 아버지의 표정은 방금전까지와는 뚜렷이 달라져 있었다. 굳 이 말하자면 미치기 직전의 얼굴,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고 광기로 돌진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울타리를 따라 조금씩 출구로 움직이며 난 필사적으로 적을 위협했다. 내 등 뒤엔 철망 울타리, 이 이상은 밀려날 수 없다. 도망칠 길은 좌우밖에 없 다. 아버지는 약삭빠르게 교정에서 안 보이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꼬리는 절 대 잡히지 않겠다는 건가? 어른이란건 한없이 더럽군. 아버지는 내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바짝바짝 간격을 좁혀왔다. 그의 팔 꿈치 아래는 아직 재킷이 덮여있었다. 그 밑에 있는 어둠이 햇살을 받아 반짝 빛 났다. ...이봐, 이봐, 설마 총이야? 아니면 역시 식칼? "아들이... 우리 켄이 흠뻑 젖어서 들어오자마자 선생님과 아마노군을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울면서 굉장히 괴로워했어.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볼 수가 없어. 너희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경찰에 연락하려했지만 그러면 아들이 유모차를 떨어트린 사실을 자백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고치고 어떻게 든 견딜 수밖에 없었지." 그 때 갑자기 급수탑 위에서 록키 주제가가 들려왔다. 내 휴대전화였다. 시로 전용으로 성정해놓은 벨소리, 시로가 연락을 취하려 하고 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용건일까? 평소엔 거의 걸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기뻐, 시로. 고마워, 시로. 하지만 미안. 나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무지 바쁘거든. "역시 범인은 이치가야였군. ...하! 역시 당신 아들은 최악의 저질이야!" "켄을 욕하는 건 그만해 주겠어? 모든 건 내 책임이야. 그 아이는 진짜로는 상 냥하고 부모를 위해주는 착한 아이고..." "착한 아이란 건 살인자의 총칭이냐?! 응?" 이치가야의 아버지가 '아니.' 하고 굉장히 쓸쓸한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켄은 정말로 착한 아이라고 헛소리처럼 반복했다. "켄은 말이지. 너희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며 우는, 마음이 부드 러운 아이야. 제발 그걸 알아줘. 켄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 내가 말했잖아? 모든 건 내 책임이라고. 왜냐하면 와타루를 죽인 건 바로 나니까."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순간, 텅! 하고 가슴을 부딪쳤다. 자백에 당황했다는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현실에서 두 손이 내 가슴을 떠밀었 다. 이치가야의 아버지가 날 있는 힘껏 들이받은 것이다! "우왓!" 나는 철망의 저항을 등으로 느꼈다. 내 몸을 유연하게 튕겨 줘야할 철망은 내 몸에 살짝 걸리기만 했을 뿐 ㄷ형태로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말도 안돼!" 이건 누가 미리 절단해놨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범인인 아버지 가 나를 그 장소로 교묘히 몰아넣었다는 애기다. "우와아앗!" 떨어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망가지지 않은 철망에 손가락을 걸려 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떨어지는 속도쪽이 더 빨랐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 풍경이 뒤집혔다. 눈에 비치는 광경이 전부 반대로 돌아 갔다. 머리 위로는 아무도 없는 넓은 교정... 아니, 이런 경우엔 머리 아래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질 거야.' 하고 체념한 것은 오직 한 순 간. 그러나 삻의 집착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 손끝에 철망이 걸렸다. e자 형태로 구겨진 울타리의 끄트머리였다! 순간, 나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끄트머리에 오른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크... 윽." 난 가까스로 데롱데롱 매달려 있었지만 어쨌든 추락을 멈출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안전히 날 떨어트리는데 성공했다곳 ㅐㅇ각 했을 아버지는 억척스러운 내게 쳇 하고 혀를 찼다. 헷, 꼴좋다! 나도 내 반사 신경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젠 집념이라고 부를 수밖 에 없다. 뭐에 대한? 물론 시로에 대한 집념이지. 록키 주제가가 아직 울리고 있었다. 시로가 날 찾고 있다. 나는 여기야, 에이드 리언! 빨리 와줘, 에이드리언! 하지만 타월은 던지면 안돼. 록키는 아직 한창 싸 우는 중이니까! 난 내가 가진 힘을 10개의 손가락에 넣어서 철망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사히 옥상까지 도달해서 '이놈의 색골 영감, 절대 살려두지 않겠어.' 하고 생 각했을때 덜컹하고 철조망 채로 몸이 밑으로 내려갔다. 순간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나도 모르게 왼손이 철망에서 떨어지려고 해서 깜 짝 놀랐 자세를 고쳤다. 섬뜩해져서 설마 하고 옥상을 응시한 나는 경악으로 굳 어버렸다. 철컹 하고 둔한 소리를 내며 철망이 절단되어 갔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재킷 밑에 감추고 있던 것은 펜치였던 것이다! "위험해...!" 그러는 동안에도 다시 철컹, 그 때마다 나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만해, 망할 영감! 죽여 버린다, 바보 녀석!" 그렇게 말하면서도 죽는 건 내 쪽이라고 내 몸이 처한 상황을 동정했다. 아버지는 밑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모을 낮추고 펜치를 쥔 팔만 한껏 뻗어서 아주 신중하게 행동했다. 묵묵히 작업을 행하는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자 책한 나머지 스스로 울타리에 펜치로 구멍을 뚫고 뛰어내린걸로 보이게 하려 는... 마치 자살을 암시하려는 듯한 무정함이 감돌았다. 어쩌면 의외로 컴퓨터로 작성한 유서같은 것도 준비했을지도 모르겠다. 컴퓨 터로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학교것과 같은 기종으로 말이다. 이 아버지라면 그 럴 수 있었다. 순진하고 부드럽고 순수하며 예쁘고 귀여운 그 와타루씨를 죽여 버린 이 잔인 한 영감이라면! "왜 와타루씨를 죽인 거야?!" "...그는 해충이었어. 켄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칠 거야. 내가 켄과 만나지 말 라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싫다고 거절했어. ...여자같은 얼굴로 부끄러운 줄 도 모르는 꼴을 하고, 그건 켄을 현혹시키는 악마야." 다시 철망이 절단되었다. 이번에도 덜컹하고 충격이 왔다. 남은 철사는 이제 5, 6개. 내 생명은 이제 2, 3분. 아니 그것보다 손가락이 너 무 아파서 견딜 수 없다. 피부가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는 바람에 더 손이 미끄럽 다. 이 짧은 인생 속에서 왜 나만 이러냐고 머리를 감싸고 싶을 정도로 무수한 위기와 맞닥트렸지만 그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 설마 이렇게 고지식한 아저씨 일 줄은 몰랐다. 그 때,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나는 헉하고 밑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바로 밑 교정을 걷고 있었다. 저 뒷모습은... 카츠라이 녀석들이 다! 녀석들, 또 체육관에서 농구를 했구나! "카츠라이!" 나는 소리쳤다. 아버지가 날 떨어트리는 것이 먼저일지 내가 구출되는 것이 빠 를지 이제는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녀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교정을 가로질 러서 점점 정문을 향해 가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카츠라이! 위를 봐! 옥상이야!" 비로소 카츠라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돌아서서 옥상을 보았다. 그리고 눈이 휘 둥그래져서 날 가리키며 허둥지둥 소란을 피웠다. "빨리! 빨리 구해줘!" 카츠라이가 뛰었다. 옥상까지 와서 아버지의 손에서 펜치를 빼앗는 것이 아니 라 아마도 직원실로 사람을 부르러 간 모양이다. 남은 두 사람은 '매트리스!' 하 고 외치고 있었다. 녀석들, 번지수가 틀렸어. 그런 걸 옮기는 동안 난 빈대떡이 되어있을 거라구! 이 얼간이들! 덜컹 하고 다시 몸이 내려갔다. 내가 초조한 것 이상으로 아버지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날 밀어 떨어트릴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수고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날 살해하고서 면담으로 온 학부형의 얼굴로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 학교를 뒤로 할 생각이었음이 분명했다. 만에 하나 옥상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누가 보더라도 '날씨가 좋아서 옥상에 와 봤더니 학생이 펜치로 울타리를 망가트리고 있어서... 설득해봤지만 늦고 말았 습니다.' 하고 적당한 핑계를 대며 눈물을 보일 생각이었을 텐지. 그것을 듣고 같은 과 녀석들도 이렇게 증언할 것이다. 아마노 녀석은 질 나쁜 왕따를 당했던 것 같다고. 이치가야에 이르러서는 아마 노는 강간을 당해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고 자책하다가 다시 난폭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만 해도 엄청나게 분했다. 진실이 어둠속에 묻혀있는데 나까 지 이 세상에서 매장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확 치밀어 올 랐다. 나는 울까보냐고 눈을 꽉 감았다. 순가락 힘도 어깨 힘도 이미 한계점을 넘었다. 죽을 때는 절대로 시로 품속에 서 죽겠다고 멋대로 결심한 나였지만 아마도 그 꿈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입술에 올리고 싶었다. 있잖아, 시로. 우리 셀 수 없을 만큼 키스했었지? 그래서 난 내 입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런데 최후의 순간에 원망의 말을 내뱉고 끝나다니 그래서는 이 입술이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시로의 감촉을 떠올리면서 볓 번이나 입술을 핥았다. 시로, 시로, 시로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시로! 무지무지 좋아해! 미치도록 좋아해, 시로! 죽어도 난 영원히 시로를 좋 아할 거야. 난 평생 시로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바람피우면 안돼, 시로... 그런 짓 하면 내가 귀신이 되어서 저주로 죽여 버릴 거야!" 역시 원한의 말이 되어버렸다고 한심한 내 자신을 한탄하고 있자 갑자기 곤혹 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은 참아줘." 나는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에... 하고 상공을 보았다. 내 시야에 들어온 위에서는 낯익은 근육질의 팔이 이제 몇 개 더 절단되면 완 전히 끝장나는 철망 끄트머리에 재빨리 뭔가를 묶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향해 '부탁합니다.' 하고 말했다. 보고 싶었던 얼굴이 데롱데롱 매달린 날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츠키, 손 있는 데까지 밧줄을 내려줄 테니까 네 힘으로 붙잡아." 설마 시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힘내고 있는 건... 역시 시로? 어째서 시로가? 정말로 시로? 어떻게 시로가 여기있지? 나는 그 환영인지 실물인지 잘 알 수 없는 시로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손가락 이 움직이지 않는다. 로프 같은 건 잡을 수도 없다. 이 상태에서 손가락 하나라 도 떼었다간 3초 후에 지상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무리야. 절대로 무리. 손가락 하나도 절대 뗼 수 없어! 하지만 버텨도 앞으로 10초...!" 내가 체면도 아랑곳 않고 울부짖자 시로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지금부터 철망을 절단한다. 철망채로 널 끌어올릴테니 잘 잡고 있어!" 1초의 검토시간도 주지 않고 시로가 펜치로 철망을 잘랐다. 상당한 충격을 각오했지만 철망은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가기는 커녕 체육부원들의 구호와 함께 천천히 옥상과 가까워지며 확실하게 끌어올려졌다. 옥상에는 카츠라이 녀석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전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도 목소리가 들렸다. '힘내!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서서히 올라가는 철망 옆에서 시로가 날 붙잡으려고 한껏 팔을 뻗고 있 다. "손떼지마, 나츠키. 이제 조금만 더!" "시로...!" 아아, 어쩌지. 안심했더니 갑자기 힘이 빠져나갔다. 마음이 느슨해져서 혈관까 지 느슨해졌다. 손가락이 피에 젖어서 미끄러웠지만 조금만 더. 이제 조금 있으 면 시로의 손이 날 잡을 수 있다. "죽어도 손을 놓지마, 나츠키!" "죽으면 손을 안 놔도 소용없잖아..." "농담할 때냐?! 아무튼 철망에만 집중해! 내가 네 팔을 붙잡을 거다. 그 때까지 절대로 놓지마! 알겠지?!" "아... 알았어..." "이제 조금 남았다, 나츠키. 힘내!" 놓지마. 힘내. 그게 시로의 명령이라면 나는 설령 소가락을 전부 잃는다 해도 그 임무를 끝까지 수행해 보일테다. "힘낼게... 시로. 그러니 시로... 부탁이니까..." 날 붙잡으면 두 번 다시 놓지 말아줘--. 19 카츠라이 녀석들의 협력으로 나는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다. 구출팀 일동이 땀을 줄줄 흘리며 주저앉은 채 나의 귀환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 다. 큰 박수 속에서 나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시로의 품에 뛰어들었다. 구출팀과 같이 주저앉아있던 시로가 내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넌 정말로 성가셔." 감정이 복받쳐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로에게 매달려서 안 떨어지는 내 주변 으로 카츠라이 녀석들이 웃으면서 모여들었다. "그런데 매달려 있길래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넌 왠지 서먹서먹해. 목숨이 달렸는데 어려워하지마."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한테 말해주지 그랬어." 카츠라이 녀석들이 멋대로 말하면서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모두에게 미안 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고맙다고 인사했다. 솔직히 좀 기뻤다. "당신, 도대체 무슨짓을 한거야?!" 격렬한 노성이 우리의 온화한 공기를 앗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눈이 일제히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방금 계단에서 뛰어올라온 이치가야 켄이었다. 그 이치가야가 노려보 고 있는 것은 토리카이 와타루 살인 및 살인 미수범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느새 와있던 후지시로와 카바마루에게 양쪽에서 팔을 붙잡힌채 연 행되던 참이었다. 마주할 면목이 없는지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치가야가 어깨로 격렬하게 씩씩대며 외쳐댔다. "무슨 생각을 한거야?! 이 망할 영감!"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조용해진 속에서 분노와 슬픔에 떠는 이치가야의 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하잖아! 웃기잖아! 왜 아버지가 와타루를 죽여야 하는데?! 왜 아마노까지 죽이려고 한거야? 내가 그런 거 부탁한 적 없잖아! 왜 그렇게 언제나 내가 바라 지도 않은 일을 아버지가 멋대로 저지르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난 모르겠 어! 왜 멋대로 없애버리려고 한거야?! 어째서 나한테 중요한 것을 이해해주지 않 는 거냐구!" 이치가야가 흥분의 숨결을 토해내자 아버지가 고개를 숙인채 대꾸했다. "난 널 위해서..." 이치가야가 아버지의 어깨를 잡았다. 뿌리치려고 하는 카바마루를 시로가 제 지했다. 카바마루가 말없이 물러나자 이치가야가 아버지의 어깨를 격렬하게 앞 뒤로 흔들면서 외쳤다. "날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잖아! 날 위해서라면... 그렇다 면 난 아버지도 와타루를 좋아해 주길 바랬어! 나와 와타루를 이해하려고 노력 해주길 바랬다구! ...왜 언제나 앞질러가는 거야? 어째서 내 길을 정하려고 하는 거야? 부모라면 날 믿으란 말이야! 내 행복을 자신의 저울로 결정하지마! 아버지 는 내... 단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이런 형태로 날 버리지 말라구! 이런 형태로 배신하지 말란 말이야...!" 이미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치가야와 아버지의 흐느낌 소리가 우 리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후지시로가 '가시죠.' 하고 부드럽게 아버지를 재촉했다. 얌전히 고개르 ㄹ끄덕 인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이치가야가 말없이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이치가야 는 그대로 무너져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 * * 시로를 학교로 부른 것은 타케와키였다. 물론 타케와키는 지금도 입원중이라 서 내가 옥상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던 사실은 몰랐다. 그저 타케와키는 자신도 사고를 당한 일로 내가 교내에서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등교했다는 것을 학교측과의 정기 연락으로 알게 된 타케와키는 내 보호자인 시로로서가 아니라 경시청 형사인 칸자키 시로에게 긴급수사 의뢰를 한 것이다. 이치가야의 아버지는 학과장과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니 타케와키 혼자서 목 소리를 높여봤자 사실이 작위적으로 일그러지든가 어둠에 묻히게 될 것이 뻔했 다. 그래서 타케와키는 사직할 각오로 내부고발을 결행한 것이다. ...제법인데, 타케와키. 시로는 그 자리에서 사건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시부야구 내에서 일어난 토리 카이 와타루 교살사건과의 관련성도 포함해서 카바마루에게 출동요청, 동시에 신주쿠, 스기나미, 나카노구 제 4방면 각서에 통보, 교내 사정에 밝은 후지시로 를 현장으로 불러내서 자신도 차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시로 일행은 주변 주민과 타케와키의 입장을 생각해서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위장 순찰차로 달려왔다. 그래서 사이렌 소리도 없이 갑자기 시로가 등장해서 깜짝 놀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비상사태에... 아니 비상사태니까 더더욱 서 로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에 상당히 감격하고 말았다. 철망에 묶은 밧줄을 찾아온 것은 카츠라이였다. 춘계 체육대회때 사용했던 그것이 직원실에 놓여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카츠라이는 떨어지려고 하는 나를 보자마자 주저없이 직원실 로 달려간 것이다. ...얼간이라고 불러서 미안하다, 카츠라이. 나는 타인과 서로 도와주거나 협력하는 것이 원래부터 익숙하지 않았지만 아 주 귀찮지만은 않다고 이번 일로 조금 인식을 달리했다. 후지시로가 이치가야의 아버지에게 수갑을 채우고 자신의 세리카 뒷좌석에 태 웠고 경관과 카바마루가 아버지를 사이에 놓고 동승했다. 나는 창문 너머로 카바마루에게 혀를 내밀었다. 이 녀석만은 역시 끝까지 맘에 들지 않았다. 적의를 드러내는 나를 보고 카바마루가 창문을 내렸다. 녀석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는지 히죽거리지도 않고 변명했다. "뭐, 형사는 아무리 의심해도 '모자란' 직업이니까." 사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 하는 거냐? 정말 성격 비뚤어졌네.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고? 장난 하냐? 바보. 네 녀석의 일은 진상 규명이 잖아. 백을 억지로 흑으로 바꾸려고 하지마. 난 형사가 되어도 절대로 네 녀석같 이 되고 싶지 않아." 힘껏 혀를 내밀어주자 카바마루가 눈을 크게 떴다. "너 형사가 되고 싶은 거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이가 없는 건지, 놀란 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사가 되어도 네가 계속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빌겠다." 자신의 직업에 단념한 듯한 말투에 울컥한 나는 반론을 터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 출세가 빠를 것은 틀림없군." 그러자 카바마루가 쓴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닫아버렸다. 자기 자신이 걸어온 형사 인생을 후회하는 듯한 자조섞인 말이었다. 카바마루의 노고를 살짝 엿본 순간, 카바마루에 대한 적대심이 왠지 천천히 사 그라졌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 속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학과장을 발견했다. 학 과장은 입술을 꽉 다문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이치가야의 아버지의 뒷모습을 눈 으로 쫓고 있었다. 세리카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말없이 바라보았다. 학과장에게 있어 이치가야 의 아버지는 단순히 돈줄이 아니라 옛 친구였다는 두 사람의 관계가 흐릿하게 떠울랐다. 나는 학과장의 안경 안쪽에 있는 가느다란 눈이 눈물로 젖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학과장은 구경꾼들이 사라져도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20 이치가야의 아버지인 이치가야 코지로는 장남인 켄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다음 해에 애처를 병으로 잃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컸던 탓인지 호의적인 재혼 이 야기도 재산이 목적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코지로의 사랑은 자연히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인 켄에게 쏟아졌던 모양이다. 코지로는 켄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과잉보호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켄을 생 각하는 마음은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없으니까 외로울 거라고 생각해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사줬다. 가고 싶은 곳에도 데려가 줬다. 하고 싶은 일을 시 켰다. 바램을 들어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 고등학교가 이어져 있는 유명 사립학교에도 시험없이 들여보내줬다. 기부금만 내면 입학할 수 잇는 학교였다. 하지만 기부금으로 입학했다는 정보 가 어디선가 새어나가서 켄은 왕따의 대상이 되었다. 켄이 코지로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켄은 등교거부아가 되어 외박을 밥먹듯이 하고 머리를 물 들이고 문신을 새겼다. 결국 시부야에서 약을 사다가 선도된 것이 고3 여름이었 다. 같은 시기에 또래의 소녀를 임신시켜서 그 사실이 학교 측에 들키는 바람에 기부금도 보람 없이 진학을 거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내자는 생각에 코지로는 켄을 연줄이 있는 우리 학교 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다시 약이나 섹스에 빠지지 않도록 학교 안에서 켄의 행 동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옛 친구인 학과장에게 부탁하고 현금을 계속 건네줬다. 하지만 들어가도 켄의 반항적인 태도는 변함없었다. 그래도 코지로는 켄이 귀 여웠다. 언제는 아버지의 애정을 알아줄 거라고 믿고 학교에 기부를 계속했다. 그런 보람이 있어서 출석 일수가 모자라도 유급하지 않고 올해는 미국에 있는 대학원에 추천장도 준비해준다고 했다. 이대로 경찰에 연루되지 않고 무사히 보내면 되겠다고 안도하고 있던 순간, 코 지로는 카드 청구서에서 토리카이 와타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토리카이 와타루의 가게인 루비 완샹에서 켄이 빈번히 쇼핑을 계속한 것이다. 한 달에 2백만은 투자하고 있다는 계산이 되었다. 카드는 자유롭게 써도 좋다고 켄 전용으로 한 장 만들어 줬지만 금액보다도 그 많은 횟수에 코지로는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코지로는 조사 회사에 의뢰해서 황급히 루비 완샹을 조사했다. 조사서에 의하 면 그곳은 외설적인 가게였다. 조사서에는 검은 옷만 판매하는 풍기문란한 가게 라는 것, 가게의 책임자인 토리카이 와타루가 여자같은 남자라는 것, 매일 밤마 다 켄과 함께 클럽에 드나드는 특별히 친한 사이라는 것 등이 쓰여 있었다. 졸업할 때가 되자 담당 교수에게서 빈번히 전화가 걸려오게 되었다. 그는 '어 떻게든 등교하도록 협력해 주십시오.' 하고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설교했다. 돈 을 찔러줘도 거절당했다. 결코 태도를 유화시킬 수 없는 상대를 처음 만난 코지 로는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모두 돈으로얌전해졌는데 말이다. 코지로는 어쨌든 켄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켄이 마음을 빼앗긴 토리카이 와타루를 떼어내는 것 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지로는 자기 발로 루비 완샹에 갔다. 켄이 없 는 것을 확인하고 가게에 들어가자 모란듯이 살을 노출시킨 여자같은 청년이 아 양을 떨며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혐오스러워서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켄이 이런 '것' 에 마음을 빼앗길리가 없다. 코지로는 '이것' 이 켄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한눈에 판단했다. 코지로는 토리카이 와타루에게 켄과 만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토 리카이 와타루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을 뿐 요령부득이었다. '켄이 학교에 안가면 곤란하다.' 고 부모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제대로 학교에 가도록 타 이르겠으니 안심하세요.' 하고 웃었던 것이다. '안심하세요.' 하고 말이다. 마치 켄이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듣는다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웃음마저 띠면서... 이 얼굴을 찢어줄까, 코지로는 그 때 처음 살의를 느꼈다고 한다. 다음 날도 코지로는 루비 완샹에 갔다. 켄이 없는 개점 시각을 노려서 아들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아마도 토리카이 와타루는 켄에게 그 일을 말한 모양이었 다. 그날 밤, 코지로는 처음으로 켄에게 맞았다. 아무리 난폭해져도 부모에게 손대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는데...! "당신 와타루에게 뭐라고 말하면 가만 안둘 거야! 두 번 다시 루비 완샹에 나타 나지마!" 가재도구를 쓰러트리고 창문을 깨고 날뛰며 코지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광기 어린 소란에 코지로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지 않으면 켄이 더러움에 물들고 말 거라 고 막연히 생각했다. 3자면담은 켄을 설득해서 등교시켰다. 켄의 마음을 열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결국 5분도 버티지 못하고 강의실을 뛰어 나가버렸다. 켄과 제대로 대화하고 싶었다. 코지로는 백 보 양보해서 토리카이 와타루를 사 이에 놓고 켄과 대화하는 걸 생각했다. 켄이 토리카이 와타루 앞에서도 그렇게 날뛸까 하는 흥미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저녁때 루비 완샹을 방문하자 토리카이 와타루도 켄도 없었다. 외설적인 의상을 입은 젊은 녀석이 가게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켄이 피운 꽁초가 남아있었다. 켄이 여기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데도 켄이 안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옷을 입는 사람은 비정상이다. 그 녀석은 켄과 같은 과 친구였다. 그도 토리카이 와타루에게 더럽혀진 불쌍한 사람이었다. 녀석은 가게 문단속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코지로는 그의 뒤를 밟 았다. 녀석이 향한 곳은 토리카이 와타루의 맨션이었다. 물론 코지로는 그곳을 이미 조사해두었다. 매상금과 가게 열쇠를 신문 투입구로 배달을 끝냈는지 2분 정도 지나자 맨션에서 나와서 역 쪽으로 사라졌다. 토리카이 와타루가 돌아온 것은 그 뒤로 바로 30분 후였다. 켄도 있었다. 택시 에서 내린 두 사람이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했다. '벌써 돌아가는 거야?' 라든가 '아침까지 논다고 그랬잖아.' 하고 떼를 쓰는 것은 아마도 켄쪽인 것 같았다. 아 버지가 걱정하시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엄마의 얼굴로 말하는 토리카이 와타루 에게 증오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저것' 은 이미 켄을 손에 넣고만 걸까? 켄은 이미 '저것' 의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 가족보다도 '저것' 의 말을 믿고 '저것' 을 선택하는 걸까? 코지로는 다음 날도 토리카이 와타루의 맨션이 보이는 위치에서 지켜보고 있 었다. 두 사람이 택시로 돌아온 것은 어제보다 빠른 오후 7시 45분. 먼저 켄이 택시에서 내려 토리카이 와타루를 에스코트했다. 거기엔 유년기를 방불케 하는 한없이 부드러운 켄의 웃음이 있었다. 그런 얼굴은 요 몇 년 동안 코지로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부모조차 갖지 못했던 권리를 '저것' 이 독점하고 있을 줄이야, 분노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그럼...' 하고 토리카이 와타루가 가볍게 한 손 을 들어올리자 켄이 그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갖다댔다. 켄이 토리카이 와타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켄이 강제로 토리카이 와타루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턱을 붙잡고 입술을 포개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켄이 저런 추악한 것에 입맞춤을 하다니! 설마, 설마!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 켄은 아직 아이다. 켄은 '저 것' 에게 현혹되어 있는 것이다.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애써 입술을 구하는 켄을 토리카이 와타루가 쓴웃음으로 거부했다. '아버지와 화해하면...' 이라며 '저것' 이 또다시 아는 척하고 입을 놀렸다. 토리카이 와타루가 맨션으로 사라졌다. 켄은 그것을 지켜보고 나서 택시로 돌 아갔다. 인터폰을 울릴 때 가지고 있던 장갑을 낀 것ㅇ느 무의식적인 행동이었 다. '그것' 이 사는 곳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에 대한 혐오와 저항감, 그리고 그 시 점에서 코지로는 무의식적으로 살의를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켄의 아버지라고 말하자 잠시 침묵한 후에 자동문이 열렸다. 맨션은 꽤나 낡았다. 엘리베이터는 있었지만 오래된 정문 홀에는 감시 카메라 의 모습이 없어서 오토록 보급 초기의 건물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즉, 오토록 설비만 있으면 불법 침입자를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어리석은 시대의 유산 이었다. 토리카이 와타루는 켄을 현혹시켜서 한몫 잡고 있는 것치고는 수수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필시 억척스럽게 저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문 앞에 선 코지로를 토리카이 와타루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막 돌아와서 옷 갈아입을 새가 없었는지 방금 전의 파렴치한 복장으로 자기 집 인데도 어딘가 무료하게 서있었다. 아마도 현관보다 안쪽으로 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늘에야말로 결판을 짓자, 코지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토리카이 와타 루도 아마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리카이 와타루쪽이었 다. 켄을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 코지로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켄도 절 좋아합니다. 켄이 약속해줬습니다. 제대로 학교에 나가 열심히 공부 하겠다고요. 켄이 정말 자신의 생활과 인생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그 때 연인이 되자고 아까 제 마음을 밝혔습니다. 켄도 납득했습... 니..." 코지로는 현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등뒤로 문이 닫힌 순간, 코지로의 올느 손은 토리카이 와타루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한 번으론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손을 들었다. 놀란 토리카이 와타루가 코지로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본성을 드러낸 거냐, 악마 녀석! "두 번 다시 켄과 만나지 마! 너같은 것을 켄이 사랑할 리가 없어! 여자도 아닌 것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요! 저와 켄은 서로 사랑합니다. 아버 님께서 모르실 뿐이에요!" 코지로는 토리카이 와타루를 쓰러트렸다. 꼴사납게 다리를 벌리고 겁에 질린 토리카이 와타루의 다리 사이의 천을 움켜쥐고 난폭하게 잡아당겼다. 가죽 벨트 하나로 매달려 있던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히 벗겨졌다. 토리카이 와타루가 깜짝 놀라 다리를 오므렸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내 아들과 사랑한다는 거야? 응?"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 뻔뻔해졌는지 토리카이 와타루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오므리고 있던 다리를 커다랗게 벌리고 '모르셨어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다리 사이 깊숙이 패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자도 가끔 여기로 플레이하지요? 아아... 아버님은 성실해 보이니까 모르실 지도 모르겠네요. 온 김에 시험해보시겠어요?" 토리카이 와타루는 일어나서 보란 듯 엉덩이를 내밀어 보였다. "자아, 아버님이 먼저 시험해보세요. 아드님과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토리카이 와타루는 코지로의 장갑 낀 손가락을 조이며 창녀처럼 허리를 흔들 었다. 괴로운 듯 신음하면서도 설교같은 말을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이... 이렇게 될 줄은... 아버님은 모르셨겠... 죠? 자아... 전 이렇게 해서 켄을 만족시킬 수 있어요. 분명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억지를 쓰는 저 입을 갈기갈기 찢어주고 싶었다. 이 구멍에 식칼을 쑤셔넣어 살을 후벼주고 싶었다. "아.. 아아." 한없이 혐오스러운 생물!! "으응... 하아...!! 아아... 아하..." 고통을 주고 싶어서 코지로는 손가락을 4개 찔러 넣었다. 토리카이 와타루의 가슴에 흔들려 빛나는 물건을 유두와 함께 잡아 뜯었다. 그런데도 토리카이 와 타루는 아픔을 호소하기는 커녕 더욱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벌리며 드디어 켄 의 이름까지 입에 올린 것이다. "아앗, 케... 켄!" 코지로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좋아, 켄. ...아, 이제 안 되겠어. 그렇게... 아... 켄, 켄, 아앗...!" 신음소리는 점점 격렬해져서 가느다란 비명으로 변해갔다. 이런 '것' 이, 이렇게 혐오스러운 생물이 내 아들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켄, 켄...!! 살려줘! 하아... 흐응... 사, 살려줘, 켄...!" 떨어져있던 벨트를 집어 토리카이 와타루의 목에 감은 건 무의식이었다. 토리카이 와타루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항하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아아아아...!" 하필이면 그 순간, 토리카이 와타루가 절정에 도달했다. 코지로는 토리카이 와 타루에게 손톱을 세웠다. 아예 내장까지 잡아 찢어주고 싶었다. 괴로운 모양인지 토리카이 와타루가 눈과 입에서 체액을 흘리며 가느다란 비 명을 흘렸다. "살려줘, 켄. 살려줘, 켄..." 가끔씩 섞이는 것은 여자와 같은 신음소리. 스스로 커다랗게 허리르 ㄹ흔들고 손목을 조이며 흰자위를 까뒤집고 다시 사정했다. 잘 보자 목에 감았던 벨트는 가느다란 목의 얇은 피부를 단단히 파고들어 있었다. 토리카이 와타루는 그 이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토리카이 와타루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코지로는 깜짝 놀라 팔을 거둬들였다. 토리카이 와타루는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조심조심 시체를 발로 뒤집자 그의 얼굴은 어딘가 황홀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가 달콤하게 허물어져 있다. 이 검은 옷의 악마는 절정의 순간에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 은 끝까지 음란 하게 죽은 것이다. 너무나 혐오스러운 나머지 토할 것 같았다. 이런 장소에 1초라도 있을까 보냐! 코지로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문틈에 토리카이 와타루의 팔이 낀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어찌되건 상관없었다. 구를 듯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을 때, 갑자기 작동음이 들렸다. 누군가 올라 오고 있다! 엘리베이터는 2층을 통과해서 3층도 지났다. 이 맨션의 최상층은 4층이었다. 누군가 이 층으로 온다! 코지로의 눈에 비상계단이 들어왔다. 코지로는 재빨리 계단 그늘로 몸을 숨기 고 숨을 죽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은 전에 보았던... 켄의 친구였다. 매상금을 전해주러 온 것인가! 코지로의 심장이 파열직전까지 팽차했다. 현관에 뒹굴고 있는 시체는 저 녀석 에게 발견될 것이다. 모든 게 끝장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면 도망칠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초조해해선 안된다. 내가 여기 왔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 지문조차 안 남아있 다. 자신과 토리카이 와타루의 접점은 점혀 없다! 코지로는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켄을 위해서라도 범죄자가 될 순 없다. 코지로는 발소리를 죽이고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2층을 지났을 땐 체면도 개의치 않고 뛰어갔다. 정문 홀의 자동문을 빠져나가 바깥으로 나갔다. 시각은 8시 20분. 계단에서도 정문 홀에서도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확신 한 순간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악감은 어느새 아 비로서의 큰 책임을 다한 고양감으로 변해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검은 옷의 악마에게서 지켰다. 그런 느낌에 취해있었다. 살인죄는 그 녀석에게 뒤집어씌우자. 미안하지만 내 아들을 위해서다. 만약 경 찰이 사정청취를 요구하면 그 녀석이 매상금을 맨션까지 운반했다고 증언하자. 코지로는 시부야서의 취조실에서 담담히 진술을 계속했다. 토해내면 토해낼수 록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가서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자신도 가 려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켄을 위해서였습니다. 켄도 이런 나를 언젠가 알아줄 거라고 맏었 습니다. 그 친구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경찰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지위가 잇는 제 증언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에 하나 제가 경찰에 붙잡혀도 돈만 있으면 금방 석방될 거라고, 그런 환상에 취해있었습니다. 전부 제가 어리 석었습니다." 이치가야 코지로 사건은 다음날 조간신문에 크게 실렸다. 학장과 학과장은 각 매스컴사에 사죄문을 올리고 기자회견에서도 전면적으로 죄를 인정하여 두 사 람 다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21 오래간만에 평온한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시로와 나의 사랑의 둥지를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벽, 오크 소재의 옷장과 다이닝 테이블을 대신하는 코타 츠와 방석 겸용 이부자리, 그리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있는 엄청난 헤비스모커인 사랑스런 연인. 시로가 담배를 입술에 끼운채 재킷을 벗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여느 때처 럼 바지런하게 시중을 들었다. 일상이 돌아왔다는 데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난 시로의 넥타이를 옷장에 넣으 면서 울고 싶을 정도로 평온한 이 공간에, 그리고 시간에 감사했다. 시로가 코타츠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신문을 펼쳤다. 그 넓은 등이 애 절할 만큼 기쁘고 슬퍼서 나는 시로의 등뒤로 돌아가 매달리고 싶은 것을 참고 두 손을 어깨에 얹고 주물렀다. 동거를 시작할 무렵에 시로는 이런 식으로 러브러브한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없이 내게 어깨를 맡기고 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말없 이 나랑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로의 눈은 신문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네가 조용하면 기분 나빠." "말이 심하다." 멈춘 손을 웃으면서 얼버무리고서 멀쩡한 듯이 기운 좋게 마사지르 ㄹ다시 시 작하자 시로가 '그런 의미가 아니야.'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야말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웃자 시로가 별 안간 내 손목을 붙잡고 강인하게 가슴에 끌어안았다. "왜... 그래, 시로." 시로가 이런식으로 날 끌어 안아준 적은 거의 없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기뻐서가 아니었다. 내가 느낀것은 이대로 몸을 섞는것에 대한 공 포였다. 시로는 시선을 피한 채 굳어져 있는 내게 아무말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 등에 두 팔을 두르고 요람처럼 부드럽게 몸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연인의 포옹이라기보다 여전히 아이를 달래는 손짓이었다. 와이셔츠 너머로 시로의 가슴의 체온에 이끌린 나는 눈을 감고 시로의 심장고동에 귀를 기울였 다. 두근... 두근... 조용한 리듬이 반복되었다. 어쩌면 난 사실 시로안에서 태어 난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미안... 시로." 입이 멋대로 사과했다. 어째서 말하는 거냐고 스스로 당황하면서도 그래도 나 는 미안하다고 바보같이 사과를 되풀이했다. "미안, 시로. 나 죽을 때까지 시로에게 말 안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안되겠 어. 난 역시 시로에게 숨길 수 없어. 시로, 나... 이치가야에게 당했어." "미안해, 시로...!" 울 생각은 없었는데 둑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넘쳐 나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엉엉 울다니 이렇게나 울다니 나 뭔가 이상해. 고작 섹스. 익숙할 터인데. 그런 데 나는 남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괴로웠다. 나는 남김없이 자백했다. 저항했지만 당해낼 수 없었다는 것, 피어스로 상처 입었다는 것, 부끄러운 차림이 되었다는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 울면서 모든 걸 이야기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시로는 계속 말없이 날 가슴에 안아주었다. "난 이제 시로랑 있을 자격이 없어. 나 무지 더러워지고... 끔찍한 짓을 당해서 이제 시로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난 역시 시로에게 숨겨도 좋으니까 시로 곁에 있고 싶었어. 시로를 속여도 좋으니까 이 방에 돌아오고 싶 었어. 그래서 괴로웠어...!" 나는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말하려고 얼굴을 들었다. 내 참회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저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던 걸까? 시로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시로는 눈을 뜬 채 얼이 빠져있는 내 눈을 바라보 며 몇 번이고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시로가 말했다. 이제 됐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지나간 일이라고... "나츠키. 넌 여기 있으면 돼. 지금은 그거면 돼." 시로는 말수가 굉장히 적다. 안타까울 정도로 나랑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로가 가끔씩 하는 말은 무엇보다도 강한 용기가 되어 내 마음에 전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눈물이 내 눈에서 뚝뚝 떨어져 나는 시로에게 매달렸 다. 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시로의 얼굴을 부둥켜안았다. "난... 이대로는 안돼. 겨우 알았어." 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강하게 끄덕였다. "난 좀 더 강해지고 싶어. 몸도 마음도 좀 더 강하게. 내겐 알아야할 것이 아직 잔뜩 있어. 나... 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고 싶어. 이대로 는 납득할 수 없어."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입이 제멋대로 나의 진로를 결정했다. "대학원에 가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 난 사람의 감정이야말로 최악의 무기 를... 흉기를 낳는다는 걸 알았어. 범죄자의 심리를 내부로부터 해명해서 진상을 추궁하는 공부를 하고 싶은 거야. 지금의 나로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이대로 가면 난 어중간하게 끝나고 말 거야." 시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우 깨달았구나... 하는 느낌의 손길이었다. 무 언의 부드러운 찬성을 얻은 나는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지식과 힘을... 싸울 수 있는 기초를 확고하게 몸에 익히고 나서 형사를 지망 할거야. 지금의 나로선 안돼. 시로랑 함께 있고 싶은 것만으론 안돼. 그런 이유 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어. ...나 진지하게 공부할 거야. 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내 말을 후원하듯이 시로가 조용한 목소리로 용기를 주었다. "넌 관찰력이 있어. 통찰력도 뛰어나지. 감수성도 남들보다 풍부하다. 분명 사 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형사가 될 거다." "시로..." "그러니까 나츠키, 좀 더 배워라. 좀 더 흡수해. ...현장에서는 방황할 시간이 없다. 두려울 정도의 속도로 매일이 지나간다. 다발하는 사건 속에서 자신을 잃 는 일 없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자신을 갈 고 닦는 일에 시간을 써." "응... 시로." "특기 분야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 이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힘을. 그것이 사회에서 무기가 되고 널 지키는 방패도 될 거다. ...아르바이 트도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다만 학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해둬." 나는 얼굴을 들었다. 시로가 이렇게 내 장래에 대해서 말해줘서 기뻤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미소지으며 물어보았다. "저기, 시로. 시로는 어느 대학 나왔어? 무슨 학부?" "왜?" "응... 공부는 고독하잖아? 그러니까 마음의 버팀목으로서 수험 목표로 삼을까 해서." 순조로웠던 대화의 흐름이 갑자기 멈췄다. 내가 재촉하자 시로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T대다." "에?" "T대 법합부다." "그..." 순간 온 몸의 핏기가 싸악 가셨다. 그거 설마 일본 최고봉의 난관인 국립 대학... 말이야? "시... 시로가 머리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아하하하 하고 나의 어색한 웃음이 허무하게 울렸다. "머리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국립이 아니면 안됐으니까 그런거니까." "어째서?"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보니 시로가 떨떠름하게 고백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난 여동생과 함께 오랫동안 백부님께 신세를 졌었어. 졸업 후엔 취직할 예정이었지만 백부님 체면상 그럴 수도 없어서 말이다. 적어 도 금전적인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국립을 택했을 뿐이야." "택했을 뿐이라니... 머리가 안 좋으면 선택의 여지조차 없잖아." 시로의 사정에 감탄해야할지 기막혀해야 할지.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알아버렸다. 시로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구나. "음, 그럼 나 시로의 모교는 제 3지망으로라도 넣지 뭐." "국립은 가뿐하지 않았나?" 시로가 눈썹을 휙 치켜떴다. 나는 그렇게 심술부리지 말라고 원망스럽게 노려 보았다. "난 시로랑 달리 금전적으로 엄청 부담 줄 것 같지만 출세하면 갚을게." 입술에 쪽 하고 키스해주자 시로가 어떻게든 현역으로 합격해 달라고 조그맣 게 어깨를 흔들었다. * * * "그럼... 아마노. 건강해." "응, 이치가야도." 신간선 플랫폼에서 나와 이치가야는 악수를 나눴다. 이치가야는 오늘 큐슈로 떠난다. 하카다에 사는 백부 댁으로 가서 함께 살 거라고 했다. 사실 난 시로의 품속에서 엉엉 울어버린 다음날, 이치가야와 화해했다. 원래부터 나는 이치가야가 싫지 않았고 이치가야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저 우리 사이에 일어난 현실의 잔혹함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 라 발버둥쳤을 뿐이었다. 감식결과만 나오면 와타루씨를 살해한 범인은 자연히 알았을 텐데 말이다. 그조차 기다리지 못했던 우리는 감정이 하라는 대로 상대 방을 공격하고 상처주는 행동만이 용감하다고 오해하고서 본능대로 행동했다. 목수야말로 최고의 애도라고 생각한 이치가야도 분노야말로 최대의 방어라고 믿었던 나도 둘 다 어린애였다는 증거다. "정말... 폐만 끼쳤구나, 아마노." "이제 됐다니까. 좋은 추억... 은 못되겠지만 너랑 친구가 되었다는 것에 솔직 히 기쁘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눈부신 은발의 멋진 남자를 올려다보자 이치가야는 쑥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노에게 지독한 짓을 해버렸지만... 그래도 난 아버지같이 되진 않을거야. 약속할게. 우리 아버지는 살인범이지만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니까." 이치가야가 결의표명을 해주었기에 나도 녀석에게 특별히 가르쳐주었다. "우리 아버지도 살인범이야. 어머니를 죽이고 나도 죽이려 했다구." 나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이치가야에게 가볍게 윙크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범죄자라도 난 범죄자가 아니야. 난 형사가 될 거니까." 자랑스럽게 말하는 나를 이치가야가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군. 너라면 될 수 있을 거야. 시로처럼 근사한 형사로 말이야." 최대급의 칭찬을 해준 이치가야가 보스턴 백을 들어올렸다. 발차 벨소리가 울 려 퍼졌다. "잘 있어, 아마노." "OK." 그 때, 이치가야가 아 하고 승차구에서 멈춰서 잊어버릴 뻔했다며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 줄게." "아, 땡큐. 근데 이게 뭐야? 대여 창고?" 이치가야가 그렇다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카드의 주소에 내가 지금까지 구입한 루비 완샹의 옷을 맡겨두고 있어. 그 거 전부 너한테 줄게. 난 못 입는 옷이었으니까 네가 가끔 입어줘." "에? 입어주라니? ...잠깐, 이치가야. 나라도 그걸 밖에서 입을 용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문이 닫혔다. 이치가야 녀석, 히죽거리는 얼굴로 가버 렸다. 대여 창고회사의 외관이 인쇄된 카드 키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어쩌나 난 처해하던 나는 그래도 뭐 어때? 하고 웃어버렸다. 시로 한사람을 관객삼아 패션쇼를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로는 뭐라고 말 할까?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지... 는 않겠지. 그럴 새가 있으면 공부하라고 화를 낼 거다. 분명. "괜찮아, 시로.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지혜와 지식을 키워서 시로에게 지지 않 는 최고의 형사가 되어 보일 테니까." 나는 자랑스러운 목표를 입 속에서 되뇌이며 홈을 뒤로했다. 22 "오늘부로 신쥬쿠서 수사 1과에 연수 부임하게 된 아마노 나츠키입니다. 잘 부 탁드립니다!" 나는 활짝 열린 문 앞에 서서 뱃속에서부터 소리쳤다. 그리고 몸에 익지 않은 양복을 걸친 상반신을 깍듯하게 90도로 굽혔다. 환영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약 10초 정도 기다렸지만 박수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얼굴을 들자... "...헉." 눈앞에서 펼쳐진 내 연수처의 광경은 내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수사과에는 어렸을 때 사적으로 자주 신세졌지만 당시보다 훨씬 험악했다. 아니, 마치 전쟁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실내에 만연한 것은 여기저기서 타들어가는 담배 연기와 책상에 쌓여있는 서 류는 뭐든지 전부 기울어지고 무너져서 결국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성은 새벽 심문인 것 같았다. 비장감에 넘치는구나.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는 110번 신고?! 어디어디에서 강도라는 둥, 누구누구가 싸웠다는 둥,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일반 시민 상대로 하나하나 정중하게 대응하고 있는 경찰서 직원의 모습은 눈물겹기 까지 했다. 아아, 또 전화가 울렸다. 하지만 10병이나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손이 빈 사람이 없었다. "저기..." 전화 왔다고 말을 걸어도 내 목소리 따윈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뚜벅뚜벅 새로 산 구두밑창을 울리며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가까운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네, 신주쿠서입니다." "본청의 칸자키다. 계장 있나?" "으." 놀랐다. 설마 배속되고 나서 최초로 시로의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것도 애정이 부린 조화일까? ...하하하. "...뭐야?" 내가 말문을 잃고 있으니까 시로가 의심스러워했다. 왠지 우스워서 나는 다시 인사를 했다. "연수생인 아마노 나츠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풉 하고 시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버릇처럼 물고 있던 담배가 하늘로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고 나도 쿡쿡 웃고 말았다. "나 바로 지금 이쪽에 도착한 참이야. 시로는 잘 있어?" "잘 있냐니 너 말이야..." 시로가 진심으로 곤혹스러워했다. 그렇겠지, 오늘 아침도 내가 시로의 정력을 쥐어 짜줬으니 말이다. 이미 30대에 돌입한 원기 왕성한 칸자키 시로는 어젯밤 3발을 쐈으면서도 아침부터 2발이나 터트렸다. 옛날엔 내가 아무리 안아달라고 재촉해도 푸대접하던 주제에 지금은 가끔 시 로 쪽에서 날 원하기도 했다. 성적으로 담백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단순히 선을 그었을 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강철의 이성이다. 성숙한 청년으로 화려한 성장을 마친 나는 지금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 큼 충실한 섹스 라이프를 보내고 있었다. 단, 어젯밤과 오늘 아침은 연수부임 축 하로 내가 억지로 졸라댔지만 말이다. "아무튼 계장 바꿔줘." 업무 중에 러브 콜은 엄금인가? 네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들고 실내를 둘러봐도 누가 계장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눈이 아는 얼굴을 포착했다. 나는 소리 높여 녀석을 불렀 다. "후지시로!" 순간, 전화를 받고 있던 후지시로가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덩달아 다른 사람 들도 일제히 나를 주목했다. 야호! 하고 순을 흔들자 후지시로가 당장 전화를 끊 고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츠키씨!" 우리는 어느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두 팔을 벌려서, 끌어안고 오랜만의 재회를 기뻐했다. "드디어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네요, 나츠키씨. 아아, 전 정말 기뻐요. 들었습 니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수료했다면서요? 연수처가 신주쿠서 희망이라고 들 었을 땐 전 귀를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본청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으니 까요." "무슨 소리야? 내 영역은 신주쿠잖아. 첫 시작으로 여기서 실적을 쌓아주지. 본 청에는 산더미 같은 업적을 가지고 올라갈 거야. 그 편이 더 빨리 시로를 쫓아갈 수 있을테니까." "생각 많이 했네요, 나츠키씨." 나는 헤헤 하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본심도 살짝 덧붙였다. "처음부터 시로곁에 있으면 너무 기뻐 일이 손에 안 잡힐 테니 말이야." 헤벌쭉 웃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뒤통수를 찰싹 얻어맞았다. "이 자식, 아프잖아...!" 이를 갈며 뒤돌아보자 이게 웬일인가! 분노의 대마신으로 변신해서 날 노려보던 시로가 무뚝뚝한 얼굴로 휴대전화 통화를 끊었다. 뭐야? 걸어가면서 전화하고 있었나? "외선을 무시하고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기지마." "아, 그거 질투..." 이봐, 시로, 요즘 조금 난폭하게 대하는 거 아냐? 벌써 침대 안에서는 사양의 사자도 모르잖아. 뭐, 우리 관계가 진보했다는 증거지만 말이다. "넌 경찰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우고 온 거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마. 외부 에서 걸려온 연락은 신속하게 연결해. 그 이유는 알고 있겠지?" 교관의 말투로 야단치기에 나도 학생의 말투로 대꾸했다. "사건 현장에서 언제 긴급연락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인 느낌~?" 요즘 유행어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시로가 이번엔 꿀밤을 날렸다. 나는 미안 하고 혀를 내밀고서 신속하게 서 내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계장한테 용건이랬지? 죄송합니다, 계장님 계십니까?" "네." 대답한 것은 후지시로였다.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계장? 하고 먼저 눈으로 확 인하자 고개를 끄덕 했다. "너 말단 아니었어? 언제부터 계장이 된 거야?" 내가 물어보자 후지시로가 지난달에 막 승진했다고 쑥스러워했다. 아까 내게 쏟아졌던 직원들의 기묘한 시선은 아마도 계장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는 의미였 던 모양이다. 납득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랑 후지시로는 친구니까 별 수 없잖아. 하지만 후지시로가 계장이란 말인가? 왠지 이 녀석의 도련님 얼굴이 신기하게도 늘름하게 느껴졌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출세 같은 건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녀석도 많다 고 들었다. 하지만 난 기회가 있으면 어디까지라도 올라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다. 왜냐하면 위로 가면 갈수록 다루는 일의 폭과 책임도 커지지 않는가? 난 그 것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몸께서 일생을 건 일이다. 그렇다면 역시 사건 지휘건을 가지고 싶다. 전 관할을 망라하며 도쿄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일소하고 싶다. 그런 커다란 꿈 을 목표로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상층부에 가고 나서다. 일선에서 활약하는 시로 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경부보를 마친 칸자키 시로 경부는 본청 소속 캐리어면서도 거동이 가볍고 현 장을 제일 중요시하는 주의로 언제나 시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실력과 경 험량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젊은 나이로서도 정확한 지도력과 행동력을 겸비한 인 재다. 캐리어란 승급 시험을 뛰어넘고 처음부터 경부보 클래스로 채용되는 녀석 들 (연간 20명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을 가리킨다. 그리고 시로는 T대 법학부를 현역 졸업한 초 엘리트로 당연히 캐리어 무리들 의 필두... 여야 했지만 시로는 순사, 순사부장, 그리고 경부보를 거쳐 지금의 경 부의 자리에 이르렀다. 물론 시로가 스스로 본청 채용을 걷어차고 가장 말단에 서부터 시작하는 파출소 근무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전체를 훑어보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자기 발로 밑자락부터 올라가는 편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시로가 언제나 내게 말했다. 미래의 경 시총감으로 불리는 시로는 정진정명 실전에서 단련된 형사란 얘기다. 원래부터 케리어는 대부분 현장의 사정을 잘 모른다. 게다가 머리가 고지식해서 친해지길 꺼려하지만 시로만은 달랐다. 그런 남자가 연인이니까 나도 불타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부터는 죽을 각오로 열심히 일해야지, 이얍!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나의 의욕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시로가 엄격한 얼굴로 후지시로 계장을 불렀따. "오늘 아침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본청에서는 나와 무라이 경부가 나 온다. 현장의 상황은?" "네, 이미 수사원과 감식반이 실황분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검사관도 곧 도 착할 예정입니다. 오실 수 있겠습니까?" 시로가 '물론이다.' 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후지시로가 뒤를 따랐다. 에? 현장? 실황분석? 검사관? 그렇다면 살인사건? "시로!" 얼른 부르자 시로와 후지시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덤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 까지도. 실언을 깨달은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말했다. "...아차, 칸자키 경부." "뭐지?" 아아아, 너무나 싸늘한 눈빛!! 그게 연인을 보는 눈이냐구. 슬퍼진다나까. 그치 만 어쩔 수 없나? 그야 지금은 업무 중이니까 말이야. "칸자키 경부, 저도 동행하게 해주세요." "인원은 충분하다." 내가 깨끗이 거절당해 소침해지자 후지시로가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하지만 빨리 현장에 익숙해지는 편이 신주쿠서에도 도움이 되는데요?" 네? 하고 사랑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후지시로에게 미간에 깊은 세로 주름을 새 긴 칸자키 경부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맘대로 해." 만세! 하고 후지시로와 파이팅 포즈를 취하자 주위의 직원들이 실소했다. 벌써 부터 주위를 아군으로 만들어버린 내게 시로가 혀를 찼다. 하지만 싫은 것만도 아닌 얼굴이었다. "현장은 신주쿠 2번가. 키노쿠니야 빌딩 뒤에 있는 S빌딩이다. 가자!" "넷!" 시로의 호령과 우리의 의욕이 수사 1과를 진동시켰다. 신주쿠서의 정예들에 섞여 나는 씩씩하게 몸을 돌렸다. -END- ----------------------------------------------------------------------- 작가 후기중에서... 일본의 경찰 규정에는 친척에 범죄자가 있는 경우 경관이 못 될터... 그렇다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나츠키가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해도 시로와 같은 형사는 못 된다. 그런 슬픈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더란 말입니다. 하지만 저기... 3권이나 질질 끌어온 주제에 라스트가 '주인공의 꿈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라면 독자 여러분에 대한 최대의 배신!! 그래서 그 부분은 칸자키 시로 경부의 입김으 로 특별히 인정되었다고 해석 및 이해해 주시면 기쁘겠어요.